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09 : 고도를 기다리며 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9
주진 글, 박강호 그림, 손영운 기획, 사무엘 베케트 원작 / 채우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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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는 '현대극'의 시초로 꼽는 작품이며, '부조리극'으로도 유명하다. 어찌보면 미술의 '초현실주의' 작품을 감상하는 듯한 난해한 느낌을 주는 것이 '현대의 부조리극'이라고 하지만 '무논리 속의 논리'를 느낄 수만 있다면 '현대극'만큼 재미를 주는 작품도 없을 것이다. '무논리 속의 논리'라는 표현은 애초에 숨겨놓지 않은 물건을 찾아내는 묘미라고도 할 수 있다.

 

  사실 이미 널리 알려진 극의 내용이라 굳이 스포일 것도 없는 사실은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극에서 '고도'는 끝내 돌아오지 않는다는 결말이다. 이를 두고 돌아오지도 않을 '대상'을 무작정 기다리고만 있는 인물들의 넋두리만 실컷 구경한다며 푸념을 늘어놓을 수도 있겠지만, 곰곰이 따져보면 우리네 인생이 '그러하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이 극의 예리함과 명철함에 반하게 될 것이다. 이런 깨달음을 얻기에는 이 책처럼 '만화형식'이 아니라 직접 연극을 관람하며 배우들의 열연을 통해서 절절하게 느끼거나, 극본을 읽으며 무한한 상상력과 더불어 불현듯 깨우침을 얻는 방법이 훨씬 탁월할 것이다. 그러니 이 책을 통해 대강의 내용을 파악했다면 연극관람이나 극본읽기를 권하는 바다.

 

