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이 세상을 만날 때 스켑틱 SKEPTIC 31
스켑틱 협회 편집부 엮음 / 바다출판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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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DCCCXCVI / 바다출판사 13번째 리뷰] 2024년 대한민국 첫 노벨문학상 한강 작가의 수상에 앞서 2022년도에 수학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필즈상'을 수상한 한국인이 있었다. 바로 한국고등과학원(KIAS) 수학부 허준이 석학교수다. 물론 관심이 있는 분들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겠지만, 모르는 분들도 꽤나 많을 것이다. 더구나 '필즈상'이라는 이름조차 생소한 분들이 더 많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대한민국에는 '수포자(수학을 포기한 학생)'가 상당히 많을 정도로 수학에 도통 관심이 없는 분위기다. 심지어 수학공부는 '덧셈과 뺄셈'만 할 줄 알면 더 배울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상당히 많다는 사실이다. 이런 주장을 하시는 분들은 조금 더 양보를 해서 '구구단' 정도만 외우면 세상을 살면서 아무런 불편이 없고, '나눗셈'과 '분수'까지 통달하면 가히 천재의 반열에 올랐으니 복잡한 수학공식 따위로 위대한 천재가 될 위인들의 기를 죽이지 말라고 외칠 정도다.

이런 이야기가 '소수의견'으로 취급할 수 없는 것이 '수학공부'가 그만큼 어렵고 힘든 과정을 거쳐야만 하는 '고행의 길'이라는 점이기 때문이다. 수학을 포기하면 인생을 편하게 살 수 있는데 왜 힘든 길을 애써 제 발로 걸어가겠느냐는 푸념이라도 나올라치면 어느 정도 수긍이 가기도 한다. 그럼에도 수학공부는 꼭 필요하다. 모든 교과과정에서 '수학'은 가장 많은 수업시간을 배정하고 있고, 모든 시험에서도 '수학'은 높은 점수를 배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에 수학공부를 포기한다면 소위 '명문'이라고 불리는 곳에는 얼씬도 할 수가 없게 된다.

그럼 왜 많은 곳에서 공부의 끝판왕을 '수학'으로 삼은 것일까? 단지 어렵고 복잡하기 때문에 그걸 능숙하게 풀어낼 수 있는 실력을 갖췄다면 훌륭한 인재일 것이라 여기기 때문일까? 아주 틀린 얘기도 아니지만, 꼭 훌륭한 인재를 골라내기 위해서만 '수학공부'를 중시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평범한 일상생활에서 '수학'은 더 많이 필요한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강조하는 것이다. 단지 그렇게 널리 쓰이고 있는 '수학'을 보통은 컴퓨터가 대신 계산해주고 있기 때문에 '수학의 필요성'을 그닥 느끼지 못하고 있는 점이 함정인 것이다. 여기서 또 '수학공부'를 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은 반색을 하게 된다. 아니 '컴퓨터'가 자동으로 계산해주는 편리한 세상인데, 왜 인간이 힘들게 공부를 해야 하느냐고 말이다.

그런 여러 가지 이유가 궁금해서 이 책을 들춰보았지만, 내가 원하는 답은 없었다. 아니, 너무 자세한 설명이 장황할 정도로 나열되었고, 꼼꼼히 읽어보니 대부분 수긍이 가는 이야기이긴 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답은 아니었다. 왜냐면 나는 '초등학생'도 단박에 이해할 수 있는 답을 원했기 때문이다. 왜 힘든 수학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지 초등학생이 듣고 바로 이해할 수 있다면 어찌 '수포자'가 생기겠느냔 말이다. 그런데 수학이 어려운 학문인 만큼이나 수학에 관한 에피소드도 어렵긴 마찬가지였다. 이래선 '수포자'만 더 양성할 뿐이다.

그렇다면 정녕 '수학공부'가 꼭 필요한 가장 쉬운 답변은 없는 것일까? 그 답변에 앞서 '수학의 필요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왜냐면 수학이 꼭 필요한 학문이라는 전제를 밑바탕에 깔아놓으면 '수학공부' 또한 살짝 어렵더라도 반드시 해야만 하는 학문이라는 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 우리에게 '수학공부'가 필요한 까닭은 무엇일까? 그건 다름 아니라 '논리적 사고력'을 배울 수 있는 유일한 학문이기 때문이다. 논리적 사고력이란 말이 어렵다면 '추론능력'이라고 이해해도 좋다. 마치 '추리소설' 속 명탐정이 범인이 남겨 놓은 여러 단서를 종합해서 "범인은 바로 당신이야!!"라고 지목하는 것처럼 '논리적 사고력'을 기르게 되면 모든 학문의 기초가 되는 것은 물론, 일상 생활속에서도 복잡한 문제에 봉착해도 척 보고 해결방법을 착 제시할 수 있는 통찰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덧붙이자면 수학공부를 통해서 '논리적 사고력'을 기르면 단순히 수학공부만 잘 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공부도 덩달아서 능력이 향상되는 효과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른 공부를 하면서 '논리적 사고력'을 배워서 거꾸로 '수학공부'를 잘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수년 간 아이들을 가르쳐본 결과, '수학공부'를 열심히 해서 '다른 공부'도 향상되는 경우는 많이 봤지만, '다른 공부'를 열심히 해서 '수학공부'의 결과가 오른 경우는 흔치 않았다. 그건 바로 '논리적 사고력'은 바로 정답이 명확한 공부에 집중할 때 발휘되기 때문이다. 정답이 불명확한 공부는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될 수도 있기 때문에 '비논리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초등생의 경우 '논리적 사고력'을 중점적으로 기르기 위해서는 수학공부가 제격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문제는 남는다. 우리 나라의 수학공부가 대개는 '단순연산 반복학습'에 치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반복학습이 초등생의 창의력을 감소시키고, '수학공식'을 단순암기하여 문제풀이만 능숙하게 만드는 학습법도 마찬가지로 '수학원리'를 이해하기보다는 '공식대입'만을 능숙하게 만들 뿐인데, 이게 어찌 '논리적 사고력'을 길러줄 수 있느냐는 비판이다. 맞는 말이다. 그런 '단순 반복학습'으론 결코 논리적 사고력을 키울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수학공부를 시켜야 한단 말인가? 기초가 부족한 학생이라면 '단순한 공식'에 숨겨져 있는 수학의 원리를 재미난 이야기형식(스토리텔링)으로 풀어서 설명하는 방식이 도움이 될 것이다. 이를 통해 '간단한 공식'일지라도 이러한 '논리사고' 과정을 거쳐서 수학공식으로 만들어져 일상생활에 편리하게 쓰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기초가 어느 정도 다져진 학생이라면 '반복 학습'이 어느 정도는 필요하다. 다시 말해, 이럴 땐 '이 공식', 저럴 땐 '저 공식'을 써야 편리하고 효과적으로 수학문제를 풀 수 있다는 '안목'을 길러야 하기 때문이다. 어떤 공부를 하던 문제를 풀어낼 수 있는 열쇠를 찾아내는 '안목'을 길러주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수학도 마찬가지다. 여러 공식 가운데 어떤 공식을 써야 보다 쉽게 문제를 풀어낼 수 있는지 '반복 학습'으로 실력을 다져나가는 학습법이 필요하다. 좀더 심화 학습이 가능하다면 '풀이 공식'에 관한 귀띔을 전혀 주지 않은 상태에서 문제를 스스로 풀어내는 학습법을 집중적으로 관리해야 한다. 아직 이 방법이 익숙하지 않아 막연하고 꽉 막힌 단계에 처한 학생이라면 '풀이에 도움이 되는 공식 몇 가지'를 보기로 주어 살짝 귀띔을 해주는 것만으로도 족할 것이다. 나머지는 '논리적 사고력'이 해결해줄 것이다.

