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온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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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DCCCXCII / 창비 8번째 리뷰] 지난해 대한민국 첫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한강'이 지목되었을 때 소름이 돋았다. 그동안 여러 한국소설가들이 노벨문학상이 거론되었을 때 '박경리'를 제외하고 그닥 탐탁스럽지 않았는데, 몇 년 전부터 '한강'이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한국사람은 노벨상 못 타잖아"라는 자조 섞인 말들이 나뒹둘던 시절이었던 터라 해마다 노벨상 수상이 다가오면 으레 다른 외국인을 점치곤 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난 꿋꿋하게 한국소설가들을 클릭하곤 했다. 박경리, 고은, 이문열, 황석영, 그리고 지난해엔 '한강'을 클릭했다. 그리고 한강이 수상을 하자 나는 부리나케 미처 구입하지 못했던 한강의 책들을 사모으기 시작했다. 늦게나마 열열한 응원을 하기 위해서였고, '대한민국 최초의 노벨수상자'에 걸맞게 존경의 의미를 담아 내 책꽂이에 영광을 심어두기 위해서였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분들이 많았나보다. 주문한 책은 3주가 넘어서야 도착할 수 있었다. 그렇게 사모으기 시작한 한강의 책들을 리뷰하고자 한다.

한강 리뷰 첫 소설은 <소년이 온다>다. 다들 아시다시피 1980년 '서울의 봄' 이후 전두환 정권은 군부세력을 앞세워 무단통치를 시작했고, 전국의 시위대들을 무차별적으로 폭력 진압하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광주'는 달랐다. 왜 하필 광주였는가? 라는 질문은 사절한다. 그 어떤 폭력도 용납할 순 없기 때문이다. 살인마 전두환의 광기가 남다른 것은 유독 광주에서만 일어난 것도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암튼 '그 날, 광주'는 달랐다. 살인마는 '본보기'가 필요하다 느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 날, 광주에서는 '살인마의 교과서'라고 보여줄 정도로 잔혹하게 일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사람을 '처리'한다는 것부터 전두환이 사람이길 포기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제목에서 언급한 소년은 '동호'라는 열여섯 살 중학생을 가리킨다. 살인마는 그렇게 어린 소년에게도 무자비했다. 그 소년이 왜 그곳, 하필이면 그날에 '전남도청'에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한 집에 세들어 살던 친구 정대를 찾기 위해서란다. 시위 현장에서 계엄군이 쏜 총탄에 친구가 맞고 쓰러지는 것을 보고 시신을 한데 모아놓은 그곳으로 갔다가 찾지 못하고, 그날밤 시민군에 합류해서 최후를 함께 맞게 된다. 하지만 시민군이 한 발의 총알도 쏘지 않던 그날, 동호는 계엄군이 쏜 총에 형과 누나 들이 맞아 죽는 걸 목격한다. 그리고 계엄군에게 잡혀가 모진 고문을 당한다. 그리고 운(?) 좋게 풀려났지만...뒤엣말이 무슨 필요가 있을까.

이 소설에서는 특히 '고문 장면'이 노골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전두환 정권의 광기는 시간을 거슬러 '박정희 정권', '이승만 정권', 그리고 '일제식민통치' 아래 무참히 짓눌렸던,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유린했던 그 광기를 연상케 한다. 그럼으로써 '광주의 시민들'은 자연스레 저항의 상징이 되었고, 자유의 수호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들이 특별해서 그런 것일까? 아니다. 그들은 지극히 '평범'했다. 지극히 '정상'이었다. 평화롭고 평온한 나날들이 이어지는 시절에 살았다면 아무런 특징도 의의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평범한 시민들이었을 뿐이다. 일제식민시절의 독립운동가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특별한 분들이 아니다. 그런데 '비정상'인 놈들이 판을 치는 어지러운 시대가 되자 '특별한' 사람이 되었다. 왜냐면 그들은 '불굴의 의지'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의를 지키고 자유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저항'을 몸소 실천한 것일 뿐이다. 그들은 절대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이기에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왜 이 미치광이들은 이토록 정상적인 사람들을 두려워해서 무참히 짓밟았을까? 전두환도 그랬고, 박정희도 그랬으며, 이승만은 말할 것도 없고, 일본군국주의에 미쳐돌아간 제국주의자들도 '정상적인 사람'을 지극히 싫어했다. 왜? '정상'이 아닌 사람들의 특은 바로 '비정상'을 당연시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비상식'적인 사고방식으로 '자신이 소유한 힘'을 과시하면 과시할수록 모든 사람들이 벌벌 떨며 괴력의 소유자인 자신들 앞에 굴복할 것이라는 망상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폭력'을 사용하면서도 '죄책감'이란 것을 전혀 생각지 못한다. 마치 원시사회의 부족장스러운 낡은 사고방식에 빠진 것이다. 이런 미치광이들은 그래서 '전쟁광'이라 불릴 정도로 살육을 즐긴다. 우리가 '전쟁영웅'을 영웅시할 때 주의해야 할 점이다. 그들이 저지른 살인행위에 '정당성'이 없다면, 하다못해 '필요성'조차 갖추지 못했다면, 단순한 미치광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런 미치광이를 영웅으로 우러러보는 사회나 국가는 또다시 그런 '미친짓'을 반복하기 마련이다.