  암튼, 극의 줄거리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라는 두 인물이 '고도'라는 이를 기다리는 장면으로 시작해서 끝을 맺는다. 하지만 줄거리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이건 '고도'가 누구인지 알지 못해도 아무 상관이 없다는 이야기와 상통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대강의 줄거리를 쭈욱 지켜보고, 등장인물들의 대사를 유심히 듣다보면 그들이 기다리는 '고도'가 무엇인지 대충은 짐작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고도'가 무엇인지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야 일단은 짜증이 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분명 그들이 기다리는 '고도'는 사람일 거라는 짐작을 가능케 한다. 허나 정작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다 극의 중반쯤 지나면 그들이 기다리는 것이 정말 사람인가? 라는 의구심을 품게 한다. 왜냐면 이 극에서는 애초부터 '시간의 흐름'이 없기 때문이다. 해가 떠있으니 '낮'인건 알겠는데 아침인지 점심인지 해질녘인지 분명치가 않다. 그저 하룻밤을 지새운 것 같은데도 극중 인물은 50여년 전 이야기를 한다. 심지어 기다리던 이들이 죽어서 떠드는 것인지 살아서 나불거리는지조차 분간할 수 없이 뒤죽박죽이다. 그럼에도 이들이 횡설수설하다가도 딱 한가지 사실을 떠올리며 모두가 수긍하고 만다. 그건 바로 '고도'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짐작했듯이 극중 인물들 가운데 제대로 되 인물은 하나도 없다. 그나마 이성적이라고 여겨지는 이는 '블라디미르'인데, 다른 인물들의 엉뚱한 이야기에 그조차 말의 앞뒤가 꼬이고 말아 극의 내용은 하나부터 열까지 제대로인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런데 그런 엉터리 말 가운데 정곡을 찔리는 듯한 말들이 툭툭 튀어나오기에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작품에 수많은 찬사를 보내고 있고, 서울대에서도 100권의 선정도서로 손꼽은 것이다. 한마디로 이 작품은 절대 '똑같은 감상'으로 읽어낼 수 없기에 독보적인 작품인 것이다. 만약 이 극본을 시험문제로 낸다면 '정답없는 답안'속에서 논리적이고 명쾌한 답안에 후한 점수를 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니 명문대학일수록 <고도를 기다리며>를 독보적으로 해석해낸 유능한 학생을 탐낼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너무 뻔한 답안은 피하기를 권한다. 이미 '기다림은 만남을 목적으로 하지 않아도 좋다'는 식의 해석은 누군가가 먼저 써먹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말 '누구'를, 혹은 '무엇'을 기다리는 것일까? 아니면 애초에 '목적'한 바도 없이 순수하게 '기다림'의 순기능만을 얻기 위해서 마냥 기다리는 것일까? 이를 테면,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속담처럼 실제로는 너무너무 궁금해서 얼른 소식을 접했으면 좋아 죽겠다는 심정이지만, 행여나 '나쁜 소식'이라고 전해질까 두려워서, '소식 없음'을 희소식으로 여기며 묵묵히 기다리는 것처럼 말이다. <고도를 기다리며>의 시대적 배경은 '2차세계대전 종반'이고, 공간적 배경은 '폴란드'라고 널리 알려진 탓에 작품속의 '고도'는 독일에게 억압받고 있는 폴란드사람들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소련군(해방군)'이라는 해석도 있다. 허나 현대극의 특징은 '배경없음'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굳이 그런 해석이 '정답'이 아니어도 상관 없다. 그렇기에 관객이나 독자가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경험'에 비추어 적절한 배경을 설정한다면 각자 나름의 '고도'를 기다리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단지 그 '고도'가 아직 오지 않고 있음을 긍정적이고 희망적으로 여긴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그럼, <고도를 기다리며>는 달리 보이게 될 것이다. 내가 기다리고 있는 '대상'이 무엇인지 불명확해도 크게 상관없을 것이다. 더 나아가 '고도'가 돌아오지 않았기에 불행하거나 절망에 빠져있지 않고, 희망과 행복으로 가득한 기다림으로 승화시킬 수만 있다면...더더 나아가 굳이 '고도'가 찾아오던 말던 아무런 상관없이 나 자신에게 만족하며 즐거울 수 있다면 가히 '해탈의 경지'에 다달았다고 주위의 부러움을 사게 될 것이다. 때론 '고도'가 정말로 찾아왔다는 상상을 해도 좋다. 마치 아기가 즐겁게 놀다가도 퇴근하고 돌아오는 엄마를 만나듯이 말이다. 그 순수하고 해맑은 아기의 표정이 바로 '고도'가 참으로 돌아온 순간일 것이라는 상상이 즐겁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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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보는 수의사의 세계 한빛비즈 커리어툰 1
수의사 기역 지음 / 한빛비즈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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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소개를 먼저 하는 게 순서겠지만, 글쓴이가 이 책을 쓰게 된 까닭부터 이야기하는 것이 더 중요할 듯 싶다. 독자인 내가 보아도 십분 공감이 가는 대목이 있었기 때문이다. 글쓴이는 '수의사'란다. 그런데 미래의 '수의사 지망생들에게 수의사 하지 말라'고 이 책을 쓴 목적을 밝히고 있다. 출판사가 책을 출간해놓고서는 '이 책 읽지 마세요'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는 말이라서 의아해했는데, 그 뒤에 이어지는 까닭을 듣고 보니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기 때문이다.

 