공부 자신감이 생긴 초등생은 중등부터 '자기주도학습'이 가능해진다. 수학공부를 터득하는 순간 다른 과목의 학습법도 저절로 향상된다. 공부방법을 터득했기 때문이다. 이렇게나 유익한 학습법이 바로 '수학공부'다. 가히 모든 학문의 기초가 '수학'이라고해도 과언은 아닌 셈이다. 그럼 이 책에서 말하는 '수학자의 생각법'도 어렵게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특히, 수학자들의 언어라고도 불리는 '수리논리학' 또는 '기호논리학'에 접근하는 것도 가능해진다. 여기까지 이해할 수 있다면 전세계 수학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게 된다. 수학언어는 전세계 공통이기 때문에 만나는 즉시 친구가 된다고 한다. 각 나라의 언어는 다를지언정 '수학'은 한 가지 언어밖에 없기 때문이다. 

수학자의 생각법은 그동안 수학자들의 골머리를 썩게 만들었던 '난제'를 푸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오히려 복잡한 세상을 아주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수학자'들은 고심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미분과 적분은 수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을 괴롭히기 위해서 만든 것이 아니라 '한 점에서의 기울기'를 파악하고, '비정형의 넓이'를 효과적으로 구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기 위해서 고안된 것이다. 언뜻 보면 말도 안 되는 것이다. '점'은 길이도 넓이도 없는데 어떻게 기울기를 구할 수 있고, 세모, 네모, 동그라미도 아닌 불특정한 모양의 넓이를 무슨 수로 구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수학자는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로 풀어냈다. 그리고 이 방법을 통해서 '그래픽'를 향상시킬 수 있게 되었고, 화려한 영상을 자랑하는 영화제작기술 등으로 응용되어서 재미난 영화를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수학자의 생각법이 없었다면 현재 우리가 누리고 있는 편리함과 유용함은 결코 실현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처럼 수학은 우리 생활에 꼭 필요하다. 그런데도 우리가 수학에 관심을 가지지 않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모든 학문은 발전을 할 수 없을 것이고, 일상은 점점 불편해지게 될 것이다. 그래도 복잡한 건 딱 질색이니 '똑똑한 사람'에게만 맡겨두면 될 일이라고? 그것도 좋은 방법이긴 한다. 그 똑똑한 사람이 착하면 문제가 없겠지만, 나쁜 사람이 '수학'을 독점하는 일이 발생한다면 어떻게 될까? 21세기는 '돈'이 곧 '권력'인 세상이다. 그런데 세계 경제는 곧 '수학'으로 핑핑 돌아가고 있다. 그 중요한 것을 독점한 나쁜 사람이 세상을 뒤흔들면 어찌 할 것인가?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모두가 수학천재이어야 할 필요는 없겠지만, '수학언어'와 '수학자의 생각법'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상식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상식이 통용될 때, 비로소 수학은 우리 일상을 편리하게 해주는 훌륭한..아니 얌전한 도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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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음모론은 사라지지 않는가 스켑틱 SKEPTIC 22
스켑틱 협회 편집부 엮음 / 바다출판사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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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EPTIC Korea (계간) : 22호_왜 음모론은 사라지지 않는가> 스캡틱 협회 / 바다출판사 (2020)

[My Review MDCCCXCV / 바다출판사 12번째 리뷰] 대한민국 사회에 '음모론'이 다시 판을 치고 있다. 아니 '탄핵정국'을 맞아 일련의 음모론이 다시 활성화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번의 활성화는 그 주역이 '현직 대통령'이기에 더욱 심각하다고 여겨진다. 그래서 '음모론'이란 과연 무엇이고, 사람들은 왜 '음모론'에 쉽게 빠져드는지 탐사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더 자세한 내용은 이 책에 쓰여져 있으니 참고하시고, 나는 현 상황에서 '음모론'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지에 대해서 논해보고자 한다.

2024년 12월 3일 밤 10시 30분 경에 대한민국 대통령 윤석열은 '비상계엄선포'를 하였다. 그런데 이 선포에 이상한 점이 눈에 띤다. '반국가단체'가 국회에서 선동을 하니 신속한 조치를 한다면서 대한민국 현직 국회의원들 다수를 체포하고, 일체의 '정치활동'을 불허한다고 했다. 또한 '부정선거'가 의심 되니 선거관리실의 서버를 장악하여 관련 의문을 전부 밝혀내겠다고도 했다. 그밖에도 여러 가지를 선포했지만 '음모론'에 관련된 것은 이 두 가지로 집중해서 볼 수 있겠다.

