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오늘도 떠나지 않습니다 - 코드블루 현장에 20대 청춘을 바친 중환자실 간호사의 진실한 고백
이라윤 지음 / 한빛비즈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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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호사는 어떤 직업일까? 정작 병원에서 근무를 하고 있는데도 잘 모르겠다. 물론 나는 '비정규직'에 '비의료진'인 탓에 커다란 병원의 부속품처럼 근무를 하고 있으니 그럴 법도 하지만, 의료진들조차 '간호사'에 대한 인식이 나와 큰 차이가 없을 정도로 모르고 있는 것 같기에 하는 말이다. 그저 '백의의 천사가 아니다'라는 사실만 확실히 알고 있을 뿐이다. 실제로 간호복이 '하얀색'에서 벗어난 것은 오래 되었다. 그리고 '치마'를 입은 간호사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간호라는 업무가 매우 '고강도'인 까닭에 불편한 복장은 방해가 될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간호사들은 대개 '딱딱한 말투'를 쓴다. 간호사 복장을 하고 있다고 해서 천상의 목소리로 응대해줄 거라는 기대는 애초에 하지 말길 바란다. 그들이 받는 업무 스트레스는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에 '웃는 얼굴'을 하고 있어도 말투는 신경질적인 경우가 많으니 묻지도 따지지도 말길 바란다. 그게 그들을 덜 피곤하게 만들테니 말이다. 그나마 코로나19 이후에는 마스크로 가리고 있어서 웃는 얼굴조차 볼 수 없게 되었다.

 

  이 책을 쓴 글쓴이는 '중환자실'에서 10년을 버텼다고 한다. 중환자실을 비유하자면 '전쟁영화 초반 5분'이 적절할 것이다. 생과 사의 갈릴길에 선 환자를 둘러싸고 수십 명의 의료진이 달려들어 말 한마디 없이 눈빛만으로 각자의 할 일을 하고, 들리는 것이라고는 귀에 거슬리는 의료기구들의 신호음과 의료진들의 거친 숨소리 뿐이다. 하지만 그들의 눈빛은 그 어느때보다 번뜩인다. 누가 뭣이 필요하다는 말을 하기도 전에 필요한 것이 전달되고, 심지어 다음 상황이 어떻게 벌어질지 예상하고 움직이기도 한다. 간혹 고성이 오가는 경우는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얼떨떨하게 바라만 보고 있는 '신입들'의 몫이고, 뒤늦게 '응급상황'을 전달받은 보호자들이 찾아와 살려내라고 소리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코드블루(성인환자) 또는 레드(소아환자)[이런 색깔구분은 병원마다 다른 것 같다] 상황에서 심폐소생술이 필요한 경우에는 온 병원의 의료진들은 그 장소로 우르르 달려갈 뿐이다. 그 뒤에 벌어지는 상황은 아까와 똑같다. 환자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은 총동원하고, 필요한 경우 보호자의 동의서를 받기 위해 촌각을 다퉈 달려가는 일이 무한히 반복된다. 그런 중환자실에서 10년 넘게 근무를 선다는 것은 '전장터 한복판'에서 버티고 살아남았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무엇이 글쓴이를 그 극한환경에서 버티게 만들었던 걸까? 고액의 연봉일까? 물론 간호사 연봉도 꽤 높은 편이다. 하지만 큰 병원이 아니라면 그리 높은 축에도 끼지 못할 뿐더러, 큰 병원이라면 일의 강도는 가히 '살인'적인 경우가 많다. 그러니 돈을 많이 준다는 꾐(?)에 빠져 '중환자실'에서 10년 동안 버티는 이는 거의 없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간호업무의 소명감 때문일까? 아픈 환자를 돌보고 생명을 살리는 일에 '소명의식'을 부여하는 일은 흔하지만, 소명의식은 각자 마음에서 스스로 우러나오는 것이지 남들이 왈가왈부한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기에 함부로 입에 올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시 말해, 너는 간호사 복장을 하고 간호업무라는 '숭고한 일(?)'을 하고 있으니 뛰어난 사명감을 발휘해서 죽은 사람도 살릴 각오로 봉사하라고 그 누구도 '강요'할 수 없단 말이다. 그러니 간호사 복장을 하고 있으니 당연히 '소명의식'도 있을 거라고 강요하지 말란 말이다. 그저 직장인일 뿐이다. 일한 만큼 돈을 벌러 온 사람이란 말이다. 그러니 중환자실에서 근무하는 간호사를 붙잡고 무조건 살려내라고 큰소리 칠 '권리'를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깨우쳐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소명의식' 따위를 함부로 떠들지는 말자.