  까닭인 즉슨, 자신은 동물을 사랑해서 수의사가 된 것은 맞는데, 어렵사리 공부를 마치고 '동물병원'을 개업해서 열심히 진찰하고 치료해서 아이를 건강하게 살려낸 뒤에 '진료비+치료비'를 청구하니, "너네는 동물을 사랑해서 수의사하는 거 아니냐? 무슨 동물병원비가 이렇게 비싸냐? 사랑한다면 봉사하는 셈치고 '무료'로 해주던가? 사랑하고 좋아하는 일을 하니 자선사업한다는 셈치고 '저렴한 비용'을 청구하는 게 맞지 않느냐?"라는 어처구니 없는 말을 늘어놓는 뻔뻔한 사람들이 아직도 많기 때문이란다. 그런 식이면 직장인들은 죄다 '무료봉사'를 해야 하고, 저같은 놈들은 죄다 '꽁'으로 먹겠다는 심보 아니겠느냔 말이다. 나라사랑해서 나라 지키는 군인도 '무료봉사'해야 하고, 도둑 잡는 걸 너무 좋아해서 경찰도 '무료봉사'해야 하고, 불끄는 걸 너~무 좋아해서 하는 일이니 소방관도 목숨 걸고 화재 진압한 뒤에 '무료봉사'해야 하느냔 말이다. 그리고 저같은 놈들은 버스운전, 비행기운전을 너무 좋아하는 사람들 덕분에 '꽁으로' 버스 타고 비행기 타도 괜찮다는 심보 아니냔 말이다. 이런 놈들은 두 눈으로 안드로메다를 구경할 때까지 싸다구를 때려야 정신을...쿨럭쿨럭

 

  암튼, 이 책은 '수의사에 관한 모든 것'을 귀엽고 재밌는 교양툰으로 제작해서 누구라도 쉽게 읽고 궁금증을 풀어 낼 수 있는 유익한 책이라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다. 다시 말해, 수의사가 꿈인 친구들이 꼭 읽어야 할 책이고, 동물을 사랑하는 독자들이 꼭 읽으면 좋을 책이고, '수의사'라는 직업에 관해서 몹시 궁금해하는 분이라면 반드시 필독해야 하는 책이다. 그런 까닭에 이 책의 내용을 조목조목 설명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너무 쉽고 재밌기에 읽으면 바로 '수의사'에 관한 모든 것을 알고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이 책의 찐 가치는 '직업의 세계'를 낱낱이 파헤친 책이 왜 필요한지, 그 당위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면 그래야 이 책과 마찬가지로 더욱더 '다양한 직업'에 관한 교양툰이 나올 테니까 말이다.

 

  이쯤해서 '직업'이란 무엇인지 잠깐 짚고 넘어가겠다. 우리가 직업을 구해야 하는 까닭은 단연코 '돈'을 벌기 위해서다. 어엿한 성인이 되면 당근 '돈벌이' 정도는 스스로 해야 하니 더 이상의 설명은 사양하겠다. 그렇다면 돈을 벌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라도 해도 괜찮을까? 그건 아니다. 적어도 윤리적, 도덕적으로 부끄럽지 않을 일을 해야 하며, 당연히 '합법적'인 일을 해야만 한다. 그렇게 '합법적'이면서도 남을 돕고 사회에 보탬이 되는 '보람'찬 일을 한다면 좋은 직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돈도 벌고, 보람도 얻었다면, 목표를 세우고 달성하여 '자아실현'도 실천할 수 있는 직업을 선택하는 것도 바람직하다. 이렇게 직업을 구한다는 것은 [돈+보람+자아실현]의 삼박자가 어우려지면 더할 나위가 없다. 물론, 이 세 가지 가운데 한쪽으로 치중할 수도 있겠지만, 결국엔 후회없는 인생을 설계하기 위한 최적의 직업을 선택하려면 '세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지 점검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다시 '수의사'로 돌아와서 적용시켜보자. 수의사는 평균연봉 6천만 원 정도라고 하니 돈이 부족하다고 할 수는 없겠다. 또한, 생명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절실히 느끼고 병들어 고통받고 아픔 아이들을 최선의 노력으로 건강을 회복시켜주는 일을 하니 '수의사'로서 보람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거기다 어릴 적부터 동물을 사랑하고 애정을 쏟게 되었고, 그래서 '수의사'라는 목표를 세우고 어렵고 힘든 과정을 거쳐 어엿한 수의사로 사회에 나가 공헌을 하니 자신의 꿈을 실현시켰다고 할 수 있으니 '자아실현'을 완성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명성을 더해 명예를 드높일 수 있다면 금상첨화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하지만 수의사가 되어 영애로운 삶을 사는 것만은 절대 아니다. 세상의 모든 직업이 그러하듯 '장점'이 있으면 '단점'도 있기 마련이다. 그 가운데 수의사가 되어 가장 힘든 점은 우리 사회의 인식이 너무나도 천박하다는데 있다. 사람새끼를 살리는 의사나 개새끼를 살리는 의사나 똑같이 '생명을 구하는 일'인데, 생명에 귀천이 있다고 여겨 '수의사'를 낮잡아 보는 우리 사회의 시선이 너무나도 품위없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돈 몇 푼을 아끼기 위해 병든 강아지를 죽게 내버려두고 새 강아지를 사겠다는 '셈법'은 도대체 어떻게 할 수 있느냔 말이다. 망가진 장난감이라도 그 앞에선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이야기를 '하나뿐인 생명의 소중함'을 앞에 두고서 어찌 감히 할 소리냔 말이다.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나불거리면 안 된다고 했거늘... 더 어처구니 없는 일은 수의사를 앞에 두고서도 이런 몰지각한 말들을 나불대는 싸구려 주둥이를 나불나불...쿨럭쿨럭