어처구니 없는 것은 전국민이 다 알고 있는 '음모론'인데, 이를 대통령의 입을 통해서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도 '비상계엄'을 통해서 말이다. 아니 '음모론'은 음모론으로 끝나야지 그걸 '기정사실'로 삼아서 반국가단체가 대한민국의 안전을 위협하고, 지난 선거에서 부정이 일어난 게 확실하니 현직 국회의원들을 신뢰할 수 없다는 논리는 도대체 무슨 시츄에이션이냔 말이다. 과거 한나라당에서 저지른 '총풍사건'과 부정선거 의혹들을 제기하며 자신들 정당의 유불리를 따지던 모습이 오버랩되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암튼, 중요한 것은 '음모론'이 진실이냐? 거짓이냐? 를 따지는 것 자체가 우습다는 얘기다. 왜냐면 음모론을 믿는 대다수의 사람들의 심리는 "음모론이 진실이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내가 믿고 싶은 내용이기 때문에 음모론을 믿는다"는 쪽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를 음모론 전문가들은 '사람들의 심리경향은 믿고 싶은 쪽(확증편향)을 믿는 것이 덜 고통스럽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단다. 다시 말해, 아무리 증거가 넘쳐나도 '믿고 싶은 증거'만 선별해서 믿기 때문에 음모론에 점점 더 빠져든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음모론을 한 나라의 최고통수권자가 믿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현재의 대한민국이 아주 잘 보여주고 있다는 얘기다.

이걸 우리는 어찌 대처해야 하는가? 설마 대통령이 바보 멍청이가 아니라면 절대 일어날리가 없다고 믿었던 사태가 벌어졌으니 말이다. 음모론에 빠진 최고권위자의 이야기는 제2차 세계대전의 원흉 '아돌프 히틀러'에서도 찾아 볼 수도 있다. 그가 썼던 <나의 투쟁>이라는 책이 바로 그런 음모론을 바탕으로 쓰여진 책이기 때문이다. 그는 당시의 독일이 패배감과 자괴감에 빠진 탓을 인종의 쓰레기 '유대인'들 때문이라고 교묘하게 둘러댔다. 그러면서 위대한 독일인(아리아인)이 '인종청소(홀로코스트)'를 단행하면 자연스럽게 독일이 세계를 지배할 수 있다고, 그것은 명백한 독일의 운명이라고 외쳐댔다. 그 결과, 대다수의 독일인들은 히틀러가 마련한 망상에 취해 끔찍한 짓을 서슴없이 저질렀다. 지금 윤석열이 저지른 행태는 바로 이런 역사적 과오를 점철하려는 시도가 아니라고 절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더 끔찍한 것은 우리 나라에서 오래도록 해결하지 못한 '선거부정 음모론'을 대통령이 직접 걸고 넘겼다는 점이다. 이를 통해서 '음모론'에 불과했던 선거부정을 기정사실화하려는 아주 나쁜 선례를 남겼다. 이를 통해 대한민국의 선거판은 요동을 치게 될 것이다. 앞으로 치뤄질 선거의 공정성을 아주 크게 훼손했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 나라 선거의 역사에서 '정당의 유불리'를 따지던 음모론을 넘어서 '대통령 선거', '지지율 여론조사' 등등에 끝없는 공정성 시비를 불러 일으키게 될 것이다. 그러면 진짜 '선거부정의 근거'가 나온 적이 있느냐? 안타깝게도 '부정의 근거'는 단 한 번도 나온 적이 없다. 역대 정권에서 선거부정이 나올 때마다 일일이 투표함을 열고 개검표까지 해봤지만, 선거결과를 뒤집은 적이 몇 차례 있기는 했어도 '선거부정의 확실한 근거'는 샅샅이 조사해도 찾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데도 대한민국 정치판에서 '선거부정 의혹'은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이는 우리 정치의 신뢰도가 형편없을 정도로 낮다는 것을 증명하는 셈이다. 그래서 '선거부정 음모론'은 끊임없이 재생산 된다. 그걸 현직 대통령이 자신에게 쏟아지는 정치공세를 피해보겠다고 '히든카드'로 써먹었으니 이제 대한민국 정치판은 더욱더 수준 낮게 놀아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하긴, '음모론'만 탓할 것이 아니다. 그에 못지 않은 '가짜뉴스'도 엄청 불티나게 소비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음모론의 최종소비자는 '특정인'이 아니다. 흔히 얘기하는 극우나 극좌 유튜버들이 문제라고 말하긴 하지만, '음모론'을 소비하는 사람들은 불특정다수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했던 '믿고 싶은대로 믿으면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다. 음모론이 재생산되고 빠른 속도로 널리 퍼지는 까닭도 바로 이런 '믿으면 편해요'라는 논리로 설명할 수 있다. 이런 음모론, 또는 가짜뉴스가 얼마나 유행하고 있는지 가늠할 수 있는 척도는 바로 '팩트체크'를 얼마나 많이 하고 있느냐로 알 수 있다. 어느 새, 우리는 거의 모든 뉴스에 '팩트체크'를 하고 있지 않느냔 말이다. 이는 전적으로 '신뢰도'의 문제다. 한마디로 '객관적이고 확실한 증거가 없으면 못 믿겠다'는 심보다. 여기에 음모론자들은 '그런 객관적이고 확실한 증거가 있어도 못 믿겠다. 나는 누가 뭐래도 믿고 싶은 것만 믿을 거다'라는 심보가 바로 음모론과 가짜뉴스의 핵심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음모론'에 휘말려서 허둥거리기만 해야 하는가? 어렵게 쌓은 대한민국의 국격을 이렇게 하루 아침에 나락으로 떨어뜨려도 괜찮냔 말이다. 방법은 있다. 음모론이든, 가짜뉴스든, 믿든지 말든지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믿은 뒤에 벌어질 '결과'다. 만약 그 결과가 '좋다'면 뭘 믿든 뭔 상관이란 말이냐. 그러나 그 결과가 심각할 정도로 큰 피해를 준다면, 그 믿음을 철회하는 것이 현명한 처사다. 히틀러의 예를 굳이 들 필요가 있을까? 음모론에 심취한 히틀러의 말로가 어땠는지 궁금하다면 '검색'을 해보시라. 그리고 그런 히틀러의 음모론에 휘둘린 선량한 독일국민들이 어떤 일을 당했는지도 함께 검색해보라.

