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여전히 공룡시대에 산다 - 가장 거대하고 매혹적인 진화와 멸종의 역사 서가명강 시리즈 31
이융남 지음 / 21세기북스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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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DCCCXV / 21세기북스 27번째 리뷰] 전세계 어린이들이 가장 사랑하고 크게 관심을 보이는 대상 가운데 1위는 단언컨대 '공룡'일 것이다. 그런데 어른이 되어서도 '공룡'을 좋아하면 바보 취급하기 일쑤다. 왜냐면 공룡은 유치하고 어른들이 생각하기에 '좋은 직업(돈벌이)'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긴 대한민국에서 커다란 공룡이 발굴되거나 한 적이 없기 때문에 더욱 '관심밖'인 것은 이해가 된다. 더구나 웬만한 선진국에는 다 있는 '자연사박물관'도 대한민국에만 없다. 반만년이라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나라인데도 말이다. 그렇다고 박물관의 수가 적은 것도 아닌데 왜 하필 '자연사박물관'만 없는 것일까? 그 대답으로 대한민국 공룡박사 이융남 교수가 내놓은 답변이 명쾌했다. "우리 나라가 '기록 역사'는 소중히 다룬 반면에 '과학과 기술, 특히 자연에 대한 소중함'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다"라는 답변이었다. 그 덕분에 우리는 수천 년 동안 땅속에 잠들어 있는 '공룡화석'을 발견하고도 그냥 내버려두었고, 비교적 최근에 와서야 '공룡화석의 소중함'을 깨닫고 부랴부랴 그것들을 모으기 시작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수가 턱없이 모자른 상황이고, 그렇게 적은 수의 공룡화석과 그 흔적으로 '자연사박물관'을 만들기에는 태부족하다는 설명이었다. 그렇다고 대한민국 자연사박물관인데 '외국의 공룡'으로 빈공간을 채울 수는 없는 노릇 아니냐는 보충설명에 아차 싶었을 정도였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에서 '공룡화석'과 '그 흔적'이 많이 발굴되고 있는 편인가? 궁금증이 이는 와중에 "그렇다!"는 답변을 이융남 교수가 내놓았다. 대한민국이 속해 있는 한반도 지형은 선캄브리아시대부터 신생대까지 다양한 지층으로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다양한 고생물의 화석과 그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한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발굴한 것이 미미한 까닭은 두 가지다. 하나는 대한민국의 지형이 매우 단단한 암석으로 이루어진 탓에 발굴이 쉽지 않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미 발굴됐거나 지표면에 드러났는데도 알아채지 못하고 그냥 방치한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 나라의 공룡화석을 본격적으로 탐사한 것은 '일제강점기 일본학자들'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일제시대에 수많은 공룡화석을 우리 나라에서 찾아냈고, 거의 대부분 일본으로 가지고 가서 현재는 '일본 자연사박물관'에 버젓이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우리 것을 우리가 소중히 여기지 않은 탓에 벌어진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현재는 대한민국에서 발굴된 '공룡화석'은 천연기념물로 등재되어 '문화재급'으로 대접 받는다고 한다. 이제부터라도 소중히 다뤄서 새로운 'K-공룡'으로 세계적인 유행을 선도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K-공룡이라니...허투루 하는 말이 절대 아니다. 이융남 공룡박사를 비롯해서 해마다 학회에 논문을 발표하는 대한민국 박사들이 혁혁한 공로를 쌓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공룡발자국 화석'은 전세계에서 대한민국이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공룡박사들이 찾아오고 있고, 몇 년 전에는 '익룡의 발자국 화석'이 고스란히 발굴되어 익룡이 지상에서 '4족 보행'을 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대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더구나 '공룡알 화석'과 '공룡알 둥지화석'이 발굴되면서 공룡도 새처럼 둥지를 만들고 알을 품은 '고등생물'이었다는 것을 증명하기도 했다. 바다거북이나 도마뱀과 같은 '파충류'는 알을 낳고 난 뒤에 돌보지 않기 때문에, 둥지를 만들고 알을 품었다는 '사실'은 공룡이 파충류보다 조류에 더 가깝다는 가설에 힘을 실어주는 일대 사건이 일어난 셈이다.

물론, 아직까지는 우리 나라에서 '티라노사우르스'와 같은 힘 쎄고 덩치 큰 공룡화석이 발굴된 적은 없다. 으레 공룡하면 떠오르는 가장 상징적인 것인데 말이다. 사실 티라노사우르스가 살았던 백악기 말의 지층이 우리 나라에 있긴 하지만 절대로 발굴할 수는 없다. 왜냐면 티라노사우르스는 '북미대륙'에 서식하던 대표적인 백악기 공룡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아쉬워할 것은 없다. 티라노사우르스의 조상에 해당하는 '타르보사우르스'가 아시아를 대표해서 몽골과 중국 등지에서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원래 티라노사우르스도 베링해협을 건너고 난 뒤에 '대형화'된 것이지 처음부터 큰 공룡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조상에 해당하는 '타르보사우르스'가 몽골과 중국 등지에서 서식했던 것이다. 그러니 한반도에서도 '티라노사우르스의 조상'에 해당하는 공룡이 발굴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왜냐면 공룡이 살던 시대에는 '국경이 없었기' 때문이다. 분명 몽골과 중국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서식했다면 한반도에서 활동하지 않았을 리 없기 때문이다. 그 증거로 한반도에서 수두룩하게 발견되고 발굴되는 '공룡발자국 화석'이다. 그 발자국 흔적들은 육식공룡, 초식공룡, 익룡, 그리고 포유류까지 다채롭게 발굴되고 있다. 그러니 그 발자국들의 주인공인 '공룡화석'이 온전히 발굴되기만 한다면 한반도에 살았던 공룡을 되살리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그러나 현재까지 발굴된 공룡화석의 수가 너무 적다는 것이 문제다. 우리 나라 건설현장에서 '공룡화석'이 발굴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골재로 사용하기 위해서 채굴한 바위조각에 고생물의 화석으로 의심되는 사례가 자주 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일부 화석으로 복원한 공룡이 바로 '코리아케라톱스 화성엔시스'다. 이름부터 '코리아'가 들어가지 않은가. 이름에서 짐작한 것이 맞다. 커다란 뿔 세개가 달린 '트리케라톱스의 조상'에 해당하는 원시 뿔공룡의 화석이다. 이렇게 유명한 공룡화석의 조상에 해당하는 '원시공룡의 화석'이 아시아에서 많이 발굴되고 있기 때문에 우리 나라도 공룡박물관을 세우고 유명관광지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갈 길이 멀다. 우리의 관심이 커져야 '관련 연구자'도 많아지고, '예산 지원'도 넉넉하게 될텐데, 현재는 그렇지 못하니 말이다.

대한민국 공룡에 대한 관심을 높이기 위한 방법은 없을까? 그 방법의 일환으로 '지금은 공룡시대'라는 주위환기가 필요할 듯 싶다. 사실 우리가 공룡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 첫번째 까닭은 바로 '공룡은 멸종했다'고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 현재 살아 있는 생물을 살리는 것도 벅찬 마당에 멸종해서 '죽어버린 생물'까지 관심을 둬야 하느냐는 빈정거림이 공룡에 대한 꾸준한 관심을 갖지 못하게 만드는 가장 큰 원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룡이 아직도 멸종되지 않고 현시대에 우리 인간과 '공존'하고 있다면 어떨까? 큰 관심까지는 아니어도 '공룡복원'에 대한 일말의 관심이 조금쯤은 생기지 않겠는가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시조새'에 대해 알아봐야 한다.