 

  비단 수의사에게만 일어나는 천박함이 아니니 하는 말이다. 자기가 하는 일에 존중받고 싶거든 남이 하는 일을 하찮게 보아선 안 된다. '손님은 왕'이 아니라 '그냥 손님'일 뿐이다. 예의 없는 손님이라면 사형이 답이다. 사형이 너무 심한 처사라면 '종신형(완전한 격리)'으로 감형해도 좋다. 남을 존중할 줄 모르는 무뢰한에겐 극형도 아까울 뿐이고, 재산몰수형을 언도해 평생 구걸하고 빌어먹게 만들어야 정신을 차릴지도 모르겠다. 어따대고 예의를 밥말아드시는지..증말

 

  어쨌든 간에 '수의사 A to Z'에 충실한 교양툰이며, 동물애호가들에겐 '교양계발서'가 되겠고, 수의사가 꿈인 어린 친구들에겐 모든 궁금증을 속속 풀어줄 훌륭한 '교과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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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더클래식 세계문학 컬렉션 (한글판) 7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허승진 옮김 / 더클래식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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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전읽기의 참맛은 읽을 때마다 새롭고 다채로운 영감이 떠오른다는 점을 빼놓을 수 없다. 물론 고전을 처음 접할 때는 절대 느낄 수 없는 맛이지만, 누구라도 '읽고 해석하고 또 읽는' 지난한 과정을 거치고 나면 자연스레 터득할 수 있는 지혜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반짝 인기몰이를 한 뒤에 철저히 잊혀지고마는 '베스트셀러'보다는 오래도록 꾸준히 읽히는 '스테디셀러'가 더 끌린다. 그 가운데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비교적 짧은 이야기라 읽기에도 편하고, 사랑이야기라서 감상도 어렵지 않게 나눌 수 있어서 좋아하는 고전문학이다. 하지만 사랑하기에 자살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주인공을 두고서는 수많은 논란을 거듭해야 하므로 오랜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문제작'일 수밖에 없기도 하다.

 