 

  마침맞게 글쓴이도 말한다. 자신은 애초에 꿈이 '간호사'도 아니었고, 우연찮게 '간호업무'를 직업으로 삼게 되었으며, 10년이 넘은 지금도 '천직'이라는 생각따위는 하지 않는다고 말이다. 한마디로 하는 일이 힘들어서 지금 당장이라도 '그 자리'를 떠난다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고 말이다. 그런데도 이 책의 제목이 <저는 오늘도 떠나지 않습니다>란다. 천직도 아니고, 소명의식도 없는 간호사가 그 힘들다는 '중환자실'을 떠나지 않겠단다. 심지어 '코로나19'로 병상의 환자는 넘쳐나고 업무강도는 한계를 초월했을 때도 그저 버텨냈을 뿐이란다. 물론 힘듦에 지쳐 '후회' 한 적도 많다고 하지만, 만약 그랬으면 '지금의 나'로 존재할 수 없었을 거라고, 다른 일을 하고 있었더라면 '단단해진 나의 모습'에 만족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없었을 거라고 말한다. 인생을 잘 살아온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만족감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토록 단단해진 간호사를 힘들게 하는 일은 이제 없을까? 아니다. 여전히 많다. 바로 인성이 글러 먹은 모자란 사람들, 전문용어로 '진상들'이 있기 때문이다. 비의료진인 나조차도 병원에서 일하다보면 이런 '진상들' 때문엔 여간 힘든 게 아니다. 그래서 나는 요즘 말끝마다 "감사합니다"라고 한다. '괄호'를 붙여서 말이다. 이를 테면, 세 가지 유형으로 써먹곤 한다. 첫 번째는 "(진상 부릴만큼 부린 것 같은데 이제 좀 꺼져 주시면) 감사합니다", 두 번째는 "(진상을 요만큼만 부려주셨으니) 너무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어머! 진상을 많이 부릴 줄 알았는데 하나도 부리지 않아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라는 용도로 써먹고 있단 말이다. 세상에서 박멸해야 할 것은 해충 뿐만 아니라 바로 이런 '진상들'이기 때문이다. 글쓴이도 오죽했으면 책의 첫머리를 바로 이런 '진상들의 사례'로 장식했을까?

 

  그렇다면 진상들을 애초부터 박멸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고객'이라는 말부터 없앴으면 한다. 바로 '손님은 왕이다'라는 사고방식이 문제인데, 언제까지 손님은 '무한권리'를 누리고, 직원은 '무한의무'만 져야 한단 말이냔 말이다. 병원을 찾아온 내원객들의 '민원업무'만 해도 정말 산처럼 많다. 해결해도 끝나지 않는 것이 '민원업무'의 특징이다. 하루종일 쏟아지는 내원객들의 불평불만은 어처구니 없는 것이 태반이기 때문이다. 몇 가지만 예를 들어보면 단박에 이해가 갈 것이다. 병원은 환자들의 안전을 위해 '보호자 1인'만 허용하곤 한다. 병실이 좁기도 하고 외래환자의 경우에도 너무 많은 내원객으로 인해 불미스런 일을 겪을 수도 있으니 불필요한 병원방문으로 병원업무를 마비시키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환자 1명에 보호자 2~3명이 찾아오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러면서 '자기 환자'는 특별하니(?) 허락해달라고 떼를 쓰곤 한다. 그래도 규정상 그럴 수 없으니 '보호자 1인'만 허용하겠다고 하면, 그때부터 어거지를 쓰기 시작한다. "너희가 뭔데 병원출입을 하라 마라야, 언제부터 병원이 이딴식으로 불친절했어? 아픈 환자를 상대로 장사를 하니 환자를 봉으로 아는 거야 뭐야? 니들이 늙은 환자들 상대로 '과잉진료' 청구해서 병원비 장난 아니게 비싼 게 하루이틀이냐구, 내가 니들 속셈 모를 줄 알아. 환자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기만 해봐, 당장 고소할테니. 감히 니까짓것들이 뭔데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건데, 오호라~ 아주 잘 걸렸어. 니들 밥줄 내가 끊어지게 만들어줄테니 각오하고 있으라고, 알았으면 당장 내가 원하는대로 다 해달라고!!" 이 정도의 언행은 그나마 '보통수준'이다. 더 심한 경우도 많고, 다 들리는 혼잣말로 '육두문자'를 날리는(!) 경우는 너무 흔해서 말할 거리도 못된다.

