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탐정 엘리자베트 2 - 바이올리니스트의 비밀을 밝히다 공주 탐정 엘리자베트 2
아니 제 지음, 아리안느 델리외 그림, 김영신 옮김 / 그린애플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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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CMXLI / 그린애플 2번째 리뷰] 프랑스 공주 엘리자베트 탐정의 두 번째 사건일지다. 앞서도 밝혔지만 '추리소설'이 아닌 '소녀감성의 동화'에 가까운 책이다. 어린이책이라도 특히 '소녀들'이 좋아할 만한 내용의 책이 따로 있는 법이다. <이사도라 문 시리즈>를 펴낸 해리엇 먼캐스터, <꼬마 흡혈귀 시리즈>를 쓴 앙겔라 좀머 보덴부르크 같은 책들 말이다. 이런 동화책들은 전세계 소녀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럼 이 책들과 <엘리자베트 시리즈>의 아니 제가 쓴 동화책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우선, 아주 큰 갈등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뭔가 낭만적이고 이국적인 정취가 물씬 풍기면서 아름다운 환상을 심어 준다는 것이다. 이런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이가라시 유미코의 <캔디 캔디>이기도 하다. 우리는 '들장미 소녀 캔디'로 익숙하다. 조금 후대의 작품으로는 이케다 리요코의 <베르사유의 장미>가 있고 말이다. 이런 작품들에 소녀들은 흠뻑 빠져들곤 한다.

어떤 이야기든 '갈등요소'가 없다면 재미가 없기 때문에 소녀들이 좋아하는 책들에도 명백한 '갈등'은 존재한다. 하지만 그 갈등이 도저히 풀 수 없는 숙제처럼 보이지 않는다. 왜냐면 그 갈등이 얼마 지나지 않아서 '데우스 엑스 마키나'처럼 초자연적인 존재(?)가 나타나서 아주 깔끔하게 해소시켜 버리기 때문이다. 마치 여자아이들이 싸움이 벌어지면 엄마나 선생님이 등장해서 이렇게 저렇게 해결하라고 지시하면 그대로 따르는 것으로 일단락을 지어버리는 것처럼 말이다. 남자아이들은 그런 거 없다. 끝장을 보고서 '승자'를 가르고 '승복'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억울하면 '실력'을 키워서 '도전'을 받아주겠지만 '패배'를 인정하지 않으면 '남자'로 인정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엄마나 선생님을 불러오면 '비겁하다'고 낙인이 찍히고 만다. 그런 연유인지는 몰라도 '소녀감성'이 물씬 나는 작품들에는 그리 어렵지 않게 해결되는 약한고리의 갈등이 곧잘 등장한다. 물론 갈등해소가 되었다고해서 '갈등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한마디로 '싸움'이나 '다툼'의 장면이 그리 오래가지 않고, 오히려 싸움이나 다툼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자세히 열거되는 경향이 강하다. 반면에 남자아이들은 '과정'이 긴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누가 이겼는데?"라는 식으로 '결과'에 집착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리고 그 결과에 따라서 승자가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에만 관심이 집중될 뿐이다. 그나마 '과정'을 즐기는 남자아이들은 '싸움과정'이나 '결투과정'의 상세함을 좋아한다. <무협지>의 한 장면처럼 말이다.

또 하나, 소녀감성의 작품에는 '끔찍한 묘사'는 금물이다. 낭만가득 화려듬뿍인 묘사로 충만해야 한다. 뭔가 이국적이고 환상적이어서 '낯선 느낌'마저 주어야 엄지손가락이 절로 올라갈 것이다. 그래서 '궁중 생활'을 담은 왕과 귀족의 이야기가 매력 만점이다. 왜냐면 오늘날에는 '계급적 신분'이 사라져서 왕자와 공주의 생활을 현실에서 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물론 돈 많은 부자들은 '옛날 귀족적인 모습'을 맘껏 꾸밀 수는 있지만, 그 옛날의 '궁중예법'이나 '화려하고 고풍적인 품위'를 엄숙히 지키는 사회분위기는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에 꽤나 낯설고 매력적으로 느껴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런 고품격의 낯설음을 '뱀파이어'나 '요정' 같은 것들에게서 느끼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런 경향이 소녀들의 감성에 잘 먹혀 들어간다. 귀여니의 소설 <늑대의 유혹>이나 스테프니 메이어의 <트와일라잇> 같은 작품에 열광하는 여성독자들은 '미모의 남자 주인공'이 등장해서 '여주인공'을 위해 모든 것을 헌신하는 장면에서 까무러치지 않은가 말이다. 목숨을 건 혈투를 벌이면서도 '고품격의 매너'를 잃지 않는 이질적이고 비현실적인 상상(?)에 빠져들곤 한다.

