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 2 - 위기의 신들 한빛비즈 교양툰 29
김재훈 지음 / 한빛비즈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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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권 리뷰에 이어...우리에게 '프로메테우스'는 어떻게 알려졌나? 가장 흔하게 알려진 이야기에 따르면, 제우스의 명령을 어기고 '인간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불을 전해줌으로써 제우스의 노여움을 '인간을 대신해서' 한 몸에 받게 된 것을 부각시킨 까닭에 압제자의 독단에 굴하지 않는 '저항의 아이콘'으로 널리 알려져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신이라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처한 현대사의 아픔을 정곡으로 관통한 '메시지(해석)'인 까닭에 아무런 비판없이 수용되어 널리 회자되었고, 프로메테우스는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인간의 편'에 선 '정의로운 신'으로 우리 가슴속에 새겨졌던 것이다.

 

  하지만, 2권에서는 '프로메테우스'의 그러한 상징과 해석에 대해서 '반전에 반전'을 더하고 있다. 이를 테면, 신의 형상을 본따 인간을 창조한 신이 프로메테우스가 아니라, 원래는 '제우스'였다고 밝히고 있으며,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을 창조하고 인간을 위해 불을 가져다준 것도 무한한 '인간사랑' 때문이 아니라 불멸의 존재로서 무료한 세월을 보내기보다 '제우스가 만든 올림푸스 12신 체제'가 만든 안정을 송두리채 뒤흔들 파란을 일으키기 위해 '필멸의 존재'를 만들어 서로가 죽고 죽이는 재미난(?) 세상을 관람(!)하기 위해 심심풀이 땅콩 삼아 창조했다는 해석을 내놓았다.

 

  물론, 이러한 해석이 옳다 그르다를 따지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다만, 그렇게 해석하였을 때, '논리적 근거'가 타당한 것이냐를 냉철하게 분석하는 힘이 중요한 것이다. 왜냐면 '신화도 역사와 마찬가지로 정답이 없다'는 것이 핵심이기 때문이다. 무언가 '정답'을 정해놓고 나면 '신화'는 더는 연구할 가치를 잃게 된다. 모든 학문에 해당되는 당연한 진리이고 말이다. 그러니 색다른 해석을 내놓았다는 것만으로도 엄청 흥미롭고 반가운 책이라는 사실이 명확해진다. 또한 그런 흥미로움이 '교양툰'에 녹아들어 누구나 쉽게 즐기고 교양을 쑥쑥 쌓아올릴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더 유익할 따름이고 말이다. 암튼, 색다른 해석을 즐길 준비가 되었으면 따라오길 바란다.

 

  사실, 이 책의 1권에서는 '프로메테우스'보다 '가이아의 복수'라는 관점이 대단히 흥미로운 점이었다. 기존의 '신화책'들이 죄다 '남성중심적인 해석'을 늘어놓았던터라 '여성중심적인 해석'에 대한 매력이 더욱 돋보였었다. 그렇게 '가이아의 복수'는 티타노마키아를 일으키며 '1차 신들의 전쟁'의 막을 올렸고, 그 다음에는 기간토마키아를 준비하며 '2차 신들의 전쟁'과 뒤이어 단번에 제우스를 파멸케 한 튀폰이 등장하는 '3차 신들의 전쟁'까지 이야기는 이어진다. 그런데 그러한 '가이아의 복수'가 이어지는 와중에 '프로메테우스의 장난기(?)'를 첨가한 것이다. 이는 우리에게 익숙한 '신화의 줄거리'에 엄청나게 공들인 '각색의 맛'을 더한 셈이다. 음악에 비유하자면 '원곡'도 좋지만 '편곡'을 해서 더 많은 대중의 사랑을 받는 노래가 있듯이, '기존의 신화 줄거리'에 '새로운 해석'을 가미해서 신화가 지닌 이야기의 맛을 더욱 풍미롭게 한 셈이다.

 

  다시 말해,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을 위해서' 한 일이 아니라 '재미를 위해서' 하였던 일이고, 인간을 창조하는데 깊이 관여한 신은 프로메테우스가 아니라 '제우스' 였단 말이다. 이것이 무슨 차이를 보여주는 것일까? 애초에 제우스는 우라노스, 크로노스에 이어 '올림푸스 12신 체제'를 완성하는 것을 주목적으로 삼았다. 그렇게 만든 '신들의 세상'은 완벽 그 자체였으며 무엇 하나 더하거나 뺄 것도 없는 '완성품'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세상을 안정시켜 나가는 것도 좋았겠지만, 제우스는 자신들을 숭배하며 두려워할 '존재의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다. 그래서 프로메테우스로 하여금 그러한 '필멸의 존재'를 창조하라고 명령하였고, 에피메테우스로 하여금 '그 존재'를 위해 알맞은 능력을 부여하라고 명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그리스로마신화의 유쾌함은 이처럼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라 뭔가 부족한 데서 찾아볼 수도 있다.

 

  암튼, '미리 생각하는 신'은 무슨 일이든 행하기에 앞서 꼼꼼히 생각을 먼저 하며 실수가 없도록 하지만, '나중에 생각하는 신'은 생각하기에 앞서 행동을 먼저 하니 종종 의도치 않은 실수를 범하곤 한다. 그러고나서 '반성'이나 '후회'라도 하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련만 행동보다 생각이 앞서다보니 그런 것을 해본 적도 없다. 하긴, '신'이라는 존재가 반성이나 후회를 하는 종자가 아니기도 하다. 그저 '저지르기'만 할 뿐인 존재가 바로 '신의 속성'이라는 점에서 놀랄 일도 아니다. 그런 일이 벌어진 덕분에 인간은 다른 동물과는 달리 '별다른 신체적 능력'도 갖추지 못하고 추위나 맹수의 위협 앞에 벌벌 떠는 '약한 존재'가 되고 만다.