대한민국의 현재는 매우 위중한 상태다. 이대로 전쟁이나 경제적 급변사태가 벌어지게 되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대한민국 국민들이 당하게 된다. 그때 가서 '음모론' 따위의 진실공방이 무슨 소용이냔 말인가. 중요한 것은 '음모론'을 믿던 말던 대한민국을 '정상화'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제발 '음모론' 따위에 휘둘리지 말라.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무엇이 최선인지 절대다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설령 그 절대다수의 목소리가 맘에 들지 않아도 일단 따라야 한다. 그 '절대다수의 목소리'가 히틀러의 망상추종자의 목소리라면 어쩌려고 그러느냐는 걱정은 하지 말아라. 현재는 '팩트체크'가 바로바로 가능한 시대다. 나의 믿음은 틀릴 수 있어도 '절대다수의 목소리'는 그런 검증을 이미 통과한 믿을만한 목소리이니 따라도 무방하다. 21세기 음모론의 특징은 결코 '절대다수'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윤석열 내란수괴와 내란동조범의 숫자가 극히 적은 것도 바로 그런 까닭이다. 그 절대다수라는 조사결과조차 '거짓선동'된 가짜뉴스라면 어쩌냐고? 그것조차 가짜뉴스로 믿는 당신이 바로 '음모론'을 정말 좋아하는 확증편향적인 '믿으면 편해요'를 맹신하고 있는 음모론자라는 사실을 명심하라. 잘못을 믿으면 모두가 망하는 길밖에 없다. 제발 선동 당하지 말길 바란다. 진짜 착한 사람은 "나조차 믿지 마세요. 모든 걸 의심해야 진실이 보여요. 나에게 후원금이나 좋아요, 구독꾹 따위도 하지 마세요. 그걸 구걸하는 사람들이 바로 당신을 망치는 음모론자들이랍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 반대면 바로 삭제해도 무방하다. 당신의 소중한 것을 앗아갈 나쁜 음모론자임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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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과 선생님이 뽑은 채만식 탁류 북앤북 논술문학 읽기 2
채만식 지음 / 북앤북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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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DCCCXCIV / 북앤북 1번째 리뷰] 학창시절 <레디메이드 인생>가 실린 국어교과서로 만난 채만식은 일제식민시대에 투철한 사회의식을 갖춘 사실주의 작가로 달달 외웠다. 그의 사진으로 실린 모습에서는 활짝 웃고 있는 모습에 선한 인상마저 받았다. 하지만 그는 '변절한 지식인'으로 친일명단에 올랐고, "조선의 젊은이들이여, 일제가 일으킨 전쟁이 나가라"라는 증거는 글로 명백히 남아 있다. 일제식민시대의 부조리와 모순을 고발하던 그가 이런 글을 남긴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이런 민족을 배반한 변절자의 작품을 우리 학생들이 배우는 것이 바람직한 일인지 의심이 들고, 이에 대한 변명이라도 듣고 싶지만, 채만식은 해방 이후 <민족의 죄인>이라는 작품으로 사죄를 대신하고서 더는 말이 없다가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그해에 폐결핵으로 숨을 거두었다. 이제 남은 숙제는 그의 작품을 읽고 직접 판단하는 일만 남은 셈이다. 그는 정녕 '변절자', 그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일까? 그나마 해방 이후 변절한 친일지식인들 가운데 유일하게 사죄를 밝힌 유일한 지식인이라는 점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작가는 '작품'으로 말한다고들 하지만, 잘못에 대한 반성은 직접적인 사죄가 아니면 용서할 수 없는 범죄라는 점에서 생각해보면, 채만식만큼 솔직한 인사도 없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이제 다시 그의 작품을 읽어본다.

소설 <탁류>는 100년 남짓한 시간이 지금도 읽기에 부족한 점이 없는 탄탄한 플롯을 지녔다. 비록 시간적 배경이 100여 년 전이라서 매우 낯설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아리따운 미모의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는 것이 확인되는 2장부터는 술술 읽히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녀의 삶은 녹록치 않다. 첫째는 투전판에서 돈을 다 잃고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람이 그녀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경제적으로 무능력한 아버지의 강압에 못이겨 '돈 많은 남자'를 남편으로 맞이하지만, 그 남편이라는 작자는 타락한 호색한으로 유부녀와 바람이 났다가 현장에서 죽임을 당하고 만다. 그렇게 남편을 잃어버린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운 미모를 간직하고 있었고, 남편이 죽자 곱사등이에 병신 같은 놈팽이에게 그만 강간을 당하고 만다. 그렇게 의지할 곳 없어 방황하던 차에 오래전부터 그녀의 미모를 탐내던 아버지의 친구에게 넘어가 몸을 의탁하게 된다. 하지만 평온할 틈도 없이 그녀 앞에 강간범이 다시 나타나자 아버지의 친구는 그녀를 더럽다며 버려버리고 만다. 그렇게 그녀는 아름다운 미모로 강간범과 함께 살게 되지만, 몸이 병신이 아니라 정신마저 병신 같던 강간범과는 더는 하루도 같이 살 수 없는 절박한 처지에 빠지자, 그만 살인을 저지르고 만다. 그녀가 바라는 것은 그저 '딸아이 하나' 잘 키우는 환경일 뿐인데 말이다. 그런 딸을 위한 마음에 "죽자구 해도 죽을 수 없구...살자구 해도 살 수가 없다"고 외친다. 한 여인의 운명이 왜 이리도 기구한 것일까?