그렇다면 <공주 탐정 엘리자베트>에도 이런 요소들이 있을까? 먼저 '프랑스 왕정'의 실존인물을 차용했다는 점이 그렇다. 실제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삼았는지까지는 잘 모르겠으나 책 내용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프랑스 궁정에서 벌어지는 일들'이고 왕실과 귀족들의 일상을 아주 세세히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소녀감성이 물씬 풍긴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 아주 약간이 '추리적 요소'를 담아 미스터리한 사건으로 흥미를 유발시키고 있지만, 이야기 맥락상 그리 중요한 사건은 아니다. 두 번째 사건에서는 '하프시코트 연주자'에 이어 '바이올리니스트 뮤직박스'가 등장하고, 그 속에 비밀암호가 담겨 있지만, 너무 쉽게 풀려버리고 만다. 대신 '엘리자베트 공주의 일상'을 중심으로 묘사되고 있는 궁중예법에 대한 묘사가 이야기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소녀독자들의 만족도가 더 높아졌을 것이다. 실제로 '여자아이'를 자녀로 부모님들이 이 책 구매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자녀가 '독서'에 흥미를 느끼고 빠져드는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아빠'는 그 까닭을 잘 이해할 수 없을지 몰라도 '엄마'는 이 책을 먼저 읽어보면 단박에 알 수 있을 것이다. 자기 딸이 이 책에 흠뻑 빠져들 수밖에 없는 까닭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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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정말 원하는 건 뭐지? 마스다 미리 만화 시리즈
마스다 미리 지음, 박정임 옮김 / 이봄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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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CMXL / 이봄 4번째 리뷰] 역시 '마스다 미리'의 만화는 '수짱 시리즈'부터 읽어야 했다. 이 책을 읽고나서야 비로소 '마스다만의 필력'이 엿보였기 때문이다. 수짱의 입을 통해서 '30대 여성의 솔직담백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데, 그 솔직함이 너무 과해서 때로는 '불편한 심정'을 토로하기도 하였다. 그것이 '여자의 일생'을 대변하는 것 같으면서도, 우리 사회가 외면하고 있는 '여성 문제'를 직접적으로 건드리면서 아슬아슬한 선을 넘나들기도 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것이 또 '문제화'가 되어 여러 사람들을 골치아프게 만드는 것은 민폐라고 생각하여 머뭇거리는 것이, 한편으로는 우리 사회가 아직까지도 '성숙하지 못하다'는 반증인 것 같아 아쉽게 한다.

이 책 <내가 정말 원하는 게 뭐지?>에서 언급하고 있는 내용은 주로 '30대 여성'을 주인공으로 삼은 문제제기다.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여성이라면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렇다고해서 이 문제들이 '일본사회'만의 문제인 것도 아니다. 비슷한 경제상황을 겪고 있는 수많은 '선진국 여성들'의 문제이기도 하면서, '유교적 여성관'을 지닌 동아시아여성만의 독특한 문제제기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수짱이 던지는 질문들은 이들 모두의 공통분모를 갖고 있는 '한국여성이 겪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마스다 미리의 책들이 수많은 여성들에게 공감을 얻은 것 같다. 그럼 하나씩 따져보자.

먼저, 30대 여성은 충분히 젊은가? 라는 질문부터 던져보자. 최근에는 여성의 평균수명이 80살에서 90살을 넘보고 있으니, 30대라면 상당히 젊은 편에 속한다. 앞으로 50~60년을 더 살 수 있는 나이다. 그래서 30대 여성이라도 요즘에는 상당히 '예쁘다'고 할 수 있고, 심지어 '젊어 보이는 나이'라는 점에선 논란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30대 여성들은 충분히 예쁜 나이이고, 젊은 나이인데도, 주위에서 '예쁘다', '젊어 보인다'는 얘기에 민감하다. 20대 때만해도 당연하게 듣는 소리였는데, 왜 '서른살'이 넘으면 그런 얘기가 칭찬으로 들리고, 그런 얘기를 더욱더 갈구하게 되는 걸까? 아직 40대가 된 것도 아닌데 말이다.