 

  익숙한 이야기 전개에서는 그 때문에 프로메테우스가 제우스의 명령을 어기고 '신의 불'을 훔쳐다 인간에게 전해줌으로써 인간은 다른 동물보다 뛰어난 재능, 다시 말해 '문명'을 일으켜세우는 위대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 때문에 인간들은 프로메테우스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는 것까지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신화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여기까지도 '제우스의 속셈'이었다고 말한다.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의 편을 들고 신들에게 '반역'을 저질러야 제우스가 자신들의 적이었던 '티탄족'이 까불고 기고만장한 일이 없기 때문이었단다. 다시 말해, 프로메테우스가 1차 신들의 전쟁에서 제우스의 편을 들어 승리할 수 있는 '공신'이었지만, 올림푸스 체제가 완성된 이후에는 그닥 필요하지 않았기에 '숙청 대상'으로 삼았다는 해석이다. 그러기 위해서 '인간이란 존재'가 필요했던 것이고, 그렇게 프로메테우스를 사랑하며 기고만장해진 인간들과 함께 프로메테우스를 제거할 수 있는 안배를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해석이 왜 필요했던 것일까? 프로메테우스가 '저항의 아이콘'의 상징으로 해석된 것은 시대적 요청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전세계 곳곳에서 '독재자의 그늘'에서 시름하는 민중들이 많았기에 '프로메테우스 신화'는 꼭 필요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에는 저항의 상징인 '프로메테우스'를 대신해서 인간을 창조했다는 '제우스의 신화'가 필요했던 것일까? 바람둥이의 상징인 제우스가 하필 '인간창조'와 '인간사랑'을 도맡아서 한 주역이라는 해석은 과연 무슨 의도이냔 말이다.

 

  사실 우리는 <그리스로마신화>를 읽으며 제우스를 오해하고 있었다. 바람둥이, 난봉꾼의 신으로만 싸잡아서 비난만 하기에 '제우스의 능력'은 너무나도 뛰어났고, '제우스의 통치력'은 모든 세상을 안정시키는데 탁월함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우스의 바람기(?)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우라노스의 저주(?)에서 벗어나기 위해 크로노스는 제 자식을 낳자마자 삼켜버렸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그 저주라는 것이 "너도 똑같은 방법으로 권좌에서 쫓겨날 것이다"였기 때문에, 아버지를 해하고 그 자리에 올라선 크라노스와 제우스도 불안하기 이를 데 없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제우스는 자신이 완성한 세상에 혼돈(전쟁)이 찾아오면 '불멸의 존재'로는 승리할 수 없고, 오직 '필멸의 존재'의 도움으로 승리할 수 있다는 신탁을 받았던 터라 신나게 자식농사(?)를 짓는데 열을 올릴 수 있는 핑계가 성립하는 셈이다.

 

  또 다른 해석으로는 그리스문화(헬레니즘)가 전세계에 퍼져나가면서 여러 민족들이 자신들의 조상이나 선조를 '제우스'에서 따오는 바람에 제우스의 의도와 상관없이 '난봉꾼의 신'이 될 수밖에 없었단다. 왜냐면 '신화'라는 것이 신들이 직접 적어 전승시킨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필요에 따라 적절하게 손을 보면서 전승해온 덕분에 자기 민족의 위대함과 우수성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최고신인 제우스는 수없이 많은 나라의 여왕과 왕비, 공주, 그리고 예쁜 처녀들을 납치하고 강간했다는 전설을 퍼뜨리게 되었다고 한다. 제우스의 정실부인이 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고 '그럴듯한 변명'이었겠지만, 헤라라는 여신이 두눈을 부릅뜨고 '정실부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데, 감히 '정식 혼인절차'를 밟을 수 있었겠느냔 말이다. 매우 부적절한 방법이지만 제우스를 '난봉꾼'에 '성폭행범'으로 만드는 것이 더욱 그럴듯했다는 논리다.

 

  어쨌든 간에, 그런 최고신이 '인간창조'와 '인간사랑'의 아이콘으로 재해석해야 할 필요성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 것인가? 그건 바로 '프로메테우스의 본색'을 까발렸더니 그다지 '좋은 신'이랄 수 없었다는 사실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프로메테우스는 '변절', '배신'을 한 셈이다. 같은 티탄족의 편을 들지 않고 상대편인 제우스의 편을 들어 자신의 종족을 '배신한 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배신자가 '한 번만' 배신한다는 상식에서 벗어날 것이다. 이는 '제우스의 분노'에서 모든 인간을 구원하기보다 자신의 후손인 '데우칼리온'만 살리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왜 프로메테우스는 그토록 사랑했다는 인간들을 '제우스의 분노'로부터 막아주거나 대신 받거나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아니라 '인간멸종'을 선택하고, 선택받은 단 한 사람 '데우칼리온'이라는 자신의 후손(어머니가 누구인지도 불분명한)만으로 살려내 '새로운 인간'을 다시 번성하게 한 까닭이 무엇이었을까? 피할 수 없는 천벌에서 그나마 가장 나은 방법이었던 것일까? 인류의 절멸이란 선택이 말이다. 이게 과연 '인간창조', '인간사랑'의 아이콘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던 것일까? 압제자로부터 인류를 구원한 '저항의 아이콘'은 어쩌고 말이다.

 

  이쯤해서 '프로메테우스'는 결코 '저항의 아이콘'이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우리 모두를 위한 '정의의 수호신'으로 믿었는데 제대로 발등이 찍혀버린 셈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기' 딱 좋은 시기는 아닌지 의심스럽다. 과연 대한민국를 제대로 살려낼 위대한 지도자는 누구란 말인가? 부유한 상류층부터 가난한 서민들까지 모두가 행복한 대한민국을 이끌어갈 리더는 과연 어떤 자질을 갖추어야 한단 말인가? 해묵은 이념갈등과 지역대립, 세대갈등, 남녀갈등 등을 눈녹듯 사라지게 만들 카리스마 넘치는 인재는 누구란 말인가? 아마도 이 책에서 말하는 '해석의 의미'는 배신을 일삼는 '프로메테우스'가 아니라 최고의 권능을 가진 '제우스'에게서 찾아야 옳다는 것으로 보여진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대단히 뛰어난 '능력자'를 리더로 바라고 있다. 앞날을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혼란스런 세계정세 속에서 대한민국을 흔들림없이 이끌어나가기 위해서는 최고신 '제우스의 권능'을 바라는 건지도 모르겠다.

