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 (리마스터판)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창비 리마스터 소설선
한강 지음 / 창비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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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CMXXXVII / 창비 9번째 리뷰] 이제는 너무도 유명해진 '한강의 소설들'을 뒤늦게 탐독하고 있다. 하지만 리뷰로 옮기기가 쉽지 않다. 노벨문학상의 무게감 때문이 아니라 '한강의 주제의식'으로 파고들기에 어려움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 그리고 <채식주의자>를 읽었는데 하나같이 다 어렵다.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지, 그것에 대한 '감'을 잡고 싶다.

이 책의 말미에 한강은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을 [고통 3부작]으로 소개하였다. 물론 작가 본인이 이 작품들을 쏟아내기까지 얼마나 큰 '고통'이 있었을지 충분히 짐작이 가니, 수긍이 가는 표현이기도 했다. 하지만 '독자'인 내가 느끼기로는 이 세 작품은 [불편 3부작]이었다. 첫 번째에는 '채식'이 불편했고, 두 번째에는 '불륜'이 불편했으며, 세 번째에는 '정신병'이 불편했다. 세 가지 모두 우리 사회가 받아들이고 포용하기에 너무도 불편한 것들이니 말이다. 이제부터 하나하나 따져볼 것이다.

'채식'이 불편한 까닭은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서 유별나기 때문이다. 가리는 음식이 한두 가지가 아닌 탓에 함께 식사할 때마다 '별도'로 챙겨주어야 하는 수고를 더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배려 차원'에서 그런 정도의 수고는 얼마든지 할 수 있고, '채식주의'가 나쁜 짓도 아니기 때문에 채식하는 사람을 차별할 근거는 전혀 없다. 그렇지만 아직 우리 사회가 채식주의자들에게 배려를 할 정도로 충분히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역시나 '불편'할 수밖에 없다. 우리 전통음식이 '육식'이 그리 많지 않지만, 철저하게 '비건'을 실행하는 사람들에게 '한식'은 동물들의 절규가 한없이 서려있기 때문이다. '고기육수'가 그렇고, 각종 '젓갈'은 또 어떤가? '해물탕'이 보글보글 끓어오를 때 뚜껑을 열고 올려지는 '낙지 한마리'는 화룡점정일 것이다. 한 겨울 얼음위에서 벌어지는 축제(!)는 또 어떤가? 그야말로 '살육의 현장'이고 '학살자들의 환호성'으로 가득하지 않은가? 덩치가 큰 '고래사냥'과 같은 것만 끔찍한 것이 아니다. '비건'을 선언한 이들은 그러한 모든 '살풍경'을 멈춰달라는 간절한 소망을 담고 있다. 그렇기에 '채식주의자'들의 까다로운 요구사항은 불편하지만 어느 정도는 참을 수 있다.

하지만 '불륜'의 경우는 좀 다를 것이다. 이건 '불편'을 넘어 부도덕하고 반인륜적인 범죄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사랑과 전쟁>에서 보여줬던 '흔한(?) 일상'일지라도, 형부와 처제가 상간을 벌이는 일을 아름다운 예술로 포장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런데 <몽고반점>을 읽다보면 그것이 또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다. 왜냐면 '예술의 세계'에서는 그게 또 말이 되는 소재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예술작품을 위해서 '옷을 벗고 알몸이 되는 일'은 비윤리적인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예술이라 하더라도 '민감한 주제'일 수밖에는 없다. 더구나 예술을 빙자한 '외설'이 너무도 판을 치는 속물적이고 저급한 예술쟁이들이 허다하지 않은가. 이들은 외설인 '포르노그라피'를 예술로 인정받기 위해 부던히도 애를 쓴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예술가든, 일반인이든 '예술'과 '포르노'를 구분하는 것은 너무 쉽기 때문이다. 그건 아름다움이 주는 '황홀감'과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의 '낯뜨거움'을 구분하는 것처럼 쉬운 일이다. 그런데 형부는 처제의 '몸'을 예술적 도구로 삼아 자신의 예술혼을 불태우고, 꽃피우려 했으나 결국은 '상간'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이것은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그냥 '범죄'다. <사랑과 전쟁>에서 보여지는 일상적인 불륜과 다를 바가 없다. 그나마 이것을 '예술'로 포장하려 했다면 아무도 모르게 '둘만의 예술'로 한정했어야 했을 것이다. 평생 비밀로 하고, 두 번 다시 시도되지 않았어야 '최소한의 예술작품'이 되었을 것이다. 이걸 어떻게 '공개'할 수 있겠는가? 아무리 아름다운 예술이었기로소니 '그 작품(몽고반점2)'을 어디에 내놓을 수 있었겠느냔 말이다. 평생 비밀로 간직하고, 결국엔 '소멸'시켰어야 할 아름다움이었다. 지독하게 불편한 예술품이란 제목으로 말이다.

