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 산책 1990년대편 2 - 3당합당에서 스타벅스까지 한국 현대사 산책 17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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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1990년대편 2 : 3당 합당에서 스타벅스까지> 강준만 / 인물과사상사 (2006)

[My Review MMCCCII / 인물과사상사 42번째 리뷰] 고품격 월간 리뷰전문잡지 <책이 있는 구석방> 일백서른한 번째 리뷰는 세계속의 대한민국으로 거듭나려는 몸부림이 안쓰러운 <한국 현대사 산책 1990년대편 2>다. 나는 93학번이다. 그런 까닭에 이 책에 나오는 모든 내용을 젊은 20대 시절에 다 겪었다. 물론 잘알았던 내용도 있지만 잘모르고 지나가버린 사건사고들도 엄청 많았다. 그럼 이 시대를 한마디로 뭐라 정리하면 좋을까? '세계화'라고 부르면 적당할 것 같다. 대한민국이란 좁은 '우물'에서 벗어나 저 넓은 '세계'로 뻗어나가려는 노력이 엿보였기 때문이다. 80년대 '3저 호황'의 탄력을 받아 90년대 초반까지도 대한민국 경제는 경제적인 풍요를 만끽했다. 부모세대가 살던 빈곤의 60년대를 생각하면 참으로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나는 '가난'을 면치 못했고, '중산층'이라 자부하던 부모님이셨지만, 그 흔한 '용돈'도 받지 못하고 친구들에게 늘 얻어 먹고 다니며 학창시절을 보냈기에 그런 풍요를 누려본 적은 없다. 하지만 내 주위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은 확실히 달라졌다. 거리에는 '오렌지족''야타족'이 즐비했고, '날라리'가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TV속 연예인을 흉내내는 젊은이들이 많았고, 그들은 젊음과 자유를 노래하며 몸을 흔들고 다녔다. 확실히 달라진 풍경이었다. 하지만 정치는 여전히 '구태'를 벗지 못했다. 6공화국에 이어 '문민정부'가 들어섰지만 세상은 그닥 달라지는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통령에게 집중된 권력으로 인해 과거의 군부독재시절과 다를 바가 없었다. 아니 '소통령'이라 불리던 김현철이 존재했기에 조금은 달라진 양상이라고 불러야 했을까? 암튼 책속으로 풍덩 빠져 보자.

<한국 현대사 산책 1990년대편 2> 관점 포인트 : 90년대는 누가 뭐라해도 '민주화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과거처럼 '군부독재'가 지배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자유'를 만끽하며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 다 해보려 했다. 더구나 미국도 1999년까지는 경제성장이 최고조였기 때문에 풍요로운 경제속에서 세계적으로 자유사상이 거리낌없이 퍼져나갔다. 거기다 1990년대가 시작하자마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독일 통일이 이루어졌고, '소련'이 해체되면서 공산주의는 몰락하게 되었고, 바야흐로 '냉전 시대'가 종결된 것도 한 몫 했다. 더구나 새천년을 맞이하는 '세기말 현상'이 넘쳐나던 시절이었다. 아름답다 못해 퇴폐적인 풍조가 널리 퍼졌고, 하나의 사상에 얽매이기보다는 그저 흥청망청 놀자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대한민국도 크게 벗어나지는 못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이런 자유로운 풍요를 완벽히 누리지는 못하는 분위기가 연출되곤 했다. 94년엔 '김일성 사망', '성수대교 붕괴', 95년엔 '삼풍백화점 붕괴', '대구 지하철 화재' 등 나라가 망할 것 같은 위기감이 맴도는 굵직한 사건사고가 해마다 일어났기 때문이다. 정치권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모양새였지만, 딱히 하는 일은 없었다. 아니 '혼선'을 주어 국민들을 혼란에 빠뜨리지 않는 것이 다행일 정도였다. 김영삼 정부는 대북관계를 개선하려 김일성과 여러 차례 회담을 시도했다. 이 회담이 삐거덕거리더니 '서울 불바다'를 거론하며 북쪽의 협박성 발언이 마구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까닭인 즉슨, 북한이 먹고 살기 팍팍해지자 '핵무기 개발'을 하겠다고 선언해버린 것이다. 미국과 한국은 이를 막으려 여러 차례 회담을 시도했지만, 북쪽의 대답은 '핵개발'을 포기하는 대신 그에 상응하는 '원조'를 확답받으려 했었는데, 김영삼 정부는 이 사안에 미적거리는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그러자 북쪽은 '서울 불바다' 발언을 하면서 전쟁 위협까지 해버린 것이다. 그러자 김영삼 정부는 국민들에게 알아서 생필품을 조달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에 수많은 국민들이 시장에 나온 물품을 사들이기 시작했고, 일부는 너무 많이 쟁여놓는 '사재기'까지 벌어지게 되었다. 그러자 언론은 '사재기'는 망국의 징조라며 국민들이 몰지각하게 행동해서는 안 된다며 훈계(?)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에 김영삼 정부는 무슨 조치를 내렸을까? 그저 관망만 하면서 아무런 대책도, 가이드라인도 발표하지 않고 흐지부지 넘어가고 말았다. 이후의 사건들도 대동소이했다. 수습하는 것은 언제나 아픔을 겪은 이웃을 도우려는 온국민의 따뜻한 마음 뿐이었다. 그렇게 얼추 수습이 되고 나서야 정부가 나서서 뒷정리를 하는 모양새가 연이어 나왔다. 하지만 그 정도만이라도 하는 정부가 대견했을지도 모르겠다. 과거 군부독재시절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와중에도 이건희를 비롯한 대기업들은 '세계화'에 발맞춰 우리 기업이 세계로 뻗어나가는데 큰 공을 세우고 있었다. 특히 반도체 공장을 세우려고 노력을 아끼지 않던 삼성 이건희는 명언을 하나 남겼다. "정치는 4류, 행정은 3류, 기업은 2류"라고 말이다. 그간 대한민국 경제가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군사작전'하듯 밀어붙인 과거의 군부독재였지만, 90년대 들어 '민주정부'가 앞장서서 뭔가를 하지도 못하고 옛방식만 답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업은 '세계화'에 발맞춰 과감히 투자하고 성장을 계획했지만, 이들의 발목을 잡은 것은 정치권이었고, 부실한 행정력이었다. 비단 기업문화에만 후진적인 시스템을 적용했을까? 사회전반적으로 '대통령'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구조에서 크게 탈피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김영삼이 대단한 '정치인''행정가'였을까? 민주화 투쟁의 산증인이긴 했지만, 그밖에 다른 역량은 없다시피 했다. 그런데도 대통령 신분이기에 국민 모두가 '김영삼의 심기'를 건들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가려 했다. 더구나 김영삼은 '고지식'한데다가 '고집'도 쎘다. 이런 대통령의 심기를 거스리지 않을 수 있는 단 한 사람이 바로 '소통령'으로 불리던 김영삼의 아들 김현철이다. 자칫 '국정농단'이 될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김현철'이 권력을 명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대신에 김영삼 대통령 앞에서 '할 말'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기에 '소통령'이라 부르며, 그의 영향력이 말도 하지 못하게 드높였다.