하지만 '생물학적 나이'로 판단을 해보면, 30대 여성은 꽤나 늙은 나이에 속한다. 왜냐면 '임신과 출산'을 할 수 있는 나이로는 꽤나 늙은 나이이기 때문이다. 10대 후반부터 40대 초반까지를 '가임기간'으로 봤을 때, 여자 나이 30살은 '여자일 수 있는 나이'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심리적 불안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나이다. 이는 '결혼연령'을 따지게 만드는 스트레스(압박감)를 동반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현대여성은 결혼과 동시에 '임신과 출산'이 의무사항(?)은 아닐지라도, 사회적으로 '여성의 능력'인 것만은 틀림없기에 웬지 '그 능력'을 과시할 수 있다가 슬슬 자신감이 떨어지는 시기이기에 '30대'라는 나이에 대한 심리적 불안감이 작동하는 나이이기도 하다. 거기다 20대에 비하면 '피부탄력'이나 '신체건강', 심지어 '화장발'조차 잘 먹히지 않은 것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나이이기도 하다. 그래서 아무리 전날 혹사를 했더라도 다음날 아침이면 개운하게 일과를 시작하던 20대와는 달리 30대로 접어들면 왠지 찌뿌둥한 것이 '나이'가 들어서 그런 것이라는 짜증이 밀려오는 것에서 기인한 불안일 수도 있다. 그렇기에 여성나이 30대는 여러 모로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나이인 것이다.

그런데 수짱의 엄마와 고모가 모두 '30대 일본여성'이라는 것이 이 만화의 핵심사항이다. 수짱의 엄마는 '기혼'이고, 수짱의 고모는 '미혼'이다. 이렇게 '결혼유무'에 관한 두 사람의 대조적인 모습이 이 책의 백미인 것도 있다. 중요한 것은 기혼인 여성도, 미혼인 여성도 모두 '불만족스런 30대'에 이런저런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점이다. 기혼 30대 여성은 직장도 없이 경제적인 능력을 모두 남편에게 의지하고 '가사노동'을 하는 것만으로 존재가치를 인정받는 '아내'이자 '엄마'이기에 스트레스를 받는다. 왜냐면 '같은 나이'인데도 어떤 친구는 '이혼'을 하고서 '직장'을 다니고 있고, 자기가 번 돈으로 '외국여행'도 다니며, '남자친구'와 데이트도 하고 섹스(?)도 즐기고 있는 것을 보면서, 자신은 '날개가 꺾여버려 자유를 잃은 불쌍한 존재'로 여겨지는 탓이다. 그래서 자신도 '직장'을 구하면 어떨까? 고민을 하게 된다. 그런데 이것이 또 '남편의 경제력'이 무능력한 탓으로 비춰질까봐 걱정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남편에게 조언을 구하고서 흔쾌히 허락(?)까지 받아놓았지만, 이 또한 '주인(일본에선 '남편'을 '주인(主人)'이라고도 부른다)'에게 허락받는 것처럼 느껴저서 서글퍼진다. 왜 노예도 아닌데 자유롭지 못한 것일까?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미혼 30대 여성도 고민스러운 것은 마찬가지다. 수짱의 고모는 '자발적 백수'인 상태다. 직장을 충분히 잡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는데도,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그냥 쉬고 있다. 물론 '집'도 있다. 그러니 경제적 능력이 부족한 것도 아니다. 그냥 현재 느끼는 '자유'를 만끽하여 여유롭고 느긋하게 있을 뿐이다. 근데 자기 또래의 여성들이 '결혼'을 하고, '자녀'를 기르고, '가정'을 꾸리며 바쁘게 살아가는데 자신은 여유롭다는 것에 왠지 모를 불안감이 휩싸여온다. 이대로 영영 결혼도 못하는 건 아닐까? 잃어버린 30년인데 영영 회사로 복귀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 이대로 늙어버려서 여성적인 매력까지 잃어버리고 그대로 늙어버리는 것은 아닌가? 등등 여러 가지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