마지막 '정신병'은 앞의 두 작품의 불편마저 명확하게 드러내주는 '최종적 불편함'이었다. 정신병동에 입원할 지경이 된 영혜가 정말로 미쳤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영혜가 '채식주의자'와 '몽고반점'에서 보여준 행동들이 '나무 불꽃'에서 그 이유가 밝혀지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바로 '영혜가 나무가 되어가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영혜는 육식을 포기하고 '채식'을 선택했으며, 겉옷을 벗어던지고 '알몸'이 되는 것이 편했고, 형부가 영혜의 몸에 직접 그려준 '꽃'을 보고 즐거워 했으며, 정신병동에 입원했을 때에 '물구나무'를 서고 다리를 벌리는 자세로 꼼짝 않고 있었으며, 동물이 먹는 '먹이'를 거부하고, 식물이 되기 위해 '햇빛'과 '물'만을 찾았고, '뿌리'를 내릴 자리를 찾아다녔다. 이런 행위 모두가 일반사람들에겐 그저 '미친짓'으로 보일 뿐이지만, 영혜 자신에겐 실로 중차대한 '순서'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를 지켜보는 독자는 '불편, 그 자체'다. 왜 그녀는 '채식주의자'로 멈추지 못하고, 끝끝내 '인간'이길 포기한 것일까? 과연 무엇이 영혜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나? 영혜, 스스로가 말하기로는 모든 것은 '꿈' 때문이라고 했다. 꿈에 나온 '얼굴'이 두렵고 무서워서 이 모든 '불편함'을 선사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진실로 불편한 것은 '영혜의 미친짓'이 아니다. 한 사람에게 집중된 '폭력'이 미치도록 불편했던 것이다. 왜 우리 사회는 이토록 옹색하고 옹졸한 것일까? 왜 한 사람의 '아픈 환자'를 이처럼 모질게 대하느냔 말이다. '유별난 사람'을 포용할 줄 모르는 사회는 끔찍하다. 모두가 정상인데 '비정상'인 것이 섞여 있으면 아름답지 못하고, 불편한 것은 사실이다. 허나 '개성 넘치는 사회'가 주는 활력을 감안한다면, 넘치는 재능과 끼를 주체하지 못해 '색다른 개성'을 뽐내는 것이 주는 아름다움을 우리가 모르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그렇다면 '영혜'가 보여주는 '유별남'을 그의 남편이 보듬어주고, 처댁 식구들이 감싸주고, 이웃들이 배려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영혜는 고통스러워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영혜가 뿜어내는 '불편함'도 더는 불편이 아니었을 것이다.

우리는 너무 각박한 사회에서 살고 있다. 서로에게 조금이라도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부던히도 애를 쓰고 살고 있고, 조금이라도 '피해'를 받고, 그것이 '손해'로 이어지면 참지 못하고 분노를 뿜어낸다. 그리고 그런 분노를 '폭력의 근거'로 삼아 정당방위라고 애써 포장한다. 자신의 속좁음, 옹졸함 따위는 무던히도 감추면서 말이다. 그래서 난 영혜가 보여주는 불편은 감당하려 한다. 지금까지는 나도 옹졸하기 짝이 없었지만 말이다. 그런 불편을 남에게 끼치게 되면 일단 주변사람들이 먼저 고통스러워지기 마련이다. 그런 고통도 우리가 함께 나누면 어떨까 싶다. 우리는 할 수 있을 듯 싶어서 그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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