 

  왜 지들만 '왕'일까? 한낱 백화점 상술에서 비롯되었다는 '손님은 왕'이다라는 것이 어찌하여 저들의 '신념'으로 승화되었냔 말이다. 입장 바꾸어 보란 말이다. 아픈 환자를 치료하고 싶은 의료진이 '환자'에게 집중하는 일은 당연한 것이다. 근데 보호자들이 감놔라 배놔라 '간섭'을 하면 집중을 할 수가 없다. 6인실 병동에 보호자가 열댓 명이 진을 치고, 병실로도 모자라 복도까지 점거하고 있으면 의료진이 어떻게 원활히 진료를 보겠느냔 말이다. 몰지각한 보호자들은 '환자이송'을 위해 마련한 엘리베이터까지 차지하고서 긴급한 상황에 오도가도 못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 못들어오게 하는 것이고 제한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하나쯤이야'라는 식으로 다 알겠으니 나만 좀 '예외'로 해주세요라면서 생떼를 쓸 수 있느냔 말이다. 지킬 건 지켜야 '손님대접'도 제대로 받는 법이다. 그러니 '손님이고 지랄이고 누구도 왕이 아니다'라는 상식이 지켜졌으면 더 바랄 게 없겠다.

 

  끝으로 자기 삶에 열심인 이들을 응원하려 한다. 이 책이 '간호사'에 관한 에피소드로 가득할지언정 간호사를 지망하는 이들만을 대상으로 쓴 책은 아닐 것이다. 힘들고 고된 간호업무를 통해서 인생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는 글쓴이를 응원함과 동시에 각자 자신의 일에서 쏠쏠한 돈맛과 일하는 보람을 얻고 있는 전세계의 모든 이들을 응원하고 싶기 때문이다. 하나뿐인 인생을 살다보면 누구나 흔들리기 마련이다. 그리고 힘들고 지쳐서 마냥 쉬고만 싶을 때도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다만 포기하지만 않으면 언젠가 '만족'이라는 결승선을 넘어서게 될 거라고 말해주고 싶다. 어차피 인생은 포기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다음 생을 기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힘들 땐 잠시 쉬어도 좋다. 하지만 당신을 응원하는 이가 분명히 있을 거라는 사실만은 기억해주길 바란다. 난 오늘도 이세상 모든 열심이들을 응원할테니 말이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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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계획은 있다 - 미루는 습관 끊어내는 끝까지 해내기의 기술
피터 홀린스 지음, 솝희 옮김 / 한빛비즈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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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 중요한 것은 '습관'이다. 거창한 계획을 짜고 화려한 시작을 알리지만 '용두사미'격으로 흐지부지 끝내고 마는 것도 습관이고, 이번에는 꾸준히 하고 부지런히 달리겠다고 다짐하지만 '작심삼일'형으로 중도포기하고 마는 것도 습관이다. 이 책의 제목처럼 <누구에게나 계획은 있다>지만 애초에 세운 계획을 끝까지 완수해내는 일은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니다. 가장 중요한 '습관'을 바꾸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끝내기 습관'을 갖기 위해선 3가지만 개선해도 충분할 것이다. 첫째는 생각은 그만하고 일단 실행하는 것이고, 둘째는 목표를 완수할 때까지 끝없이 동기부여해야 하는 것이고, 마지막은 완수의 걸림돌은 싹 제거하고 날마다 한발짝씩 나아가길 멈추지 않는 것이다. 이 책에는 그밖에도 여러 가지 귀띔을 제공하고 있지만, 위의 3가지가 가장 중요하고 나머지는 3가지에 집중력을 발휘할 수 있는 '보조적인 수단'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 수단은 '선언문 작성', '미루지 않기', '딴짓하지 않기', '과한 목표 세우지 않기' 등이다.