  베르테르는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누구라도 로테를 보았다면 그녀보다 사랑스런 여자를 발견할 수 없었을 테니 말이다. 허나 로테는 모든 이들의 사랑을 받을 만큼 사랑스럽긴 하지만 아무나 사랑할 수는 없는 여자였다. 그녀에겐 이미 결혼을 약속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행운아는 알베르토라는 성실한 남자였다. 그녀에게 더할나위 없이 딱 맞는 젊은 신사였던 것이다. 베르테르는 그런 사실을 알고 난 뒤에도 그녀를 향한 사랑을 멈출 수가 없었다. 허나 딱 거기까지였다. 로테는 베르테르도 좋아했지만, 자신의 짝으로 알베르토를 이미 선택했고, 그 선택은 변함이 있을 수 없었다. 로테의 사랑은 알베르토였고, 알베르토 역시 로테를 사랑하는 이미 완벽한 짝꿍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베르테르는 그런 변함없는 사랑을 '확인'하고서도 사랑을 멈추지 못한다. 이렇게 사랑의 열병에 빠진 딱한 청년은 그녀를 잊기 위해 몸부림도 쳐보지만 베르테르의 사랑, 역시 진실된 것이었기에 변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결심한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빠졌다면 '죽음'으로 멈추게 하리라고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 소설이 '문제작'일 수밖에 없음을 알 수 있다. 사랑에 빠져본 이들은 공감할 것이다. 죽음보다 더 한 고통이 따른다하더라도 멈출 수 없는 것이 바로 '사랑'이라고 말이다. 그토록 아픈 사랑에 빠진 베르테르가 죽음을 선택한 것은 분명 어리석은 짓이긴 하지만 십분 공감하고도 남으리라는 것은 누구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이유로 선택한 죽음이 '자살'이라는 것에는 사회적으로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당시만해도 종교상의 이유로 '자살'은 금기시 되었을 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자살'하려는 이를 그대로 방치하면 '자살방조죄'가 성립해 법적인 책임이 뒤따르게 된다. 그러니 사랑에 빠졌다는 이유만으로 자살한다는 것은 쉬이 '공감'하기 힘든 대목이 분명하다.

 

  그런데도 베르테르의 죽음을 두고 많은 이들은 낭만적인 해석을 내놓는다. 죽음으로 베르테르의 사랑은 고결하고 완벽함을 증명한다면서 '사랑한다면 베르테르처럼'이라는 수식어를 남긴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 때문에 수많은 젊은이들이 베르테르를 모방해 짧디 짧게 생을 마감하는 현상이 붐처럼 일어났고, 이룰 수 없는 사랑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동반자살에 이르는 젊은 남녀를 두고 '베르테르 효과'라고 지칭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허나 죽음은 절대 '진정한 사랑의 고백'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룰 수 없는 사랑, 해서는 안 될 사랑이 곧 '숭고한 사랑'은 아니기 때문이다. 진정 아름다운 사랑은 '그 사랑'이 더욱 아름다울 수 있게 지켜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베르테르가 로테를 사랑하고, 그 사랑을 이룰 수 없는 슬픔 때문에 절망에 빠졌다고 하더라도 자살을 해서는 안 되었다. 그렇게 되면 남겨진 사람들, 특히, 로테의 마음이 결코 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또 다른 이름의 '상처'를 남긴 꼴이 되고, 그 상처 때문에 베르테르의 사랑은 완벽할 수도, 고결할 수도 없게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러니 베르테르는 자신만의 욕심으로 남을 배려하지 못한 '잘못된 선택'을 하고만 셈이다.

 

  그럼에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고전명작에 반열에 오른 까닭은 당시의 널리 퍼졌던 이성적인 '계몽주의'에 반기를 드는 '젊은이들의 열정'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기성세대들이 철옹성처럼 구축한 '합리주의'에 반하여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진솔한 것이라며 당시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오직 '이성'을 따르는 것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기성세대들의 갑갑한 사회적 풍습에 과감히 도전장을 내밀었던 것이다. 이것이 당시 독일사회에 열풍처럼 번졌던 '질풍노도'였던 것이다. 젊은이들은 이 소설을 읽으면서 '자신의 감정을 솔직담백하게 드러내는 베르테르'에게 열광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놓은 사회적 잣대가 반드시 옳은 것만은 결코 아니라는 퍼포먼스를 베르테르가 '자살'을 함으로써 확인시켜준 셈이다.