기구한 운명의 여인은 '초봉이'라는 이름을 가졌다. 그녀의 삶을 이처럼 기구하게 만든 원인은 '미모' 때문이었을까? 하긴 그녀가 예쁘지 않았다면 그녀의 주변에 이처럼 남자가 들끓지도 않았을 것이고, 조금 못나더라도 순박한 사내를 만나 평온하게 살아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가난' 때문이었을까? 그녀의 아버지가 투기꾼이 아니라 제대로 된 가장이었다면 그녀를 단지 '돈만 많은 남자'에게 시집을 가라고 강압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초봉이가 남몰래 좋아했던 의사 조수였던 사내와 알콩달콩 살림을 차리고 넉넉하지는 않지만 행복한 가정을 꾸려나갔을지도 모른다. 만약 불행의 원인이 '미모'라면 개인의 문제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가난'이라면 사회의 부조리가 한몫을 했을 것이다. 물론 '미모'가 원인이었더라도 예쁜 여자를 가만 냅두지 않는 '여성 인권'을 철저히 무시한 처사이니, 그 또한 사회적 문제로 지적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대적 정황을 살펴보면 일제식민시대가 조성한 '사회문제'가 한 개인의 운명까지 기구하게 만들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만약 일제가 조선을 식민통치함에 있어 매우 합당하고 합리적으로 지배했더라면 당시 사회분위기가 그리 엉망진창일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통치질서가 너무나도 무참했기에 사회조차 혼탁한 '탁류,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 책의 제목이 '탁류'인 까닭도 바로 초봉이의 삶을 기구하게 만든 원인이 어지러운 사회속에서는 평범한 이들도 그 혼탁한 구렁텅이속에서 타락할 수밖에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대한민국에서 '초봉이' 같은 여인은 어떤 삶을 살게 될까? 순박하고 청소한 외모의 스물한 살의 여자라면 필시 '대학생'일 것이다. 여대생이란 표현을 피한 까닭은 현재의 대한민국이 '여성의 인권'을 존중하는 상식적인 사회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아리따운 외모에 더불어 재능까지 겸했다면 아이돌로 데뷔하여 인기정상의 엔터테인먼트로 활약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해서 우리 사회 역시 이 아리따운 여성을 가만 냅두지 않을 것이다. 그 시절보단 나은 편이긴 하지만 아직도 우리 주변에는 '못난 남자들'이 정말 많기 때문이다. 착한 남자도 분명 많지만, 그에 못지 않게 나쁜 남자와 이상한(?) 남자들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이런 지뢰밭을 미모의 여성 혼자 헤쳐나가기란 정말 힘들 정도로 말이다. 그래서 현재의 대한민국도 여전히 '탁류'인 것은 매한가지다.

그럼 이처럼 '혼탁한 사회'를 졸졸졸 흘려보내고 맑고 깨끗한 '청류'가 흐르게 만들기 위해선 무엇을 먼저 해야 할까? 이런 질문을 민족배반자에게 묻는 것이 큰 실례가 되는 것은 아닐지도 의문이고 말이다. 하지만 이 작품도 그렇고, <태평천하>도 그렇고, 그가 쓴 대부분의 작품에서 비치는 '일제시대'는 하나같이 정상적인 것이 없다. 그런 비정상적인 세상에 가없는 비판을 쏟아낸 것이 바로 채만식이었다. 만약 그가 30년대, 40년대의 좌절을 겪지 않았다면 쉽사리 체념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허나 그는 희망의 끈을 놓아버렸다. 아주 큰 희망을 품었음에도 끝내 그 희망을 달성하지도 못한채 그만 포기하고 말았다. 그 때문에 <민족의 죄인>이란 마지막 작품을 반성하며 써내려갔는지 모른다. 다른 변절자들은 그조차도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순박함'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순박함이 해방 직후에 벌어진 '또 다른 탁류' 앞에서 또 한 번 좌절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짧은 수명을 한탄하지는 않았을까?

암튼, 탁류를 청류로 바꿀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다.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법치주의니, 합리주의니, 공리주의니, 어떤 것이든 좋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것이 최선이다. 죄가 있다면 그 죄를 달게 받는 사람을 존중하는 사회도 정의로운 사회의 모습일 것이다. 더 많은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서 각자의 몫으로 주어진 행복을 조금씩 나눌 줄 아는 사회일 것이고, 그렇게 희생한 소수에게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고 존중해주는 문화를 만들어나가는 것이 '청류'로 바뀌어진 사회의 모습일 것이다. 고용주는 노동자를 위해 아낌없는 투자를 하고, 노동자는 그런 고용주를 위해 부지런히 일하는 사회,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사회적 약자'의 고충을 빈틈없이 살펴보고, 우리가 걷어서 낸 세금이 필요한 곳에 적절히 쓰여지는 공공성과 투명성이 확보한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도 그런 청류의 일부일 것이다. 어쩌면 청류란 바둑에서 말하는 '완생'의 개념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좁은 바둑판에서는 '미생'에서 '완생'으로 거듭나는 신의 한수가 존재하지만, 이 넓은 세상에서는 결코 '완생'을 확신할 수 없어 모두가 '미생'으로 남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결코 '청류'에서 살 수 없어 '탁류'에 머물고 있지만 끝없이 '청류'를 추구하는 시지프스의 운명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허나 어찌 시지프스가 불행하기만 할까? 건강을 위해서 헬스장 런닝머신에 올라 끝없는 제자리뜀을 하고 있지 않은 것이 현대의 시지프스 아니겠는가. 그 런닝머신 위의 모습이 현재는 똥배가 출렁거릴지라도 언젠간 '식스팩'이 될 것이란 희망을 품고 날마다 뛰고 있는 모습이 진정 멋진 모습은 아닐런지...

