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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과 편견 ㅣ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81
제인 오스틴 지음, 박용수 옮김 / 문예출판사 / 2024년 10월
평점 :
[My Review MDCCCXCIII / 문예출판사 8번째 리뷰] <오만과 편견>은 '가벼운 연애소설(칙릿, Chick Lit)'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앞서 마크 트웨인을 언급했지만, 그가 이 책을 비난한 까닭도 바로 그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작가는 '사회고발의 선구자'가 되어야 하는 듯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만과 편견>을 쓴 제인 오스틴은 정말 '사회고발'과 같은 문제를 제시하지 않았을까? 이 소설의 주된 줄거리가 '베넷가의 딸들'이 각각 결혼할 남성을 사냥(?)하듯 무도회에 참석하는 장면이라는 점에서 가벼운 연애 소설이라고 확신할 수도 있을 것이다. 더구나 그 딸들의 어머니가 '돈 많은 남성들'을 자기 집에 초대하지 않는 남편을 향해 넋두리를 하는 장면을 보면 마크 트웨인이 왜 이 소설을 맹비난했는지도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작가인 제인 오스틴도 책 첫머리에 [이 소설은 괜찮은 신랑감을 찾기 위한 여정임을 밝힌다]라고 썼다. 그래서 이 소설을 '가벼운 연애 소설'이라고 불러도 딱히 변명할 거리가 없을 것이다.
허나, 18세기 당시 영국사회에서 '한정상속법'이라는 것이 있었음을 간과한다면 이 책은 그저 그렇고 그런 '연애 소설'로밖에 볼 수 없지만, 당시 여성이 사회활동을 할 수 없고, 유일한 '수입원'은 부모의 상속이나 남편의 수입이 전부였다는 '경제적 예속 상태'에 묶여 있었던 것을 인식하는 순간, 이 소설은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사회고발성 문제작'으로 읽을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런 경제적 예속상태에 묶여 있는 여성이 '어떻게' 돈 많은 남성과의 결혼을 거절할 수 있었겠느냔 말이다. 그런데 이 소설의 주인공 '엘리자베스 베넷'은 당시 최고 갑부의 청혼을 당당히 거절하고 만다. 이는 엘리자베스가 넝쿨째 굴러온 복을 걷어찬 격이지만, '사랑'이 없는 '돈'만 보고 결혼한다면 자기 자신에 대한 모욕으로 여기는 자유롭고 주체적인 영혼의 소유자 임을 포기하는 처사라고 당당히 밝힌다. 이런 여성을 두고서 마크 트웨인은 어찌 비난을 앞세웠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가 입버릇처럼 말했듯이, 그는 이 책을 끝까지 읽지도 않고서 책의 앞부분 몇 장만 읽고서 험한 말을 지껄임 셈이다.
18세기에는 영국을 비롯해서 전세계 여성들이 '경제적 독립'을 선언할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다. 수많은 여성들은 태어나서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결혼해서는 남편의 이름으로, 늙어서는 아들의 이름으로 '대신'하여 불릴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말해, '이름'조차 갖지 못하고, 혹여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누구의 딸', '누구의 아내', 그리고 '누구의 엄마'로 불리는 것이 다반사였다. 이에 대해 여성들은 별다른 반박조차 할 수 없었다. 왜냐면 '남자의 경제적 위치'에 예속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여성들이 '경제적 독립'을 선언하기 위해선 엄청난 비난도 감수해야만 했다. 그런데 당시 영국은 여성에 대한 또 하나의 굴레가 있었다. 바로 '한정 상속법'이라는 독소 조항이었다. 이 법은 아버지의 재산이 아무리 많더라도 그의 죽음으로 인한 상속 권한은 오직 '장자'에게만 있다는 것이다. 딸 자식에게는 한 푼도 주지 않는다. 심지어 아내마저도 상속 권한이 없다. 첫째 아들에게 넘겨진 재산상속으로 집안의 여성은 '빌붙어' 살아야만 하는 처지다. 만약 베넷 가문처럼 '아들'이 없는 경우에는 어찌 될까? 그렇다면 가장 가까운 친척 가운데 선별된 '남성'에게 상속 권한이 넘어가게 된다. 심지어 생판 모르는 남성일지라도 법이 그러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에서는 '콜린스'가 그렇게 등장하게 되었고, 베넷 가문의 다섯딸 가운데 한 명이 그와 결혼하지 않는다면, 베넷씨가 사망했을 때, 그가 가진 재산은 몽땅 콜린스에게 넘어가게 된다. 그리고 생판 모르는 베넷 부인과 그녀의 다섯딸은 졸지에 살던 집에서조차 한 푼도 건질 것 없이 쫓겨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런 판국인데, 베넷 부인이 자신의 딸들에게 '돈 많은 남성'과 결혼을 서두르는 것이 볼썽사나운 모습이랄 수 비난할 수 있겠는가.