나가는 글 : 이런 와중에 대학가는 '한국대학생총연합(한총련)'이 세를 자랑했다. 그렇게 열망하던 '민주화'를 이뤘는데 당시 대학생들이 무엇을 바랐기에 이토록 극렬한 시위를 이어갔던 것일까? 바로 '민족통일'이었다. 기성세대는 통일에 대한 염원을 바란다면서도 실질적으로 성과를 내지는 못하고 있었다. 이에 학생들이 나서서 민족통일을 말하고, 우리 민족의 장래에 관한 청사진을 말하기에 이른 것이다. 애초에 정부가 나서서해야 할 일임에도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94년에 군입대를 했기 때문에 '대학생 신분'으로 한총련에 가담해 시위를 경험하지는 못했다. 96년에 제대를 한 뒤에 복학을 하니, 대학가에서 시위를 찾아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 사이 '한총련'이 거의 와해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당시 군내부에서는 '주체사상파(주사파) 색출'을 한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북한의 지령을 받아 대남공작의 성격으로 학생시위를 이끌거나 참여했던 이들을 뿌리 뽑겠다며 내놓은 조치였는데, 그래서 군시절에 원없이 '반공교육'을 받곤 했다. 국민학교시절에 받던 그 방공교육을 군대에서 또 배웠던 것이다. 이렇게 한총련이 와해가 된데에는 96년 '북한 잠수함 침투 사건''한총련 여학생 성추행 사건'이 빌미가 되어 구속 기소된 400여 명의 학생 가운데 51명이 실형 선고를 받으면서 해체되었다. 북한이 끊임없이 도발을 벌이고 있고, 학생시위대가 문란한 짓을 벌이고 있으니 '학생시위의 순수성'을 의심받기 시작했던 것이다. 국가 안위를 도외시하고, 사회질서를 어지럽히는 학생시위를 더는 묵과하지 않겠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팽배했던 것이다. 이에 한총련은 폭력적인 시위를 거의 하지 못했고, 간간히 집회가 이어졌지만 집회를 하더라도 마땅히 할 것이 없어져버린 까닭에 학생시위는 점차 수그러 들었던 것이다.

한편 김영삼 정부는 'OECD 가입'을 공약으로 내걸었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 때마침 95년에 수출이 1000억 달러를 넘어서자 김영삼 정부는 그대로 공약을 밀어붙인 것이다. 그렇게 1996년 대한민국은 29번째 회원국으로 가입하게 되었다. 허나 80년대부터 OECD 가입을 추진했었지만 "잃을 것이 더 많다"는 의견이 더 많아서 미루고 또 미뤘던 것인데, 김영삼 정부는 내친김에 밀어붙였던 것이다. 이듬해 97년에 벌어질 일은 상상밖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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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1990년대편 1 - 3당합당에서 스타벅스까지 한국 현대사 산책 16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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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1990년대편 1 : 3당 합당에서 스타벅스까지> 강준만 / 인물과사상사 (2006)

[My Review MMCCCI / 인물과사상사 41번째 리뷰] 고품격 월간 리뷰전문잡지 <책이 있는 구석방> 일백서른 번째 리뷰는 드디어 바라고 바라던 '문민정부의 탄생'과 함께 'IMF 금융위기'로 추락한 90년대 대한민국 사회의 민낯을 밝힌 <한국 현대사 산책 1990년대편 1>이다. 대한민국의 90년대는 '문화의 시대'였다. 적어도 지식인들은 그렇게 말했다. 허나 우리는 품격 높은 문화를 이룩하지 못한 때였다. 아직은 말이다. 그럼 어떤 문화가 주름 잡던 시대였을까? 강준만은 '소비문화'를 꼽았다. 시장논리의 지배를 받는 절제없고 허세가 난무한 그런 시대정신의 승리였던 것이라면서 말이다. 아닌 게 아니라 그 덕분에 우리는 무절제한 소비와 향락을 즐기다 'IMF 환란'을 맞이하고 한동안 통곡하고 고통에 겨워 신음했다. 그리고 2000대가 넘어서도 '소비문화'는 수그러들지 않았고, 환란을 극복한 뒤에 무서운 속도로 다시 살아나 한국인의 정신을 지배하고 말았다. 이는 2026년인 지금도 마찬가지다. 절제보다 소비가 미덕인 사회에서 부를 쌓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천박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럼 책 속으로 풍덩 빠져 보자.

<한국 현대사 산책 1990년대편 1> 관점 포인트 : 1990년 새해 벽두에 노태우 정권은 '3당 합당'을 선언했다. 노태우 정권이 들어서자 맹렬하게 비난을 하던 김영삼도 어느덧 수위를 낮추더니 급기야 정권에 야합하는 모양새를 보였던 것이다. 이를 두고 민주계열에서는 '배신'이니 '배반'이니 '치매'라는 입에 담지 못할 상소리가 난무했지만, 김영삼은 노태우가 군사작전하듯 밀어붙이는 3당 합당에 협력하고 말았다. 그렇게 김영삼과 김종필이 합당을 해서 민주자유당(민자당)이 창당되었고, 이들은 노태우 정권을 수호하는 '보수연합'에 시동을 걸었다. 일설에는 김영삼이 김대중이 이끄는 민정당에 이어 '제2 야당'에 만족할 수 없었기에 차라리 '여당쪽'으로 선회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왔지만, 그보다는 김영삼이 이끄는 통일민주당을 옥죄는 검찰 수사에 항복했기 때문이라는 얘기가 더 신빙성이 높다. 김영삼의 비서실장이었던 서청원의 증언에 따르면, '동해 보궐선거 후보매수 사건'을 수사하던 검찰이 매수자금을 조사하던 중 그 자금이 '김영삼의 은행구좌'에서 나왔다는 결정적인 증거를 확보하였기 때문이라는 얘기다. 어찌 되었든 김영삼은 '3당 합당'을 통해서 노태우 정권의 뒤를 잇는 유력한 대통령 후보가 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정치적 위기를 모면하고 되려 반격하는 노련한 정치적 셈법을 성공한 셈이다. 물론 여전히 김영삼과 김대중의 맞대결에서 누구도 승부를 예측할 수 없는 팽팽한 긴장감이 유지되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애초에 6공화국은 오래 유지될 수 없는 '한계'가 분명했다. 그런 한계점을 안고 있는 노태우는 김영삼과의 당내 경쟁에서 점차 밀려났고, 다음 대권은 김영삼에게 물러줄 수밖에 없는 처지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93년 대선에서 DJ와 YS 가운데 누가 승리할 것인지가 관건이 되었다. 누가 승리하든 그토록 바라던 '민주정권의 승리'가 예약되었다.

그렇게 시대는 점차 바뀌었다. 신군부가 서슬 퍼런 독재를 펼치던 시대는 저물고 바야흐로 '문민정부'가 들어설 준비를 하고 있던 것이다. 사회는 빠르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간 억눌려오던 것들이 한껏 뿜어져 나오는 시대를 만끽했던 것이다. 허나 '자유'가 지나치면 '방종'이 된다고 했던가. 세상은 빠르게 바뀌고 있는데 이를 뒷받침해줄 '사상'은 뒤쳐지고 있었기에 우리 사회에는 여러 곳에서 '문화지체 현상'이 발현되고 있었다. 대통령제의 폐해를 지적하면서 '내각제'를 추진했지만, 권력자가 되면 권력을 쉽게 내려놓지 못했다. 그래서 대선에서 승리하기 위해 손가락 걸고 야합을 하며 '난 대통령, 넌 내각총리'를 약속하지만, 일단 대통령에 당선되고 나면 이를 번복하기 일쑤였다. 아니 대통령이 될 것까지도 없었다. 당 대표가 되기만 해도 권력을 나누는 일은 '있었더라도 없던 일'이 되기 일쑤였다.