 

  허나, 오늘의 대한민국을 이끄는 가장 훌륭한 리더는 바로 대한민국 시민들 '모두가 가진 역량'일 것이다. 낡은 이념에 흔들리지 않고, 수많은 갈등의 본질도 '모두의 이익(공공의 이익)'을 위해 공평과 형평의 잣대를 능수능란하게 활용할 수 있는, 때론 대한민국 '모두'를 위해 자신의 불이익 따위를 셈하지 않고 기꺼이 희생을 감수할 수 있는, 그런 멋진 시민들이 모두 훌륭한 리더의 역할을 발휘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런 믿음이 어마무시한 튀폰 앞에서도 두려움으로 온몸을 적시면서도 두려움 앞에 당당히 맞서는 '최고신'을 닮은 대한민국 시민리더를 양성할 것이다. 이젠 '프로메테우스'의 뒤에 서서 독재타도를 외치는 시절은 지났다. 거대한 불의 앞에 서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는 공포가 엄습할지라도 결코 물러서지 않는 용감한 시민리더들이 절실한 시절에 꼭맞는 해석이 아닌가 싶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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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BEER천가 - 본격 맥주 교양 원샷툰 한빛비즈 교양툰 27
몰트다운 지음, 블리자두 그림 / 한빛비즈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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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술을 끊었다. 나이가 들면서 건강을 챙기기 위해서 술을 끊은 까닭도 있지만, 나와 감히 '술대작'을 할 깜냥 있는 술친구가 없기에 덩달아 술을 끊은게 결정적 이유였다. 그렇게 나는 술을 멀리하면서 자연스레 술친구도 남지 않게 되었다. 그저 마시기 위해 모였고 취할 때까지 그저 마실 줄밖에 모르던 시끄럽고 변변치 못한 술친구들이었기에 술을 끊은 것에 아무런 미련도 남지 않았다. 그렇게 2018년에 마지막 캔맥주('카스'...난 이 맥주만이 좋았다)을 따면서 촛불을 안주 삼았고, 변변찮은 술친구들과도 안녕을 고했다.

 

  그렇게 5년이 흘러 지금 가장 땡기는 술은 바로 맥주다. 시원한 생맥주와 얼큰한 해물탕을 안주 삼아 마시는 것이 일품이었기 때문이다. 이 조합이 별로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겠지만, 드셔보시면 자꾸 땡기게 되실 거다. 그런데 이렇게 '환상의 조합'도 진한 느낌의 흑맥주나 걸죽한 에일과 곁들이면 그 맛이 별로다. 당시에는 아무 생각없이 꿀조합으로 마시기만 했었는데, 이 책을 읽고 나니, 그 까닭을 알 것도 같다. 사실 우리 나라의 생맥주는 맛도, 향도 '밍밍(드라이)한 라거 스타일'이기 때문이었다. 그저 얼음처럼 차갑기만한 '시원한 맛'과 얼큰하다 못해 '앗! 뜨겁고 매운 맛'의 해물탕이 조합을 이뤘으니, 흔히 말하는 '단짠단짠의 효과'를 그대로 적용한 경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예상했겠지만 이 책은 <맥주의 백과사전>이라고 할 정도로 맥주에 관한 정보로 가득한 교양툰이다. 그래서 읽기만 해도 '세계맥주'를 맛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이고, 이 책을 탐독하고 나면 웬만한 맥주 전문가보다 더 그럴 듯한 전문지식을 뽐낼 수 있게 될 것이다. 무릇 '주류 전문가'는 어딜 가든 환영받기 마련이다. 대표적으로 '와인'이 그렇지 않느냔 말이다. 고급 식당에서 음식주문은 대충시키더라도 와인 하나만이라도 '탁월한 선택'을 한다면 결코 푸대접 받지 않게 되니 말이다. 이젠 맥주도 '소물리에' 같은 지식을 갖춰야 장소와 격식에 꼭맞는 맥주를 선택할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한 맥주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또한, 이 책은 '백과사전'으로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맥주의 역사>를 엿볼 수 있어서 독서의 즐거움을 높일 수 있다. 독일의 '맥주 순수령'이 맥주, '본연의 맛'을 지키는데 유용하게 작용했다면, 옆나라 벨기에에서는 '순수령' 따위는 개나 줘버리고 맥주에 별에 별 첨가물을 쏟아부어 '맥주의 다양한 맛'을 볼 수 있는 즐거움을 선보였다. 물론, 둘 다 '맛있는 맥주'만 살아남이 지금까지 전해져 왔다는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팩트이고 말이다. 게다가 요즘에는 '흑맥주'가 고급화 전략으로 인해 고급맥주로 유명하지만, 애초에는 몰트(맥아)로스팅의 기술적 한계로 인해 '흑맥주'는 대충 만들어져서 저렴하게 팔려 '서민(짐꾼) 맥주'로 통했단다. 당연히 부유한 이들은 '맑은 맥주'를 즐겨 마셨고 말이다. 물론 오늘날에는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다양한 맛과 향을 즐기면서 자신에게 딱맞는 맥주를 골라마시면 되겠지만 말이다. 거기에다 극심한 온도차를 이겨내며 긴 항해를 거친 뒤에도 즐길 수 있는 '인도 맥주(IPA)의 탄생 일화'나 미국의 금주법이란 기이한 시대에 탄생한 '무알콜 맥주' 따위의 비하인드 스토리만 골라 읽어도 맥주를 즐기는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무엇보다 '과학적이고 위생적인 방식'으로 연구과정을 거쳐 만들어지는 다양한 맥주의 맛과 향을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술꾼들을 행복하게 할 것이다. 이제는 '수입맥주'를 즐기는 것을 넘어 우리 나라에서 직접 빗은 '로컬(수제) 맥주'가 즐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같은 라거나 에일이라도 '지역의 정서(맥주의 주재료인 물, 몰트, 홉, 기타등등)'와 '장인의 노력', 그리고 '술꾼의 기호'라는 삼박자가 딱 맞아 떨어져야 제대로 즐길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맥주에 따라 '병'이나 '캔', 그 자체로 마셔야 제맛인 경우도 있고, 꼭 '전용잔'에 부어마셔야 제대로 음미할 수 있다고도 하며, 그러기 위해서 '수십 개'가 넘는 전용잔을 구비해야 맥주의 맛과 향을 즐길 수 있다고 하니, 정말 까다롭기 그지 없게 되었다. 그래서 이 책의 가치가 더욱 높아지게 된 셈이고, 웬만큼 공부하지 않고 발품을 파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제맛의 맥주'를 즐길 수 없다고 하니 머리가 다 어지러울 정도였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그런 '복잡한 공식(?)'이나 '어려운 과정'을 거치지 않고도 퇴근후 시원한 맥주 한 잔을 즐기는 여유를 갖길 원하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렇다. 맥주 한 잔을 제대로 마시는 것도 좋지만, 아무런 부담없이 노곤해진 몸에 싱그러운 기력을 충전시켜줄 '맥주 한 잔'을 고대하고 있다. 그때 너무 많아진 맥주 종류로 고민스럽다면 방법이 없지는 않다. 하나는 '일일이' 다 마셔보면서 나에게 딱맞는 맥주를 선별하는 방법이 있고, 다른 하나는 이 책 , <용BEER천가>를 읽고서 맥주전문가 못지 않은 전문지식을 사용해 선택하는 방법이 있다. 후자의 방식을 선택한다면 '유용한 맥주상식'은 덤으로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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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 1 - 올림포스 연대기 한빛비즈 교양툰 28
김재훈 지음 / 한빛비즈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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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혹시 수없이 많은 <그리스로마신화> 가운데 무엇을 골라 읽을 것인지 고민인가? 그렇다면 아주 훌륭한 고민에 빠졌다고 박수를 쳐드리고 싶다. 왜냐면 <그리스로마신화> 만큼 수없이 많은 '변주'를 거친 책도 없기 때문이다. 그만큼 고르기 힘든 일이고, 그걸 고민할 정도의 독자라면 이미 상당 수준의 '독서가'임을 인증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사실 '정답'이 없는 질문이기도 하다. 왜냐면 <그리스로마신화>를 제대로 맛보기 위해서는 그 수많은 원전들을 섭렵해야 겨우 제맛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지난한 과정을 거치고 지적 숙련을 거듭하고나서야 겨우 '이책은 이런 맛, 저책은 저런 맛이 난다'고 맛을 구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난 다음에야 간신히 '선택'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책, 김재훈의 <만화로 보는 그리스로마신화>가 대단히 훌륭한 원전해석을 선보인 '수준급, 신화인문서'라면서 말이다.

