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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06 : 젊은 예술가의 초상 ㅣ 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6
박성문 글, 이철희 그림, 손영운 기획, 제임스 조이스 원작 / 채우리 / 2012년 2월
평점 :
각설하고, 좋은 소설이란 무엇일까? 제임스 조이스는 자신의 자전적인 소설인 <젊은 예술가의 초상>의 한 대목에서 '좋은 작품의 특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좋은 작품은 인간의 감정을 사로잡는 것이다"라고 말이다. 이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던 '카타르시스(감정의 정화)'라는 표현을 빌리는데, 무언가에 '사로잡히게' 만들 정도의 감정이 생긴다면 좋은 작품이고, 그렇지 못하면 그저 밋밋한 좋지 못한 작품이라고 한 구분하였다. 여기에 한 눈에 사로잡을 만한 '형식'까지 갖춘 작품이라면 미인을 바라볼 때, '그녀의 이름은 무엇일까? 어디에 살까? 남자 친구는 있을까? 무엇을 좋아할까? 말을 한 번 걸어볼까? 하고 꼬리에 꼬리는 물며 궁금해하는 것이 생기는데, 바로 이런 감정이 '사로잡힌'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에 덧붙여,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런 궁금증이나 관심이 '광휘'를 만든다고 했고, 조이스는 다시, 광휘를 '무언가에 사로잡히고, 더 깊이 몰두하여 진실된 모습을 깨닫는 것'이라고 풀었다.
그렇다면 <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좋은 소설'일까? 많은 이들은 제임스 조이스가 기존의 소설과는 판이하게 다른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현대소설(모더니즘)의 기틀을 닦았다면서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 다시 말해, 기존의 소설이 '행위 중심'으로 서술한데 반해, 조이스는 '의식 중심(떠오르는 이미지)'으로 이야기를 서술함으로써 소설속에 '초현실주의'를 실현시키는데 선구자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고 평가하니 말이다. 하지만 요즘 독자들이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읽다보면, 이야기의 흐름을 파악하기도 전에 책을 덮어버리고 말 것이다. 왜냐면 책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선 '배경지식'이 필요한데, 아무런 배경지식도 없이 무작정 '좋은 소설'이라는 평만 믿고서 소설속으로 뛰어들다보면 '의식의 흐름 기법' 때문에라도 어질어질 멍한 채 이리저리 헤매기만하다가 책을 덮어버리기 일쑤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그리 '좋은 작품'이라고 말하기 힘들 것이다.
허나, 작품속에 담긴 '배경지식'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게 된다면 '이 책'이 왜 그토록 극찬을 받는 소설인지 어렵지 않게 이해하게 될 것이다. <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한 명의 예술가가 탄생하기까지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는 '과정 중심'으로도 읽어도 좋고, 영국의 식민지로 신음해야만 했던 '아일랜드'와 '아일랜드인'으로서의 아픔과 고뇌를 이해하며 '민족주의의 각성'에 대해 깊이 고민할 수도 있으며, 종교인으로서의 소명의식과 안정적인 직장인으로써의 '종교에 대한 성찰' 등등 하나의 소설을 읽었을 뿐인데, 독자가 지니고 있는 '배경지식'에 따라 변화무쌍한 모습으로 다양한 색채의 스펙트럼을 펼쳐내는 소설이야말로 훌륭한 소설이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 '서울대선정 문학고전'으로 읽는 <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고전문학의 깊이를 체험하지 못한 예비독자들에게 훌륭한 길라잡이가 될 것이다.
물론, 길라잡이가 소개하고 있는 내용만 달달 암기하듯 '감상'하는 것으로 그친다면, 진정 '고전문학'에 담긴 참뜻을 이해하는데 스스로 한계를 긋는 작업일 뿐이다. 더구나 이 책은 '만화형식'이라서 '원작소설'에서 느낄 수 있는 '의식의 흐름 기법'을 제대로 맛볼 수도 없으며, 그런 기법을 통해 선보여지는 '작가의 분신'인 소설속 주인공 '스티븐 디덜러스'의 수많은 갈등과 고민도 생생하게 느끼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저 원작에서 '그런 것들'을 다루고 있다는 '정보'만 달달 외우고 '시험대비'만을 위한 독서로 전락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모법답안처럼 제시되어 있는 '작품해석'을 이해한 뒤에는 '자신만의 관점'으로 작품을 '재해석'하는 과정을 반드시 거치길 바란다. 이 책은 그런 '재해석'을 위한 첫 디딤돌로 활용해야 더욱 바람직하며, 이 책의 '소임'을 다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이토록 두서없이 서론이 장황한 까닭은 나 역시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읽으며 엄청 헤맸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말이 좋아 '의식의 흐름기법'이지 이야기의 맥락을 파악하기도 전에 확확 바뀌는 장면연출과 부족한 배경지식으로 인해 제대로 된 이해를 하기 전에 책을 덮어버리고 만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경험을 해본 적이 있다면 '아는 만큼 보이고,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에 전적으로 공감하게 될 것이다. 자, 이제는 제임스 조이스에 대해서 알게 되었으니 썰을 풀어보아야겠다.