비단 정치권에서만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은 아니다. 온 사회가 천지개벽이라도 하는 듯이 엄청난 변혁을 보여줬다. 그래서 온갖 '자유'를 만끽할 수 있었지만, 그런 자유도 누려본 적이 있어야 제대로 누리는 법이다. 대표적인 것이 '신용카드'였다. 당장 손에 쥔 현금이 없어도 마음껏 사고 싶은 물건을 쓱쓱 긁고 살 수 있다는 '신용카드'는 한 달 뒤에 엄청난 액수를 청구받으면서 깜짝 놀라게 되었다. 제 정신을 갖고 있거나 '경제상식'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었더라면 당장 '신용카드'를 없애고 빚청산부터 한 뒤에 알뜰살뜰한 소비생활을 이어나갔을테지만, 그런 상식을 배운 적이 없었던 세대는 무책임하게 '카드 돌려막기(일명 '카드깡')'로 위기를 해결하려 했고, 감당할 수 없이 불어나는 이자대금을 지불하지 못하고 끝내 '신용불량자'로 낙인 찍혀서 일상생활조차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고 말았다.

92년도에는 '서태지와 아이들'이 등장했다. 이들의 노래를 들은 '기성세대'는 노래 같지도 않다며 폄하했지만 10대, 20대 젊은 세대는 '랩 음악'이라고 하는 새로운 장르에 신선함을 느끼며 열광했다. 그렇다고 서태지가 추구하는 음악성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열광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기성세대의 주류 음악과는 뭔가 다른 차원을 보여줬기에 열광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대중문화를 '소비'하는 젊은 세대가 천박하다는 얘기는 아니다. 아직 이들이 체감하는 색다름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고 누구도 '설명'해주지 못하기 때문에 얼떨떨해 할 뿐이었다. 그렇게 바뀌는 세상에 온몸으로 부딪히며 왜 전율하고 있는지도 모른채 그저 온몸을 던지던 '새 물결'을 만끽했던 것이다.

나가는 글 : 여기에 마광수와 이문열의 '시대관'이 대립하고 충돌하는 일도 벌어졌다. 92년 연세대 마광수 교수가 직접 쓴 <즐거운 사라>가 음란 시비에 휘말리면서 검찰에 의해 전격 구속되었다. '음란물 제작 및 배포 혐의'가 구속 사유였다. 책 내용 가운데 여주인공 사라가 학생 신분으로 대학교수에게 학점을 얻기 위해 목적으로 유혹하고 변태적인(?) 성관계를 하는 내용이 문제시 되었지만, 이 정도 수준의 내용을 가지고 '야한 소설'이란 딱지를 붙일 만한 이유가 있겠느냔 말이다. 정작 문제는 마광수 교수가 평소에 '기성문학'에 대한 날선 비판을 일삼았다는 점이 대중문학인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던 점이다. 그런 까닭에 정권이 '문학'에 법의 잣대를 들이대며 '검열'하려 할 때 '표현의 자유''문학인들의 동료의식'으로 마광수 교수를 옹호하지 않고 되려 '마광수 씨'라고 호칭하며 외면해버린 것이다.

이에 대해 당대 유명작가였던 '이문열'은 <시대와의 불화>라는 산문집을 내며 '지식인의 권위주의 문화'를 날카롭게 지적했다. 그러면서 대학교수라는 신분으로 그토록 '교육적인 효과'를 강조하던 양반이 그런 야한 소설이나 써대는 꼴을 비아냥거리는 투로 발언해버린 것이다. 하지만 평소 마광수 교수의 모습을 잘 아는 지인들은 이런 이문열의 비난(?)에 대해 반론을 내놓기도 했다. 마광수 교수는 평소 교수들에게도 "학생은 아랫사람이 아니다"라는 소신을 말하며, 꼰대 지식인들을 비판했단다. 더구나 지나가는 학생과도 항상 깎듯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받아주어서 되려 학생들이 황송해하는 일화를 많이 남긴 교수이기도 했다. 그런 마 교수가 <즐거운 사라>를 쓴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당시 '성 풍속도'가 퇴폐적이고 기형적으로 문란한 성접대를 하며 '기생관광'으로 수익창출을 하던 박정희, 전두환 정권에 대한 날선 비판도 담았을 것이다. 그러면서 "너희들은 그토록 난삽하고 문란한 성생활을 즐기며 부를 창출하기까지 하면서 지식인과 민주화 투쟁을 하는 이들의 도덕성을 문제 삼으며 비난할 자격이 있기나 하느냐?"면서 진정한 '성 자유화'를 논하려면 <즐거운 사라>에 나오는 사라처럼 찐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날카로운 사회비평을 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마광수 교수의 '깊은 뜻'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그 당시에는 거의 없었던 것이 대략 난감이다. 마 교수는 '시대를 너무 앞서간 죄'를 치룰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박정희 복고주의'도 단단히 유행했다. 이 시절만큼 언론, 출판, 방송 등 문화 분야에서 '박정희 띄워주기'가 성공한 사례가 없었기 때문이다. 동아일보의 <남산의 부장들>, 한국일보의 <실록 청와대>, 중앙일보의 <청와대 비서실>, 월간조선 등의 월간지도 '박정희 비화'를 소개하고 판매하는데 열을 올렸다. 또한 사회 저명인사들의 '공개 발언'도 여실했다. 이때부터 공인들이 '박정희를 존경한다'는 말을 아주 당당하게 해댔기 때문이다. 여기에 MBC드라마 <제3공화국>이 절찬 방영하고 인기를 끌었으며, 드라마 중간중간에 '다큐형식'으로 관계자의 증언을 삽입하여 박정희 정권 시절을 정당화하는데 동원되기도 했다. 특히 월간조선의 조갑제는 93년 11월호에 <박정희와 김영삼의 화해>라는 글에서 "그의 장기집권은 권력욕보다는 일에 대한 욕심, 조국근대화는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사명감에서 비롯된 바가 더 크다"거나 "인간이 가장 비참해지는 상태가 배고픈 상태라면 박 대통령은 인권 문제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해결한 것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하며 큰 인기를 구가했다. 이런 발언의 진짜 목적은 '김영삼 폄하'였지만, 어찌된 일인지 김영삼 쪽 사람들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에 정치평론가 고성국은 "필자는 대통령이 이렇게 혹독하게 공격당하는데도 침묵으로 일관한 정부를 알지 못한다"면서 1년 넘게 연재하면서 현 집권여당과 현 대통령을 비꼬고 있는데도 미동조차 하지 않는 김영삼 측을 이해할 수 없다고 개탄했다. 암튼 세상이 요상하게 돌아가고 있던 것만은 틀림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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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1980년대편 3 - 광주학살과 서울올림픽 한국 현대사 산책 14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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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1980년대편 3 : 광주학살과 서울올림픽> 강준만 / 인물과사상사 (2003)

[My Review MMCCC / 인물과사상사 40번째 리뷰] 고품격 월간 리뷰전문잡지 <책이 있는 구석방> 일백스물아홉 번째 리뷰는 대한민국 제5공화국 전두환 정권의 민낯을 낱낱이 파헤친 <한국 현대사 산책 1980년대편 3>이다. 강준만은 박정희 정권을 '기회주의 공화국'이라 평가했다. 그럼 전두환 정권은 뭐라 평가해야 할까? 딱히 표현된 것은 없지만 그저 '광기와 야만의 공화국'이라고 정의하는 것이 편할 것 같다. 전두환 정권 때에는 모든 사람들이 미치지 않고서는 제정신으로 살 수 없는 그야말로 '혼돈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1980년대는 신군부의 독재에 의해 '광주학살'로부터 시작했다고봐도 무방하다. 소설가 한강의 책 <소년이 온다>에도 자세히 나와 있지만 신군부는 자신들의 권력 탈취를 위해서 광주를 무참히 짓밟았다. 다른 지역에서는 그 사실을 몰랐다가 나중에 알고 나서는 그저 먹먹하기만 했다. 자신들이 일보후퇴를 했을 때 광주는 홀로 외롭게 투쟁했었고, 그 결과 광주는 잔인하게 유린 당했다. 이런 시국인데도 전 국민은 전두환 정권 때 출범한 '프로야구'에 열광하며 스포츠에 열광했다. 아, 그러고보니 전두환 정권은 '스포츠 공화국'이기도 했다. 86 아세안게임(종합 2위)과 88 올림픽(종합 4위)을 성공적으로 치루면서 전 국민을 국뽕의 도가니로 몰아넣었기 때문이다. 허나 그뿐이었다. 군사정권의 억압과 광기에도 굴하지 않던 용감한 시민들의 저항은 이어졌지만, 그에 못지 않게 전두환과 노태우 등의 군부독재의 지도부는 철저한 탄압으로 일관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 국민은 87년 대통령직선제를 얻어내는 민주주의적 승리를 탈환했다. 이런 아이러니한 80년대를 좀 더 파고 들어가 보자.