진화론적인 관점에서 '시조새'는 과거의 공룡과 현재의 새를 연결해주는 '고리 역할'을 했다. 거대한 공룡은 멸종했지만 '시조새'를 기점으로 날개 달린 공룡은 새로 진화에 성공해서 오늘날까지 이어졌다고 말이다.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 이야기였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믿었지만, 사실과는 다르다. 왜냐면 진화는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공룡이 시조새를 거쳐 새로 진화한다는 것이 잘못된 상식인 까닭은 원시영장류에서 침팬지를 거쳐 인간으로 진화되었다는 것이 틀린 말인 것처럼 명백하다. 한마디로 침팬지는 결코 인간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침팬지와 인간은 같은 포유류이고, 같은 영장류에 속해 있기 때문에 '공통 조상'이 있을 순 있다. 그리고 그 공통 조상에서 '어느 순간' 돌연한 환경변화로 인해 '서로 다르게' 적응해야 했고, 달라진 환경에 '제대로 적응'한 개체만이 살아남아 후손을 남기게 되면서 '종의 분화'가 나타나게 되었고, 그렇게 '서로 갈라진 종'으로 세대를 이어 나가다보니 현시점에 이르러서 '침팬지종'과 '인간종'으로 서로 다른 종이 된 것이다. 실로 오랜 시간이 흘러야 '진화의 매커니즘'이 작동하게 되고 '눈에 띄게' 보여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조새'의 경우는 뭐란 말인가? 공룡과 새를 연결해주는 '고리'가 맞긴 한가? 그렇다면 시조새는 공룡인가? 새인가? 숱한 논란 끝에 오늘날에는 종지부를 찍었다. 그 까닭은 바로 '깃털' 때문이었다. 사실 '동물의 털'과 '조류의 깃털'은 유전적으로 동일하다. 그러니 털이 깃털로 변한 것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반면에 털은 '체온조절'이 뛰어나고 깃털은 '날 수 있게' 하는 기능에 차이를 둔다. 그런 까닭에 공룡의 피부에 '털'이 있는지 '깃털'이 있는지 확인만 할 수 있다면 공룡과 조류의 상관관계를 정립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공룡에게서 '털'도 발견되었고, '깃털'도 발견할 수 있는 화석이 존재한다는 것으로 오랜 논란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일부 공룡에게 '털'이나 '깃털'이 이미 있었고, 그것을 가지고 있던 공룡 가운데 일부는 '시조새'처럼 초보적인 비행이 가능한 종으로 분화하였으며, 백악기 말 커다란 운석이 지구를 강타한 이후에는 '육상공룡'들 대부분이 멸종하였고, '하늘을 날 수 있는 종'들이 일부 살아남아 오늘날 새로 다시 번성하게 되었다는 가설이다. 그렇기에 어느 시대에는 공룡과 시조새, 그리고 새가 '공존'하던 시기가 있었을 것이다.

생명의 신비는 이처럼 다양한 종으로 분화하여 번성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흔히 '생태계의 다양성'을 해치게 되면 인류 또한 멸종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곧잘 하는데, 공룡의 멸종이 그 증거이기도 하다. 우리가 '공룡전성시대'라고 부르던 시대가 있다가 사라진 것처럼 '인간전성시대'인 지금 정점을 찍었고, '서서히'일지 '급속히'일지는 알 수 없으나 인류도 언젠간 절멸의 시간을 맞이하게 될 것이 틀림 없다는 것을 스티븐 호킹 박사처럼 똑똑한 사람들이 꾸준히 경고하고 있다는 점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우리가 공룡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훌륭한 교훈 가운데 하나이고 말이다.

다시 돌아와서, 우리는 '공룡시대'를 함께 살아가고 있다. 왜냐면 공룡의 한 갈래인 '새'가 인간보다 훨씬 더 많은 종으로 번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우리는 '일부'이긴 하지만 공룡의 후예에 대해 심각한 의존(?)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깊은 관심을 가져야만 한다. 바로 하루라도 먹지 않고서는 참을 수 없다는 '치킨(닭요리)'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이미 '공룡천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전세계의 치킨집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수의 치킨집을 보유하고 있는 나라이니 말이다. 대한민국 국민이 '1인 1닭'을 한다는 기준으로 단순계산을 해도 일주일에 한 번 치킨을 시켜먹으면 일주일에 5000만 마리의 공룡을 요리한 셈이다. 그렇게 한 달이면 2억 마리, 1년이면 24억 마리의 공룡뼈를 발골하며 먹어치운 셈이다. 정녕 '공룡의 나라'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지 않겠는가?

마지막으로 우리가 공룡연구를 깊이 해야 하는 까닭은 '고생물학'을 다루는 분야가 지질학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생물학이 어째서 '지구과학'의 분야인 '지질학'과 연관이 있냐면 '고생물학 연구'는 주로 '화석'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화석연구는 '지질시대의 시간'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증거이며, 그렇게 '땅의 시간'을 연구하는 것이 대한민국의 과학발전에 중요한 지표가 되며, 그렇게 축적된 과학기술이 수없이 많은 '응용과학'으로 실현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고생물학 연구'는 기초과학에 해당한다. 우리가 그토록 빈약하기 이를 데 없는 분야인 '기초과학의 핵심'이 바로 고생물학에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기초과학'에 등한시 하게 되면 모처럼 선진국 대열에 끼어든 대한민국이 다른 나라를 이끌어가는 '선도국가'가 될 수 없다는 것과 다를 바 없게 된다. 그렇기에 우리는 공룡에 대한 관심을 높여 '기초과학 분야'에도 꾸준하게 투자를 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물론 요원한 이야기다. 기초과학이 하루 아침에 쑥쑥 클 리도 없고 말이다. 그렇기에 꾸준해야 한다. 그 시작을 '공룡에 대한 관심'으로 할 수 있다니 할 만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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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생 시즌2 : 16 미생 (리커버 에디션) 16
윤태호 지음 / 더오리진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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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생 시즌2: 16>  윤태호 / 더오리진 (2023)