그러면서 두 여성은 동시에 물음을 던진다. '내가 정말 원하는 게 뭐지?'하고 말이다. 21세기 일본에서 살아가는 30대 여성은 도대체 정말로 무엇을 가장 바라고 있는 걸까? 이걸 가지면 저것도 갖고 싶고, 고로케 살다보면 요로케 살아가야 바람직한 것이 아닐지 의구심이 밀려온다. 물론 이런 고민들은 '30대 남성들'도 똑같이 하곤 한다. 그러나 여성들과 비교하면 좀 단순(?)한 고민들이다. 왜냐면 남성들은 '생물학적 고민'도 40대 이후이고, '경제적인 고민'도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사회구조적 문제로 접근해서 풀어버리는 경향이 크기 때문이다. 오히려 남성들의 고민은 '경제적인 능력'에 함몰되어 있는 편이다. 그리고 이런 문제들은 남성들이 꽉 쥐고 있는 경제주도권으로 어느 정도 해결해버리곤 한다. 왜냐면 사회적으로 남성들의 취업은 꽤나 긍정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남자들은 '성인'이 되면 으레 '취직'을 해야 사람구실한다고 여겨서 취업을 할 의지만 있으면 어디서든 일을 할 수 있다. 그리고 '결혼'을 하면 다니던 직장에서 격려를 해주며, '자녀'가 생기면 더 많은 격려를 해주는 분위기를 만들어 준다. 그래서 남성들의 고민은 꽤나 단순한 편이다. 여성이 결혼하고, 임신하고, 출산, 육아를 할 때마다 '직장상사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것에 비한다면 말이다.

그래서 이 책의 결론은 무엇일까? 안타깝게도 꽤나 소극적이다. 수짱의 엄마가 자신도 '직장'을 구하겠다고 선언을 하고, '주인'이라 부르지 않고 '남편'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결말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직장을 구하고서 '현실적인 문제해결'에 나선 것이 아니라 그저 '열린 결말'로 앞으로 변화할 수 있다는 여지만 남겨놓았을 뿐이다. 그럼에도 2012년쯤의 일본사회에서는 큰 시도였는지도 모른다. 일본에선 아직도 '여성인권'적인 면에서 낙후된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한때 전세계적으로 큰 붐을 일었던 '미투사건'도 유독 일본사회에선 그 영향력이 미미했다. 그리고 아직도 일본여성은 '결혼'과 동시에 '직장퇴사'를 하고 '가사와 육아'에 전념하는 사회현상이 여전하다. 맞벌이를 하면 '남편의 경제적 능력이 없다'는 것을 자랑하는 꼴이라면서 기피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일본의 현실에서 수짱이 던지는 질문들은 여성독자들이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모든 선진국 여성들이 겪는 문제이기도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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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를 읽다, 마음을 읽다 - 뇌과학과 정신의학으로 치유하는 고장 난 마음의 문제들 서가명강 시리즈 21
권준수 지음 / 21세기북스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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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CMXXXIX / 21세기북스 32번째 리뷰] 뇌과학은 이제 막 첫발을 뗀 수준이다. 그간 '뇌가 하는 역할'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아내긴 했지만 '결과론'적인 결과일 뿐, 우리가 뇌를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수준까지는 다다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뇌과학의 미래는 밝다. 해온 것보다 할 것이 더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제나 과학은 '윤리적인 면'을 경계해야 한다. 연구를 빙자해서 비윤리적인 '선'을 넘어버리면, 그건 '과학'이란 이름으로 연구가 아닌 폭력을 저지르는 것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뇌가 하는 역할'을 속속들이 파악한 '뇌 지도'를 완벽하게 완성하게 되면 우려스러운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다. 인간의 뇌를 조종하는 게 가능해지면 '인간'을 조종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많은 인간을 조종해서 벌어질 일도 걱정이지만, 딱 한 사람만 조종이 가능하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이 '한 나라의 최고통치자'라면 두려운 일이 벌어질 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기에 뇌과학은 어디까지나 '질병치료'를 최우선 목적으로 두고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만 사용되도록 철저히 관리되어야 한다. 비단 뇌과학만의 문제는 아니다. 인류의 미래를 좌우할 과학 연구분야는 충분히 감시감독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럼 '정신의학'에서는 어떨까? 우리는 오래전에 '정신질환'을 마음의 병으로 오해하고서 정신이나 마음을 다스리는 것으로 치유할 수 있다고 믿었다. 허나 뇌과학이 발달한 오늘날에는 모든 정신질환은 마음이 아닌 '뇌의 문제'임을 파악했다. 그래서 우리는 뇌를 연구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뇌의 특정영역에서 어떤 작용을 하는지 파악하는데 주력을 해왔고, '호르몬'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래서 요즘엔 정신질환을 치료하는데 '호르몬'을 투여하여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방법까지 알아내게 되었다. 그런 까닭에 과거에는 '불치병'으로 여기기도 했고, 엄청난 폭력적(?)인 방법으로 정신질환을 치료하는 끔찍한 일도 저지르기도 했으나, 근래에는 그런 끔찍한 짓까지는 하지 않고 '뇌의 작용'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정신질환을 치료하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우울증이나 조현병 등과 같은 정신질환을 완치에 가까운 효능을 보이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도 왜 우울증이나 조현병이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는 원인으로 잘못 오인하고 있는 것일까? 이는 언론이 성급하게 일반화시키는 오류를 범한 탓으로 봐야 할 것이다. 우리 사회가 '정신질환'에 대해서 잘못된 인식을 갖고 있는 것도 한몫 단단히 하고 있기도 하다. 주변에 감기 기운이 있는 환자가 있으면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거나 '약처방'을 받아 적극적으로 치료를 권유하는 것처럼 '정신질환'으로 인식되는 환자가 있다면 '병원에서' 진찰을 받고 약처방을 받아 적극적으로 치유를 하도록 권하면 되는데, '정신질환자=범죄자'라는 등식을 먼저 떠올리고 외면하고 따가운 시선을 던질 뿐이니, 치료가 필요한 환자들이고, 적극적인 치료와 관리를 통해서 '증상'을 완화하거나 조절할 수 있는 상태인데도 쉬쉬하며 감추다가 결국엔 더 큰 피해를 낳게 되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심지어 '예방차원'에서 정신병원에 갖다온 사실이 밝혀지는 것만으로도 '범죄자 딱지'를 붙여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한 사회적 문제가 끝내 극단적인 범죄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정신질환이 부정적인 결과만 낳는 것이 아니라 '천재적 영감'을 떠오르게 하는 긍정적인 결과를 낳기도 한다. 영화 <뷰티풀 마인드>, <이미테이션 게임>, <아마데우스> 같은 것을 봐도 그렇다. 천재적 수학자, 과학자, 예술가 들은 하나같이 평범한 사람들과는 아주 다른 '생각'을 떠올려 온 인류에게 위대한 축복을 안겨주기도 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그런 역사적 천재들도 살짝 비틀어서 바라보면 모두 '정신질환자'였을 뿐이다. 그러니 모든 정신질환이 다 악영향을 끼치는 나쁜 사람이라는 오해는 하지 않고,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가 '통제 가능한 과학적 범주 안'으로 정신질환자들을 끌어들이고 품을 수 있어야만 한다.

