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 2 - 위기의 신들 ㅣ 한빛비즈 교양툰 29
김재훈 지음 / 한빛비즈 / 2023년 8월
평점 :
1권 리뷰에 이어...우리에게 '프로메테우스'는 어떻게 알려졌나? 가장 흔하게 알려진 이야기에 따르면, 제우스의 명령을 어기고 '인간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불을 전해줌으로써 제우스의 노여움을 '인간을 대신해서' 한 몸에 받게 된 것을 부각시킨 까닭에 압제자의 독단에 굴하지 않는 '저항의 아이콘'으로 널리 알려져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신이라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처한 현대사의 아픔을 정곡으로 관통한 '메시지(해석)'인 까닭에 아무런 비판없이 수용되어 널리 회자되었고, 프로메테우스는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인간의 편'에 선 '정의로운 신'으로 우리 가슴속에 새겨졌던 것이다.
하지만, 2권에서는 '프로메테우스'의 그러한 상징과 해석에 대해서 '반전에 반전'을 더하고 있다. 이를 테면, 신의 형상을 본따 인간을 창조한 신이 프로메테우스가 아니라, 원래는 '제우스'였다고 밝히고 있으며,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을 창조하고 인간을 위해 불을 가져다준 것도 무한한 '인간사랑' 때문이 아니라 불멸의 존재로서 무료한 세월을 보내기보다 '제우스가 만든 올림푸스 12신 체제'가 만든 안정을 송두리채 뒤흔들 파란을 일으키기 위해 '필멸의 존재'를 만들어 서로가 죽고 죽이는 재미난(?) 세상을 관람(!)하기 위해 심심풀이 땅콩 삼아 창조했다는 해석을 내놓았다.
물론, 이러한 해석이 옳다 그르다를 따지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다만, 그렇게 해석하였을 때, '논리적 근거'가 타당한 것이냐를 냉철하게 분석하는 힘이 중요한 것이다. 왜냐면 '신화도 역사와 마찬가지로 정답이 없다'는 것이 핵심이기 때문이다. 무언가 '정답'을 정해놓고 나면 '신화'는 더는 연구할 가치를 잃게 된다. 모든 학문에 해당되는 당연한 진리이고 말이다. 그러니 색다른 해석을 내놓았다는 것만으로도 엄청 흥미롭고 반가운 책이라는 사실이 명확해진다. 또한 그런 흥미로움이 '교양툰'에 녹아들어 누구나 쉽게 즐기고 교양을 쑥쑥 쌓아올릴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더 유익할 따름이고 말이다. 암튼, 색다른 해석을 즐길 준비가 되었으면 따라오길 바란다.
사실, 이 책의 1권에서는 '프로메테우스'보다 '가이아의 복수'라는 관점이 대단히 흥미로운 점이었다. 기존의 '신화책'들이 죄다 '남성중심적인 해석'을 늘어놓았던터라 '여성중심적인 해석'에 대한 매력이 더욱 돋보였었다. 그렇게 '가이아의 복수'는 티타노마키아를 일으키며 '1차 신들의 전쟁'의 막을 올렸고, 그 다음에는 기간토마키아를 준비하며 '2차 신들의 전쟁'과 뒤이어 단번에 제우스를 파멸케 한 튀폰이 등장하는 '3차 신들의 전쟁'까지 이야기는 이어진다. 그런데 그러한 '가이아의 복수'가 이어지는 와중에 '프로메테우스의 장난기(?)'를 첨가한 것이다. 이는 우리에게 익숙한 '신화의 줄거리'에 엄청나게 공들인 '각색의 맛'을 더한 셈이다. 음악에 비유하자면 '원곡'도 좋지만 '편곡'을 해서 더 많은 대중의 사랑을 받는 노래가 있듯이, '기존의 신화 줄거리'에 '새로운 해석'을 가미해서 신화가 지닌 이야기의 맛을 더욱 풍미롭게 한 셈이다.
다시 말해,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을 위해서' 한 일이 아니라 '재미를 위해서' 하였던 일이고, 인간을 창조하는데 깊이 관여한 신은 프로메테우스가 아니라 '제우스' 였단 말이다. 이것이 무슨 차이를 보여주는 것일까? 애초에 제우스는 우라노스, 크로노스에 이어 '올림푸스 12신 체제'를 완성하는 것을 주목적으로 삼았다. 그렇게 만든 '신들의 세상'은 완벽 그 자체였으며 무엇 하나 더하거나 뺄 것도 없는 '완성품'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세상을 안정시켜 나가는 것도 좋았겠지만, 제우스는 자신들을 숭배하며 두려워할 '존재의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다. 그래서 프로메테우스로 하여금 그러한 '필멸의 존재'를 창조하라고 명령하였고, 에피메테우스로 하여금 '그 존재'를 위해 알맞은 능력을 부여하라고 명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그리스로마신화의 유쾌함은 이처럼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라 뭔가 부족한 데서 찾아볼 수도 있다.