 

  그렇다면 한 번 세운 계획을 끝까지 완수하는 것이 왜 중요할까? 다름 아니라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적인 방법이고 성공하기까지 가장 빠른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한 번 시작했다하면 끝을 보고 마는 당차고 성실한 사람에게 '실패'란 어울리지 않는 법이다. 그리고 인디언들이 기우제를 했다하면 100% 성공률을 자랑하는 것도 바로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멈추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성공하는 DNA를 가졌다면 바로 '끝을 보는 습관'이 그 증거일 것이고, 끝을 보기 전에는 '결코 멈추지 않는 습관'을 가졌다면 당근 성공하기 마련일 것이다.

 

  이렇게나 '성공비결'이 쉽고도 간결하며 이해하기도 쉬운데 왜 성공하는 사람들이 적은 것일까? 그게 바로 '끝내기 습관'을 기르기까지 각고의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언제 성공할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으니 '끝장'을 보는 것도 언제일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저 묵묵히 '성공'에 다달았다고 모두가 인정할 때까지 '전진'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 까닭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성공적인 습관'을 들이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누구나 달성하기 쉬운 '단기목표'를 세우고, '완수의 기쁨'을 연속적으로 꾸준하게 만끽하는 것이 비결이라고 이 책은 지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거창한 목표보다는 소박하지만 소중한 목표를 세우고, 어렵고 복잡한 목표보다는 쉽고 간단한 목표로 세분하는 것이 중요한 포인트다. 그리고 성공비결의 집중력을 높이기 위해 '동시다발적'으로 여러 가지 일을 처리하는 '멀티테스킹'보다 한 가지에 집중하는 '싱글테스킹'에 주력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성공할 확률이 40~70% 정도라면 과감하게 추진하고, 이에 미치지 못한 낮은 확률로 '도박'을 하지도 말 것이며, 너무 확률을 높이기 위해 철저히 준비하느라 '타이밍'을 놓치지도 말라고 조언하고 있다. 그리고 너무 허황된 희망에 부풀어 오르지도 말 것이며, 너무 과도한 생각이나 너무 심한 걱정 따위를 할 필요도 없다고 못 박았다. 모두 '완수하는 습관'을 기르는데 방해가 되는 걸림돌이기 때문이다.

 

  자, 정리하면 성공비결은 간단하다. 끝장을 볼 때까지 멈추지 마라. 완수하는 습관을 들이면 누구나 성공에 도달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일단 세운 목표는 매일 꾸준히 밀고 나가는 힘이다. 그 힘을 잃지 않는 한 당신은 반드시 성공할 것이기 때문이다. 올해 계획한 일이 있다면 아직 늦지 않았다. 설령 올해 안에 달성하지 못해도 괜찮다. 멈추지 않고 끝까지 해낸다면 당신의 성공습관은 빛나는 결말을 달성할테니 말이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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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11 : 구운몽 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11
윤병언 글, 정찬호 그림, 손영운 기획, 김만중 원작 / 채우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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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후기 가장 핫한 '애정소설'을 꼽으라면 <춘향전>을 꼽는 이들이 많겠지만, 나는 단연 <구운몽>이라 말할 것이다. 왜냐면 <구운몽>은 로맨스소설 코드의 정석이랄 수 있는 '잘난 남주'와 '예쁜 여주'가 등장하며 잘난 남주는 '하는 일'마다 대성공을 이루어 출세가도를 달리고, 예쁜 여주는 예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재주와 지혜마저 빼어나니 읽는 내내 흐믓하게 읽어낼 수 있어 '최고의 읽는맛'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가볍게 읽을 수 있는데도 '유교, 불교, 도교의 사상'이 적절히 녹아 있어 읽고 난 뒤에는 '철학적 사유'까지 즐길 수 있으니 단연 최고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어디 그뿐인가. 대부분 '작가미상'인 한국고전소설에 비해 '서포 김만중'이 임금(숙종)에게 바른말을 간언하다 유배형을 받은 뒤 절해고도에서 홀로 계신 어머님을 위로하기 위해 하룻밤에 지어낸 소설로도 유명하니, '표현론적 관점' 뿐만 아니라 '반영론적 관점'으로도 소설을 감상할 수 있기에 읽는이로 하여금 다채로운 즐거움을 맛보게 할 수도 있다. 거기에 김만중이 이 책 이외에도 <사씨남정기>, <서포만필>과 같은 책들을 펴낸 까닭에 '작가의 생각(의도)'를 비교분석하는 즐거움 또한 빼놓을 수 없으니, 여러 모로 <구운몽>은 읽는 가치와 함께 재미까지 얻을 수 있는 소중한 우리 문학인 것이다. 여기에 '순한글문학'으로 펴냈으니 그 가치는 두 말할 것도 없다.