<한국 현대사 산책 1980년대편 3> 관점 포인트 : 박정희가 죽고 난 뒤에 우리 모두는 잠깐의 자유를 누렸다. 이른바 '서울의 봄'이라고 불리는 그것이다. 신군부는 정권이양을 하기 전까지 '하고 싶은 것, 다 하라'는 식으로 그저 방관만 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지식인과 대학생을 주축으로 민주주의를 위한 목소리를 한껏 높였는데, 전두환을 위시한 '신군부 세력'이 정권이양을 안정적으로 확신하자마자 군홧발로 짓밟기 시작했고 전국적인 시위도 잠잠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탄압이 심했던 것이다. 그런데 유독 '광주'에서만은 굴하지 않았다. 그리고 잔인하게 짓밟혔다. 이른바 '광주학살'이다. 공수여단을 투입해 우리 국민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고 '실탄'을 발사한 것이다. 그리고 장악한 언론을 통해 광주에서 '북한 간첩'이 난동을 벌이고 있어 우리 국군이 척결했다고 발표했다. 국민들은 깜짝 놀랐다. 광주에까지 '간첩'이 버젓이 활동하고 있었다니, 그걸 또 우리 국군이 용맹하게 진압했다니, 간담이 서늘했지만 딴에는 안심 되는 소식이었다. 그러나 시일이 지나자 그날의 '진실'이 퍼지기 시작했다. 전두환 일당이 저지른 만행은 실로 끔찍했고 그 대상은 무고한 광주시민들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누구도 그 진실을 함부로 말할 수 없었다. 공공연하게 떠들고 다니면 '똑같은' 폭력을 당할 것이라 여겼던 것이다. 아무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지만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미 박정희 정권 때 경험했던 일이었고, 새로 집권한 '신군부세력'은 더하면 더했지 덜할 놈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신군부도 그런 눈치를 챘다. 그래서 국민들의 이목을 돌릴 '수단'이 필요했다. 그것이 '3S 정책'이었다. 스포츠, 스크린, 섹스 말이다. 프로야구가 이때 개막된 것은 철저히 의도된 것이었다. 검열되어 들여오지 못했던 영화가 물밀듯이 들어온 것도 바로 이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의 자유화'를 선언하며 쾌락이란 쾌락은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자유(?)'를 허했다. 그러나 뜻있는 지식인과 대학생들은 이런 자유 말고 '진정한 자유'를 꿈꿨다. 그래서 80년대에는 시위가 끊이질 않았고, 서울 도심에 '최루가스'를 맡지 않는 날이 없었을 정도였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80년대는 '단군이래 최대 호황'을 맞았다. 신군부가 들어서고 88 서울올림픽 개최가 확정되었다. 또한 86 아시안게임도 개최하게 되었다. 신군부는 이를 자신들의 정권을 빛낼 절호의 기회로 삼고 '스포츠 성과'를 통해서 치적 쌓기를 하려고 심혈을 기울였다. 마치 박정희 정권이 '경제성장'에 목을 맨 것처럼 전두환 정권은 '스포츠 성과'로 자신들이 부당하게 차지한 정권에 '정당성'을 심으려 했던 것이다. 그 덕분이었을까? 온 국민을, 특히 중고등학생을 체육대회 봉사대원으로 차출해서 공을 들인 결과, 86 아시안게임에서는 금메달 94개의 중공에 이어 '금메달 1개 차이'로 종합 2위에 올라섰다. 일본과는 무려 금메달 34개의 차이를 보인 것이다. 전두환은 이런 쾌거를 '자기 홍보화'하며 대한민국이 세계로 발돋움하게 되었다고 선전했다. 더구나 시기적으로 86년부터 저달러, 저금리, 저유가의 '3저 호황'으로 인해 GNP 성장률은 전년 대비 2배 이상 오르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국민들은 '국뽕'이 차오르는 쾌감을 만끽했다. 한국인에게 '먹고 사는 문제'만큼 민감한 문제는 없었고, 경제호황을 맞아 살림살이가 나아지는듯 하니 '신군부세력'은 이를 자신들의 치적으로 삼으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어림도 없는 소리다. 국민들은 그간 신군부가 저지른 온갖 비리와 부정부패를 눈감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전두환 정권의 7년 임기가 끝나가는 시점에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접한 시민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여기에 경찰의 발표는 뜨겁게 타오르는 불에 기름을 붙는 격이었다. "책상을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뉴스는 삽시간에 퍼져나갔고, 시민들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끓어오르게 만들었다. 여기에 5·18 광주항쟁 희생자 7주기 추모 미사 때 가톨릭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의 이름으로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은 조작되었다"는 성명서를 발표했고, 박종철을 고문해서 죽인 진범은 따로 있다며 진실을 폭로하니 국민들은 또다시 들고 일어섰다. 전국적인 시위가 수없이 벌어졌고, 6월에 들어서자 전두환은 장기집권의 꿈을 접고 자신의 친구이자 당시 민정당 대표였던 노태우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겠다는 발표를 했다. 자신도 '체육관 선거'로 집권했으니, 노태우도 그 방식으로 '신군부세력'의 집권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라 여겼을 것이다.

허나 87년 6월 9일 연세대에서 시위하던 이한열이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쓰려져 동료 학생들의 부축을 받아 병원에 갔으나 안타깝게 한 달 간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7월 5일 사망하고 말았다. 더구나 당시 이한열이 피를 흘리며 동료에게 의지하고 있는 사진이 '로이터 통신 사진기자 정태원'에 의해 촬영되었고, 이 사진이 <중앙일보>에 게재되었는데, 이 한 장의 사진에 의해 군사독재정권은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노태우가 차기 대통령으로 지명을 받아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시위대는 최루탄에 맞아 병원에 실려간 이한열을 살려내라며 비통한 눈물을 흘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6월 10일을 기점으로 시위대는 전국 500여곳이 넘는 곳에서 50여만 명이 합세했는데, 대학생 뿐만 아니라 일명 '넥타이 부대'까지 합세하면서 서울 명동일대는 시위대의 열기로 뜨거워졌다.

나가는 글 : 그러나 5공 정권은 이때까지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단다. 그저 6·10 시위 이후 서울 명동 일대가 '불순 폭력 세력'에 의해 점거되었다데 충격과 우려를 금치 못한다는 성명을 내놓을 뿐,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허나 착각이었다. 한국의 '중산층'이 움직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제 시위대는 '한열이를 살려내라'는 외침과 함께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전두환에게는 치욕적인 요구조건이었을 것이다. 어떻게 잡은 정권인데, 맘 같아서는 '광주학살' 때처럼 또다시 군병력을 풀어놓고 시위대를 강제진압할 생각이 굴뚝이었을 것이다. 허나 올림픽이 코앞이었다. 미국 레이건 대통령도 쿠데타는 불가하다는 메시지를 강력하게 전했다. 사마란치는 서울에서 대규모 소요사태가 발생한다면 올림픽 개최지를 다른 장소로 변경할 수도 있다고 거론했다. 그래서 전두환은 급히 김영삼과 회담을 추진했고, 김영삼은 '직선제, 국민투표, 구속자 석방(김대중)' 등을 요구했지만, 회담은 결렬되었다.