<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한 예술가의 자전적인 소설인 까닭에 작품속의 인물과 배경이 마냥 '허구성'을 띤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소설을 통해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에 '진심'이 담겨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런 진심 가운데 나는, 작가의 고국이 '아일랜드'라는 점이 눈에 띄었다. 강대국의 압제 아래 신음하던 '식민지 조국의 현실'을 안타깝게 바라보며 어떠한 희생이 따르더라도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을 하는 민족주의자가 있는 반면에, 어둡고 아픈 현실 앞에 '삶의 당위성'을 빌미로 내세우며 그런 현실과 적당히 타협하며 삶의 길을 찾아나서는 현실주의자가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렇게나 서로 다른 '이질적인 사상가(?)'들이 모두 아일랜드인이라는 점이 비극의 시작인 것이다. 민족주의자들의 눈에는 조국의 어두운 앞날이 예견되는데도 비굴하게 압제자들의 비위를 맞추며 조국을 배신하고, 동포를 배신하면서도 오직 '물질적 풍요'만을 추구하는 정신 나간 사람으로 보일 뿐이다. 반면에 현실주의자들의 눈에는 거대한 바위에 달걀던지기 꼴로 하나 뿐인 소중한 목숨마저 헛되게 낭비(?)하며 불가능에 가까운 '조국의 독립'이라는 무모한 도전을 부추기는 비이성적인 사람으로 보일 뿐이다. 이렇게나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두 '아일랜드 사람'이라는 똑같은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현실을 제임스 조이스는 못마땅했던 것이다.
그래서 조이스는 소설속 주인공으로 등장해서 '반민족적인 행태'를 일삼는 이들을 향해 날카로운 비판을 서슴지 않는다. 아니, 어린시절에도 부당한 처우를 받으면 당당히 '옳음'을 밝히고 한 점 부끄럼없이 떳떳한 '행동'으로 실천으로 옮겼던 자신에게 아낌없이 칭찬을 하기도 했다. 그런 올곧은 성품이었기에 '성직자의 길'을 갈 것이라고 고민하던 시절에는 유혹을 참지 못하고 사창가를 들락거렸던 자신에게 그토록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며 괴로워했던 것이다. 그런 고통은 자신이 '성직자의 길'을 포기하면서 겨우 벗어날 수 있었지만, 가정의 생계를 걱정해야만 하는 '청년시절'이 되자 생계를 위해 '안정적인 직장'을 얻어야 하는가? '자신의 꿈(자아)'을 실현시키기 위해 예술가의 혼을 갈고 닦아야 하는가?로 고민하게 된다. 물론, 이런 고민을 하면서도 '민족적인 고뇌'를 내려놓지 않았다. 당시의 성직자들이 자신들의 출세와 안녕을 위해서 조국을 배신하고 '영국의 입맛'에 딱맞는 설교를 늘어놓는 비겁한 모습과 예술이란 이름으로 대중을 현혹시키는 수준 낮은 창작자들이 다른 사람들의 아이디어를 베끼면(도둑질)서도 부와 명예를 적당히 건져올려 배를 채우면서도 부끄러울 줄 모르는 몰염치함도 서슴없이 비판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작중화자인 '스티븐 디덜러스'는 예술가로 성장하기 위해 그리스의 뛰어난 장인 '다이달로스'처럼 숱한 고난을 이겨내고 마침내 화려한 비행을 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신념을 보여준다. 어려움에 빠진 '조국'과 '가정'의 비참한 현실을 낱낱이 고발하면서도 '예술가의 혼'을 불태울 열정을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는 굳은 다짐을 하면서 말이다.
오늘날의 대한민국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듯 했다. 명실공히 '선진국'으로 발돋움하였는데도, 현실은 중국에 이어 미국을 '종주국'으로 삼고, 강대국(?) 일본의 식민지인처럼 '강자의 입맛대로' 시키는 일에만 충실히 따르는 멍청이가 되는 것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헌신하는 일이라 굳게 믿고 있는 이들이 아직도 많이 있으니 말이다. 이런 멍충이들은 미국이 '영원'할 것이라 믿고 있을 것이고, 일본이 '아직'도 강대국이라는 꿈에서 깨어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이미' 미국의 간섭 없이도 잘살 수 있고 일본 따위는 한 수 아래로 보아도 될 정도로 후진국이 되어 버렸다는 '사실'을 어찌하여 외면하게 되었을까? 몹시 궁금할 지경이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그런 멍충이들이 대한민국에 절반 가까이나 살고 있다는 점이다.
중요한 것은 그 절반이나 되는 멍충이들을 깨우쳐주는 일이 아니다. 이미 깨어있는 나머지 절반이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해야 멍충이들이 활개를 칠 수 없기 때문이다. 멍충이들을 깨우치게 하는 일보다는 분명 쉬운 일이고 말이다. 그렇다면 '해야 할 일'이 무어냐고? 그 첫 번째는 무엇보다, '돈, 많은 놈'이 부럽다면 그놈들이 '사악한 짓'을 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감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 '돈, 많은 놈'은 그 가운데 소수에 불과하다. 그러니 '돈, 많은 놈'을 '돈도 많은 분'으로 개과천선할 수 있도록 법과 제도, 그리고 사회, 문화 등등 총체적으로 바꿔나가야 한다. 부익부빈익빈이 만연하고, 계층사다리가 사라져버려서 '없는 사람'은 출세하기 힘든 세상이 되어버렸다고? 그럼 당당히 요구해라! 대한민국을 살기 좋은 나라로 만들라고 말이다. 그게 바로 '해야 할 일'이다. 정치인들이 후진적으로 썪어서 서민들을 위한 법과 제도를 만들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그런 놈들을 '찍어준 사람'이 누구란 말인가? 정치는 '선거'때만 하는 것이 아니다. '날마다' 하는 것이다. 당당히 요구해라! 한 점 부끄럼이 없는 '돈도 많은 분'만이 이 땅에 충만해질 때까지 '해야 할 일'을 망각하지 말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