뭔가 장황한 마무리지만, 과거의 초봉이는 꿈꿀 수 없었던 현실을, 현재의 초봉이는 꿈꿀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넋두리를 읊어보았다. 더불어서 과거의 채만식은 좌절했지만, 현재의 대한민국을 살고 있었더라면 좌절을 넘어 '한류열풍'의 파도를 타고서 세계적인 작가로 거듭나지 않았을까 상상해보았다. 그러지 못한 그 당시의 비극적 운명이 참으로 안타깝다는 생각과 함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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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과 편견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81
제인 오스틴 지음, 박용수 옮김 / 문예출판사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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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DCCCXCIII / 문예출판사 8번째 리뷰] <오만과 편견>은 '가벼운 연애소설(칙릿, Chick Lit)'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앞서 마크 트웨인을 언급했지만, 그가 이 책을 비난한 까닭도 바로 그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작가는 '사회고발의 선구자'가 되어야 하는 듯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만과 편견>을 쓴 제인 오스틴은 정말 '사회고발'과 같은 문제를 제시하지 않았을까? 이 소설의 주된 줄거리가 '베넷가의 딸들'이 각각 결혼할 남성을 사냥(?)하듯 무도회에 참석하는 장면이라는 점에서 가벼운 연애 소설이라고 확신할 수도 있을 것이다. 더구나 그 딸들의 어머니가 '돈 많은 남성들'을 자기 집에 초대하지 않는 남편을 향해 넋두리를 하는 장면을 보면 마크 트웨인이 왜 이 소설을 맹비난했는지도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작가인 제인 오스틴도 책 첫머리에 [이 소설은 괜찮은 신랑감을 찾기 위한 여정임을 밝힌다]라고 썼다. 그래서 이 소설을 '가벼운 연애 소설'이라고 불러도 딱히 변명할 거리가 없을 것이다.

허나, 18세기 당시 영국사회에서 '한정상속법'이라는 것이 있었음을 간과한다면 이 책은 그저 그렇고 그런 '연애 소설'로밖에 볼 수 없지만, 당시 여성이 사회활동을 할 수 없고, 유일한 '수입원'은 부모의 상속이나 남편의 수입이 전부였다는 '경제적 예속 상태'에 묶여 있었던 것을 인식하는 순간, 이 소설은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사회고발성 문제작'으로 읽을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런 경제적 예속상태에 묶여 있는 여성이 '어떻게' 돈 많은 남성과의 결혼을 거절할 수 있었겠느냔 말이다. 그런데 이 소설의 주인공 '엘리자베스 베넷'은 당시 최고 갑부의 청혼을 당당히 거절하고 만다. 이는 엘리자베스가 넝쿨째 굴러온 복을 걷어찬 격이지만, '사랑'이 없는 '돈'만 보고 결혼한다면 자기 자신에 대한 모욕으로 여기는 자유롭고 주체적인 영혼의 소유자 임을 포기하는 처사라고 당당히 밝힌다. 이런 여성을 두고서 마크 트웨인은 어찌 비난을 앞세웠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가 입버릇처럼 말했듯이, 그는 이 책을 끝까지 읽지도 않고서 책의 앞부분 몇 장만 읽고서 험한 말을 지껄임 셈이다.

18세기에는 영국을 비롯해서 전세계 여성들이 '경제적 독립'을 선언할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다. 수많은 여성들은 태어나서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결혼해서는 남편의 이름으로, 늙어서는 아들의 이름으로 '대신'하여 불릴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말해, '이름'조차 갖지 못하고, 혹여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누구의 딸', '누구의 아내', 그리고 '누구의 엄마'로 불리는 것이 다반사였다. 이에 대해 여성들은 별다른 반박조차 할 수 없었다. 왜냐면 '남자의 경제적 위치'에 예속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여성들이 '경제적 독립'을 선언하기 위해선 엄청난 비난도 감수해야만 했다. 그런데 당시 영국은 여성에 대한 또 하나의 굴레가 있었다. 바로 '한정 상속법'이라는 독소 조항이었다. 이 법은 아버지의 재산이 아무리 많더라도 그의 죽음으로 인한 상속 권한은 오직 '장자'에게만 있다는 것이다. 딸 자식에게는 한 푼도 주지 않는다. 심지어 아내마저도 상속 권한이 없다. 첫째 아들에게 넘겨진 재산상속으로 집안의 여성은 '빌붙어' 살아야만 하는 처지다. 만약 베넷 가문처럼 '아들'이 없는 경우에는 어찌 될까? 그렇다면 가장 가까운 친척 가운데 선별된 '남성'에게 상속 권한이 넘어가게 된다. 심지어 생판 모르는 남성일지라도 법이 그러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에서는 '콜린스'가 그렇게 등장하게 되었고, 베넷 가문의 다섯딸 가운데 한 명이 그와 결혼하지 않는다면, 베넷씨가 사망했을 때, 그가 가진 재산은 몽땅 콜린스에게 넘어가게 된다. 그리고 생판 모르는 베넷 부인과 그녀의 다섯딸은 졸지에 살던 집에서조차 한 푼도 건질 것 없이 쫓겨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런 판국인데, 베넷 부인이 자신의 딸들에게 '돈 많은 남성'과 결혼을 서두르는 것이 볼썽사나운 모습이랄 수 비난할 수 있겠는가.

이런 설정속에서도 제인 오스틴은 엘리자베스 베넷을 빗어낸 것이다. 결혼으로 시작해서 결혼으로 끝나는 이야기속에서 말이다. 그럼 엘리자베스 베넷이 가장 원하는 신랑감은 어떤 조건을 갖춰야 했을까? 첫째로는 '오만'하지 않아야 했다. 엘리자베스는 다시와의 첫 만남에서 단단히 오해를 한다. 그의 첫 인상이 굉장히 '오만'했다고 평가를 내린 것이다. 그 까닭은 바로 무도회장에서 춤을 출 수 있는 남성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인데도, 다시가 고작 두 번의 춤밖에 추지 않고 많은 여성들이 누려야 할 기쁨을 단칼에 박살냈던 무뢰한이라고 단정한 것이다. 오늘날에서는 그러거나 말거나 '개인의 취향'이고, '존중받아 마땅한 자유'였겠지만, 당시 여성들에겐 유일하게 허락된 사회활동 중 하나인 '무도회'에 참석한 남성의 의무를 방기한 모습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춤추지 않을 바에는 참석하지 말았어야 하고, 참석했다면 넓은 아량을 베풀어서 여성들을 '기쁨'을 충족시켜주는 의무를 다했어야 했는데, 다시는 그런 남성이 아니었다고 비판한 셈이다. 하지만 이는 엘리자베스의 '편견'이었다. 다시에게는 나름의 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 사정이란 것이 남들에게는 '오만'하게 보여질 수밖에 없다는 점이 안타깝지만 말이다.