시위는 2145회를 넘겼고, 최루탄은 35만 발 넘게 쏘았단다. 단 17일 동안의 대기록이었단다. 그리고서 6·29일 전국민을 향한 거대한 쇼가 펼쳐졌다. 이른바 '노태우의 6·29 선언'이다. 대통령 직선제 수용, 김대중 등 사면, 대통련 선거법 개정, 국민기본권신장, 언론자유 창달, 지방자치제 실시 등의 8개항을 제시했다. 신군부가 저지른 가장 악질적인 만행 '광주학살'에 대한 사죄와 무거운 책임을 지겠다는 조항은 빠졌지만, 국민들은 일단 환호했다. 자신들의 승리이자, 민주주의의 승리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정말 승리였던 것일까?

6·29 선언은 국민들의 거센 저항을 일단 막고 '거리의 정치''제도권 정치'로 되돌리는데 성공적인 효과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일단 '직선제 수용'을 통해서 전두환에서 노태우로 안정적인 정권이양할 길은 막혔지만, 승산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전두환은 이것조차 다 계산에 넣어두었던 것이다. 그리고 사면복권되는 '정치인과 학생'들도 선별적이었다. 일단 김대중과 김영삼을 대립 구도로 만들고, 극렬하게 저항하는 학생들도 일부만 석방시키는 등 '내부 분열'을 조장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민주 진영은 6·29 선언 이후 끝없는 분란을 일으키고 말았다. 이른바 '민주화 투쟁과 학생운동의 구심점'이 분산되는 기막힌 일이 벌어진 것이다. 여기에 7, 8월에는 '노동자 투쟁'이 대대적으로 발생했다. 박정희 정권 이후 대대적인 노동자 탄압에 의해 '노동조합의 취약성'이 여전했고, 전두환 정권 때에도 철저하고 집요하게 탄압한 결과 '노동자 투쟁의 무력함'이 팽배했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노동자 투쟁은 큰 결실도 맺기 전에 보수언론에 두들겨 맞고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란에 빠져버렸다. 이에 실망한 중산층은 노동자 투쟁에서 시선을 돌려 '엘리트'를 지향하게 되었다. 뭐라도 똑똑한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을 직감한 것이었다.

이렇게 6·29 선언으로 일보후퇴한 전두환과 노태우는 민주화 투쟁도 잡고, 노동자 투쟁도 와해시키는 일거양득을 얻었다. 그리고 약속한대로 '대통령 직선제'를 시행하며 정정당당하게 승리를 쟁취하겠다는 작전을 은밀하게 시작했다. 더구나 3저 호황으로 경기는 순풍에 돛단 듯 날아갔다. 중산층은 이런 호황을 '노동자 대투쟁' 같은 것으로 좋은 기회를 날려버릴까 두려웠던 것인지도 모른다. 거기다 그해 11월 대통령 선거를 2주 남겨두고 KAL기 폭파사건이 발생했다. 범인은 남자 한 명과 여자 한 명이었는데, 그 가운데 여자 한 명을 생포했고, 그녀의 정체가 북한 공작원 '김현희'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북한 김정일이 88올림픽 참가 방해 공작을 펼치기 위해 대한항공 여객기 폭파 지령을 내렸다는 것이다. 북한으로서는 자유진영 뿐만 아니라 공산진영까지도 대거 88올림픽에 참가한다는 사실이 부담으로 작용했던 듯 싶다. 그렇게 국제사회에서 고립을 느낀 북한이 '국면 전환용'으로 일으킨 사건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간 쌓아온 민주화 투쟁의 성과가 하루 아침에 날아가버린 셈이다. 국민들의 뇌리 속에는 오직 '정권 안정'만을 떠올리기 딱 좋은 사건이었다.

1987년 대통령 선거는 짜고 치는 고스톱 판이 되어 버렸다. 6·10 항쟁으로 사면복권된 김대중은 당시 '불출마 선언'을 했다가 이를 번복하고 '대통령후보 출마'를 선언한다. 이에 김영삼은 '민주진영 후보단일화'를 주장했지만, 김대중 측은 이를 일축해버린다. 결국 13대 대통령 선거는 노태우의 일방적인 승리로 장식했다. 노태우 36.6%, 김영삼 28.0%, 김대중 27.1%였다. 양김의 분열이 가장 큰 패배원인이었지만, 때마침 터진 KAL기 폭파사건이란 '북풍'과 신군부의 지역감정선동, 부정·불공정선거, 언론의 왜곡 편파보도 등도 노태우 당선에 큰 기여를 했다. 허나 문제는 조직적인 관권 선거를 예상했음에도 이를 이겨내지 못한 '민주진영의 안일함'이 가장 큰 문제였다. 김영삼과 김대중이 각각 경상도와 전라도를 양분해버리는 바람에 '지역감정'은 불붙어 버렸고, 그로 인해 전국에서 '기득권 세력'의 표를 고르게 가져간 노태우가 압승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으니 말이다. 모처럼 타오른 '민주화 열망'은 이렇게 어이없게 실패로 끝맺고 새롭게 6공화국이 열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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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대사와 명장면으로 보는 삼국지 한 권으로 끝내는 인문 교양 시리즈
스미타 무쿠 지음, 양지영 옮김, 와타나베 요시히로 감수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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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대사와 명장면으로 보는 삼국지> 스미타 무쿠 / 양지영 / 와타나베 요시히로 / 알에이치코리아(RHK) (2024)

[My Review MMCCXCIX / 알에이치코리아(RHK) 4번째 리뷰] 고품격 월간 리뷰전문잡지 <책이 있는 구석방> 일백스물여덟 번째 리뷰는 총 8권의 '한 권으로 끝내는 인문 교양 시리즈' 중 '삼국지'편인 <명대사와 명장면으로 보는 삼국지>다. 이런 시리즈를 발견하면 꼭 다 읽고 싶어지는 강박을 갖고 있지만 이번에는 '삼국지'에만 관심을 가지려 애쓰고 있기 때문에 꾹 참고 이 책만 읽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한 권으로 끝내는' 시리즈는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 더 놀란 것은 '삼국지' 책 가운데 그런 책이 정말 수두룩하다는 것을 발견했단 거다. 지금 그런 책만 5권 째 읽고 있는중인데 찾아도 찾아도 또 찾아지고 있어서 나중에는 좀 걸러서 읽으려고 한다. 리뷰로는 이 책이 '두 번째 책'인데 내용이 거의 대동소이하기 때문이다. 같은 '일본 번역본'이라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암튼 너무 많은 책이라 살짝 부담이 되기 시작했다. 그럼 책 속으로 풍덩 빠져 볼란다.

