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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양록, 조선 선비 왜국 포로가 되다 - 기행문 ㅣ 겨레고전문학선집 15
강항 지음, 김찬순 옮김 / 보리 / 2006년 10월
평점 :
고려 6대 임금 성종 때 거란이 침략을 하였다. 거란은 국력을 갖추자 나라이름을 '요'로 고치고, 송 침략에 앞서 고려를 압박하기 위해 침략을 하였는데, 첫 번째 침략에서는 '옛고구려땅을 내놓아라'고 요구하며 무력시위를 펼친 것이다. 이에 고려는 창졸지간에 침략을 당한 터라 거란장수 소손녕의 공격에 맥없이 무너졌고, 이들의 요구에 전전긍긍하며 맞서 싸우거나 땅을 내어주거나 하자며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서희는 거란의 침략이 '80만 대군'이라는 일방적인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며, "대군을 몰고 왔으면 속전속결을 할터인데, 그러지 않고 '협상' 따위나 하고 있으니, 필시 허풍이 틀림없을 것"이라며 담판을 한 연후에 결정을 하라며 임금께 주장을 올렸다. 이에 성종이 강화에 서희를 내려보내니, 거란의 주장은 거짓이었고, 속셈은 따로 있었다는 것을 간파하고, 회담을 고려에 유리하게 이끌 수 있었다.
이것이 교과서에도 실려있는 '거란 1차침략'에 대한 '서희의 외교협상'의 내용이다. 이처럼 외교와 전쟁 등과 같은 중요한 국가대사에 꼭 필요한 것이 바로 '정보력'이다. 그런데 조선시대 선조에 벌어진 전쟁,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은 그렇지 못했다. 어릴 적부터 똑똑하기로 유명했던 임금과 신하들이 즐비하던 시절이었는데도 '일본의 침략야욕'을 제대로 간파하지도 못하고, '전쟁대비'도 적절히 하지 못하고, '전후처리'조차 공정하지 못했던 엉망진창이었던 '치욕의 역사'였다. 과연 이 둘의 차이는 무엇일까?
'서희의 외교협상'은 적의 의도를 정확히 알아낸 덕분에 고려는 엄청난 이득을 얻게 되었다. 거란측의 허장성세에 맞서 주눅 들지 않는 자세로 당당하게 회담을 이어나간 결과, 고려는 '강동6주'라는 어마어마한 땅을 얻게 되었고, '거란군의 철군 약속'도 받아냈으며, 고려의 변방을 괴롭히던 '여진족 토벌'까지 보장받았다. 고려가 거란측에게 내어준 것은 '송과의 교류 단절'과 '거란과의 통교' 뿐이었으니, 외교협상으로 전쟁도 막고 이득도 챙기는 대단한 성과를 얻어낸 것이다. 반면에 임진왜란 때에는 전쟁직전에 '통신사'를 보내 일본측을 염탐할 수 있는 기회와 시간을 벌었는데도, 통신사가 가져온 '정보'를 제대로 활용하지도 못하고 일본의 침략을 고스란히 당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오랜 전란을 거쳐 '고도의 정규군'을 보유했던 일본군에 비해 오랜 평화로 소홀해진 국방력과 실전 경험이 전무한 군사시스템으로 '계획적인 침략'에 적절히 대비하지 못한 조선군이라는 '현실'을 고작 1년이라는 시간으로 어찌 해볼 겨를조차 없었을 것이다. 허나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외적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고, 외적을 정확히 간파했더라면 짧은 시간이었더라 하더라도 그처럼 속절없이 무너지진 않았을 것이라 안타까운 것이다.
이런 안타까움에 전쟁 이후에 쓰여진 책이 바로 류성룡이 쓴 <징비록>이다. 이 책에는 '전쟁의 참상'이 이토록 무섭고 전쟁을 '대비'하지 않은 대가가 이처럼 비참하니, 비극적인 전쟁의 기록을 철저히 남겨 만일을 대비하고 후대에 경계로 삼길 바라는 마음이 간곡히 담겨 있다. 하지만 이 <징비록>은 제대로 읽히지도 못하고 또다시 '호란'을 겪게 되었으며, 그런 굴욕을 당한 뒤에도 오래도록 외면을 받고 있다가 침략국인 일본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어 역수입된 뒤에야 유명세를 받게 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단다. 이런 <징비록>에 버금가는 책이 정유재란 때 일본에 포로로 끌려갔다 극적생환을 한 강항선비가 쓴 <간양록>이다. 이 책의 내용도 '왜국의 정세'가 자세히 적혀 있고, '왜국의 지리, 문물, 풍습' 따위도 굉장히 자세히 서술되어 있으며, 특히, 왜국의 유명 인물에 대한 나름의 평가가 실려 있어 현지에서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일본의 정보'가 낱낱이 보고되어 있는 소중한 '기록물'임에 틀림없다. 그런데도 이 책 역시 널리 읽히지 못한 신세였으며, 오늘날에는 이름이라도 널리 알려진 <징비록>과는 반대로 <간양록>이라는 이름조차 생소해져 버리고 말았다. 실제 나도 이 책의 존재에 대해서 꽤나 최근에 알게 되었고, 뒤늦게 읽어보게 되었다. 우리는 어째서 이토록 '정보력'에 대해서 둔감한 것일까?