암튼, '미리 생각하는 신'은 무슨 일이든 행하기에 앞서 꼼꼼히 생각을 먼저 하며 실수가 없도록 하지만, '나중에 생각하는 신'은 생각하기에 앞서 행동을 먼저 하니 종종 의도치 않은 실수를 범하곤 한다. 그러고나서 '반성'이나 '후회'라도 하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련만 행동보다 생각이 앞서다보니 그런 것을 해본 적도 없다. 하긴, '신'이라는 존재가 반성이나 후회를 하는 종자가 아니기도 하다. 그저 '저지르기'만 할 뿐인 존재가 바로 '신의 속성'이라는 점에서 놀랄 일도 아니다. 그런 일이 벌어진 덕분에 인간은 다른 동물과는 달리 '별다른 신체적 능력'도 갖추지 못하고 추위나 맹수의 위협 앞에 벌벌 떠는 '약한 존재'가 되고 만다.
익숙한 이야기 전개에서는 그 때문에 프로메테우스가 제우스의 명령을 어기고 '신의 불'을 훔쳐다 인간에게 전해줌으로써 인간은 다른 동물보다 뛰어난 재능, 다시 말해 '문명'을 일으켜세우는 위대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 때문에 인간들은 프로메테우스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는 것까지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신화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여기까지도 '제우스의 속셈'이었다고 말한다.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의 편을 들고 신들에게 '반역'을 저질러야 제우스가 자신들의 적이었던 '티탄족'이 까불고 기고만장한 일이 없기 때문이었단다. 다시 말해, 프로메테우스가 1차 신들의 전쟁에서 제우스의 편을 들어 승리할 수 있는 '공신'이었지만, 올림푸스 체제가 완성된 이후에는 그닥 필요하지 않았기에 '숙청 대상'으로 삼았다는 해석이다. 그러기 위해서 '인간이란 존재'가 필요했던 것이고, 그렇게 프로메테우스를 사랑하며 기고만장해진 인간들과 함께 프로메테우스를 제거할 수 있는 안배를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해석이 왜 필요했던 것일까? 프로메테우스가 '저항의 아이콘'의 상징으로 해석된 것은 시대적 요청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전세계 곳곳에서 '독재자의 그늘'에서 시름하는 민중들이 많았기에 '프로메테우스 신화'는 꼭 필요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에는 저항의 상징인 '프로메테우스'를 대신해서 인간을 창조했다는 '제우스의 신화'가 필요했던 것일까? 바람둥이의 상징인 제우스가 하필 '인간창조'와 '인간사랑'을 도맡아서 한 주역이라는 해석은 과연 무슨 의도이냔 말이다.
사실 우리는 <그리스로마신화>를 읽으며 제우스를 오해하고 있었다. 바람둥이, 난봉꾼의 신으로만 싸잡아서 비난만 하기에 '제우스의 능력'은 너무나도 뛰어났고, '제우스의 통치력'은 모든 세상을 안정시키는데 탁월함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우스의 바람기(?)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우라노스의 저주(?)에서 벗어나기 위해 크로노스는 제 자식을 낳자마자 삼켜버렸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그 저주라는 것이 "너도 똑같은 방법으로 권좌에서 쫓겨날 것이다"였기 때문에, 아버지를 해하고 그 자리에 올라선 크라노스와 제우스도 불안하기 이를 데 없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제우스는 자신이 완성한 세상에 혼돈(전쟁)이 찾아오면 '불멸의 존재'로는 승리할 수 없고, 오직 '필멸의 존재'의 도움으로 승리할 수 있다는 신탁을 받았던 터라 신나게 자식농사(?)를 짓는데 열을 올릴 수 있는 핑계가 성립하는 셈이다.