둘째로는 여성을 존중하는 예의 바른 남자여야 했다. 힘 없는 여성에게 물리적, 정신적 폭력을 저지르는 못난 남성들이 넘쳐나는 시대인 까닭이다. 소설 <인형의 집>에서도 잘 엿보이지만 여성을 '남성의 소유물'로 여기고 장난감처럼 곱게 치장하고 예쁜 모습을 남들에게 과시하는 용도로밖에 쓸 줄 모르는 무례한 남성이라면 사양한다는 뜻이다. 더구나 '남자의 자존심'이나 '체면'을 살려주기 위해서 여성에게 무례할 정도로 내조를 강요한다면 정말 끔찍한 결혼생활일 거라고 엘리자베스는 생각한다. 그래서 그녀는 '콜린스'와의 결혼도 거절한다. 자기 아버지의 재산을 지키는 것은 물론, 남은 가족의 생계도 꾸릴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는데도 콜린스의 청혼을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이를 두고서 엘리자베스를 매우 '이기적인 여자'로 오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콜린스와 결혼한 살롯 루카스만 보더라도 엘리자베스의 선택은 매우 현명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엘리자베스의 친구인 살롯도 가난한 집안이어서 어쩔 수 없이 콜린스의 청혼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살롯의 집안 식구들은 콜린스의 재산을 노나먹으며 잘 살게 되었을 것이다. 허나 정작 살롯은 어땠을까? 원치 않은 남성과 호의호식하며 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삶을 살게 되었다고 위안 삼을 수 있었을까? 한마디로 살롯의 선택은 '자기 삶'을 걷어차고, 오로지 '남'을 위해서만 헌신하는 삶을 선택했다. 그것이 진정 살롯이 원하는 삶이었을까? 자꾸 되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마지막은 가장 중요한 조건인 '사랑'할 줄 아는 남자여야 했다. 사랑은 만능 열쇠다. 못할 일이 없고, 이루지 못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두 사람 사이에 사랑이 끊이지 않는다면 더할 나위가 없다. 엘리자베스와 다시는 바로 그런 사랑을 서로 꿈꿨고, 둘은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마지막 자존심 싸움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싸움 끝에 둘은 '파경'에 이를 수도 있었지만, 결국 서로를 향한 마음을 재확인하고서 결혼에 골인하고 만다. 여기에 '돈 많은 남성', '가장 아름다운 여성'이라는 수식어가 덧붙여질 필요가 있을까? 서로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고 믿는 그 순간부터 그런 '외부조건'들은 아무런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이 바로 위대한 사랑의 힘이다. 엘리자베스도 바로 그렇게 사랑받아 마땅한 남성을 찾아헤맨 것이고, 다시도 그런 사랑을 받아도 될만큼 멋진 여성을 찾아헤맨 끝에, 둘은 서로를 알아보고 사랑의 결실을 맺은 것이다. 이쯤 되면 '로맨스소설'로는 장엄한 수준을 넘어선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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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온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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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DCCCXCII / 창비 8번째 리뷰] 지난해 대한민국 첫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한강'이 지목되었을 때 소름이 돋았다. 그동안 여러 한국소설가들이 노벨문학상이 거론되었을 때 '박경리'를 제외하고 그닥 탐탁스럽지 않았는데, 몇 년 전부터 '한강'이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한국사람은 노벨상 못 타잖아"라는 자조 섞인 말들이 나뒹둘던 시절이었던 터라 해마다 노벨상 수상이 다가오면 으레 다른 외국인을 점치곤 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난 꿋꿋하게 한국소설가들을 클릭하곤 했다. 박경리, 고은, 이문열, 황석영, 그리고 지난해엔 '한강'을 클릭했다. 그리고 한강이 수상을 하자 나는 부리나케 미처 구입하지 못했던 한강의 책들을 사모으기 시작했다. 늦게나마 열열한 응원을 하기 위해서였고, '대한민국 최초의 노벨수상자'에 걸맞게 존경의 의미를 담아 내 책꽂이에 영광을 심어두기 위해서였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분들이 많았나보다. 주문한 책은 3주가 넘어서야 도착할 수 있었다. 그렇게 사모으기 시작한 한강의 책들을 리뷰하고자 한다.

한강 리뷰 첫 소설은 <소년이 온다>다. 다들 아시다시피 1980년 '서울의 봄' 이후 전두환 정권은 군부세력을 앞세워 무단통치를 시작했고, 전국의 시위대들을 무차별적으로 폭력 진압하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광주'는 달랐다. 왜 하필 광주였는가? 라는 질문은 사절한다. 그 어떤 폭력도 용납할 순 없기 때문이다. 살인마 전두환의 광기가 남다른 것은 유독 광주에서만 일어난 것도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암튼 '그 날, 광주'는 달랐다. 살인마는 '본보기'가 필요하다 느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 날, 광주에서는 '살인마의 교과서'라고 보여줄 정도로 잔혹하게 일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사람을 '처리'한다는 것부터 전두환이 사람이길 포기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제목에서 언급한 소년은 '동호'라는 열여섯 살 중학생을 가리킨다. 살인마는 그렇게 어린 소년에게도 무자비했다. 그 소년이 왜 그곳, 하필이면 그날에 '전남도청'에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한 집에 세들어 살던 친구 정대를 찾기 위해서란다. 시위 현장에서 계엄군이 쏜 총탄에 친구가 맞고 쓰러지는 것을 보고 시신을 한데 모아놓은 그곳으로 갔다가 찾지 못하고, 그날밤 시민군에 합류해서 최후를 함께 맞게 된다. 하지만 시민군이 한 발의 총알도 쏘지 않던 그날, 동호는 계엄군이 쏜 총에 형과 누나 들이 맞아 죽는 걸 목격한다. 그리고 계엄군에게 잡혀가 모진 고문을 당한다. 그리고 운(?) 좋게 풀려났지만...뒤엣말이 무슨 필요가 있을까.