이제 미래사회는 '인공지능의 시대'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상당수의 과학자들은 그때를 2045년쯤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아직은 실현불가능하지만 '뇌과학의 발달'은 인간의 뇌와 인공지능을 결합시키는 일을 가능하게 할지도 모른다. 그럼 인간은 '유한한 육체'를 버리고 '인간의 정신'만 따로 옮겼다가 '무한한 육체, 또는 기계'로 바꿔서 영생을 누리는 삶을 살 수도 있다. 물론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관점에서 '있을 수 없다'고 결론을 짓지 않는다는 가정 아래에서만 말이다. 딴에는 인간의 뇌와 인공지능이 서로 대결하는 양상으로 우리의 미래가 펼쳐질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렇게 어두운 미래가 아닌 밝은 미래를 전망할 수도 있다. 인간에겐 어렵고 복잡한 '단순반복적인 작업'은 인공지능에게 맡기고, 인간에겐 좀더 수월하지만 인공지능은 결코 할 수 없는 '창의적인 영역'을 도맡아서 서로 협업을 하는 미래사회를 말이다. 결국 뇌과학이 풀어낼 숙제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매우 민감하고 중요한 문제이니 우리 모두가 이해하고 적용하는데 '적극적 참여'를 할 수 있도록 뇌과학을 이해하고 있어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이해하기 힘들다면 최소한 관심이라도 기울이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과학은 윤리적인 틀 아래에서 밝고 건전하게 발전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특히 '뇌과학'은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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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탐정 엘리자베트 1 - 뮤직박스의 암호를 찾다 공주 탐정 엘리자베트 1
아니 제 지음, 아리안느 델리외 그림, 김영신 옮김 / 그린애플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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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CMXXXVIII / 그린애플 1번째 리뷰] 본격적인 '추리소설 탐독'을 준비하던 와중에 독특한 '탐정 소설'을 하나 발견했다. 무려 '프랑스 100만 부 판매 실적'을 선보인 베스트셀러다. 어린이책 치고는 대단한 실적이긴 한데 우리 나라보다 책 판매가 활발한 프랑스에서 '100만 부'가 대박인 것인지, 중박인 것인지는 가늠하기 힘들었다. 이럴 때 '아는 지인'이라도 좀 있었으면 디테일한 궁금증을 해갈하면 좋으련만, 그조차도 없이 오로지 '홀로서기'를 해야 하는 것이 정말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래도 재미난 책을 찾아내서 스스로 칭찬을 아끼지 않는 중이다.