 

  그렇다면 이 책은 어떻게 즐기면 좋을까? 사실 이 책에 대한 리뷰는 벌써 '두 번째'인데, 같은 책으로 열 번이라도 더 리뷰를 써낼 수 있을 정도로 '대서사극'을 감상한 뒤의 여운이 찐~하게 밀려들고 있다. 그래서 고민 끝에 이번 리뷰에서는 '제우스 중심'이 아닌 '또 다른 신'을 중점으로 이야기를 풀어갈까 한다. 어차피 새로 출간한 2권에서도 '같은 인물(신)'에 포커스를 맞추었기 때문이다. 그 신은 바로 '프로메테우스(미리 생각하는자)'다.

 

  약간의 스포를 하자면, 1권의 내용은 신들의 전쟁인 '티타노마키아'를 거쳐 올림포스 12신이 정립하는 일대기를 보여주었고, 2권에서는 또 다른 신들의 전쟁인 '기간토마키아'를 치룬 뒤 제우스가 신들 중의 제왕임을 확인해주는 내용이 핵심이다. 그런데 두 차례의 전쟁에서 '제우스'가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다름 아니라 '프로메테우스'가 제우스의 편을 들었기 때문이고, 제우스에게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을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프로메테우스'는 왜 제우스의 편을 들었을까? 라는 의문이 저절로 들기 마련이다. 이제부터 1권의 내용에 집중해보련다.

 

  '그리스로마신화'에서는 두 차례의 '신들의 전쟁'을 선보인다. '북유럽신화'에서도 라그라로크라는 모든 신들이 참전하는 최후의 결전을 치루며 신들의 세상이 저물어가고 인간들의 세상이 펼쳐지는 과정을 엿볼 수 있지만, '그리스로마신화'에서도 '신들의 전쟁'을 두 차례나 겪으면서 이후에 인간들이 중심이 되는 세상이 도래할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게 된다. 이렇게나 비슷한 양상으로 신화가 전개된 까닭은 다름 아니라 '신화'를 만든 이가 바로 '인간'인 탓이다. 아무리 전능한 신들이 세상을 창조하고 불사의 몸을 갖고 만물 위에 군림하더라도 끝내는 '신들의 전성시대'가 저물고 필멸의 몸을 가진 부족한 이들, 즉 '인간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시대가 도래할 수밖에 없다는 필연적인 전개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다만, 다른 점은 '북유럽신화'에서는 거의 모든 신들이 전멸한 뒤에 인간세상이 펼쳐지지만, '그리스로마신화'에서는 제우스가 최고신임을 재확인한 뒤에 서서히 잊혀져 간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신들 중심의 신화가 영웅 중심 서사로 바뀌었다가 끝내는 인간 중심의 스토리 라인을 펼쳐낸다는 말이다. 물론, 그 인간들이 '제우스'를 비롯해서 여러 신과 영웅들의 후손임을 밝히는 '족보전쟁'의 양상을 띠지만 말이다. 그런 까닭에 '신화'는 '역사'로 이어지기 마련이며, 신화는 허구맹랑한 상상의 소산으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역사의 빈틈'을 메워주는 소중한 사료로 다뤄져야 한다. 마치 우리가 '단군할아버지'를 한민족의 조상으로 자연스레 받아들이는 것처럼 말이다.

 

  그 가운데 첫 번째 전쟁인 '티타노마키아'는 말그대로 '티탄(타이탄)과 벌인 전쟁'이다. 그렇다면 '티탄'은 누구인가? 헤시오도스의 <신들의 계보>에 따르면, 태초에는 카오스(혼돈)이 있었고, 그 무질서한 곳에서 모든 신들의 어머니인 '가이아'가 탄생하였다. 가이아는 자신이 낳은 우라노스(하늘신)를 지아비로 삼아 12명의 신을 낳았는데, 바로 가이아와 우라노스 사이에서 낳은 신들이 바로 '티탄족'이었다. 그런데 가이아와 우라노스는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 가이아가 티탄족만 낳은 것이 아니라 괴물들도 여럿 낳았기 때문이다. 우라노스는 괴기망측한 그 괴물들을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심지어 가이아의 자궁속(타르타로스, 깊은 땅속)으로 다시 돌려보내는 막되먹은 처사를 벌였기 때문이다. 그 괴물들은 바로 외눈박이 키클롭스 삼형제와 머리 50개, 팔 100개인 괴력의 헤카톤케이레스 삼형제다. 이렇게 자신이 낳은 자식을 자식으로 인정받지도 못하고 이유같지 않은 이유로 땅속 깊이 유배된 처사에 불만을 들어내고 우라노스를 물리칠 방도를 떠올렸던 것이다.