 

  먼저, 장자의 '나비의 꿈'을 이야기 하련다. 바로 '꿈과 현실'에 관한 이야기다. 장자는 꿈속에서 나비가 되어 꽃들 사이를 즐겁게 날아다녔는데, 깨어보니 자신으로 돌아왔더라는 이야기다. 분명 장자와 나비는 '별개'이건만, 꿈이 진실인지 현실이 진실인지 '분별'하는 것이 어려운 까닭을 모르겠다는 말을 한다. <구운몽>에서도 성진은 불가의 몸으로 팔선녀를 희롱한 죄로 '양소유'라는 인간으로 환생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인간으로서 즐거움을 만끽하는 동시에 유한함을 깨닫는 순간, 다시 불가의 몸으로 되돌아와 큰 깨달음을 얻고 속세를 떨쳐내고 부처로 귀의하였다는 구성으로 이야기를 펼쳐냈다. 그런 까닭에 독자들도 완독을 한 뒤에 '성진의 삶'이 진실인지, '양소유의 삶'이 진실인지 속속들이 분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구운몽>은 분명 인간세상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유쾌한 이야기가 분명하지만, 그렇게 인간세상에서의 '해피엔딩'을 맞이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된 것이로다는 '색즉시공'의 해탈의 경지에 다다르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일반독자들은 혼란스럽기 그지 없다. 온갖 부귀영화가 다 부질없으니 '인생, 뭐 있어? 그냥 즐기는 거야!'라고 살라는 것인지, 만 가지 근심이 허황된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니 '무소유의 삶'으로 안분지족하며 살라는 것인지 헷갈리기 딱 좋다. 이를 김만중의 삶에 빗대어 분석한다면 나라에 충성하고 임금께 충신이 되길 마다하지 않은 결과가 '유배의 삶'이었고, 그 덕분에 홀로 계신 어머니를 제대로 모시지도 못하고 임종마저 지키지 못하는 '불효의 삶'을 살았으니, 김만중은 실로 '인생무상'을 제대로 느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 관점에서 김만중은 '유학자의 삶'을 살았으나 '불가의 도리'를 깨달아 덧없는 삶의 슬픔을 조금이라도 줄이려 했을런지도 모르겠다.

 

  이렇듯 <구운몽>은 유교, 불교, 그리고 도교의 사상이 적절히 배합되어 읽는 즐거움을 더해준다. 그중에서도 '입신양명'에 최선을 다하는 유가의 삶과 '색즉시공'의 깨우침을 목표로 삶은 불가의 삶의 '절충'을 모색한 점이 단연 으뜸이다. 도교의 색채는 신선과 선녀의 등장으로 몽환적인 느낌을 극적으로 살려내고, '몽유계 소설'이라는 장르의 장점을 최대한 살려낸 것으로 최선을 다한 셈이다. 그러니 어떤 사상에 더욱 큰 가치를 두고 읽어도 무방하다. 하지만 난 '유교의 코드'로 <구운몽>을 읽어내는 것이 요즘 MZ세대들에게도 취향저격일 것이라 생각한다. 최근의 젊은이들은 무언가를 얻기 위해 '인고의 세월'을 이겨내는 것보다 '하나뿐인 인생'을 최선을 다해 즐기는 것을 미덕으로 삼고 있는 싶기 때문이다. 추호도 비난하려는 의도는 없으니 오해는 없길 바란다.

 

  나 역시 '성진의 삶'보다는 '양소유의 삶'에 더욱 열광하는 독자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일개 서생에 불과한 양소유가 천부적인 재능을 뽐내며 '하는 일'마다 천복을 누리다 승상의 지위까지 얻어 최고의 명예를 다 누리는 삶을 누가 마다할 것이냔 말이다. 더구나 어여쁘고 어진 미녀를 아내로 맞이하는데, 하나가 아니라 여덟이라하고, 절세가인의 부인들이 시기와 질투로 싸우기는커녕 사이좋은 자매처럼 화목하게 지낸다니 '가정의 평화'는 모든 사내가 꿈꾸는 최고의 이상향이며, 그 자녀들 또한 더할 나위 없이 출중하고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니 얼마나 즐거운 소설이냔 말이다.