이런 설정속에서도 제인 오스틴은 엘리자베스 베넷을 빗어낸 것이다. 결혼으로 시작해서 결혼으로 끝나는 이야기속에서 말이다. 그럼 엘리자베스 베넷이 가장 원하는 신랑감은 어떤 조건을 갖춰야 했을까? 첫째로는 '오만'하지 않아야 했다. 엘리자베스는 다시와의 첫 만남에서 단단히 오해를 한다. 그의 첫 인상이 굉장히 '오만'했다고 평가를 내린 것이다. 그 까닭은 바로 무도회장에서 춤을 출 수 있는 남성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인데도, 다시가 고작 두 번의 춤밖에 추지 않고 많은 여성들이 누려야 할 기쁨을 단칼에 박살냈던 무뢰한이라고 단정한 것이다. 오늘날에서는 그러거나 말거나 '개인의 취향'이고, '존중받아 마땅한 자유'였겠지만, 당시 여성들에겐 유일하게 허락된 사회활동 중 하나인 '무도회'에 참석한 남성의 의무를 방기한 모습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춤추지 않을 바에는 참석하지 말았어야 하고, 참석했다면 넓은 아량을 베풀어서 여성들을 '기쁨'을 충족시켜주는 의무를 다했어야 했는데, 다시는 그런 남성이 아니었다고 비판한 셈이다. 하지만 이는 엘리자베스의 '편견'이었다. 다시에게는 나름의 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 사정이란 것이 남들에게는 '오만'하게 보여질 수밖에 없다는 점이 안타깝지만 말이다.
둘째로는 여성을 존중하는 예의 바른 남자여야 했다. 힘 없는 여성에게 물리적, 정신적 폭력을 저지르는 못난 남성들이 넘쳐나는 시대인 까닭이다. 소설 <인형의 집>에서도 잘 엿보이지만 여성을 '남성의 소유물'로 여기고 장난감처럼 곱게 치장하고 예쁜 모습을 남들에게 과시하는 용도로밖에 쓸 줄 모르는 무례한 남성이라면 사양한다는 뜻이다. 더구나 '남자의 자존심'이나 '체면'을 살려주기 위해서 여성에게 무례할 정도로 내조를 강요한다면 정말 끔찍한 결혼생활일 거라고 엘리자베스는 생각한다. 그래서 그녀는 '콜린스'와의 결혼도 거절한다. 자기 아버지의 재산을 지키는 것은 물론, 남은 가족의 생계도 꾸릴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는데도 콜린스의 청혼을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이를 두고서 엘리자베스를 매우 '이기적인 여자'로 오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콜린스와 결혼한 살롯 루카스만 보더라도 엘리자베스의 선택은 매우 현명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엘리자베스의 친구인 살롯도 가난한 집안이어서 어쩔 수 없이 콜린스의 청혼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살롯의 집안 식구들은 콜린스의 재산을 노나먹으며 잘 살게 되었을 것이다. 허나 정작 살롯은 어땠을까? 원치 않은 남성과 호의호식하며 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삶을 살게 되었다고 위안 삼을 수 있었을까? 한마디로 살롯의 선택은 '자기 삶'을 걷어차고, 오로지 '남'을 위해서만 헌신하는 삶을 선택했다. 그것이 진정 살롯이 원하는 삶이었을까? 자꾸 되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마지막은 가장 중요한 조건인 '사랑'할 줄 아는 남자여야 했다. 사랑은 만능 열쇠다. 못할 일이 없고, 이루지 못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두 사람 사이에 사랑이 끊이지 않는다면 더할 나위가 없다. 엘리자베스와 다시는 바로 그런 사랑을 서로 꿈꿨고, 둘은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마지막 자존심 싸움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싸움 끝에 둘은 '파경'에 이를 수도 있었지만, 결국 서로를 향한 마음을 재확인하고서 결혼에 골인하고 만다. 여기에 '돈 많은 남성', '가장 아름다운 여성'이라는 수식어가 덧붙여질 필요가 있을까? 서로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고 믿는 그 순간부터 그런 '외부조건'들은 아무런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이 바로 위대한 사랑의 힘이다. 엘리자베스도 바로 그렇게 사랑받아 마땅한 남성을 찾아헤맨 것이고, 다시도 그런 사랑을 받아도 될만큼 멋진 여성을 찾아헤맨 끝에, 둘은 서로를 알아보고 사랑의 결실을 맺은 것이다. 이쯤 되면 '로맨스소설'로는 장엄한 수준을 넘어선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