[My Review MDCCCXIV / 더오리진 3번째 리뷰] 원 인터네셔널의 천과장은 고민중이다. 그가 속해 있는 '영업3팀'에 옛 철강팀의 에이스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천과장은 다시 부흥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는 생각이 들어 CIC(사내독립기업)를 구상했다. 물론 철강팀의 강대리와 장백기가 함께 한다는 조건으로 말이다. 허나 천과장은 고민이 많다.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사실 대기업을 다니면서 월급을 받는 처지에 '따로' 독립을 해서 나온다는 것이 쉬운 결정은 아니다. 좋은 아이템이다 싶어서 회사를 박차고 나왔다가 헛물만 켜고 쫄딱 망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웬만한 사람들은 상사 눈치 보느라 더럽고 치사한 일을 당해도 그냥 '버티는 것'이 최선이라고 말하곤 한다. 근데 '사업'이라는 것이 위에서 하라는 것만 하고, 시키는 것만 하는 것이 영 재미가 없다. 수익이 많고 적고를 떠나서 '내 사업'을 해서 성공하고 대박을 터트리는 것이 사업하는 맛이기 때문이다. 과거 '영업3팀'이 그랬다. 오차장은 남들이 하기 싫은 일만, 성과도 별로 없는 일만 골라서 한다고 주변에서 비아냥거리기 일쑤였지만, 오차장과 김대리, 그리고 장그래는 '그런 일'을 하는 것이 즐거웠던 것이다. 그러다 대박을 터트리기도 했고, 나중에 합류한 천과장도 그런 영업3팀의 일원이었기에 다시금 재미난 사업이 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 좋자고 다른 사람에게까지 폐를 끼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막말로 자신은 '하고 싶은 일'하다가 망해도 소원풀이한 셈 치면 그만이지만, 덩달아서 끌려온 사람은 처지와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더구나 상사가 억지로 끌고와서 어쩔 수 없이 시작했는데 사업이 망해버린다면, 그 원망을 어찌 감당할 수 있겠냔 말이다. 물론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다고 망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돌다리도 건너는 심정'으로 시작해야만 했다. 더구나 지난 편에서 '중국발 철강 리스크'가 업계를 강타한 와중에 주요사업이었던 '철강'을 제외하고 새로운 아이템으로 새로 일을 시작하는 '영업3팀'으로써는 더욱더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천과장은 CIC를 이끌고 싶다. 장백기로 부족하다 싶으면 안영이와 한석율까지 끌고 와서 말이다.

안영이와 한석율은 '고민중'이다. 원 인터라는 번듯한 대기업 정직원이지만 '직장상사'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실력발휘'를 해도 인정을 받기는커녕 '모멸감'이 들 정도로 꼰대짓을 하는 회사분위기에 질렸기 때문이다. 안영이는 '대리'로 승진까지 했지만 여전히 부당대우를 받고 있다. 번번히 아이디어를 빼앗기고, 그래서 '실적'도 빼앗기고, 상사의 실수를 덤터기 쓰면서까지 '인사고과'를 받기 위해서 눈치를 보며 숨죽이듯 회사 생활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한석율은 더욱 심각하다. 자칭 타칭 '섬유팀 현장마스터'로 불릴 정도로 발에 땀나듯 열심히 일을 하고 있지만, 소시오패스에 걸린 직속상사 때문에 하루가 멀다하고 '현장사고'가 터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난 사고를 '뒷수습'하는 것은 언제나 한석율이었다. 이러한 때에 영업3팀의 천과장이 'CIC 멤버'로 함께 일을 하자는 제안을 해왔다. 한석율은 두손 두발을 들며 환영했지만, 안영이는 신중했다. 그리고 신중한 김에 '수익이 날 만한 사업리스트'를 골랐고, 그 가운데 '철강사업'에 마진(수익)이 남겠다 싶었지만, 철강쪽의 전문가인 '장백기의 고견'이 필요하다는 전제를 달았다. 장백기가 '해오던 사업'이기도 했고, 그가 OK를 한다면 안영이도 천과장의 손을 잡을 수도 있다는 메시지를 표현한 셈이다. 그렇다면 장백기는 어떤 결론을 내렸을까?

원 인터라는 대기업조차 중국발 리스크로 인해 '철강사업'에서 손을 떼고 철강팀마저 해체 해버린 상황이다. 그런 상황에서 아무리 전문가라고 해도 '장백기'에게 뾰족한 수가 있기나 한 걸까? 그래서 신중한 안영이도 장백기가 OK를 하지 않는다면 CIC에 동참할 수 없다고 한 것일테다. 그렇다면 장백기의 대답은? 반반이었다. 애초에 사업이라는 것에 '무조건' 성공이나 실패는 없는 법이다. 같은 상황이라도 '누구'와 함께 일을 진행시키느냐에 따라 성과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허나 대기업 입장에서는 '리스크'가 크면 수익을 내도 그리 크지 않으니 손을 뗄 수밖에 없지만, 작은 기업(사내독립기업) 수준의 수익을 내는 것이라면 '해볼만' 한 일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장백기는 그런 이야기를 천과장에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사업성공을 하기 위해서 커다란 모험을 해야만 한다. 어쩌면 고생이란 고생은 다하고서도 쥐꼬리만한 수익만 낼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런 '사서 고생할 일'을 하기 위해 안정된 직장인 '원 인터'를 박차고서 나갈 까닭이 없다. 그래서 장백기도 '추가 옵션'을 내놓는다. 사서 고생하는 일을 하면서도 언제나 즐겁게 일하는 사람들과 함께라면 말이다. 그런 사람이 누가 있었을까? 바로 '온길 인터네셔널'에 모여 있었다.

그리고 가장 핵심적인 인물, 객관적인 실력은 검증되지 않았지만, 일을 할 때 '일머리'를 제대로 쓸 줄 알고 '일이 되게끔'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주변 동료들에게 언제나 '기대'하게 만드는 인물, 바로 장그래가 있는 작은 회사다. 장백기는 그동안 장그래를 무척이나 시기하고 질투하면서도 내색은 하지 않았으나, 장백기 자기 자신도 위태로운 처지에 놓인 것을 간파하자마자 '어떤 일이라도 일이 되게끔 일머리를 제대로 부릴 줄 아는' 장그래와 함께 일을 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은 것이다. 실로 대단한 변화인 셈이다. 그동안 장백기는 정직원인 자신과 계약직인 장그래 사이에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자존심'이랄 수도 있다. 허나 사업을 하다보면 그런 자존심 따윈 헌신짝처럼 갖다버릴 줄도 알아야 한다. 근데 장백기는 그런 타입이 절대 아니었는데, 그렇게 바뀐 것으로도 모자라 장그래와 '함께' 일을 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계산까지 했기 때문이다. 장그래가 정말 그렇게 대단한 인재인 걸까?

남들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목표에 정확히 명중시키는 사람을 '대단한 사람', '뛰어난 실력자'라고 추켜세우지만 그보다 더 뛰어나다고 평가하는 '천재'는 애초에 생각지도 못했던 과녁을 찾아내서 한가운데에 명중시키는 사람이다. 장그래는 그런 천재유형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물론 이야기속의 허구적인 캐릭터에 불과하지만, 현실에서도 그런 '천재'가 있기에 놀라운 것이다. 바둑기사로 '프로'를 꿈꿨지만 끝내 '입단'에 실패하고 계약직과 중소기업을 전전하는 캐릭터지만, 함께 일을 하는 동료들은 장그래를 그렇게 허투루 평가하지 않는다. 왜냐면 장그래는 언제나 '일이 되게끔' 일을 해내는 지름길을 알고 있는 듯한 성실함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해서 장그래가 하는 일이 '천재적인 것'도 결코 아니다. 김부련사장이나 오상식부장, 그리고 김동식과장의 눈에 보이는 장그래는 그저 평범할 따름이다. 일을 배우는 '정석 코스'를 따라 차근차근 성장하는 캐릭터인 까닭이다. 그런데 장그래가 하는 일이 그리 평범하지는 않다. 왜냐면 '말단사원' 주제에 '오너 마인드'로 일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사원이면 사원답게 상사가 시키는 일이나 열심히 하면서 차근차근 일을 배워나가면 될 것을, 장그래는 차근차근 배우는 처지면서도 머리속에는 온통 '오너 마인드'로 가득해서 일을 처리하는 속도가 느리기도 하지만, '상사'가 해야할 사업적 고민조차 장그래가 먼저 하고 있어서 답답할 지경이다. 허나 그런 장그래가 미워 보이지는 않는다. 그가 하는 고민이 알고보면 '매우 중요한 일'의 단초가 되거나, 꼬이고 꼬인 '문제의 해결점'이 될 실마리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장그래는 '일의 핵심'을 정확히 짚어낼 줄 아는 높은 안목을 지녔다. 그래서 하는 일마다 허투루하는 법이 없다.