 

  헌데 말이다. 과연 현실에서 '여덟 명의 아내'가 절세가인의 미모를 갖추고 재벌 못지 않은 부와 유명 아이돌 걸그룹의 멤버일 정도로 재능을 갖추고도 자매처럼 사이좋게 지낼 수 있을까? 이는 '일부일처제'였던 조선시대에도 불가능했다. 그리고 구중궁궐에 사는 임금도 '수많은 여인네'를 제것(?)처럼 여겼으나 그속에서 피어나는 암투는 늘 피비린내를 풍겼다는 사실만 보아도 비현실적인 요소다. 진정 소설의 허구가 아니고서는 절대로 불가한 현실을 꿈결처럼 창조해낸 김만중은 정말이지 최고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현실속에선 절대로 불가한데도 '현실'처럼 그려놓았으니 얼마나 대단하냔 말이다. 물론 <구운몽>에서 '양소유의 삶'은 꿈속에서 벌어진 일이니 그런 '비현실적인 요소'쯤이나 얼마든지 허락될 것이다. 여자들도 <꽃보다 남자>과 같은 드라마를 꿈꾸며 빵빵한 꽃미남들에 둘러싸여 행복한 비명을 지를 수 있지 않느냔 말이다.

 

  하지만 꿈같은 현실은 매정한 현실에선 결코 '재현'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양소유의 삶'을 꿈꾸며 '성진의 삶'에 깊은 고민을 더할 수밖에 없다. 과연 어디까지가 나에게 허용된 '욕심'인가? 따위의 고민 말이다. 어찌 보면 우리네 삶은 욕심이 과해서 '무욕의 삶'을 살아야 할 필요성을 깨닫기보다는 더이상 버릴 욕심조차 없는 '무소유의 삶'을 강제하기에 욕심을 버릴 수 없게 만드는 비극을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이를 테면, 지금 사는 현실은 10억의 일확천금을 꿈꾸며 매주 로또를 구매하는 '200만원짜리 인생'을 살지만, 가혹한 현실은 10억이 없으면 살맛조차 느낄 수 없게 만들어 '실현되지 않는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마는 비극의 연속인 셈이다. 그래서 우리는 '성진의 삶'을 돌이켜 보아야 한다. 한낯 꿈에 불과한 '10억짜리 인생' 따위는 잊고 내 수준에 딱 맞는 '타협의 삶'을 최선을 다해 즐길 수 있길 바라면서 말이다.

 

  그렇다고 '양소유의 삶'을 포기하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 비록 이번 생은 '성진의 삶'을 살 운명일지라도, 운명처럼 찾아오는 '양소유의 삶'이 끝자락일지언정 놓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며 늘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면, 그뿐일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현실은 '팔선녀의 아내'를 맞이할 수 없어도 '팔선녀' 같은 하나 뿐인 아내와 함께 살아간다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면 된다. 가끔 선녀처럼 보이지 않으면 어떤가. 가끔일망정 선녀처럼 보이는 마누라도 없이 쓸쓸이 늙어가는 나도 있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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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울프
리우바 가브리엘레 지음, 천지은 옮김 / 미메시스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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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를 '그림책'으로 엮어낸 책으로 소개하면 좋을 듯 싶다. 요즘엔 '그래픽노블'이라는 장르로 불리기도 하는데, 여느 그래픽노블보다 훨씬 '색채감'이 뛰어나기 때문에 100여 쪽에 달하는 그림책으로 소개해도 무리가 없을 듯 싶다. 그래서 책 읽는 부담은 한껏 낮추면서 그동안 궁금했던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들'을 읽어나갈 마중물로 삼기에 딱 적당한 느낌이었다. 사실 아직까지 그녀의 책을 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단편집>으로는 몇몇 작품을 읽어보긴 했지만, 그녀의 대표적인 소설을 차마 읽지는 못했다. 왜냐면 그녀가 여러 차례 '자살'을 시도할 정도로 우울한 성향을 갖고 있다는 단편적인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울증이 심한 사람과 친해지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사람들과 함께 어울릴 때는 '조증'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쾌활한 성향을 내비치다가도 혼자 있는 시간이 되면 한없이 침울해져서 주위의 사람들까지 '전염'시켜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그래서 멜랑꼴리한 여친과는 사랑에 빠지면 안 된다. 근데 그런 사랑을 내가 했다. 그것도 끝내는 짝사랑으로 말이다. 아무리 연락을 해도 '답장'이 없던 그녀와 끝을 내는 것이 그렇게나 힘들었다. 그래서인지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은 쉽사리 손이 가지 않았다. 그녀의 소설에서 '우울했던 그녀'를 발견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 책의 분위기는 시종 우울하다. 색감에서 느껴지기도 하고, '무표정'한 모습에서도 그렇다. 하지만 그녀의 생애가 그러했기에 거부감은 없었다. 책의 내용은 그녀가 '동성애' 상대였다는 '비타 색빌웨스트'를 만나면서 시작한다. 평생을 조용하고 소심한 성격이었다던 그녀도 '뜨거운 사랑'을 나눴었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되면서 그녀에게도 '사람냄새'가 나기도 했을 거라는 상상을 할 수 있었다. 비록 그녀만을 바라봤던 남편과 나눈 '사랑'이 아니었지만, 그녀도 가슴 뜨겁게 사랑할 줄 아는 '평범한 여자'였다는 사실에 묘한 안도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토록 뜨거웠는데 버지니아는 '버림'을 받았고, 끝내 사랑을 잃어버린 그녀는 우울증을 이겨내지 못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안타깝다기보다는 그녀에게 딱 어울리는 결말이라는 엉뚱한 느낌이 들고 말았다. 왜냐면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는 원래 그런 것 같기에 말이다. 허나 이런 엉뚱한 느낌은 내가 아직 그녀의 소설들을 접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것일테다.