 

  이런 젊은이들의 용기 있는 행동은 오늘날에도 여전하다. 기성세대의 성공담이 젊은이들에게도 '성공의 지름길'을 보장해주면 좋겠지만, 세대가 바뀌면 '성공의 기준'도 함께 변하게 된다는 진리를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수없이 배웠기 때문이다. 물론 젊은세대들 앞에 놓인 여러 문제들도 시대가 변천하는 것만큼 변화무쌍한 모습을 보이기에 그에 맞는 해법을 쉬이 찾기 어렵다. 기성세대들도 모두가 성공한 것은 아니다. 그들도 젊은 시절에 '맨땅에 헤딩'을 하며 숱한 어려움을 겪었고 저마다 나름의 방법으로 산적한 문제들에 당당히 맞섰을 것이다. 그 가운데 몇몇 사례가 성공을 이루었고 숱한 실패와 좌절을 맞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니 기성세대들의 성공담이 언제나 '만능열쇠'가 되는 것도 아님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러니 현명한 기성세대들이라면 우리 젊은이들이 겪는 어려움과 고충을 이해하고 열띤 응원을 해주어야지 '어줍잖은 저들의 성공담'을 들먹이며 젊은이들을 조롱거리로 삼거나 나약하다며 우롱해서는 안 될 것이다.

 

  분명 '자살'은 권장사항이 될 수 없다. 또한 절대 '낭만'적이지도 않으며 고결하고 순수함과도 거리가 멀 수밖에 없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베르테르는 기성세대의 견고한 고지식함에 반기를 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자살'로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지만, 오늘날에는 그런 식으로 젊은 세대의 고충을 털어놓는다고 기성세대들이 꿈쩍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했으면 좋겠다. 오히려 젊은 세대들의 '불굴의 의지'만이 어리석은 기성세대에게 따끔한 일침을 놓을 유일한 해법일 것이다. 21세기 '베르테르 현상'은 나약한 젊음이 아닌 강인한 젊음을 통해서 사회변화를 유도하는 진정한 횃불이 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21세기 베르테르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하나뿐인 목숨'을 희생할 것이 아니라 '하나뿐인 인생'을 바람직하고 후회없이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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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운데이션 파운데이션 시리즈 Foundation Series 1
아이작 아시모프 지음, 김옥수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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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설하고, 우주 대서사시를 이야기해보련다. 광활한 우주를 배경으로 한 SF소설은 프랭크 허버트의 <듄>을 비롯해서 아서 클라크의 <스페이스 오디세이>, 그리고 아이작 아시모프의 <파운데이션>으로 정점을 찍었다. 물론, 개인적인 견해일 뿐이니 태클은 사양한다. 각각의 시리즈는 저마다 특색이 있으니, <파운데이션>만의 특별함을 언급하는 것이 이 소설을 이해하는데 더 효과적일 것으로 생각한다. 이야기의 시작은 바로 '제국의 멸망'이다.

 

  거대한 제국은 언제나 모든 것을 거느리는 '거대함, 그 자체'였지만 거대해진만큼 사소한 것까지 신경을 쓸 겨늘이 없어지게 되면서 서서히 쇠락해져가게 되었고, 결국엔 '멸망'에 이르게 될 운명에 처했다. 허나 등잔 밑이 어둡다고 제국의 한복판에서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런 조짐에 둔감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 '강렬한 경고음'을 낸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해리 샐던'이라는 심리역사학자다. 그는 꽤나 정확한 셈법으로 '제국의 멸망'을 미래예측하였고, 자신의 계산은 틀림이 없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안 그래도 망해가는 조짐을 보이는 제국은 '독재자'가 등장해 장기집권을 하며 나라꼴을 엉망으로 만들고 있었기에 '샐던의 지적'에 공감하는 사람들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허나 부패한 권력은 정당한 비판을 몹시 싫어하기 마련이라 '샐던의 무리들'은 점점 핍박을 받게 되고 정책적으로도 그들을 탄압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허나 그러면 그럴수록 '해리 샐던의 입지'는 더욱 공고해질 뿐이었다. 이에 제국의 법정은 샐던에게 '유죄'를 선포하고 추방령을 내린다. 그러나 그 '추방령'조차 샐던이 예측한 미래에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예정대로의 진행'일 뿐이었다.