이렇게나 철두철미한 장그래를 '사업파트너'로 장백기는 인정한 셈이다. 그리고 '영업3팀'이 다시 뭉칠 기미가 보인다. 천과장이 추진하는 CIC(사내독립기업)에 온길 인터를 합병하게 되면 말이다. 거기다 안영이와 한석율까지 합류하게 되면 가히 '천하무적'이 되지 않겠는가? 다음 편이 기대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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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과학사
팀 제임스 지음, 김주희 옮김 / 한빛비즈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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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DCCCXIII / 한빛비즈 153번째 리뷰] 모든 학문이 그렇지만 '알면' 참 유용하다. 굳이 '아는 것이 힘'이라는 베이컨의 명언을 끄집어낼 필요도 없이, 우리는 살면서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것을 실감하며 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대인에게 가장 필요한 학문을 꼽자면 어느 과목을 가장 중요하게 공부해야 할까? 초등생 시절부터 죽어라 공부했던 '국영수사과'에서 답을 고르자면, 나는 '과학'을 꼽고 싶다. 물론 모국어인 '국어'를 몰라서도 안 되고, 세계화 시대에 걸맞게 '영어'를 등한시해서도 안 되며, 논리적 사고력의 기틀을 잡아줄 '수학'도 꼭 필수이며,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살펴볼 안목을 길러주는 '사회'도 중요한 과목이긴 하지만, '과학'을 콕 짚어서 필수중요 과목이라 꼽은 까닭은 바로 '우리가 사는 세상을 바르게 이해하는 척도'가 되는 과목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한 눈에 알고 싶다면 과학공부를 게을리 해선 안 된다는 말이다. 나름 20년째 아이들에게 논술을 가르친 경험을 토대로 드리는 말씀이니 믿어도 좋다.

좀더 부연설명을 드리자면, 과학성적이 우수한 학생과 그렇지 못한 학생의 차이가 엄청나게 크다는 말이기도 하다. 과거에는 과학을 잘하면 '이과', 과학을 못하면 '문과'를 지향하는 선별적인 차이에 불과하다면서 '단순암기 과목'으로 치부하곤 했지만, 7차 교육개정 이후로 '통합교과'에 따른 수시개정이 보편화된 현재의 교육과정에서 '과학'은 명문대를 갈 수 있느냐, 가지 못하느냐를 가름하는 중요한 척도가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과학과목 뿐만 아니라 '수학'도 중시된 까닭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수학보다는 과학이 더 중시되는 까닭은 현대사회에서 '과학기술'과 관련이 없는 것이 없을 정도로 우리가 사는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선 '과학지식'이 그 어느 때보다 더 긴요하게 요구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해서 과학을 모르면 살 수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아무리 첨단제품이 쏟아져 나온다고해도 '메뉴얼'에 나와있는 '사용설명'을 읽고 '간편조작 버튼'이 어디 있는지만 알면 쓸 수 있기 때문이다. 평범하게 살아가는데에 복잡한 '과학이론'까지 이해해야 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만 더 편리하고 안락하게 살아가며 '경제적 윤택함'을 누리면서 살고 싶다면 과학공부는 필수다. 자본주의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노동(육체적 힘)'으로 먹고 살아가는 방법으론 택도 없고, '돈(자본)'이 돈을 버는 투자를 하지 않고서는 경제적 여유를 누릴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유망한 기업에 투자를 해야 하고, 어떤 기업이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지 한눈에 알아보려면 '과학' 정도는 '상식'이 되어야 한다. 언제까지 남들의 귀띔을 엿듣고서 뒤늦게 투자할 셈인가? 세상이 돌아가는 원천은 '과학기술'에 있고, '과학기술'을 선점한 국가가 선진국인 것이 당연시 되는 세상이다. 하다 못해 침대를 고를 때에도 '과학'을 따지던 세상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과학공부가 맘처럼 쉬운 것은 아니다. 맘잡고 과학상식 좀 넓히려고 '과학책'을 꺼내들었다가 몇 장 넘기지도 못하고 다시 덮은 일이 많을 것이다. 실제로 요즘 과학은 너무 어렵다. 어찌어찌 '뉴턴과학'까지는 기초 상식으로 이해가 가능하지만 '플레밍의 오른손 법칙'에 이어 '왼손 법칙'까지 따지다보면 본의 아니게 쌍권총을 들고 춤을 추게 된다. 그러다가 '아인슈타인과학'으로 넘어갈라치면 '특수상대성이론'은 특수하게 어렵고, '일반상대성이론'은 일반적으로 어렵다는 것을 알게되고 '양자물리학'으로 넘어가면 우주가 왜 그렇게 비정상적으로 운용되고 있는지 어렴풋하게나마 알게 된다. 그렇게 까마득한 우주의 끝자락으로 과학이해의 경계를 넓히다보면, 문득 그 넓은 우주속에 자그마한 지구가 '창백한 점' 하나를 찍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겸손해지기 마련이다. 왜냐면 시작은 '과학'이었지만 그 끝에는 '철학적 사유'로 귀결되는 오묘한 진리를 깨우치기 때문이다.

그렇게 어렵고 난해한 과학공부를 꼭 해야만 하는가? 라는 질문으로 되돌아올 즈음에야 겨우 '알기 쉽게 풀이된 과학책'을 찾기 마련이다. 그럴 때 딱 좋은 책이 있다. <뜻밖의 과학사>라는 책이다. 이 책은 '팀 제임스'라는 영국의 과학선생님이 직접 쓴 책이다. 이 책 이전에 <원소 이야기>, <양자역학 이야기>, 그리고 <천문학 이야기>까지 줄줄이 히트작을 내놓은 인기만점의 '유명 유튜버'이기도 하다. 제임스는 그렇게 인기를 끈 강의를 필두로 하여 책을 펴냈는데, 이 책 <뜻밖의 과학사>는 그 책들의 '종합편'이라고 해도 좋다. 앞서 펴냈던 책들에서 소개한 내용을 이 책에서 다시 선보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책에서는 '과학사'라고 하는 역사적인 이야기꺼리를 조목조목 소개하고 있기 때문에 앞선 책보다는 '부담'은 줄이고 '재미'와 '흥미'는 높이는 느낌을 받게 될 것이다. 어쩌면 제임스는 이 책을 통해 과학에 관한 '부담'은 낮추고 과학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아이들이 공부하는 과정을 지켜보면 항상 '성공'하는 패턴이 있다. 여기서 성공이라함은 '성적향상'을 말한다. 어느 과목일지라도 '재미'를 느끼고 즐기듯 즐겁게 공부하면 반드시 성적이 올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재미없던 과목에서 '재미'를 느끼기 위해선 언제나 '흥미유발'이 필요했다. '흥미'를 유발시키야 재미를 느낄 수 있었고, 이는 '아는 만큼 보인다'는 공식에 따라서 '흥미+지식', 다시 말해 '흥미'에 '지식'을 더해야 성적향상이라는 결실을 맺었던 것이다. 그런데 '흥미'를 느끼기 이전에 더 중요한 것은 '관심'을 가지는 것이었다. 흔한 속담 가운데 '말을 물가로 끌고 갈 수는 있어도 물을 마시게 할 수는 없다'는 것처럼 아무리 교사가 '흥미'를 유발시키고 '지식'을 더해주려 노력해도 아이가 '관심'을 갖지 않고 꺼버리면 말짱도루묵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수업시간 안에 온갖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했지만, 이것만큼은 누구도 해줄 수가 없었고, 오직 '본인'만이 스스로 갖는 방법밖에 없었다. 20년째 그 노력을 해보았지만 '관심사'까지 아이에게 억지로 가지게 만드는 참교육 방법은 없다는 것만을 확인했을 뿐이다. 하지만 일단 '관심'이 생기면 그 뒤부터는 일사천리다. 그 뒤부터는 파죽지세처럼 누구도 말릴 수 없는 것이었고, 오히려 '흥미폭발'을 어디까지 컨트롤 할 수 있는지 걱정해야 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렇게 깨우친 '원리와 이치'는 죽을 때까지 잊혀지지 않으며, 무엇으로도 그 '열의와 열성'을 막을 수도 없게 된다.