 

  이때의 주역이 바로 '티탄족의 우두머리(사실은 막내)' 크로노스다. 가이아의 흉계에 빠진 우라노스가 방심한 틈(!)을 타고 크로노스가 가장 단단한 금속, 아다마스로 벼린 거대한 낫을 들고 제 아버지의 거시기를 싹뚝 잘라버린 것이다. 그리고 제 아버지의 왕좌를 차지하였다. 하지만 이렇게 거사에 성공한 가이아는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없었다. 크로노스가 어머니를 배신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거사는 성공하였고 크로노스는 제왕의 자리에 올랐다. 신들의 세상에도 '질서'는 있는 법이어서 가이아는 울분을 삼키고 또 다른 기회를 엿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제왕의 자리에 오른 크로노스도 마음이 편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자신의 아버지가 거시기가 잘리면서 저주를 남겼기 때문이다. "크로노스, 너도 네 자식에게 똑같이 당할 것이다"라고 말이다. 그래서 그랬을까? 크로노스는 자신의 누이이자 아내인 레아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을 낳는 족족 삼켜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다섯 명의 자식을 제 아빠가 삼켜버리는 광경을 지켜 볼 수밖에 없었던 레아는 여섯 번째 아이(제우스)만큼은 지켜야겠다는 생각을 하였고, 이를 기회로 삼아 가이아는 크로노스를 몰아낼 궁리를 하면서 자신의 손자이기도 한 제우스를 지지하는 편에 서게 되었다. 그렇게 구사일생으로 살아남게 된 제우스는 쑥쑥 자라서 어른이 되었고, 우라노스의 저주를 실현시키며 크로노스에게서 왕좌를 탈환하게 된다. 하지만 아버지와 달리 크로노스를 한 방에 처리하지 못했기에 기력을 회복한 크로노스는 자신의 형제인 '티탄족'을 이끌고 제우스의 형제들과 맞서 싸우게 되는데, 이것이 최초의 신들의 전쟁 '티타노마키아'다. 우리의 또 다른 주인공인 '프로메테우스'가 티탄족인데도 제우스의 편을 들어 제우스가 승리할 수 있게 한 숨은 공신이라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고 말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대목은 자신의 형제를 배신하고 제우스의 편을 든 까닭이 무엇이었냐는 점이다.

 

  수많은 신화학자들은 '프로메테우스(미리 생각하는 자)'가 미래를 볼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었기에 10년이나 이어졌던 '티타노마키아'에서 제우스가 끝내 승리할 수밖에 없는 까닭을 '미리' 알고 있었던 탓이라고 해석한다. 과연 그뿐이었을까? 이 책에서는 단순히 '그것'만은 아니라고 말한다. 훗날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의 창조주'로 활약하는 장면과 연관지으면서 신들의 세계를 '티탄'이 지배하는 것보다 '티탄의 자식들'이 지배하는 것이 더 재미난 일이 벌어질 것이라 예견했기 때문이라고 썰을 풀어놓았다. 더 재미난 일 말이다. 사실 이 말이 좀 무시무시한 말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재미'를 말할 때, 질서정연한 곳에서 느끼기보다 그야말로 혼돈, 그 자체인 무질서한 곳에서 더 찐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똑같은 일상이 반복되는 재미없고 지루한 천국보다 하루하루가 짜릿하고 화끈한 지옥이 더 낫다는 말에 열광하는 이들이 더 많겠냔 말이다. 이런 짜릿한 미래를 예견한 프로메테우스가 자신의 동족을 배반하고 말았다.

 

  물론, 배반의 대가는 치욕, 그 잡채였다. 이건 2권에서 다시 이야기하련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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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06 : 젊은 예술가의 초상 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6
박성문 글, 이철희 그림, 손영운 기획, 제임스 조이스 원작 / 채우리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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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설하고, 좋은 소설이란 무엇일까? 제임스 조이스는 자신의 자전적인 소설인 <젊은 예술가의 초상>의 한 대목에서 '좋은 작품의 특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좋은 작품은 인간의 감정을 사로잡는 것이다"라고 말이다. 이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던 '카타르시스(감정의 정화)'라는 표현을 빌리는데, 무언가에 '사로잡히게' 만들 정도의 감정이 생긴다면 좋은 작품이고, 그렇지 못하면 그저 밋밋한 좋지 못한 작품이라고 한 구분하였다. 여기에 한 눈에 사로잡을 만한 '형식'까지 갖춘 작품이라면 미인을 바라볼 때, '그녀의 이름은 무엇일까? 어디에 살까? 남자 친구는 있을까? 무엇을 좋아할까? 말을 한 번 걸어볼까? 하고 꼬리에 꼬리는 물며 궁금해하는 것이 생기는데, 바로 이런 감정이 '사로잡힌'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에 덧붙여,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런 궁금증이나 관심이 '광휘'를 만든다고 했고, 조이스는 다시, 광휘를 '무언가에 사로잡히고, 더 깊이 몰두하여 진실된 모습을 깨닫는 것'이라고 풀었다.

 

  그렇다면 <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좋은 소설'일까? 많은 이들은 제임스 조이스가 기존의 소설과는 판이하게 다른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현대소설(모더니즘)의 기틀을 닦았다면서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 다시 말해, 기존의 소설이 '행위 중심'으로 서술한데 반해, 조이스는 '의식 중심(떠오르는 이미지)'으로 이야기를 서술함으로써 소설속에 '초현실주의'를 실현시키는데 선구자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고 평가하니 말이다. 하지만 요즘 독자들이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읽다보면, 이야기의 흐름을 파악하기도 전에 책을 덮어버리고 말 것이다. 왜냐면 책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선 '배경지식'이 필요한데, 아무런 배경지식도 없이 무작정 '좋은 소설'이라는 평만 믿고서 소설속으로 뛰어들다보면 '의식의 흐름 기법' 때문에라도 어질어질 멍한 채 이리저리 헤매기만하다가 책을 덮어버리기 일쑤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그리 '좋은 작품'이라고 말하기 힘들 것이다.