이 책 <공주 탐정 엘리자베트>는 '추리소설'이라기엔 많이 부족하다. 추리의 요소보다는 '프랑스 궁정'에 대한 배경묘사가 훨씬 더 많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책 무척 재밌다. 실제 '역사적인 배경'을 소재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주인공은 프랑스 부르봉왕조의 공주 '엘리자베트(1764~1794)'로 실존 인물이다. 프랑스의 국왕 루이 15세의 손주이기도 하다. 그리고 엘리자베트의 오빠가 바로 '루이 16세'이고, 올케가 '마리 앙투아네트'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역사적 인물이 등장하며 '베르사유 궁전'을 배경으로 이야기가 펼쳐지면서 '왕실 가문의 사람들'이 펼치는 '궁정 이야기'가 매력적이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역사소설'인 것도 아니다. 실존 인물이 등장인물로 나오긴 하지만 '역사적 사실'을 다루고 있는 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단지 '실존 인물'을 등장시켜 몰입감을 최고조로 끌어올리는 효과를 톡톡히 보인 듯 싶다. 더구나 '공주'가 등장을 하니, 소녀 독자들에겐 더할 나위 없는 최고의 책일 것이다.

그럼 '탐정'은 언제 나오냐고? 글쎄, 이 책에서 '추리적 요소'를 찾기는 힘들다. 굳이 추리할 수 있는 내용이란 '암호 코드의 비밀'을 풀어서 '암호문'을 해독하는 장면이 유일하기 때문이다. 그럼 '공주 탐정'이 하는 일은 무엇이냐고? 음...탐정 역할을 공주가 맡기는 한데, 실상은 그 '탐정 놀이'를 통해서 엘리자베트가 '수학 공부'를 대신하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이 공주가 워낙 말괄냥이에 공부하고는 담을 쌓아서 간단한 덧셈과 구구단도 외우길 싫어했다고 하니 말이다. 그래서 궁정 최고의 '가정교사(실은 '귀족 출신')'가 엘리자베트를 전담하여 교육을 실시했지만, 번번이 공부하기 싫다고 퇴짜를 놓기 일쑤인 엘리자베트 앞에서 두손 두발을 들고 '교육 포기 선언'을 국왕 앞에서 하는 것으로 소설의 이야기가 시작할 정도다. 하지만 새로운 온 '가정교사(역시 귀족 출신)'는 이런 엘리자베트에게 딱 맞는 교육을 실시하였고, 그 교육 가운데 하나가 바로 '탐정 놀이'였던 것이다.

그리고 엘리자베트가 '공주 탐정'이 될 수밖에 없었던 사연은 바로 하프시코드 연주를 하는 '뮤직박스'에서 아주 비밀스런 문서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서 '추리'가 시작되는데, 무려 3부작에 걸쳐서 세 가지 '뮤직박스'를 찾아내어 차례차례 암호문을 풀어내어 마침내 엄청난 보물을 찾아내는 것이 책내용의 골자다. 그렇지만 그 추리적 요소가 너무나도 간략하고 간단하게 서술되고 있어서 '추리소설'이라고 불리기엔 많이 부족하다. 그래서 이 책을 소개할 땐 '추리소설'이 아닌 소녀들이 좋아할 '어린이책'이라고 소개하는 것이 적당할 듯 싶다.

여기서 '뮤직박스'라고 소개한 소재가 흔히 '오르골'이라고 불러주면 느낌이 좀 달라질 듯 싶다. 원래는 '뮤직박스'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은 표현이긴 하지만, 우리는 '일본식 표현'인 오르골이 더 익숙하기 때문이다. 근데 이 '뮤직박스'에 비밀이 숨겨져 있다는 것이 우연히 발견된다. '하프시코드(피아노처럼 생겼지만, 그보다는 좀 작은 건반악기. 피아노의 전신으로도 불린다)를 연주하는 뮤직박스'가 아름다운 연주를 자동으로 하는 것도 신기하지만, 그 아름다운 연주에 맞춰서 '인형 연주자'가 실제로 악기를 연주하는 것처럼 정교하게 움직이기 때문에 더 소중하게 여겼던 것이다. 그런데 그 뮤직박스를 엘리자베트 공주가 실수로 망가뜨렸다가 다시 고치는 과정에서 그 속에 '비민암호문'이 적힌 쪽지가 발견되면서 사건은 시작된다. 그리고 그 암호문의 내용은 '두 번째 뮤직박스'를 찾는 단서가 된다.