그런 우려가 대한민국에 다시 벌어지지 않았느냔 말이다. 2024년 대한민국에 '비상계엄선언'이 웬말이냐. 이는 단 한사람의 우발적인 명령이 아닌 '미치광이' 대통령과 군관계자, 그리고 행정각료와 집권여당이 오랜 기간 조직적으로 짜서고 벌인 '계획적인 내란범죄'였다는 것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그리고 내란수괴의 머릿속에는 자신의 생각에 동조하지 않는 모든 이들을 '반국가단체'로 싸잡아서 처단할 것이라 목소리를 높였고 말이다. 과거의 망령이 다시 살아돌아오기라도 했단 말인가? 실제로 계엄군을 이끌었던 군관계자들의 집무실에 '전두환 사진'이 걸려있었고, 그들에게는 '자랑스런 선배'이자 '지도자'였다는 것이 구설로 오른 지도 꽤 되었다. 하긴 윤석열 정권 초기에 육군사관학교에서 '홍범도 흉상'을 없애려는 시도가 있었던 기억이 새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일제식민시절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독립군 대장 홍범도가 '그들'에게 왜 눈엣가시가 되었는지 이제는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이 책이 쓰여진 때가 2014년 박근혜 정권 시절이다. 그리고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해가 2024년이다. 지난 10년간 우리는 달라진 것이 없게 된 셈이다. 이제 곧 윤석열 정권도 탄핵과 함께 사라질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뼈저린 반성을 하지 않으면 '제3의 탄핵정국'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소설가 한강이 지적한 우리 시대의 아픈 곳을 우리는 이제 더는 외면하면 안 된다. 통증은 피한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마취제나 진정제로는 잠깐의 통증만 느끼지 못하게 할 뿐이다. 아픈 상처는 도려내고 깨끗하게 소독한 뒤에 깔끔하게 봉합을 해야 '새살'이 돋아날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에 쓰여진 끔찍한 고문묘사는 우리 시대의 '아픈 상처'다. 그 아픔을 딛고 일어서야 진정한 극복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두 번 다시 '비상계엄'이라는 끔찍한 악몽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다면, 우리가 직면한 문제를 직시하고 진심으로 해결하려 노력해야 한다. 유일한 해결방법은 '극복'이다. 무거운 죄책감에 짓눌려 살거나 마땅히 받아야 할 죄를 피하려고만 한다면, 또 우리 국민들이 그런 '죄인'을 눈감아주고 어설프게 관용으로 엮어 슬그머니 풀어준다면 우리는 또 어려움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또 '그날의 광주'를 다시 되풀이 해야겠는가? 우리가 또 '망국의 설움'을 당해봐야 속이 시원하겠는가? 모든 것을 다 잃고서 땅을 치고 후회해봐야 늦는다. 이제라도 우리가 짊어진 '과거의 망령'에서 속히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끔찍한 과거일망정 '마주 서기'를 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 당시에 지은 죄가 있다면 이제라도 마땅히 처벌을 받아야 한다. 모든 죄에는 '공소시효'가 불성립해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오직 처절한 반성만이 유일한 면죄부임을 우리 모두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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