 

  그렇게 제국의 변방, 금속자원조차 태부족해서 기초적인 생활필수품조차 머나먼 제국의 지원이 없으면 생존을 위협받게 되는 외딴 행성 터미너스에 '샐던의 무리들'은 정착하게 된다. 그리고 예정되었던대로 그들은 '백과사전편찬'을 숙원사업으로 삼고 그곳에서 정착해나간다. 그러던 먼 훗날, 예정대로 제국은 그 힘을 잃고 점점 쇠락해간다. 그러자 제구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외곽에서부터 독립적으로 힘을 키워가는 세력들이 생겨나게 되었는데, 그중 아나크레온 행성인들이 터미너스에 군대를 끌고 쳐들어오게 된다. 애초에 샐던이 추방되면서 '터미너스'는 제국의 보호를 받게끔 되어 있으나 제국의 힘이 미치지 못하니 변방의 반란군의 힘에 맞서 싸울 변변한 무기도 없이 외적을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터미너스에 찾아온 최초의 위기는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을까?

 

  이때 '해리 샐던'이 모습을 나타낸다. 이미 오래전에 죽은 이가 '영상'을 통해 터미너스에 닥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지혜를 보여준 것이다. 왜냐면 이런 위기조차 샐던이 예측한 미래에 다 나타났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터미너스 주민들이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에 아무런 대책도 없이 '백과사전'이나 편찬하던 외딴 행성이 생존할 수 있을지 의심하고 있을 때, 짠~하고 나타난 것이다. 이런 일은 이후에도 계속 반복하게 되며 이를 '샐던 위기'라 부르며 고비 때마다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적확하게 제시하게 된다. 아무튼, 터미너스가 맞이한 첫 번째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다름 아니라 '그들이 원하는 것을 퍼주어라'는 것이었다. 줄 것도 없는 외딴 행성에서 도대체 뭘 줘야 한단 말인가? 그건 의외지만 강력한 무기가 될 수도 있는 에너지원, 바로 '원자력'이었다.

 

  '원자력'은 애초에 제국의 것이었다. 제국은 '원자력의 힘'으로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고, 그 거대한 힘으로 은하계 전체를 거느렸던 것이다. 그래서 외딴 행성인데도 터미너스에는 소소하나마 아주 작은 '원자력'을 가동할 수 있었던 것이다. 허나 너무 작아서 큰 무기를 만들거나 운용할 수는 없었고, 그저 생활용품을 만들거나 소규모 공장을 돌릴 수 있을 정도로 작은 원자력이었다. 바로 이것을 아나크레온이 원하면 주라는 것이었다. 근데 우습게도 아나크레온에는 '원자력'을 다룰 기술력이 없어 터미너스에서 '기술자'까지 함께 제공(?)해야만 했다. 이렇게 아나크레온의 군대는 터미너스의 소소한 조공을 챙겨 돌아가게 되고 첫 번째 샐던 위기는 이렇게 일단락이 된다.

 

  하지만 위기는 끝나지 않았다. 제국이 멸망한 뒤에 '야만의 시대'가 찾아온다는 샐던의 예측이 현실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애초에 샐던은 이 야만의 시대가 무척이나 오래 지속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파운데이션(백과사전)'이 그 야만의 시대를 획기적으로 줄여 1000년이면 끝맺고 다시금 온 은하계에 문명을 건설하고 평화가 안착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래서 '파운데이션'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한 것이다. 허나 다른 사람들에겐 허무맹랑한 예언일 뿐이었다. 고작 백과사전편찬을 하면 야만의 시대가 비교적 짧게 지나갈 수 있다니 무슨 황당한 말이냐고 말이다. 하지만 샐던의 예언은 하나씩 차례대로 착착 맞아떨어지며 진행되고 있었다. 정작 '파운데이션'을 제작하는 터미너스의 주민들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그렇게 '파운데이션'은 몇 차례의 '샐던 위기'를 현명하게 극복해나가며 점차 많은 사람들이 '파운데이션의 위력'을 실감하게 된다. 그리고 파운데이션의 진정한 힘은 '백과사전, 그 자체'가 아니라는 것도 깨닫게 된다. 그 안에 담긴 '지식'이 힘의 근원이었고, 그 지식으로 펼쳐보이는 '사람의 힘'이 그 막강한 전력을 보여주었고, 끝으로 사람들의 마음속에 웅크리고 있는 '사랑의 힘'이 현현할 때, 그 어떠한 힘일지언정 그보다 더욱더 압도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그러한 '사랑의 힘'이 구현되기 위해서 겉으로는 맹목적인 믿음을 바탕으로 한 '종교의 힘'을 빌어야 했고, 탐욕스런 물욕이 내제된 '경제의 힘'으로 나타나기도 했지만, 그 어떤 힘이든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는 진정한 힘을 발휘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다.