이 책에 소개된 '과학사'들 가운데 어느 하나도 쉽사리 얻어낸 결과가 없다는 점에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물론 페니실린처럼 '실수'가 위대한 발견의 시작이 되기도 했고, 고무나 플라스틱처럼 '엉뚱한 결과물'이 위대한 발명을 낳기도 했으며, 빅뱅이론처럼 '남들의 비아냥'을 받던 것이 과학계의 새로운 정설로 탄생되는 일도 흔하지만, 수많은 과학자들의 노고가 없었다면 그러한 실수와 실패, 또는 비웃음을 통해서 얻어낸 것이 아무 것도 없었을 거라는 점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과학의 혜택'을 무궁무진하게 누리며 살아가고 있다. 과학이론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알지 못했어도 말이다. 그런데 앞으로의 미래에도 그럴까? 그건 아니라고 본다. 왜냐면 첨단과학기술이 '일상생활의 모든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TV가 만들어지면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봐야 할 수고를 덜고, 가정에서 편하게 시청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저 '일방적으로' 시청만 할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OTT를 기반으로 '원하는 것'을 골라서 따로 시청이 가능해졌다. 가까운 미래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모르긴 몰라도 TV를 대체할 새로운 콘텐츠를 '시청자'가 직접 만들어서 유통하는 시장이 만들어질 것이다. 과거에는 전문가의 영역이었던 '제작과정'이 간편해지면서 다채로운 상상력을 발휘한 이들의 데뷔가 관건이 되는 세상이 펼쳐질 것이다. 그러니 '과학기술'에 대한 이해가 떨어지면 그러한 '창작물'을 직접 제작하지도 못하고 소외되는 계층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어쩌면 완벽한 '양방향 상호소통'이 가능해진 제작환경에서 24시간 라이브(생방송)가 펼쳐지는 세상이 될지도 모른다.

그때에는 무엇이 관건이 될까? 무엇보다 '창작력'이 가장 절실할 것이다. 창작과 창조의 영역은 '무한한 상상의 세계'다. 첨단과학기술은 머릿속에 상상한 것을 그대로 표현해낼 수 있는 세상을 구현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상상력은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이것이 관건이 되는데, 안타깝게도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는 없는 법'이다. 다시 말해, 창조교육의 시작은 '모방'으로부터 비롯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어릴 적부터 '기초교육'은 지식교육이 될 수밖에 없고, 결국 '암기과목'으로부터 시작해서 어느 정도 활용할 수 있는 '데이타'를 쌓고 난 뒤에야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는 말이다. 이 '창의력'에 상상의 날개를 달아줄 학문은 단연코 '과학'이 틀림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머나먼 미래를 그린 것에 '공상과학(SF)'이라는 말을 붙인 것이다. 결국은 '상상의 날개를 단 과학'이란 뜻과 상통하게 된다.

이 책에 소개된 '과학사'들은 한결같이 뜬금없다. 나름 '과학의 연대기'에 걸맞게 흐름을 쫓으려 노력했지만, 읽다 보면 중구난방 어지러움을 느낄 뿐이다. 그만큼 과학이 '방대하다'는 것을 짐작케 하는 증거이기도 하지만, 자칫하다간 길을 잃고 헤매기 딱 좋은 서술방식이라는 비판도 감수해야만 할 것이다. 허나 저자의 '의식의 흐름'을 되짚어가다보면 '뜻하지 않게 놀라운 과학사'를 마주하고 있는 독자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물리와 화학, 생물, 지구과학을 넘나드는 과학사의 나열속에서 길을 잃지 않고 이치를 헤아리다보면 어느새 '과학에 대한 관심'이 부쩍 달아오른 자신을 발견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놀라운 경지에 오른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뿌듯하지 않겠는가. 이 책이 당신도 깨닫지 못했던 '과학적 관심'을 일깨우는데 보탬이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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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디푸스 왕 안티고네 외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1
소포클레스 외 지음, 천병희 옮김 / 문예출판사 / 2006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My Review MDCCCXII / 문예출판사 6번째 리뷰] 이 책에는 그리스 3대 비극 작가 가운데 '아이스킬로스'와 '소포클레스'의 작품이 모두 4편 실려 있다. 실려있는 순서대로 아이스킬로스의 <아가멤논>, <코에포로이>와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 <안티고네>다. 모두 인간이 감당하기 힘든 '비극적인 소재'로 구성되어 있으며, 신이 정해놓은 운명에 맞서 고뇌하고 고통받는 인간의 모습을 아주 잘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는 작품들이기도 하다. 그런데 왜 '희극'이 아니라 '비극'이 그리스에서 유행한 것일까? 이에 대해 많은 문학가들은 '인간의 위대함과 존엄을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논한다. 신이 정한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삶이고, 또한 그 삶은 '고통의 연속'일 뿐이지만, 그 절망적이고 가망 없는 투쟁 속에서도 인간은 타협을 거부하고 파멸을 자초하면서 스스로 '존재의 가치'를 찾아내는 유일무이한 존재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신의 피조물에 불과한 하찮은 인간일지라도 '정해진 운명'에 맞서 싸우는 불굴의 의지를 보여줌으로써 진정한 '인간다움'을 보여준다 하겠다.

그렇다면 뭐가 '인간다움'이란 말인가? 그리스 비극에서 보여주는 내용은 그야말로 '참담함, 그 자체'다. <아가멤논>에서는 아내가 내연남과 짜고서 남편을 독살하고, <코에포로이>에서는 아들이 어머니와 내연남을 죽이며 아버지의 복수를 대신한다. <오이디푸스 왕>에서는 더 심하다. 아들이 아비를 죽이고 어미와 결혼해서 자식까지 낳는 스토리가 전개되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안티고네>는 비극의 정점을 찍었다하겠다. 꼭 지켜야 마땅할 '국법 vs 도덕'의 갈등을 최고조로 보여주며 무엇이 올바른 것이고, 무엇이 정의인지 고뇌케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어느 작품이나 비극적 상황을 묘사하지만 후대로 갈수록 '비극적 주제'가 점점 더 무거워지고 수많은 생각을 하게끔 한다. 이런 까닭에 많은 문학가들은 아이스킬로스를 '비극의 창시자'라고 부르고, 소포클레스를 '비극의 완성자'라고 부른다.