 

  허나, 작품속에 담긴 '배경지식'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게 된다면 '이 책'이 왜 그토록 극찬을 받는 소설인지 어렵지 않게 이해하게 될 것이다. <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한 명의 예술가가 탄생하기까지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는 '과정 중심'으로도 읽어도 좋고, 영국의 식민지로 신음해야만 했던 '아일랜드'와 '아일랜드인'으로서의 아픔과 고뇌를 이해하며 '민족주의의 각성'에 대해 깊이 고민할 수도 있으며, 종교인으로서의 소명의식과 안정적인 직장인으로써의 '종교에 대한 성찰' 등등 하나의 소설을 읽었을 뿐인데, 독자가 지니고 있는 '배경지식'에 따라 변화무쌍한 모습으로 다양한 색채의 스펙트럼을 펼쳐내는 소설이야말로 훌륭한 소설이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 '서울대선정 문학고전'으로 읽는 <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고전문학의 깊이를 체험하지 못한 예비독자들에게 훌륭한 길라잡이가 될 것이다.

 

  물론, 길라잡이가 소개하고 있는 내용만 달달 암기하듯 '감상'하는 것으로 그친다면, 진정 '고전문학'에 담긴 참뜻을 이해하는데 스스로 한계를 긋는 작업일 뿐이다. 더구나 이 책은 '만화형식'이라서 '원작소설'에서 느낄 수 있는 '의식의 흐름 기법'을 제대로 맛볼 수도 없으며, 그런 기법을 통해 선보여지는 '작가의 분신'인 소설속 주인공 '스티븐 디덜러스'의 수많은 갈등과 고민도 생생하게 느끼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저 원작에서 '그런 것들'을 다루고 있다는 '정보'만 달달 외우고 '시험대비'만을 위한 독서로 전락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모법답안처럼 제시되어 있는 '작품해석'을 이해한 뒤에는 '자신만의 관점'으로 작품을 '재해석'하는 과정을 반드시 거치길 바란다. 이 책은 그런 '재해석'을 위한 첫 디딤돌로 활용해야 더욱 바람직하며, 이 책의 '소임'을 다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이토록 두서없이 서론이 장황한 까닭은 나 역시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읽으며 엄청 헤맸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말이 좋아 '의식의 흐름기법'이지 이야기의 맥락을 파악하기도 전에 확확 바뀌는 장면연출과 부족한 배경지식으로 인해 제대로 된 이해를 하기 전에 책을 덮어버리고 만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경험을 해본 적이 있다면 '아는 만큼 보이고,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에 전적으로 공감하게 될 것이다. 자, 이제는 제임스 조이스에 대해서 알게 되었으니 썰을 풀어보아야겠다.

 

  <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한 예술가의 자전적인 소설인 까닭에 작품속의 인물과 배경이 마냥 '허구성'을 띤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소설을 통해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에 '진심'이 담겨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런 진심 가운데 나는, 작가의 고국이 '아일랜드'라는 점이 눈에 띄었다. 강대국의 압제 아래 신음하던 '식민지 조국의 현실'을 안타깝게 바라보며 어떠한 희생이 따르더라도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을 하는 민족주의자가 있는 반면에, 어둡고 아픈 현실 앞에 '삶의 당위성'을 빌미로 내세우며 그런 현실과 적당히 타협하며 삶의 길을 찾아나서는 현실주의자가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렇게나 서로 다른 '이질적인 사상가(?)'들이 모두 아일랜드인이라는 점이 비극의 시작인 것이다. 민족주의자들의 눈에는 조국의 어두운 앞날이 예견되는데도 비굴하게 압제자들의 비위를 맞추며 조국을 배신하고, 동포를 배신하면서도 오직 '물질적 풍요'만을 추구하는 정신 나간 사람으로 보일 뿐이다. 반면에 현실주의자들의 눈에는 거대한 바위에 달걀던지기 꼴로 하나 뿐인 소중한 목숨마저 헛되게 낭비(?)하며 불가능에 가까운 '조국의 독립'이라는 무모한 도전을 부추기는 비이성적인 사람으로 보일 뿐이다. 이렇게나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두 '아일랜드 사람'이라는 똑같은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현실을 제임스 조이스는 못마땅했던 것이다.

 

  그래서 조이스는 소설속 주인공으로 등장해서 '반민족적인 행태'를 일삼는 이들을 향해 날카로운 비판을 서슴지 않는다. 아니, 어린시절에도 부당한 처우를 받으면 당당히 '옳음'을 밝히고 한 점 부끄럼없이 떳떳한 '행동'으로 실천으로 옮겼던 자신에게 아낌없이 칭찬을 하기도 했다. 그런 올곧은 성품이었기에 '성직자의 길'을 갈 것이라고 고민하던 시절에는 유혹을 참지 못하고 사창가를 들락거렸던 자신에게 그토록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며 괴로워했던 것이다. 그런 고통은 자신이 '성직자의 길'을 포기하면서 겨우 벗어날 수 있었지만, 가정의 생계를 걱정해야만 하는 '청년시절'이 되자 생계를 위해 '안정적인 직장'을 얻어야 하는가? '자신의 꿈(자아)'을 실현시키기 위해 예술가의 혼을 갈고 닦아야 하는가?로 고민하게 된다. 물론, 이런 고민을 하면서도 '민족적인 고뇌'를 내려놓지 않았다. 당시의 성직자들이 자신들의 출세와 안녕을 위해서 조국을 배신하고 '영국의 입맛'에 딱맞는 설교를 늘어놓는 비겁한 모습과 예술이란 이름으로 대중을 현혹시키는 수준 낮은 창작자들이 다른 사람들의 아이디어를 베끼면(도둑질)서도 부와 명예를 적당히 건져올려 배를 채우면서도 부끄러울 줄 모르는 몰염치함도 서슴없이 비판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작중화자인 '스티븐 디덜러스'는 예술가로 성장하기 위해 그리스의 뛰어난 장인 '다이달로스'처럼 숱한 고난을 이겨내고 마침내 화려한 비행을 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신념을 보여준다. 어려움에 빠진 '조국'과 '가정'의 비참한 현실을 낱낱이 고발하면서도 '예술가의 혼'을 불태울 열정을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는 굳은 다짐을 하면서 말이다.

 

  오늘날의 대한민국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듯 했다. 명실공히 '선진국'으로 발돋움하였는데도, 현실은 중국에 이어 미국을 '종주국'으로 삼고, 강대국(?) 일본의 식민지인처럼 '강자의 입맛대로' 시키는 일에만 충실히 따르는 멍청이가 되는 것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헌신하는 일이라 굳게 믿고 있는 이들이 아직도 많이 있으니 말이다. 이런 멍충이들은 미국이 '영원'할 것이라 믿고 있을 것이고, 일본이 '아직'도 강대국이라는 꿈에서 깨어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이미' 미국의 간섭 없이도 잘살 수 있고 일본 따위는 한 수 아래로 보아도 될 정도로 후진국이 되어 버렸다는 '사실'을 어찌하여 외면하게 되었을까? 몹시 궁금할 지경이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그런 멍충이들이 대한민국에 절반 가까이나 살고 있다는 점이다.