사건은 비록 매우 단순하지만, 그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서 공부하기 싫어하는 엘리자베트 공주는 공부를 즐겁게 할 수 있는 방법도 배우게 되고, 평생을 함께 한 소중한 친구도 얻게 된다. 그리고 엘리자베트 공주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도 새삼 깨닫게 되는데, 과연 부러울 것도 없고 부족할 것도 없을 '아름다운 공주'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게 된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는 것이 이 책을 재미나게 읽을 수 있는 방법중 하나일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뮤직박스'에 담겨 있는 비밀은 과연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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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리마스터판)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창비 리마스터 소설선
한강 지음 / 창비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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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CMXXXVII / 창비 9번째 리뷰] 이제는 너무도 유명해진 '한강의 소설들'을 뒤늦게 탐독하고 있다. 하지만 리뷰로 옮기기가 쉽지 않다. 노벨문학상의 무게감 때문이 아니라 '한강의 주제의식'으로 파고들기에 어려움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 그리고 <채식주의자>를 읽었는데 하나같이 다 어렵다.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지, 그것에 대한 '감'을 잡고 싶다.

이 책의 말미에 한강은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을 [고통 3부작]으로 소개하였다. 물론 작가 본인이 이 작품들을 쏟아내기까지 얼마나 큰 '고통'이 있었을지 충분히 짐작이 가니, 수긍이 가는 표현이기도 했다. 하지만 '독자'인 내가 느끼기로는 이 세 작품은 [불편 3부작]이었다. 첫 번째에는 '채식'이 불편했고, 두 번째에는 '불륜'이 불편했으며, 세 번째에는 '정신병'이 불편했다. 세 가지 모두 우리 사회가 받아들이고 포용하기에 너무도 불편한 것들이니 말이다. 이제부터 하나하나 따져볼 것이다.

'채식'이 불편한 까닭은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서 유별나기 때문이다. 가리는 음식이 한두 가지가 아닌 탓에 함께 식사할 때마다 '별도'로 챙겨주어야 하는 수고를 더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배려 차원'에서 그런 정도의 수고는 얼마든지 할 수 있고, '채식주의'가 나쁜 짓도 아니기 때문에 채식하는 사람을 차별할 근거는 전혀 없다. 그렇지만 아직 우리 사회가 채식주의자들에게 배려를 할 정도로 충분히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역시나 '불편'할 수밖에 없다. 우리 전통음식이 '육식'이 그리 많지 않지만, 철저하게 '비건'을 실행하는 사람들에게 '한식'은 동물들의 절규가 한없이 서려있기 때문이다. '고기육수'가 그렇고, 각종 '젓갈'은 또 어떤가? '해물탕'이 보글보글 끓어오를 때 뚜껑을 열고 올려지는 '낙지 한마리'는 화룡점정일 것이다. 한 겨울 얼음위에서 벌어지는 축제(!)는 또 어떤가? 그야말로 '살육의 현장'이고 '학살자들의 환호성'으로 가득하지 않은가? 덩치가 큰 '고래사냥'과 같은 것만 끔찍한 것이 아니다. '비건'을 선언한 이들은 그러한 모든 '살풍경'을 멈춰달라는 간절한 소망을 담고 있다. 그렇기에 '채식주의자'들의 까다로운 요구사항은 불편하지만 어느 정도는 참을 수 있다.