그러나 '비극의 매력'은 갈등양상을 벌이는 양쪽 모두의 편을 들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어느 한 쪽의 편을 쉽사리 들 수 없게 만드는 것이 비극에 푹 빠지게 만드는 이유라고 하겠다. <아가멤논>에서 아내(클리타이메스트라)가 남편(아가멤논)을 죽이기 위해 내연남(아이기스토스)까지 끌어들이는 '부정적인 일면'만 소개하는 일이 많은데, 사실 아내가 마땅히 사랑하고 존경해야할 남편이라는 작자가 '딸(이피게네이아)'을 전쟁 출정식의 산 제물로 갖다 바친 것에 대한 복수였던 것이다. 이는 어머니라면 당연히 가졌다고 보는 '모성애'를 공격한 남편의 천인공로할 만행에 대한 정당한 복수가 아니겠냔 말이다. 그러나 전쟁영웅이기도 한 남편을 죽이기에 힘이 모자랐던 아내는 남편을 죽이기 위해 '내연남'을 꼬드겼고, 이러한 '아내의 불륜(?)'은 예나 지금이나 금기시 되고 동정받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편, <코에포로이>는 <아가멤논>의 뒷이야기에 해당한다. 남편을 살해하고 내연남과 함께 국가를 통치한 클리타이메스트라의 친아들 오레스테스가 '아버지(아가멤논)의 복수'를 위해 고국으로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들은 부정한 짓(!)을 저지른 어머니와 내연남을 처지하며 복수에 성공한다.

그런데 말이다. 이런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한 국가의 백성들은 행복한가? 아무리 '왕족의 운명'과 공동운명체(?)인 백성들이라고해도 민주정치의 원조라 자랑하던 그리스국가 아니었던가 말이다. 더구나 트로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돌아온 영웅들이 살아 숨쉬던 시절을 배경으로 삼았는데, 그런 영웅들이 고국으로 되돌아와 통치에 참여한 모습은 전혀 비춰지지 않는다. 이것이 아이스킬로스의 비극의 한계점이다. 비록 '비극의 창시자'라는 칭송을 아낌없이 받고 있지만, '비극,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고 그냥 '한 가문(왕족)의 몰락'만에만 초점을 맞췄을 뿐이다. 그에 반해 소포클레스는 좀더 심오한 내용을 담았다. 비록 '오이디푸스 왕'이 겪은 불운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은 매한가지지만, 그래도 오이디푸스가 다스리는 '테바이'라는 나라가 겪는 풍파와 테바이 민중들이 겪는 고난까지 작품내용의 전개에 중요한 매개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 그렇다.

<오이디푸스 왕>은 정신분석학자인 지그문트 프로이트에 의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명칭으로 더 유명해졌지만, 오이디푸스가 친부를 살해하고 친모와 결혼을 한 것에만 초점을 맞춰 '성도착증'이라는 성욕구만 해석을 해버리는 편파적인 결과만 부추긴 점이 아쉽다. 사실 오이디푸스 왕은 테바이를 아주 잘 다스리던 훌륭한 군주였는데도 말이다. 이러한 점은 싹 가려지고 그저 비이성적인 성욕구에 대한 그럴듯한(?) 분석만 남겨놓았으니 억울할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렇게 훌륭한 군주로 나라를 잘 다스리고 있었는데, 테바이에 이유를 알 수 없는 역병이 돌면서 테바이는 '판데믹의 위기'로 빠져버리고 만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 델포이 신전으로 신탁을 받아 오지만, '도덕적으로 불명예스러운 이'가 테바이에 몰려온 위기의 원인이라는 애매한 말만 돌아왔을 뿐이다. 지혜로운 오이디푸스 왕도 이 수수께끼 같은 신탁을 해석하지 못해 고민하게 된다.

오이디푸스 왕이 지혜로운 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가 테바이의 왕이 되기 전에 괴물 '스핑크스'가 테바이를 공포로 몰아넣었기 때문이다. 스핑크스는 '아침엔 네 발, 점심엔 두 발, 저녁엔 세 발로 걷는 동물'이 무엇이냐는 수수께끼를 내고서 풀지 못한 나그네들을 잡아먹기로 유명한 괴물이었는데, 이 괴물이 낸 수수께끼를 이방인이었던 오이디푸스가 답을 맞추고 스핑크스를 처지해서 때마침 테바이의 왕이었던 라이오스가 의문의 죽음(!)을 맞아 자리가 빈 임금자리를 오이디푸스가 차지하게 되었고, 살아있는 왕비 이오카스테와 결혼을 해서 '테바이 왕가의 혈통'을 이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따라서 오이디푸스의 등장은 테바이로서는 국난극복을 해낸 영웅의 등장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고, 그런 오이디푸스 왕이 테바이를 다스리는 동안 태평성대를 누렸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평화로운 테바이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역병이 돌면서 테바이를 '죽음의 나라'에 버금갈 정도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받아온 신탁이 '부도덕한 인물을 추방해야 한다'는 내용이니 지혜로운 오이디푸스마저도 풀지 못한 숙제가 되어 버린 셈이다.