 

  중요한 것은 그 절반이나 되는 멍충이들을 깨우쳐주는 일이 아니다. 이미 깨어있는 나머지 절반이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해야 멍충이들이 활개를 칠 수 없기 때문이다. 멍충이들을 깨우치게 하는 일보다는 분명 쉬운 일이고 말이다. 그렇다면 '해야 할 일'이 무어냐고? 그 첫 번째는 무엇보다, '돈, 많은 놈'이 부럽다면 그놈들이 '사악한 짓'을 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감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 '돈, 많은 놈'은 그 가운데 소수에 불과하다. 그러니 '돈, 많은 놈'을 '돈도 많은 분'으로 개과천선할 수 있도록 법과 제도, 그리고 사회, 문화 등등 총체적으로 바꿔나가야 한다. 부익부빈익빈이 만연하고, 계층사다리가 사라져버려서 '없는 사람'은 출세하기 힘든 세상이 되어버렸다고? 그럼 당당히 요구해라! 대한민국을 살기 좋은 나라로 만들라고 말이다. 그게 바로 '해야 할 일'이다. 정치인들이 후진적으로 썪어서 서민들을 위한 법과 제도를 만들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그런 놈들을 '찍어준 사람'이 누구란 말인가? 정치는 '선거'때만 하는 것이 아니다. '날마다' 하는 것이다. 당당히 요구해라! 한 점 부끄럼이 없는 '돈도 많은 분'만이 이 땅에 충만해질 때까지 '해야 할 일'을 망각하지 말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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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의 섬 1 쥘 베른 베스트 컬렉션
쥘 베른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림원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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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읽기까지 '여담'을 조금 풀어놓자면, <열림원>에서 출간한 '쥘 베른 컬렉션'을 한창 사모으고 있었던 때로 돌아가야 한다. 살림살이가 풍족하지 못하던 시절이라 책을 많이 사지 못하던 때여서 진짜 '소장각'인 책들만 사모으던 터였는데, 쥘 베른의 열혈팬이었던 나는 이 책에 아낌없이 홀릭해버렸다. 그렇게 10권을 모았는데, 이상하리만치 책의 출간이 늦어지고 있었다. 분명 '컬렉션 목록'에는 <신비의 섬>을 비롯해서 <황제의 밀사>, <기구 타고 5주간> 등등이 소개되어 있었는데도 말이다. 그렇게 하염없이 기다리던 어느 날 갑자기 '후속작'이 출간되었는데, 막상 사려고 보니 '표지갈이'가 되어 버린 '개정판'으로 출간해버린 것이다. 가격이 오른 것은 둘째치고, 기존에 소장하고 있는 책들까지 싹다 '표지갈이'가 되어, 이전과는 아주 다른 '장서'로 재출간이 된 것이었다. 더구나 '이전 장서'와는 책의 높이마저 달라져서 '구매욕구'가 싹 사라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렇게 '쥘 베른 컬렉션'은 새단장한 모습으로 또 다른 모습의 '쥘 베른 컬렉션'이란 이름으로 연이어 새책들이 출간되었더랬다. 하지만 난 끝내 '개정판'을 사모을 수가 없었다. 마치 '개정판'을 사모으게 되면, 기존에 모았던 책들에 대한 '배신(?)'을 하는 느낌이 들어서였을 것이다. 그렇게 난 왠지 모를 '배신감'에 '개정판'에 대한 미움만 키워나갔다. 하지만 그 '개정판'도 오래 가지 못하고, '쥘 베른 베스트 컬렉션'이란 이름으로 소위 '잘 팔리는 책들(?)'만 엮어서 또 다른 '표지갈이'로 지금의 책이 출간되고 말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었는데, 우연한 계기로 <해저 2만리>에 등장했던 '네모선장의 정체'가 <신비의 섬>에서 밝혀진다는 문구를 읽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두말없이 '또또 개정판'에 해당하는 이 책을 구매해서 읽게 된 것이다. 그래서 내 책꽂이에는 두 개의 '이질감'이 가득한 쥘 베른 컬렉션이 장식하게 되었다. 앞으로 '또또 개정판'을 사모으게 될런지 장담할 수는 없지만, 개정판이 출간되더라도 제발 '표지갈이'는 완간을 한 뒤에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넌지시 호소해보려 한다. 정말이지 '완간'도 되기 전에 표지를 바꿔버리면 구매욕이 현저히 떨어지고 만다. 적어도 내 경우에는 말이다.

 

  암튼, 내가 <신비의 섬>을 읽게 된 까닭은 앞서 말한 '네모선장의 정체'가 밝혀진다는 문구가 결정적이었다. 그리고 지금 1권을 다 읽어보니, 첫 느낌은 '어른판' <2년 동안의 휴가(15소년 표류기)>를 읽은 듯한 느낌도 들고, '무인도'에 정착해 아무 것도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꿋꿋하게 '생존'해나가는 등장인물들의 모습에서는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를 읽는 느낌도 들었다. 1권의 줄거리에서 '네모선장의 비밀'이 밝혀지는 내용은 없었지만, 네모선장의 흔적(?)인 듯한 '암시'가 되는 부분들은 몇몇 있었다. 다섯 명의 조난자 중에서 네 명은 폭풍속을 기구를 탄 채 날다가 추락하던 중에 해안가에 표류해서 운좋게 생존하지만, 단 한 명은 '동굴' 속에서 발견 되었다는 점이나, 아무도 살고 있지 않은 무인도 같은 섬의 호수에서 괴물같이 거대한 듀공이 격렬한 사투 끝에 죽임을 당했는데, 듀공의 사체가 '날카로운 칼'에 의해 잘려진 것같은 상처가 커다랗게 있었다는 점, 그리고 조난자와 함게 표류한 개, 토비가 새로 정착한 동굴을 거처로 삼은 뒤에도 '바다로 통해 있을 거라 짐작'하고 있는 통로 근처에서 이상하리만치 경계를 하고 으르렁거리는 장면이라든지, 마지막으로 덫에 걸린 새끼돼지와 비슷하게 생긴 동물로 요리를 해서 맛있게 먹다가 딱딱한 돌 같은 것을 씹게 되었는데, 알고보니 돌이 아니라 '납으로 만든 총알'이었다는 점에서 탐정같이 예리한 독자들은 '네모선장의 비밀'과 연관지을 수 있는 단서일지도 모른다는 상상력을 발휘하게 되기 때문이다. 아닌게 아니라, <해저 2만리>에서도 네모선장이 바다 한가운데 아무도 알지 못하고 누구도 찾을 수 없는 섬에서 '노틸러스호'를 기항하고 수리를 하거나 보급을 하는 '신비한 섬'을 언급한 대목이 있기에 <신비의 섬>에서 '무인도'라고 알려진 '링컨 섬'에서 발견되는 이러한 '증거'들은 애독자들에겐 단지 '무인도'가 아니라는 설정, 그 이상의 설렘을 발동시키기에 충분할 것이다.