<명대사와 명장면으로 보는 삼국지> 관점 포인트 : 솔직히 이 책을 평가하자면 좋은 점수는 주고 싶지 않다. 왜냐면 '오탈자'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줄거리를 요약한 1부에서만도 '관직명''지역명'을 엉망으로 적어 놓았고, 심지어 10장을 넘기기도 전에 '오탈자'가 내 눈에 검열이 되어서 불편했던 것이 큰 감점요인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명대사''명장면'으로 보겠다고 호객(?)을 하고서는 명대사와 명장면을 명확한 '쳅터 구분'으로 표시하지도 않은 채 그냥 '줄거리' 속에 어물쩍 설명하면서 넘어갔기 때문이다. 그것도 눈에 확 띠는 색깔로 찐하게 표시했으면 나았을텐데, 책표지의 색과 비슷한 색깔로 보통의 글자보다 '흐리게' 써버린 바람에 가뜩이나 노안이 와서 작은 글자가 한 눈에 들어오지 않는 나에게 '판독'하는데 큰 시련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나처럼 '삼국지 덕후' 수준의 독자들은 그런 오점이 한 눈에 들어오는 반면, '삼국지 초보'인 분들께는 이 책이 담고 있는 '오류'를 파악하지 못하고 잘못된 정보를 '사실'로 믿어버릴 소지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감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신뢰를 잃어버린 상태에서 '시리즈의 다른 책'을 읽는 것이 잘하는 일인지 회의하게 할 정도였다. 암튼 신뢰를 많이 깎아버린 것은 사실이다. 그런 점을 빼놓고는 '줄거리 요약'이라거나 '삼국지 지식'에 해당하는 내용은 충실하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삼국지 초보'가 읽기에 부담이 없는 훌륭한 책이라고 보여진다. 또한 '삼국지 지식'에 해당하는 2부의 내용을 숙독했을 경우, '소설 삼국지(삼국지연의)'를 보다 재밌고 생생하게 즐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 <삼국지>를 통찰하듯 읽기 시작하면서 느낀점은 일본은 생각보다 '삼국지'에 대한 인기가 뒤처지는 것 같다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유독 '한 권으로 읽는' 시리즈가 많았고, 그 내용도 '심화'하는 느낌보다 초보자를 위한 '개론서'에 불과한 책들이 상당했다는 점이다. 이 책도 꽤나 쉬운 편이었기에 하는 얘기다. 더구나 전체 분량에서 3/4을 줄거리 요약에 할애했고, 나머지 1/4만 상식적인 지식을 보충할 뿐이니 웬만한 '덕후'들이라면 이 책은 그냥 패스해도 아무 문제 없을 정도로 쉬운 책이었다. 반면에 초보 입문자라면 이 책이 상당히 도움을 줄 것이고 말이다.

그런 까닭에 설명하고 있는 '주요 인물''중요 장면' 들은 대부분 '위촉오 삼국 형성 이전 시기'의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적벽대전' 이전까지 상세히 설명하는 듯 싶다가 적벽대전 승리 이후에는 주요 인물들의 '사망이야기'만 가득 했다. 사실 <삼국지>에서 가장 재밌는 부분은 위나라의 조조, 촉나라의 유비, 오나라의 손권을 중심으로 한 '가까운 인물들'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가 맞긴 하다. 그리고 조조와 유비가 죽고 '낯익은 주인공들'이 모두 죽고 난 뒤의 이야기는 재미가 반감되며 읽기에 지루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삼국지>의 마지막 이야기가 '오장원'에서 제갈량이 죽는 것으로 종결되는 것으로 오해하는 분들도 꽤나 많다. 심지어 '소설 삼국지'도 그런 형식의 책들이 많이 소개되어 있다는 점도 한 몫 한다. 특히 일본판 <삼국지>가 '오장원에 지는 별'이라는 제목으로 끝나곤 하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진정한 <삼국지>라면 제갈량이 죽은 뒤에 위나라의 조씨 황족이 사마씨 일족에게 황위를 빼앗기고 진(晉)나라를 건국하고 손권의 후손인 손호가 사마염에게 항복하는 것까지 다뤄야 한다. 연도로는 184년부터 280년까지 약 100년 간의 역사다. 이 100년 동안에 벌어진 역사적 사실은 한 명 뿐이어야 할 '천자'가 위촉오에서 각각 배출하여 모두 '세 명의 황제(천자)'가 동시에 등장했다는 것이다. 이는 5000년 중국사에서 유일무이한 사건이기도 하다. 이는 그만큼 이 시기가 극도로 혼란했던 시기였으며, 그 격동의 시기가 불과 100년도 안 되는 짧은 데 반해서 엄청난 군웅들이 할거하여 서로 자웅을 겨뤘다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시절이었다는 점이 세간의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더구나 '위진남북조시대'라고 부르는 것처럼 위나라와 진나라 뒤에 이어진 중국의 왕조는 '오랑캐'라 부르던 여러 유목민족들이 수많은 왕조를 개창하고 멸망하긴 거듭했기에 '5호 16국'이라는 별칭으로 따로 정리할 정도다. 나중에 수나라가 재통일을 하기까지 중국전역은 엄청난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나가는 글 : 그렇다면 묻지 않을 수 없다. 왜 '한나라'는 통일을 유지하지 못하고 '분열'할 수밖에 없었을까? 그렇지 않았다면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고 전쟁에 휩쓸려 고생을 하지도 않았을텐데 말이다. 가장 큰 원인을 꼽자면 한나라의 역대 황제들이 '10살 이하의 어린 나이'에 제왕의 자리에 올랐다가 '외척 세력''환관 세력'에게 권력을 넘겨주었기 때문에 나라가 심지어 갓 태어난 아기가 황제에 올랐다가 채 한 살이 되기도 전에 죽게 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삼국지>에서도 영제의 두 아들인 소제와 헌제가 각각 10대 초반의 어린 나이에 황제에 올라 '외척 세력(하진과 하태후)'에게 휘둘리고 '환관 세력(십상시)'과 권력다툼을 벌이는 통에 황건적의 난이 벌어지고 동탁이 권력을 잡으면서 끝내 한나라는 끝장이 났다. 이는 한나라의 뒤를 이은 '위나라''진나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까닭에 태평세월을 누리기도 전에 권력다툼을 벌이던 세력끼리 뇌물을 받아챙기면서 부정부패가 일상이 되자 나라가 멸망하게 된 것이다.

그럼 우리는 <삼국지>를 읽으면서 무엇 깨달아야 하는가? 그건 혼란한 시대를 맞이하게 될 수밖에 없는 까닭을 잘 살펴봐야 하는 것이다. 왕조시대에 '권력의 향배'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권력을 가져야 할 사람이 가지게 되면 '정당성'을 확보했기에 '강력한 왕권'을 휘두를 수 있고, 그 덕분에 나라는 태평하게 된다. 그런데 왕권을 정당하지 못한 세력이 갖게 되고, 부당한 권력이 행사하게 되면 나라꼴은 우스워지고 망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럼 민주주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어떻게 '정당한 권력'을 판단할 수 있을까? 주권을 가진 국민이 직접 '선출'한 권력에게만 권력을 누릴 힘을 실어주고, 권력자는 주권자에게 '위임'을 받을 권력을 올바르게 행사할 때 '권력의 정당성'을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이승만이나 박정희처럼 자기에게 유리하게 헌법을 바꿔가면서 '장기집권'을 꾀한다면 정당성을 찾기 어렵다. 전두환과 노태우처럼 국민을 학살하고 권력을 차지하면 '인정'할 수 없고, 이명박처럼 '비자금 착복'해서도 안 되고, 박근혜처럼 최순실에게 '국정농단'을 시켜도 안 되며, 윤석열처럼 '불법 비상계엄'을 선포해서 영구집권을 꿈꿔도 안 된다.

<삼국지>는 1800년 전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써내려간 소설이지만, 오늘날의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면서 깨우칠 수 있는 지혜가 무척 많을 수밖에 없다. 더구나 세계 정세가 이처럼 혼란하고, '패권 국가'를 자부하던 초강대국 미국이 흔들리며, 미국의 아성에 도전하며 맹렬히 성장하는 중국과 과거에 영광을 자랑하던 러시아가 새로운 패권국으로 명함을 내밀려 하는 이 시기에 <삼국지>에서 얻은 지혜는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을 것이다.