 

  아시모프는 평생에 걸쳐 집필한 이 소설을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를 기초해서 써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모든 것을 예측한 기반도 '심리역사학'이 된 것이고, 역사는 반복된다는 격언에 따라 <파운데이션>에서 펼쳐지는 장엄한 이야기도 이러한 '반복되는 역사의 흐름'을 이해하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도 인간은 '역사'를 통해 배운 지식을 알고 있으면서도 '똑같은 실수'를 어처구니 없이 계속 반복하곤 한다. 폭력은 결코 현명한 해법이 아니고, 일을 해결하기는커녕 도리어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뿐이라는 사실을 명명백백하게 '기록'해놓았음에도, 그런 어리석음은 무한반복되기 일쑤니 말이다. 마치 인간은 '필멸이 필연'인 것처럼 우매한 행동을 영원히 반복할 뿐이다.

 

  이러한 '야만'을 종식시킬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아직까지는 '없는 것'이 기정사실인 듯 싶다. 20세기에 수많은 전쟁을 일삼으며 그 아픔과 슬픔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데, 21세기가 되어서도 그 아픔과 슬픔을 '나름의 방식으로 종식시키겠다'면서 또다시 전쟁을 일으키고 있으니 말이다. "이러다 다 죽어"라는 <오징어게임>의 명대사는 어차피 단 한 명만 남을 때까지 승부를 펼치는 참혹한 현장에선 공허한 외침이었을 뿐이다. 죽어가는 이들의 처절한 싸움을 지켜보며 희희낙락하는 '저들' 앞에선 말이다. '저들의 야만'을 멈출 수 없다면 전쟁은 어쩔 수 없이 '필연'이 되고 만다. 암튼, 소설로 돌아와서, 지난 100년 간 '샐던 위기' 때마다 슬기롭게 위기를 극복해낸 터미너스의 주민들은 과연 남은 900년도 슬기롭게 헤쳐나갈 수 있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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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목표한 리뷰가 150편인데..많이 부족하다

남은 달에 올인을 한 번 해보련다.

 

지난 달에 비해 달라진 점은 '오프라인 12%'가 순위에서 밀리고

'온라인 11%'가 순위에 진입한 것이다.

이건 그간 리뷰한 책 가운데

책구매 방식이 '오프라인'에 치중해 있다가

이번에 '온라인 구매'가 훨씬 더 많이 늘었다는 뜻이다.

아무래도 논술수업을 하다보니 대량구매를 했던 터라

조금이라도 비용을 줄이기 위해 발품을 팔았더랬었는데

이젠 논술수업을 하더라도 거의 '온라인'으로 소구매를 하니...쩝

 

그런 탓에 리뷰한 책들이 거의 대부분 '어린이책'이기도 하다.

그마저도 27%에서 26%로 하향하였다.

이런 경향은 점점 심해질 듯 싶다.

현재는 초등수업보다 중고등수업에 치중하고 있고,

아이들 책보다는 '내 취향의 책'들을 먼저 리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근래에는 새로 목표를 잡아

집에 쌓인 책들을 좀 섭렵해야겠다. 그럼 다시 어린이책 리뷰가 더 늘어날 듯도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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