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과 선생님이 뽑은 채만식 탁류 북앤북 논술문학 읽기 2
채만식 지음 / 북앤북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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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DCCCXCIV / 북앤북 1번째 리뷰] 학창시절 <레디메이드 인생>가 실린 국어교과서로 만난 채만식은 일제식민시대에 투철한 사회의식을 갖춘 사실주의 작가로 달달 외웠다. 그의 사진으로 실린 모습에서는 활짝 웃고 있는 모습에 선한 인상마저 받았다. 하지만 그는 '변절한 지식인'으로 친일명단에 올랐고, "조선의 젊은이들이여, 일제가 일으킨 전쟁이 나가라"라는 증거는 글로 명백히 남아 있다. 일제식민시대의 부조리와 모순을 고발하던 그가 이런 글을 남긴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이런 민족을 배반한 변절자의 작품을 우리 학생들이 배우는 것이 바람직한 일인지 의심이 들고, 이에 대한 변명이라도 듣고 싶지만, 채만식은 해방 이후 <민족의 죄인>이라는 작품으로 사죄를 대신하고서 더는 말이 없다가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그해에 폐결핵으로 숨을 거두었다. 이제 남은 숙제는 그의 작품을 읽고 직접 판단하는 일만 남은 셈이다. 그는 정녕 '변절자', 그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일까? 그나마 해방 이후 변절한 친일지식인들 가운데 유일하게 사죄를 밝힌 유일한 지식인이라는 점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작가는 '작품'으로 말한다고들 하지만, 잘못에 대한 반성은 직접적인 사죄가 아니면 용서할 수 없는 범죄라는 점에서 생각해보면, 채만식만큼 솔직한 인사도 없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이제 다시 그의 작품을 읽어본다.

소설 <탁류>는 100년 남짓한 시간이 지금도 읽기에 부족한 점이 없는 탄탄한 플롯을 지녔다. 비록 시간적 배경이 100여 년 전이라서 매우 낯설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아리따운 미모의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는 것이 확인되는 2장부터는 술술 읽히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녀의 삶은 녹록치 않다. 첫째는 투전판에서 돈을 다 잃고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람이 그녀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경제적으로 무능력한 아버지의 강압에 못이겨 '돈 많은 남자'를 남편으로 맞이하지만, 그 남편이라는 작자는 타락한 호색한으로 유부녀와 바람이 났다가 현장에서 죽임을 당하고 만다. 그렇게 남편을 잃어버린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운 미모를 간직하고 있었고, 남편이 죽자 곱사등이에 병신 같은 놈팽이에게 그만 강간을 당하고 만다. 그렇게 의지할 곳 없어 방황하던 차에 오래전부터 그녀의 미모를 탐내던 아버지의 친구에게 넘어가 몸을 의탁하게 된다. 하지만 평온할 틈도 없이 그녀 앞에 강간범이 다시 나타나자 아버지의 친구는 그녀를 더럽다며 버려버리고 만다. 그렇게 그녀는 아름다운 미모로 강간범과 함께 살게 되지만, 몸이 병신이 아니라 정신마저 병신 같던 강간범과는 더는 하루도 같이 살 수 없는 절박한 처지에 빠지자, 그만 살인을 저지르고 만다. 그녀가 바라는 것은 그저 '딸아이 하나' 잘 키우는 환경일 뿐인데 말이다. 그런 딸을 위한 마음에 "죽자구 해도 죽을 수 없구...살자구 해도 살 수가 없다"고 외친다. 한 여인의 운명이 왜 이리도 기구한 것일까?

기구한 운명의 여인은 '초봉이'라는 이름을 가졌다. 그녀의 삶을 이처럼 기구하게 만든 원인은 '미모' 때문이었을까? 하긴 그녀가 예쁘지 않았다면 그녀의 주변에 이처럼 남자가 들끓지도 않았을 것이고, 조금 못나더라도 순박한 사내를 만나 평온하게 살아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가난' 때문이었을까? 그녀의 아버지가 투기꾼이 아니라 제대로 된 가장이었다면 그녀를 단지 '돈만 많은 남자'에게 시집을 가라고 강압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초봉이가 남몰래 좋아했던 의사 조수였던 사내와 알콩달콩 살림을 차리고 넉넉하지는 않지만 행복한 가정을 꾸려나갔을지도 모른다. 만약 불행의 원인이 '미모'라면 개인의 문제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가난'이라면 사회의 부조리가 한몫을 했을 것이다. 물론 '미모'가 원인이었더라도 예쁜 여자를 가만 냅두지 않는 '여성 인권'을 철저히 무시한 처사이니, 그 또한 사회적 문제로 지적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대적 정황을 살펴보면 일제식민시대가 조성한 '사회문제'가 한 개인의 운명까지 기구하게 만들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만약 일제가 조선을 식민통치함에 있어 매우 합당하고 합리적으로 지배했더라면 당시 사회분위기가 그리 엉망진창일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통치질서가 너무나도 무참했기에 사회조차 혼탁한 '탁류,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 책의 제목이 '탁류'인 까닭도 바로 초봉이의 삶을 기구하게 만든 원인이 어지러운 사회속에서는 평범한 이들도 그 혼탁한 구렁텅이속에서 타락할 수밖에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대한민국에서 '초봉이' 같은 여인은 어떤 삶을 살게 될까? 순박하고 청소한 외모의 스물한 살의 여자라면 필시 '대학생'일 것이다. 여대생이란 표현을 피한 까닭은 현재의 대한민국이 '여성의 인권'을 존중하는 상식적인 사회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아리따운 외모에 더불어 재능까지 겸했다면 아이돌로 데뷔하여 인기정상의 엔터테인먼트로 활약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해서 우리 사회 역시 이 아리따운 여성을 가만 냅두지 않을 것이다. 그 시절보단 나은 편이긴 하지만 아직도 우리 주변에는 '못난 남자들'이 정말 많기 때문이다. 착한 남자도 분명 많지만, 그에 못지 않게 나쁜 남자와 이상한(?) 남자들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이런 지뢰밭을 미모의 여성 혼자 헤쳐나가기란 정말 힘들 정도로 말이다. 그래서 현재의 대한민국도 여전히 '탁류'인 것은 매한가지다.