또 다른 해석으로는 그리스문화(헬레니즘)가 전세계에 퍼져나가면서 여러 민족들이 자신들의 조상이나 선조를 '제우스'에서 따오는 바람에 제우스의 의도와 상관없이 '난봉꾼의 신'이 될 수밖에 없었단다. 왜냐면 '신화'라는 것이 신들이 직접 적어 전승시킨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필요에 따라 적절하게 손을 보면서 전승해온 덕분에 자기 민족의 위대함과 우수성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최고신인 제우스는 수없이 많은 나라의 여왕과 왕비, 공주, 그리고 예쁜 처녀들을 납치하고 강간했다는 전설을 퍼뜨리게 되었다고 한다. 제우스의 정실부인이 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고 '그럴듯한 변명'이었겠지만, 헤라라는 여신이 두눈을 부릅뜨고 '정실부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데, 감히 '정식 혼인절차'를 밟을 수 있었겠느냔 말이다. 매우 부적절한 방법이지만 제우스를 '난봉꾼'에 '성폭행범'으로 만드는 것이 더욱 그럴듯했다는 논리다.
어쨌든 간에, 그런 최고신이 '인간창조'와 '인간사랑'의 아이콘으로 재해석해야 할 필요성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 것인가? 그건 바로 '프로메테우스의 본색'을 까발렸더니 그다지 '좋은 신'이랄 수 없었다는 사실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프로메테우스는 '변절', '배신'을 한 셈이다. 같은 티탄족의 편을 들지 않고 상대편인 제우스의 편을 들어 자신의 종족을 '배신한 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배신자가 '한 번만' 배신한다는 상식에서 벗어날 것이다. 이는 '제우스의 분노'에서 모든 인간을 구원하기보다 자신의 후손인 '데우칼리온'만 살리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왜 프로메테우스는 그토록 사랑했다는 인간들을 '제우스의 분노'로부터 막아주거나 대신 받거나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아니라 '인간멸종'을 선택하고, 선택받은 단 한 사람 '데우칼리온'이라는 자신의 후손(어머니가 누구인지도 불분명한)만으로 살려내 '새로운 인간'을 다시 번성하게 한 까닭이 무엇이었을까? 피할 수 없는 천벌에서 그나마 가장 나은 방법이었던 것일까? 인류의 절멸이란 선택이 말이다. 이게 과연 '인간창조', '인간사랑'의 아이콘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던 것일까? 압제자로부터 인류를 구원한 '저항의 아이콘'은 어쩌고 말이다.
이쯤해서 '프로메테우스'는 결코 '저항의 아이콘'이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우리 모두를 위한 '정의의 수호신'으로 믿었는데 제대로 발등이 찍혀버린 셈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기' 딱 좋은 시기는 아닌지 의심스럽다. 과연 대한민국를 제대로 살려낼 위대한 지도자는 누구란 말인가? 부유한 상류층부터 가난한 서민들까지 모두가 행복한 대한민국을 이끌어갈 리더는 과연 어떤 자질을 갖추어야 한단 말인가? 해묵은 이념갈등과 지역대립, 세대갈등, 남녀갈등 등을 눈녹듯 사라지게 만들 카리스마 넘치는 인재는 누구란 말인가? 아마도 이 책에서 말하는 '해석의 의미'는 배신을 일삼는 '프로메테우스'가 아니라 최고의 권능을 가진 '제우스'에게서 찾아야 옳다는 것으로 보여진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대단히 뛰어난 '능력자'를 리더로 바라고 있다. 앞날을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혼란스런 세계정세 속에서 대한민국을 흔들림없이 이끌어나가기 위해서는 최고신 '제우스의 권능'을 바라는 건지도 모르겠다.
허나, 오늘의 대한민국을 이끄는 가장 훌륭한 리더는 바로 대한민국 시민들 '모두가 가진 역량'일 것이다. 낡은 이념에 흔들리지 않고, 수많은 갈등의 본질도 '모두의 이익(공공의 이익)'을 위해 공평과 형평의 잣대를 능수능란하게 활용할 수 있는, 때론 대한민국 '모두'를 위해 자신의 불이익 따위를 셈하지 않고 기꺼이 희생을 감수할 수 있는, 그런 멋진 시민들이 모두 훌륭한 리더의 역할을 발휘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런 믿음이 어마무시한 튀폰 앞에서도 두려움으로 온몸을 적시면서도 두려움 앞에 당당히 맞서는 '최고신'을 닮은 대한민국 시민리더를 양성할 것이다. 이젠 '프로메테우스'의 뒤에 서서 독재타도를 외치는 시절은 지났다. 거대한 불의 앞에 서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는 공포가 엄습할지라도 결코 물러서지 않는 용감한 시민리더들이 절실한 시절에 꼭맞는 해석이 아닌가 싶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