대한민국은 지정학적으로 대단히 유리(?)한 전략적 요충지를 선점하고 있다. 주변국들이 중국과 일본, 러시아, 미국이라는 강대국인 탓에 '한반도'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는 형국이란 말이다. 이런 유리한 곳에 위치한 우리가 '강대국들의 정보'에 빠삭하고 민감하며 신속하게 대처하고 처리할 수 있는 능력만 갖춘다면, 고려를 침략했던 거란과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에 서로 선물공세를 하며 자신에게 유리한 외교관계를 유지하려 무던한 애를 경쟁적으로 쓸 수밖에 없게 만들 수도 있다. 헌데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미중 갈등이라는 첨예한 대립에 '실리외교'는커녕 '중립외교'도 펼치지 못하고 이리저리 휘둘리기 바쁘고, 우리보다도 약해빠진 나라로 전락한 러시아와 일본에게조차 떳떳하고 당당한 자세를 취하지 못하고 비굴하게 굽신대는 꼬락서니가 정말 우습지 않느냔 말이다.
멍청한 이들은 말한다. 이것은 '약소국의 현실'이니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이다. 고려는 객관적인 관점에서 '강대국'이었나? 거대한 땅을 차지한 송에 비해서도, 신흥강국으로 영토를 넓히며 옛고구려땅과 발해까지 멸망시키며 송나라를 침략하던 거란에 비해서도 조막만한 고려는 그 힘을 크게 발휘하지도 못하고, 외교적 발언도 크게 내어보지 못한 '약소국'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런데도 서희는 외교협상만으로 '고려의 이익'을 최고를 끌어낼 수 있었다. 무엇보다 상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고, 주변의 정세를 정확히 간파해서 '고려가 나아갈 길'을 명확히 제시한 덕분에 고려는 그 어떤 나라도 무시할 수 없는 나라로 자존심은 물론이고, 국력도 크게 위명을 떨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간양록> 같은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 무엇보다 '정보의 힘'이 가져다줄 고마운 선물에 대해 깊이 생각해봐야 한다. 비록 왜적의 포로로 끌려갔으나 일본의 전후사정을 비롯해서 일본의 강점과 약점을 모두 간파한 소중한 정보를 남겨 놓았으니, 그 소중한 정보를 바탕으로 '조선이 취해야 할 자세'를 갖춰나가는 것이 올바른 일이다. 여기에 '정보의 업그레이드'도 대단히 중요하다. 항상 '최신 정보'에 귀를 기울이고 눈독을 들여서 '외적의 정세'를 새로 파악해야만 그에 알맞은 새로운 대응을 세우고 전략을 짤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깨달음을 오늘날의 국제정세에 적용시키면 대한민국도 더는 '약소국' 신세에서 벗어나 '강대국의 자세'를 취하며 외적의 입맛과 요구에 신속하게 대응하고 적절하게 전략을 짜아낸 뒤에 국익을 최고수위로 끌어올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너무도 당연한 소리 아니냔 말이다.
누가 말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을 다시 새겨야 할 때다. 우리 역사가 늘 자랑스럽지는 않을지라도 '수난과 고난' 뒤에 다시 일어나 지금의 위상을 갖추게 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정보의 중요성'을 명심하고, 적절하고, 신속하고, 적확하게 대처해나갈 때에만 자랑스런 역사를 쓸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강대국이 강대국일 수 있는 첫 번째 이유도 '정보력'이고, 약소국이 강대국이 될 수 있는 최고의 이유도 '정보력'이다. 이 책의 내용이 비록 '과거의 정보'이고, 그나마 오랫동안 묻혀 있어 잘 알지 못했다하더라도 괜찮다.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이기 때문이다. <간양록>을 통해 얻을 '정보력'은 낡아서 별로 쓸모가 없겠지만, 이 책에 담긴 '정신'은 지금 현재에도 얼마든지 써먹을 수 있는 소중한 자원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