 

  이러한 흥미진진한 '단서'들은 일단 2권에서 다시 '본격, 추리'를 해보도록 하고, 다시 책의 줄거리로 시선을 돌려보려 한다. 먼저 줄거리는 단순하다. 다섯 명의 조난자가 등장하는데, 이들은 기구를 타고 미국의 '남북전쟁'이 한창인 리치먼드에서 탈출에 성공하지만, 하필 탈출할 때의 날씨가 폭풍우가 몰아치기 직전이었던 탓에 운좋게 탈출에 성공한 것이 그만, 폭풍속에 휘말리게 되었고, 그렇게 남서쪽으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려가다가 망망대해에 추락을 면하기 위해 기구 안에 실었던 '모든 것'을 기구밖으로 떨구며 근근히 버티다 '운좋게(?)' 육지를 발견하고 불시착을 하게 되는데, 알고 보니 그 육지는 망망대해에 갇힌 섬이었다는 전개다. 그리고 그 섬은 대륙이나 가까운 섬과도 멀리 떨어져 있었고, 정기적으로 운행하는 뱃길과도 멀리 떨어진 탓에 그야말로 '완벽하게' 아무 것도 없는 무인도였다는 설정이다.

 

  그런데 이토록 아무 것도 없는 섬에서 '생존의 불씨'를 되살린 것은 다름 아니라 '인류의 지혜', 그리고 '문명의 지성'이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는 믿기 힘든 현실이 펼쳐지면서 '쥘 베른의 역작'이라는 면모가 여실히 엿볼 수 있다. 이는 다섯 명의 조난자가 대단한 능력자들이라는 사실에서 더욱 그렇다. 그 뛰어난 능력은 그들의 이름에서도 엿볼 수가 있다. 먼저, 만물박사의 역할을 맡고 있는 '사이러스 스미스'는 Cyrus(키루스)라는 페르시아 제국을 건설한 대왕의 이름에서 따왔고, <뉴욕 헤럴드> 신문기자인 '기디언 스필렛'은 종군기자로 활약하면서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는 용맹함을 갖춘 지성인으로 척박한 무인도에서도 위대한 모험가로 활약하며 조난자들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발벗고 나서는 영웅적 인물이었다. 또한, 사이러스의 하인을 자처한 '네브'라는 흑인이 등장하는데, 북군으로 참전한 사이러스는 네브를 노예신분에서 해방시켰지만, 원래부터 충직하고 성실하며 헌신적인 성향을 띤 네브는 해방된 뒤에도 사이러스의 하인을 자처했더란다. 이런 '네브'의 이름은 성경에 등장하는 신바빌로니아 왕국의 군주 네부카드네자르(느부갓네살) 대왕에서 따왔다. 이 대왕은 백성을 사랑한 자애로운 왕이었으며 왕비를 위해 손수 '공중정원'을 만들어줄 정도로 지극정성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 항해에 잔뼈가 굵은 선원 출신의 '펜크로프', 그리고 모험을 좋아하고 박물학에 뛰어난 재능을 갖춘 소년 '허버트'가 합류하여 아무 것도 없는 무인도에서 무엇이든 뚝딱뚝딱 만들어내는 신비한 일들이 날마다 일어나게 된다.

 

  이러한 이야기 설정과 전개는 이 책이 <15소년 표류기>나 <로빈슨 크루소>와 비슷한 면모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완전 다르다는 점을 알 수 있게 된다. 그 까닭은 앞선 두 소설에서는 표류자들이 '우연한 계기'로 생존에 필요한 물자나 원료를 얻게 되면서 무인도에서 생존하고 끝내 탈출하게 되지만, <신비의 섬>에서는 외부와는 완전히 차단되어 완전 고립된 무인도에서 '자체적인 노력'만으로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뚝딱뚝딱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다만, 무인도에서 용광로를 만들어서 '철기도구'를 제작해낸다든지, '니트로글리세린'이란 폭발물을 조제하여 거대한 폭발을 일으킬 정도로 '화학제조'를 실현한다든지, 맨몸으로 표류했음에도 굻어죽지 않을 정도를 넘어서서 매일매일 '사냥'에 성공해서 '고기(단백질)섭취'를 가능케하여 무인도에서 문명을 일구어내는 왕성한 체력을 뿜뿜해내는 과정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아무리 소설이라도 뻥이 좀 심하다고 할 수도 있다.

 

  허나 쥘 베른은 이러한 '무모한 설정'을 온전히 '과학의 힘'을 바탕으로 완벽히 무마시켜버렸다. 무릇 인류에겐 '지식 축적'이 가능하기 때문에 다른 동물과는 달리 우월할 수밖에 없고, 그런 우월함을 바탕으로 만물의 영장으로 군림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를 밑바탕에 깔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참으로 무모한 '과학만능주의'의 폐해라 지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특히, '인간의 관점'에서만 '자연의 섭리'를 논하고, 그런 섭리의 위험함을 전혀 경계하지 않고, 오히려 '신이 내린 축복'으로만 해석하며 자연과 환경 파괴를 일삼는 모습은 이 소설의 유쾌함에 살짜쿵 걸림돌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쥘 베른이 19세기 작가였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가 살던 시대에는 '만물의 영장'으로 인간이 지구의 모든 것을 누리지 못할 것이 없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테니 말이다.

 

  어쨋든, 1권은 씹던 고기에서 '납 총알'이 발견되어 2권에서 벌어질 파란만장한 모험담을 예고하며 마무리하였다. 2권에서는 또 어떤 '네모선장의 비밀'이 파헤쳐질지 기대가 만빵이다. 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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