#리뷰 #삼국지 #한권으로끝내는인문교양 #알에이치코리아 #고전지혜 #책이있는구석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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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1970년대편 3 - 전태일과 경부고속도로, 개정증보판 한국 현대사 산책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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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1970년대편 3 : 전태일과 경부고속도로, 개정증보판> 강준만 / 인물과사상사 (2026)

[My Review MMCCXCVIII / 인물과사상사 39번째 리뷰] 고품격 월간 리뷰전문잡지 <책이 있는 구석방> 일백스물일곱 번째 리뷰는 박정희 정권의 빛과 그림자를 강준만 방식으로 평가한 <한국 현대사 산책 1970년대편 3>이다. 솔직히 내가 무슨 신념과 소신을 가지고 '한국 근현대사'를 논평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현재의 대한민국이 과거와는 달리 변했기 때문이다. 세계적으로 '선진국'으로 공인도 받았고, 국제적인 위상 또한 '세계 탑티어'에 올라 그 어떤 나라도 대한민국을 함부로 좌지우지 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무시한 나라(?)가 되었기 때문이다. 막말로 '제국주의 노선'을 단 한 번도 펴지 못하고 도리어 '제국주의의 피해국가' 가운데 한 나라였던 약소국이었는데, 100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엄청난 변화를 겪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내가 과거 학창시절에 배웠던 '역사수업'의 내용은 달라져야만 했다. 과거에 우리가 힘이 없어서 '강대국의 입맛'에 맞춰서 설설 기는 모습까지 보여야 하는 굴육의 나날이었으나 지금의 대한민국은 다른 나라를 압도적으로 굴복시키고 '우리의 입맛'대로 할 수 있는 강대국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과거의 '열강들이 저질렀던 행패'를 저지르지 않았는데도 이처럼 '선진국'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십분 살려서 강대국을 넘어 우리의 힘만으로 '올바른 선도국가'로 발돋움 할 수 있게 되었다. 인류 역사상 이런 나라는 없었다. 대한민국이 유일하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 까닭은 대한민국이 해방 이후에 지금까지 매우 독특한 역량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 이유를 파헤치기 위해 책속으로 풍덩 빠져보자.

<한국 현대사 산책 1970년대편 3> 관점 포인트 : 이 책은 1960년대에 이어 1970년대까지 주름 잡던 '박정희 정권'에 대한 장단점을 다각도로 분석한 책이다. 그리고 그 결론은 '박정희 정권은 개발독재로 성공하고 부패정치로 폭망했다'라고 평가했다. 대한민국의 경제발전은 박정희 정권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은 사실이다. 허나 그 발전의 성과를 전국민에게 골고루 나눠주는 것에는 실패한 정권이었고, 그로 인해 특권을 누리고 특혜를 받은 '일부 계층'만이 현재까지 권력과 부를 누리게 되었고, 대다수의 국민들은 군부독재의 매서운 감시와 통제 속에서 꽃을 피우지도 못하고 사그라들어야만 했던 아픈 시대였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서 그나마 배고팠던 '이승만 독재정권'에 비해서는 '박정희 독재정권'이 더 낫다고 평가할 수 있다며 박정희 정권을 옹호하며, 박정희 정권이 아니었으면 우리는 지금까지도 굶주리며 살았어야 했다며 박정희를 영웅시하는 분위기가 여전하다고 전한다.

그런데 이것이 정말 옳은 평가일까? 박정희 정권의 뒤를 이은 '전두환 정권''노태우 정권'이 저지른 비리와 부정부패를 지켜보면서 뭔가 깨닫는 것이 없단 말인가? 이들은 박정희 군사독재를 그대로 답습하며 '신군부세력'을 키우고 박정희보다 더한 부정부패를 일삼으며 나라꼴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전두환도, 노태우도, 다른 것은 몰라도 대한민국 경제만큼은 자신들이 최고로 살려놨다는 자화자찬을 끊임없이 늘어놓았다. 실제로도 그랬을까? 박정희 정권 때와 마찬가지로 몇몇 소수의 특권 계층과 특혜를 누린 일부 계층만이 누린 '사실'이었다. 나머지 대다수의 국민들은 여전히 못 먹고 못 살기는 마찬가지였다. 단지 1970년대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세계 경제가 대호황이었다는 점 때문에 대한민국 경제는 그렇게 군사정권의 부정부패가 심했어도 경제가 성장하고 발전하는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그렇게 대한민국 보수 정권은 박정희 정권의 경제성장한 화려한 점만 부각시키며 박정희를 영웅화하는데 열을 올리고 실속을 챙겼다. 물론 그러고도 실제로 대한민국 경제를 쭈욱 성장발전시키는 눈부신 업적을 남겼더라면 그냥 속아넘어가줄 수도 있었겠는데, 그들이 저질렀던 '부정부패의 나쁜 버릇'을 버리지 못한 탓에 김영삼 정권 때 'IMF 외환위기'를 맞았고, 이명박 정권 때 '다스 비자금'으로 단단히 부정축재를 했고, 박근혜 정권 때 '최순실 국정농단'으로 부정부패를 눈감았으며, 윤석열 정권 때에는 아예 '비상계엄과 전쟁 유발'을 일으키며 내외환죄로 구속수감되어 재판중이지 않은가 말이다. 그리고 이들은 한목소리로 '박정희 정권은 위대했다'는 목소리를 드높이기 바빴다. 왜냐면 그래야 자신들이 '박정희 정권의 진정한 후예'로 인정 받을 수 있고 권력을 쥐고 국민들을 계속 우려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웬만한 역사적 사실은 인터넷으로 어렵지 않게 다 찾아볼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물론 그럼에도 '편협한 시각'에 갇혀서 헛소리를 지껄이는 '극우세력'이 시끌벅적하게 떠들어대곤 하지만, 결국 그들은 오래 가지 못한다. 지금도 극렬하게 지랄발광을 하면서 연일 뉴스에 오르내리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정상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대다수의 국민들은 극우의 선동에 쉽게 흔들리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극소수의 '극우세력의 선동'에 홀랑 넘어가서 들러리를 서는 '가짜 보수세력들'이 문제다. 바로 '박정희 정권'을 옹호하고, '박정희 군사독재'를 격렬하게 극찬하는 세력들이다. 이들이 이처럼 '박정희 찬양'에 앞장서는 까닭은 그들에 의해 온갖 특혜를 받고 특권을 누리던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대구, 경북지역 사람들'이다. 이들은 박정희 정권 때 박정희를 찬양하면서 '개발독재의 특권과 특혜'를 누렸던 세력이다. 그리고 박정희가 죽은 뒤에도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멱방, 박근혜, 문재인, 윤석열에 이르기까지 멈추지 않고 특권과 특혜를 관성적으로 누려왔다. 그게 마치 자신들만 받아야 마땅한 것처럼 말이다. 여기에는 독재세력이 '기생'했던 특정언론도 마찬가지였다. 흔히 말하는 '조중동'을 말하지만, 그밖에도 거의 대부분의 크고 작은 언론들이 다 그모양 그꼴이었다. 그렇게 해야 '광고'라도 하나 몰아주었고, '이벤트'를 벌여서 지역주민들을 먹여살리는데 '세금'을 빼돌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 지역사람들에게 돌아가야할 세금이 특권과 특혜를 누리던 몇몇 사람들에게 빼돌려지니 '지역경제발전'이 발목 잡히는 것은 당연지사다. 현재 그지역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폭망한 까닭도 바로 그 지난한 부정부패가 끊임없이 이어져 온 결과였다.