그럼 이처럼 '혼탁한 사회'를 졸졸졸 흘려보내고 맑고 깨끗한 '청류'가 흐르게 만들기 위해선 무엇을 먼저 해야 할까? 이런 질문을 민족배반자에게 묻는 것이 큰 실례가 되는 것은 아닐지도 의문이고 말이다. 하지만 이 작품도 그렇고, <태평천하>도 그렇고, 그가 쓴 대부분의 작품에서 비치는 '일제시대'는 하나같이 정상적인 것이 없다. 그런 비정상적인 세상에 가없는 비판을 쏟아낸 것이 바로 채만식이었다. 만약 그가 30년대, 40년대의 좌절을 겪지 않았다면 쉽사리 체념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허나 그는 희망의 끈을 놓아버렸다. 아주 큰 희망을 품었음에도 끝내 그 희망을 달성하지도 못한채 그만 포기하고 말았다. 그 때문에 <민족의 죄인>이란 마지막 작품을 반성하며 써내려갔는지 모른다. 다른 변절자들은 그조차도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순박함'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순박함이 해방 직후에 벌어진 '또 다른 탁류' 앞에서 또 한 번 좌절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짧은 수명을 한탄하지는 않았을까?

암튼, 탁류를 청류로 바꿀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다.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법치주의니, 합리주의니, 공리주의니, 어떤 것이든 좋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것이 최선이다. 죄가 있다면 그 죄를 달게 받는 사람을 존중하는 사회도 정의로운 사회의 모습일 것이다. 더 많은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서 각자의 몫으로 주어진 행복을 조금씩 나눌 줄 아는 사회일 것이고, 그렇게 희생한 소수에게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고 존중해주는 문화를 만들어나가는 것이 '청류'로 바뀌어진 사회의 모습일 것이다. 고용주는 노동자를 위해 아낌없는 투자를 하고, 노동자는 그런 고용주를 위해 부지런히 일하는 사회,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사회적 약자'의 고충을 빈틈없이 살펴보고, 우리가 걷어서 낸 세금이 필요한 곳에 적절히 쓰여지는 공공성과 투명성이 확보한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도 그런 청류의 일부일 것이다. 어쩌면 청류란 바둑에서 말하는 '완생'의 개념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좁은 바둑판에서는 '미생'에서 '완생'으로 거듭나는 신의 한수가 존재하지만, 이 넓은 세상에서는 결코 '완생'을 확신할 수 없어 모두가 '미생'으로 남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결코 '청류'에서 살 수 없어 '탁류'에 머물고 있지만 끝없이 '청류'를 추구하는 시지프스의 운명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허나 어찌 시지프스가 불행하기만 할까? 건강을 위해서 헬스장 런닝머신에 올라 끝없는 제자리뜀을 하고 있지 않은 것이 현대의 시지프스 아니겠는가. 그 런닝머신 위의 모습이 현재는 똥배가 출렁거릴지라도 언젠간 '식스팩'이 될 것이란 희망을 품고 날마다 뛰고 있는 모습이 진정 멋진 모습은 아닐런지...

뭔가 장황한 마무리지만, 과거의 초봉이는 꿈꿀 수 없었던 현실을, 현재의 초봉이는 꿈꿀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넋두리를 읊어보았다. 더불어서 과거의 채만식은 좌절했지만, 현재의 대한민국을 살고 있었더라면 좌절을 넘어 '한류열풍'의 파도를 타고서 세계적인 작가로 거듭나지 않았을까 상상해보았다. 그러지 못한 그 당시의 비극적 운명이 참으로 안타깝다는 생각과 함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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