 

  이제 그녀의 소설속에서 그 까닭을 찾아보고자 한다. 물론 목적은 '버지니아 울프=우울=자살'이라는 등식을 깨버리기 위해서다. 한 여자의 생애를 아름답게 만들어주지는 못할망정 온통 차갑고 어둡게 만들기는 싫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도 가슴 따뜻한 여인이었음으로 기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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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10 : 열하일기 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10
박교영 글, 박수로 그림, 손영운 기획, 박지원 원작 / 채우리 / 2012년 6월
평점 :
절판


  조선은 오랑캐에게 굴복한 치욕을 씻고자 '북벌'을 기치로 내걸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조선의 자존심'을 다시 세우는 쪽으로 북벌의 명분을 세워야 마땅하거늘, 엉뚱하게도 이미 망해버린 명나라에 '의리'를 다하고 '은혜'를 갚기 위해서 북벌을 해야 한다고 떠들어댔다. 이른바 '사대주의'다. 허나 실상은 '주인'을 잃은 강아지마냥 큰 개 앞에서 물지도 못하고 앙앙 짖어대는 격이나 다를 바 없었다. 나는 이것이 더욱 치욕스럽다. 자존심도 없고 자립심도 없는 행태이기 때문이다. 현재 대한민국에 이르렀는데도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 모양이다. 명을 대신해서 강성해진 청에게 '사대'를 하더니, 열강의 강탈 앞에 청나라도 맥을 못추게 되니 '일본'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고, 일본이 패망하니 '미국'이 그 자리를 대신하더니, 명실공히 선진국의 반열에 오른 대한민국에 아직도 '친일파'가 득세하고, '친미파'가 권세를 누리는 형국이니 말이다.

 

  애초에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가 '사대주의'를 표방한 것은 큰 나라를 '견재'하기 위한 술책이었을 뿐인데, 지배층인 사대부가 큰 뜻을 품기는커녕 점점 나약해지다가 끝내는 '붕당'을 이루어 사단칠정 따위의 뜬구름만 잡기에 이르니 나라에 큰 위기가 닥쳐 오랑캐가 쳐들어오는데도 제대로 막지도 못하고 허둥거리다가 결국 나라꼴을 엉망으로 만들고 말았다. 앞서 말한 '자존심'도 버리고 '자립심'도 내다버리고 새로운 주인을 찾아 멍멍 짖어대는 바로 그 '개나리'들이 말이다.

 

  이런 무능한 집권층을 한껏 비웃어주고 웃음거리로 전락시킨 위대한 풍자가가 있었으니 바로 '연암 박지원'이다. 그는 일찍이 과거시험 따위는 집어치우고 평생 벼슬을 하지 않기로 한다. 영조로부터 친히 칭찬을 들으며 과거를 보아 급제하라고 권할 정도로 뛰어난 재주를 지녔지만, 과거장에 들어선 그가 목격한 것은 벼슬을 돈을 주고 사고 파는 현장이었으며, 온갖 부정행위를 눈감아주는 난장이었기 때문에 과거를 포기한 것이다. 그래도 억지로 주위에서 떠미니 과거장에 다시 들어가긴 했으나 시험을 치르기는커녕 답안지에 수묵화를 그려내고 뛰쳐나와 버렸단다. 애써 벼슬자리에 오른다하더라도 썩은내 풀풀나는 '정치판'에 발을 들여놓기도 싫었던 것이다.