이렇게나 어려운 문제를 풀기 위해 오이디푸스는 최선을 다했고, 그 최선이란 것이 '부도덕한 인물'을 색출하여 마땅한 벌을 받게 하고 테바이에서 추방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최고통치자인 자신부터 이를 실천하겠노라고 엄숙한 맹세까지 한다. 그 부도덕한 인물을 추방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두 눈을 찔러' 장님으로 만들겠노라고 말이다. 어찌 이렇게나 무서운 맹세가 자기 자신에게 닥칠 것이라 예상이나 했을까? 그렇게 부도덕한 인물을 찾으려는 노력으로 인해 결국 그 장본인이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오이디푸스는 스스로 두 눈을 찔러 '진실을 보지 못한 죄'를 씻고, '자신의 안위'보다 국가의 안위를 위해서 스스로 왕의 자리에서 물러나 맹인거지가 되어 테바이를 떠난다. 자신이 왕이었을 때 그 '부도덕한 인물'을 아무도 도와주지 말라 명했던 탓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 인간에게 내려진 무서운 운명에 벌벌 떠는 나약한 인간이 아닌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불운 앞에서도 당당히 맞서는 불굴의 의지를 가진 인간'을 마주하게 된다. 우리는 이런 멋진 인간에게 아낌없이 박수갈채를 보내지 않느냔 말이다.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한다면 당당히 벌을 받고 철저히 속죄하는 모습이 얼마나 '인간다운 행동'인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다만, 그처럼 '인간다움'을 갖춘 인격이 오늘날에는 찾아보기 힘들 뿐이다. 죄를 짓고도 비겁하게 '무죄'를 받기 위해 꼼수를 부리고, 부도덕한 짓을 저지르고도 '과거의 영예'를 끌어들여 오물을 덮고 고약한 냄새를 감추려 애를 쓰는 비겁자들을 우리는 너무도 많이 보고 있다. 심지어 비윤리적인 잣대를 들이대며 '비윤리적인 행동'마저 정상이라고 떠벌리는 비정상적인 세태까지 펼쳐질 지경이다. 어찌 인간의 탈을 쓰고 그리 부끄러운 짓을 떳떳하게 밝히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지만, 그런 비정상적인 인간을 방치하고 부도덕한 짓을 저지르는데도 그저 방관만 하고 있는 국민들도 '비정상'인 것은 마찬가지다. 우리가 <오이디푸스 왕>을 통해서 깨달아야 할 것은 '비극'에 맞서 피하거나 굽히거나 굴하지 않는 한 인간의 일거수일투족이다. 오이디푸스의 행보 하나하나를 눈여겨 보아야 할 '시대적 위기'가 우리에게 닥쳤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안티고네>는 무엇을 '지키고 따라야' 우리가 사는 세상을 고귀하게 만들 수 있는지 보여준다. 오이디푸스 왕이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나고 테바이를 통치할 자리에 올라야 할 '마땅한 권리'는 당연히 오이디푸스의 두 아들에게 있었다. 바로 장자 폴리네이케스와 차남 에테오클레스다. 하지만 왕의 자리는 하나였기에 두 형제는 '선택'해야만 했다.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합의'를 할 것인지, '싸울' 것인지 말이다. 비극적 운명은 이 둘에게 '싸움'을 종용했고, 둘은 못나게도 싸웠다. 물론 처음엔 장자에게 왕위가 돌아갔다. 하지만 외삼촌인 크레온의 야욕(?)에 의해 둘은 왕위 다툼을 벌이게 되었고, 장자가 내쫓기고 차남이 왕위에 오르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 억울했던 장자는 이웃나라에 '구원병'을 청하고 고국 테바이를 향해 창을 꼬나쥐게 된다. 이렇게 벌인 싸움에서 두 사람은 목숨을 잃어버리는 치명상을 당하여 죽고, 비어 있는 왕위는 크레온이 차지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왕의 자리에 올라 오랫동안 고난을 겪은 테바이를 바로 잡고자 '국법'을 내세웠으니, 조국을 위해 싸운 자에게는 명예롭게 하고 조국을 배신한 자에게는 불명예를 내리겠다는 모두가 이해할 만한 '합당한 법'을 공표한다. 이처럼 크레온은 이성적인 판단을 내릴 줄 아는 '똑똑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비극의 시작은 바로 여기서 시작한다. 불명예를 받아 마땅한 테바이의 배신자 '폴리네이케스'는 외국의 군대까지 끌여들여 조국을 공격했으니 그의 시체는 그 누구도 장례를 치루지 말 것이며, 들짐승과 날짐승의 먹잇감으로 방치해 둘 것을 명령한다. 그리고 누구라도 그 명령을 어긴다면 '국법의 이름'으로 엄히 다스릴 것이라 함께 공지한다.

그런데 이를 어기는 사람이 등장하고 만다. 바로 폴리네이케스의 살아남은 혈육인 여동생 '안티고네'와 '이스메네'다. 안티고네는 아무리 국법으로 금하는 일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친오빠를 장례도 치르지 못하는 하는 국법을 지킬 순 없다면서 오빠의 죽음을 애도한다. 이는 '도덕적인 행위'이며 누가 탓할 수도 없는 상식이다. 그런데 그런 상식이 '국법'에 위배된다면서 안티고네는 스스로 죽을 운명을 지게 된다. 한 나라를 다스리는 현명한 임금이라면 이럴 때 어떻게 조치를 해야 할까? 스스로 제정한 '국법'의 지엄함을 증명하기 위해 손수 사형을 해야 할까? 아니면, 비록 법을 어겼다고 하더라도 인간이 지켜야 마땅할 '도덕적 가치'를 위해 한 발 물러서서 '예외'를 두어야 할까? 허나 꼭 지켜야 할 '국법'에 예외를 둔다면 국법이 제대로 지켜질 리 없다. 누구라도 이런저런 변명을 늘어놓으며 '빠져나갈 구멍'을 찾을 게 뻔하고, 그렇게 흔들린 '사법정의'는 끝내 무너져버릴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정의구현'을 내세운다 한들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은 '꼭 지켜져야할 도덕적 윤리'라는 것이 있다. 아무리 법으로 금한다 하더라도 '핏줄로 이어진 가족'이 지켜야 할 윤리가치가 있지 않느냔 말이다. 그런 가족 간에 치뤄야 할 '윤리규정'이 있다면 그것마저 금하게 만드는 것은 너무나도 '비인간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기에 안티고네는 국법으로 금지하고 있는 일이라 하더라도 목숨을 돌보지 않고 '오빠의 장례'를 치룬 것이다. 세상엔 '국법'보다 더 소중히 지키고 따라야 할 '윤리가치'가 있다면서 말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더 중요하고, 우선 되어야 마땅할까? 나라를 바로 세우는 '사법정의'가 중요할까? 인간답게 살아갈 '윤리가치'가 더 우선해야 할까? 쉽지 않은 결정이다. 마치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를 따지는 듯한 어리석은 질문이지만, 우리가 살아갈 세상을 올바르고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선 꼭 따져보고 현명한 대답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소포클레스는 크레온의 아들 하이몬이 안티고네를 사랑하는 것으로 설정하고 '엄격한 국법'을 시행한 대가로 크레온은 아들과 아내를 동시에 잃어버리는 비극을 맞이하게 된다. 한마디로 멋진 나라를 만드는데 성공했으나 사랑하는 가족은 잃어버린 셈이다. 허나 사랑하는 가족마저 죽음을 면치 못하게 만든 '인간'이 만든 세상이 아름다울 수 있겠느냐는 의문은 계속 남는다.

우리네 인생은 '비극'으로 얼룩져 있다. 한마디로 아름답기만 한 인생은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리스 비극'은 인간들이 겪고 있는 비극보다 더한 슬픔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카타르시스(눈물의 정화)'라고 표현하며 슬픔을 겪으며 한바탕 울음과 눈물을 쏟고 난 뒤에 '마음의 찌꺼기'를 걸러내어 슬픔을 이겨낼 힘을 얻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비극'을 예찬했다. 한편의 비극이 우리네 삶보다 더욱 슬픈데도 '비극적 주인공'이 슬픈 운명에 맞서 당당한 모습을 통해서, 현실에서 맛볼 '평범한 비극' 따위는 가볍게 이겨낼 수 있다고 말이다. 물론 시대가 많이 변한 오늘날에는 '비극'보다 더한 '막장 드라마'가 현실로 펼쳐지고 있어 혼란스러울 수도 있겠으나 운명에 맞서는 당당한 주인공의 모습은 아직도 변하지 않았다. 그 막장 드라마보다 더한 막장 현실이 우리네 삶을 시험케 하더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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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한중일 세계사 17 - 을미사변과 황해 위기 본격 한중일 세계사 17
굽시니스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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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DCCCXI / 위즈덤하우스 33번째 리뷰] 고종에 대한 평가는 어찌 해야 할까? 망국의 임금으로서 '나름' 열심히 일한 성군으로 추켜세워야 할까? 아니면, 나라가 망하거나 말거나 '왕권회복'에만 혈안이 된 암군으로 매도해도 될까? 객관적인 평가만 놓고 본다면 '나름' 열심히 일한 왕임에는 틀림없지만 '세계정세'를 볼 수 있는 혜안이 없어서 국가의 운명과 백성의 안위가 바람 앞의 촛불 신세인데도 '제 잇속(왕권)'만은 놓치지 않으려 부던히도 애를 쓰는 모습이 안쓰러울 지경이다. 허나 주관적인 평가를 한다면, 그래도 내 나라 임금인데 미워할 수만 있겠느냔 말이다. 비록 '조선왕조의 백성'이 아닌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고종을 평가한다면 '시대의 흐름'을 읽어내는 안목을 읽어내지 못해 결국 '망국의 길'을 제 발로 걸어들어간 암군이었다고 평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첫 단추는 '흥선대원군'이 잘못 끼웠다. 어린 임금(고종)을 대신해서 '세도정치의 폐단'을 바로 잡고 '왕조의 기틀'을 회복하여 조선왕조의 부흥을 꾀했다는 점에선 높은 점수를 주어야 마땅하겠지만, 서구열강의 야욕과 침탈까지 적절히 읽어내고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점은 뼈 아프다. 더구나 어린 고종이 '어른 고종'이 되었을 때 자연스레 권력을 이양하고 사심 없이 뒷전으로 물러나야 했음에도, 그러지 않고 '임오군란'을 비롯해서 끊임없이 임금과 '권력다툼'을 했다는 것이 조선을 망국으로 이끈 주범이라 할 것이다.