하지만 '불륜'의 경우는 좀 다를 것이다. 이건 '불편'을 넘어 부도덕하고 반인륜적인 범죄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사랑과 전쟁>에서 보여줬던 '흔한(?) 일상'일지라도, 형부와 처제가 상간을 벌이는 일을 아름다운 예술로 포장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런데 <몽고반점>을 읽다보면 그것이 또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다. 왜냐면 '예술의 세계'에서는 그게 또 말이 되는 소재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예술작품을 위해서 '옷을 벗고 알몸이 되는 일'은 비윤리적인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예술이라 하더라도 '민감한 주제'일 수밖에는 없다. 더구나 예술을 빙자한 '외설'이 너무도 판을 치는 속물적이고 저급한 예술쟁이들이 허다하지 않은가. 이들은 외설인 '포르노그라피'를 예술로 인정받기 위해 부던히도 애를 쓴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예술가든, 일반인이든 '예술'과 '포르노'를 구분하는 것은 너무 쉽기 때문이다. 그건 아름다움이 주는 '황홀감'과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의 '낯뜨거움'을 구분하는 것처럼 쉬운 일이다. 그런데 형부는 처제의 '몸'을 예술적 도구로 삼아 자신의 예술혼을 불태우고, 꽃피우려 했으나 결국은 '상간'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이것은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그냥 '범죄'다. <사랑과 전쟁>에서 보여지는 일상적인 불륜과 다를 바가 없다. 그나마 이것을 '예술'로 포장하려 했다면 아무도 모르게 '둘만의 예술'로 한정했어야 했을 것이다. 평생 비밀로 하고, 두 번 다시 시도되지 않았어야 '최소한의 예술작품'이 되었을 것이다. 이걸 어떻게 '공개'할 수 있겠는가? 아무리 아름다운 예술이었기로소니 '그 작품(몽고반점2)'을 어디에 내놓을 수 있었겠느냔 말이다. 평생 비밀로 간직하고, 결국엔 '소멸'시켰어야 할 아름다움이었다. 지독하게 불편한 예술품이란 제목으로 말이다.

마지막 '정신병'은 앞의 두 작품의 불편마저 명확하게 드러내주는 '최종적 불편함'이었다. 정신병동에 입원할 지경이 된 영혜가 정말로 미쳤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영혜가 '채식주의자'와 '몽고반점'에서 보여준 행동들이 '나무 불꽃'에서 그 이유가 밝혀지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바로 '영혜가 나무가 되어가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영혜는 육식을 포기하고 '채식'을 선택했으며, 겉옷을 벗어던지고 '알몸'이 되는 것이 편했고, 형부가 영혜의 몸에 직접 그려준 '꽃'을 보고 즐거워 했으며, 정신병동에 입원했을 때에 '물구나무'를 서고 다리를 벌리는 자세로 꼼짝 않고 있었으며, 동물이 먹는 '먹이'를 거부하고, 식물이 되기 위해 '햇빛'과 '물'만을 찾았고, '뿌리'를 내릴 자리를 찾아다녔다. 이런 행위 모두가 일반사람들에겐 그저 '미친짓'으로 보일 뿐이지만, 영혜 자신에겐 실로 중차대한 '순서'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를 지켜보는 독자는 '불편, 그 자체'다. 왜 그녀는 '채식주의자'로 멈추지 못하고, 끝끝내 '인간'이길 포기한 것일까? 과연 무엇이 영혜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나? 영혜, 스스로가 말하기로는 모든 것은 '꿈' 때문이라고 했다. 꿈에 나온 '얼굴'이 두렵고 무서워서 이 모든 '불편함'을 선사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진실로 불편한 것은 '영혜의 미친짓'이 아니다. 한 사람에게 집중된 '폭력'이 미치도록 불편했던 것이다. 왜 우리 사회는 이토록 옹색하고 옹졸한 것일까? 왜 한 사람의 '아픈 환자'를 이처럼 모질게 대하느냔 말이다. '유별난 사람'을 포용할 줄 모르는 사회는 끔찍하다. 모두가 정상인데 '비정상'인 것이 섞여 있으면 아름답지 못하고, 불편한 것은 사실이다. 허나 '개성 넘치는 사회'가 주는 활력을 감안한다면, 넘치는 재능과 끼를 주체하지 못해 '색다른 개성'을 뽐내는 것이 주는 아름다움을 우리가 모르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그렇다면 '영혜'가 보여주는 '유별남'을 그의 남편이 보듬어주고, 처댁 식구들이 감싸주고, 이웃들이 배려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영혜는 고통스러워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영혜가 뿜어내는 '불편함'도 더는 불편이 아니었을 것이다.

우리는 너무 각박한 사회에서 살고 있다. 서로에게 조금이라도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부던히도 애를 쓰고 살고 있고, 조금이라도 '피해'를 받고, 그것이 '손해'로 이어지면 참지 못하고 분노를 뿜어낸다. 그리고 그런 분노를 '폭력의 근거'로 삼아 정당방위라고 애써 포장한다. 자신의 속좁음, 옹졸함 따위는 무던히도 감추면서 말이다. 그래서 난 영혜가 보여주는 불편은 감당하려 한다. 지금까지는 나도 옹졸하기 짝이 없었지만 말이다. 그런 불편을 남에게 끼치게 되면 일단 주변사람들이 먼저 고통스러워지기 마련이다. 그런 고통도 우리가 함께 나누면 어떨까 싶다. 우리는 할 수 있을 듯 싶어서 그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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