이걸 '총체적 난국'이라고 말해야 할까? '부정부패의 당연한 귀결'이라고 표현해야 할까? 이제 '이재명 정부'가 들어서며 그런 비리와 부패가 낱낱히 밝혀지고 있다. 그리고 국민이 낸 세금을 허투루 쓰지 않고 '제대로' 집행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는데도 그 오래된 부정부패가 속속들이 밝혀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아직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그리고 난 정치인을 100% 믿지 않는다. 이번 이재명 정부에서는 부정부패가 최소화되어 국가발전과 국민권리에 누를 끼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나가는 글 : 박정희는 시대가 낳은 '괴물'이 아니다. 대한민국이 위기를 겪고 어려움을 겪던 시절에 흔히 나타날 수 있는 '평범한 독재자'에 불과하다. 세계사적으로 볼 때 어지러운 시기에 영웅이 등장하듯 박정희도 '조조''나폴레옹'처럼 화려하게(?) 등장한 것 뿐이다. 그래서 그 당시 국민들도 박정희 정권이 저지르는 비리와 부정부패를 적당한 선에서는 눈 감아주었다. 당장 배고파서 죽겠는데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하면서 지도자를 뽑을 여유가 있었겠는가? 그저 열심히 하겠다니 지켜봐줬던 것이고, 나름 배고프지는 않게 해주었기에 '적당한 선'에서는 참아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세계사적으로도 '독재자'는 늘 그 적당한 선을 쉬이 넘어버리곤 한다. 박정희도 그랬다. 그래서 국민들이 들고 일어선 것이다. 그때 적당히 했으면 훌륭한 지도자라고 극찬까지 했을테지만, 대부분의 '독재자'들은 그런 깨달음을 깨우치지 못하고 '급발진'하기 십상이다. 박정희도 딱 그랬다.

1970년대 대한민국은 그래서 암울했던 시기다. 개발독재의 성공으로 '경제성장'에 성공한 듯 싶었던 박정희 정권은 그를 빌미로 국민들을 옥죄고 틀어막기에 급급했다. 그리고 자신을 찬양하는 측근들만 비호했고, 그 측근들이 저지르는 부정부패에는 눈을 감았다. 반대로 박정희 정권에 날선 비판을 하는 지식인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남산'으로 끌고가 고문을 일삼았고, 그로 인해 사람이 죽어도 나몰라라 했다. 일반 국민들도 시위를 통해 부당함을 알렸고 시정을 요구했지만, 박정희 정권은 시종 국민들을 개돼지 취급하며 자신들만이 '애국자'라고 자평하며, 박정희 정권을 비판하기라도 하면 '빨갱이'로 몰아서 사회적 매장을 시켜버리기 일쑤였다. 그 시절이 얼마나 혹독했으면 지금까지도 '애국자와 빨갱이 타령'을 하고 있겠느냔 말이다. 아니 '태극기와 성조기'만 들면 무조건 애국자고, 저들을 비판하면 '빨갱이'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극우세력들과 그들의 선동에 홀라당 넘어가버려서 이성의 끈을 놓아버리는 내란세력들이 얼마나 많은가 말이다.

분명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은 '경부고속도로 개통', '7·4남북공동선언', '그린벨트와 산림녹화', '새마을운동', '민족성 개조론', '수출전쟁의 성공', '중화학공업 발전', 그리고 '월남전 파병'으로 인한 전쟁특수로 대한민국 경제를 성공적으로 이끈 공로는 분명하다. 그러나 경부고속도로를 무리하게 개통하는 바람에 '유지보수비용'이 건설비의 10배를 넘어섰고, 서울-부산간 남북으로 길게 뻗은 탓에 지역을 동서로 '분열'시킨 단적인 원인을 제공했다. 또한 '남북공동선언'으로 한반도에 평화무드가 찾아오게 한 것은 긍정적인 일이지만, 그로 인해 통일한국에서 누가 '일인자'가 될 것인가로 경쟁에 불붙어 김일성과 박정희가 서로 '1극 체제'로 만들기 위해서 독재화를 공고히하며 자신을 반대하는 세력을 숙청하고 제거하는 일에 열을 올리며 사회체제를 더욱 경색시키고 말았다. 그리고 나머지 사안들도 긍정적인 면이 있는 반면에, 그에 못지 않은 '부정적인 평가'가 뒤따르면서 스스로 공과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이런 까닭은 박정희가 일제시대 '군인 출신'이었기 때문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다카키 마사오'라고 불리던 그 시절에 박정희는 일제의 '사무라이 정신'을 동경하게 되었고, 이를 대한민국에 '하면 된다'는 군사적 마인드를 퍼뜨리며 모든 일을 밀어붙였기 때문에 벌어진 사안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 덕분에 대한민국 경제발전의 근간이 된 '한강의 기적'을 이룰 수 있었다고 반론을 주장하는 이들도 많다. 허나 '한강의 기적'이라는 성과가 박정희 '개인의 업적'이란 말인가? 온 국민이 일치단결하여 이뤄낸 빛나는 성과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박정희 정권은 그 공로를 국민들에게 돌리고 감사를 표했어야 옳다. 그런데 박정희 정권은 그 성과를 오직 자신들만이 할 수 있었다는 '자만심'에 빠지게 되었고, 그로 인해 '3선 개헌', '유신 선포' 등으로 장장 19년 동안이나 장기 집권을 꾀했다. 물론 이를 반대한 세력들은 잔혹하게 짓밟으면서 말이다. 이는 대한민국 '민주주의 후퇴'를 의미했다.

물론, 그 시절은 '안보 위기'가 고조되었고, 심지어 북한보다 경제성장이 뒤쳐지는 악조건 속에서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조치'였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그건 '반만 맞고 반은 틀린 이유'일 것이다. 그건 그들이 주장하는 '자유대한민국'이란 표현에서 '자유'를 북한의 공산주의의 반대 개념으로만 해석하고, 국민들이 진정 누려야 마땅한 '자유'는 외면한 조치였기 때문이다. 도대체 그런 해석이 어찌 온당하다고 할 수 있겠냔 말이다. 북한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국민들에게 부여된 '자유'를 짓밟는 행태가 어찌 자랑스러울 수 있느냔 말이다. 이를 두고 6·25 전쟁을 겪어본 세대는 북한 인민군이 저지른 끔찍한 만행을 겪어보지 않아서 해대는 헛소리라고 일축하겠지만, 국민이 바라는 '자유'는 대한민국이 망하기를 바라는 '방종'이 아니라 대한민국이 더 잘 살고 더 행복한 나라가 되길 바라는 '자유'라는 점에서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박정희 정권은 국민들이 주장하는 '자유'에 대해서 매우 편협한 해석을 하면서 자신들에게 반하는 주장을 하면 '반공법'을 내세워서 처단하는데 급급했다.

그 때문에 '전태일' 같은 최소한의 인권을 보장해달라는 노동운동조차 박정희 정권은 외면하기 바빴다. 결국 전태일은 자신이 죽어야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이라며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자신의 몸을 불사른다. 그리고나서야 비로소 대한민국의 지식인들과 노동자들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특히 지식인들은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홀로 공부할 때 "어려운 한자를 읽고 해석해줄 대학생 친구를 사귀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뒤늦게 전해 듣고 대학생을 포함한 지식인들이 자신들만의 시위운동에 빈틈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똑똑하다고 자부하던 그들의 시위가 왜 노동자들의 목소리에는 공감하지 못하고 그들을 외롭게 만들었는지 자성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식인들은 노동자들과 손을 잡고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기에 종교인과 언론인까지 합세해서 박정희 정권의 부정부패를 낱낱이 고발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시도가 무색하게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는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에서 권총으로 차지철을 쏘고 박정희를 쏘아 죽였다. 그렇게 박정희 정권은 끝장이 난 것이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받은 것은 '신군부 세력'의 우두머리였던 전두환이었다. 전두환 정권이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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