그 다음엔 '민비'의 섣부른 정치 훈수였다. 을미사변 이후에 '명성황후'로 추증되나 살아있을 땐 고종의 아내인 '민씨 성을 가진 왕비'였다. 그리고 조선은 '왕비(여자)의 정치참여'를 용인하지 않았다. 문정왕후의 섭정이 임금(명종)의 권력보다 강할 때도 있었으나 어디까지나 '임금의 어머니'였었다. 왕의 부인인 '왕비'가 권력의 축이 된 적은 조선시대에 없었단 말이다. 그런데도 민비는 흥선대원군과 고종의 권력다툼의 한복판에 뛰어들어 '민씨의 천하'를 만들 정도로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였다. 그것이 절대적으로 '고종의 왕권회복'을 위해서만 이루어진 일이었다면 그나마 높이 평가해줄 수 있겠으나, 딴에는 '고종의 권위'보다 우월함을 점거하며 독단적인 전횡을 저지르기도 했다는 점에서 도를 넘었다 하겠다. 더구나 (친미파에서 친일파로, 친일파에서 친러파로 갈아타는) 개화파의 우두머리 역할(?)까지 마다하지 않은 추진력은 고종의 든든한 파트너로 대원군과 '왕권다툼'을 벌일 때도 있었으나, 공공연히 고종보다 더 강력한 리더십으로 '권력행사'를 벌이는 일도 있었다는 점에서 국정농단(외척의 간섭)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럼에도 고종의 줏대를 발휘해서 국정을 원활하게 운영했더라면 조선은 위기 속에서도 살길을 찾는 행보로 나아갔을 것이다. 가장 결정적인 실수는 '청의 개입'을 두 차례나 용인했다는 점이다. 동학농민운동(동학혁명) 때에도, 갑신정변 때에도 스스로 해결방법을 찾지 않고 '청군 원병'을 요청해서 국가의 주권을 크게 훼손시켰다. 더구나 을미사변(민비 시해사건)이 일어나자 과감하게(?) '아관파천(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을 단행한 것이다. 아무리 일본의 강압적 태도에 놀라고 신변의 위협으로 살기 힘들어졌다고 하더라도 '한 나라의 임금'으로서 외국공사관에 몸을 의탁하고서 러시아의 보호(?)를 꾀하느냔 말이다. 이 역시 '청군의 개입'과 마찬가지로 '러시아군의 개입'을 종용하는 결과를 낳았고, 결국 '스스로 해결방법'을 찾지 않고 끊임없이 다른 나라를 끌어들여 국가를 어지럽히는 자충수를 둔 셈이다. 그리고 청군의 개입으로 '청일전쟁'이 벌어진 것처럼 러시아군의 개입을 빌미로 '러일전쟁'이 벌어질 참이니 조선은 '다른 나라의 전쟁'에 전쟁터를 제공하는 어리석은 짓을 벌인 셈이다. 물론, 결과가 좋았으면 '신의 한 수'라면서 고종을 칭송하는 이들도 많았으리라. 그런데 결과까지 안 좋았으니 고종은 더욱더 비난만 받게 될 뿐이었다.

딴에는 '약소국의 비애'를 감안하여 다른 열강의 힘을 빌어 '이이제이(오랑캐의 힘으로 오랑캐를 제압한다)'를 하려는 고종의 비극을 충분히 이해할 수도 있을 법하다. 호시탐탐 조선을 넘보는 '일본제국의 야욕' 앞에 청의 힘을 빌어 일제를 제압하려 했고, 미국의 힘을 빌어 일제를 저지하려 했으며, 러시아의 힘을 빌어 일제를 호령하려 하는 것이 슬기로운 지혜라 하지 않을 수 있겠냔 말이다. 허나 조선에게 시급한 것은 '근대화'였다. 그 때문에 뒤늦게나마 '개화파의 손'을 들어주며 조선을 개혁하려 들고 근대화에 앞장 서려 했으나 손발이 맞지 않아 번번히 실패한 탓도 있겠다. 먼저 근대화를 성공시키기 위해선 '국력'이 바탕으로 깔려 있어야 하는데, 국력의 근본이랄 수 있는 '경제력'이 바닥을 치고 있었으니 서구열강 앞의 먹잇감 밖에 될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경제력을 키우기 위해선 '백성들부터 근대교육'을 시켰어야 했는데, 그러기엔 자금도 부족했고, 열의도 없었다. 그저 양반의 자제들 몇몇 만이 소위 '외국물'을 먹고 왔을 뿐이며, 그들이 맛보고 온 '선진문물'에 대해 옥석을 가릴 줄 아는 이가 얼마 없었으니, 그나마도 아무 소용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훗날 서재필이 주도한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가 망해가는 나라에 빛이 될 수도 있었으나, 그 빛마저 고종은 자신의 '전제왕권강화'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제 발로 차버린 셈이 되었다. 그리고서 꿋꿋하게 밀어붙인 것이 '대한제국 황제가 되는 길'이었으니, 한 치 앞도 살피지 못하는 어리석은 임금의 전형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하긴 이런 전제왕권의 끝을 잡고 허우적거리던 것이 어디 '고종' 하나 뿐이었겠는가? 청나라 황실이 그랬고, 러시아 로마노프 황제가 그랬으며, 프로이센을 비롯해서 유럽 곳곳의 왕조가 모두 비슷한 운명을 맞이했더랬다. 그럼에도 그네들은 '식민지'를 거느린 제국주의 국가로 거듭난 반면에 조선은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수모를 겪은 것이 결정적 차이다. 이렇게 종합적인 평가를 매겨도 고종은 좋은 점수를 받기 힘들다.

이제 조선은 어디로 가는가? 우리는 이미 그 역사를 알고 있지만, 제대로 알고 있지는 못하다. 그 까닭은 '한국사'라는 우물 속에서만 굴러가는 역사를 공부한 탓이다. 이 책이 훌륭한 까닭은 '한국사의 흐름'을 파악하기 위해 '주변 정세'를 아울러 '세계 정세'까지 역사적 흐름에 발맞춰서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깨알같은 글씨'가 한눈에 들어오지 않아 불편하지만, 그래도 이 책을 놓치 않는 까닭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제 '러일전쟁'이 펼쳐질 참이다. 그 전쟁이 벌어지기까지 어떤 정세가 숨겨져 있었는지 속시원히 알아보고자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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