이 소설에서는 특히 '고문 장면'이 노골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전두환 정권의 광기는 시간을 거슬러 '박정희 정권', '이승만 정권', 그리고 '일제식민통치' 아래 무참히 짓눌렸던,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유린했던 그 광기를 연상케 한다. 그럼으로써 '광주의 시민들'은 자연스레 저항의 상징이 되었고, 자유의 수호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들이 특별해서 그런 것일까? 아니다. 그들은 지극히 '평범'했다. 지극히 '정상'이었다. 평화롭고 평온한 나날들이 이어지는 시절에 살았다면 아무런 특징도 의의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평범한 시민들이었을 뿐이다. 일제식민시절의 독립운동가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특별한 분들이 아니다. 그런데 '비정상'인 놈들이 판을 치는 어지러운 시대가 되자 '특별한' 사람이 되었다. 왜냐면 그들은 '불굴의 의지'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의를 지키고 자유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저항'을 몸소 실천한 것일 뿐이다. 그들은 절대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이기에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왜 이 미치광이들은 이토록 정상적인 사람들을 두려워해서 무참히 짓밟았을까? 전두환도 그랬고, 박정희도 그랬으며, 이승만은 말할 것도 없고, 일본군국주의에 미쳐돌아간 제국주의자들도 '정상적인 사람'을 지극히 싫어했다. 왜? '정상'이 아닌 사람들의 특은 바로 '비정상'을 당연시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비상식'적인 사고방식으로 '자신이 소유한 힘'을 과시하면 과시할수록 모든 사람들이 벌벌 떨며 괴력의 소유자인 자신들 앞에 굴복할 것이라는 망상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폭력'을 사용하면서도 '죄책감'이란 것을 전혀 생각지 못한다. 마치 원시사회의 부족장스러운 낡은 사고방식에 빠진 것이다. 이런 미치광이들은 그래서 '전쟁광'이라 불릴 정도로 살육을 즐긴다. 우리가 '전쟁영웅'을 영웅시할 때 주의해야 할 점이다. 그들이 저지른 살인행위에 '정당성'이 없다면, 하다못해 '필요성'조차 갖추지 못했다면, 단순한 미치광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런 미치광이를 영웅으로 우러러보는 사회나 국가는 또다시 그런 '미친짓'을 반복하기 마련이다.

그런 우려가 대한민국에 다시 벌어지지 않았느냔 말이다. 2024년 대한민국에 '비상계엄선언'이 웬말이냐. 이는 단 한사람의 우발적인 명령이 아닌 '미치광이' 대통령과 군관계자, 그리고 행정각료와 집권여당이 오랜 기간 조직적으로 짜서고 벌인 '계획적인 내란범죄'였다는 것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그리고 내란수괴의 머릿속에는 자신의 생각에 동조하지 않는 모든 이들을 '반국가단체'로 싸잡아서 처단할 것이라 목소리를 높였고 말이다. 과거의 망령이 다시 살아돌아오기라도 했단 말인가? 실제로 계엄군을 이끌었던 군관계자들의 집무실에 '전두환 사진'이 걸려있었고, 그들에게는 '자랑스런 선배'이자 '지도자'였다는 것이 구설로 오른 지도 꽤 되었다. 하긴 윤석열 정권 초기에 육군사관학교에서 '홍범도 흉상'을 없애려는 시도가 있었던 기억이 새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일제식민시절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독립군 대장 홍범도가 '그들'에게 왜 눈엣가시가 되었는지 이제는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이 책이 쓰여진 때가 2014년 박근혜 정권 시절이다. 그리고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해가 2024년이다. 지난 10년간 우리는 달라진 것이 없게 된 셈이다. 이제 곧 윤석열 정권도 탄핵과 함께 사라질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뼈저린 반성을 하지 않으면 '제3의 탄핵정국'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소설가 한강이 지적한 우리 시대의 아픈 곳을 우리는 이제 더는 외면하면 안 된다. 통증은 피한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마취제나 진정제로는 잠깐의 통증만 느끼지 못하게 할 뿐이다. 아픈 상처는 도려내고 깨끗하게 소독한 뒤에 깔끔하게 봉합을 해야 '새살'이 돋아날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에 쓰여진 끔찍한 고문묘사는 우리 시대의 '아픈 상처'다. 그 아픔을 딛고 일어서야 진정한 극복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두 번 다시 '비상계엄'이라는 끔찍한 악몽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다면, 우리가 직면한 문제를 직시하고 진심으로 해결하려 노력해야 한다. 유일한 해결방법은 '극복'이다. 무거운 죄책감에 짓눌려 살거나 마땅히 받아야 할 죄를 피하려고만 한다면, 또 우리 국민들이 그런 '죄인'을 눈감아주고 어설프게 관용으로 엮어 슬그머니 풀어준다면 우리는 또 어려움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또 '그날의 광주'를 다시 되풀이 해야겠는가? 우리가 또 '망국의 설움'을 당해봐야 속이 시원하겠는가? 모든 것을 다 잃고서 땅을 치고 후회해봐야 늦는다. 이제라도 우리가 짊어진 '과거의 망령'에서 속히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끔찍한 과거일망정 '마주 서기'를 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 당시에 지은 죄가 있다면 이제라도 마땅히 처벌을 받아야 한다. 모든 죄에는 '공소시효'가 불성립해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오직 처절한 반성만이 유일한 면죄부임을 우리 모두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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