 

  그런 그가 청나라의 문물을 배우고 익혀야 한다고 '북학'을 주장하는 까닭도 다른 이유가 아니다. 바로 손자병법에도 나온 '적을 이기기 위해선 필히 적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삼척동자도 다 아는 상식이기 때문이다. 조선의 양반들은 말로는 치욕을 씻고 오랑캐에게 복수를 하겠다고 하면서, 청나라의 홍이포에 대적할 변변한 '기술력'조차 갖추려 노력하지 않는다. 그들의 정예병인 '팔기군'을 상대하려면 '기마부대'를 양성하고, '기마술'을 단련해야 할텐데, 그 기본이 될 '준마'를 기르기를 게을리해서 겨우 '조랑말'로 하루 반나절밖에 달리지 못하는 기병에, 소매는 넓고 바짓단은 치렁해서 혼자서는 절대 말을 몰지 못하는 양반네들이 대다수인데도, 입만 열만 '북벌'을 외치고, 명나라에 '보은'하자고 나불댄다. 다 부질없는 소리다. 청나라를 이기자면 청나라를 배우는 것부터 시작해야 옳은 방법이다.

 

  그런 마음을 품고 있는 박지원이 청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러 가는 사신단에 꼽사리 낄 수 있게 되어 여행을 했다가 기록을 남겼으니, 그것이 바로 <열하일기>다. 보통은 황제가 북경에 머물고 있으니 대부분의 조선사신단이 다녀온 뒤에 쓴 기록은 <연행일기>라는 제목을 달았다. 그런데 박지원이 사신을 갈 때에는 황제가 더위를 피해 '열하'로 피서를 갔기 때문에 조선사신단도 덩달아서 북경을 거쳐 '열하'까지 가게 된 것이다. 그 덕분에 박지원은 다른 사신단보다 더 많은 것을 보고 오게 되는 행운까지 얻게 되었다. 그래서 <열하일기>는 다른 기록보다 더욱 많은 견문을 담을 수 있었다.

 

  허나 보고 들은 것이 더 많은 것보다 <열하일기>가 소중한 까닭은 연암의 문체가 사뭇 달랐기 때문이다. 기존의 사대부들이 쓰던 방식은 '고전체'라고 해서 옛 경전을 따라 쓰는 것을 최고로 쳤다. 허나 이런 글을 읽기에 너무 딱딱해서 금방 지루하고 따분해지는 경향이라 조선후기에 이르러서는 고루한 지식인들의 답답함이 느껴질 정도였을 것이다. 허나 '연암체'는 달랐다. 억지로 점잖고 고상한 체하기보다는 '진실한 마음'으로 사물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듯 써냈으니 얼마나 읽기에도 시원시원하고, 엣 중국의 것을 빗대어 표현하기보다는 당시 '조선의 현재'를 [날것, 그대로] 가감없이 속시원히 써내렸고, 거기에 지배계층에 대한 '비판의식'이 고스란히 담겨 있으니 얼마나 신선했겠느냔 말이다. 이런 '연암체'로 쓰여진 <열하일기>는 입에서 입으로 소문이 퍼지게 되었고, 너무 많은 인기탓에 '베껴쓰기'로 유통이 되니 가히 '조선의 르네상스(문예부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런 연암체는 곧 명맥이 끊기고 만다. 권좌의 불안함을 '반듯함'으로 자리보전하던 정조가 '문체반정'을 선포했기 때문이다. 문체반정이란 '패관문학' 같은 잡스런 글을 쓰지 못하게 하고, 오직 '고전체'만을 바른형식이라고 못박아 버린 것을 일컫는다. 정조는 박지원에게도 두 번 다시 '연암체'를 쓰지 않겠다고 맹세를 하지 않으면 벌을 내릴 것이고, 맹세를 한다면 벼슬을 내리겠다고 할 정도였다. 물론 그렇다고 연암이 연암스럽지 않게 된 것은 아니지만, 그 뒤로 '연암체'를 따라쓰지 못하니 제대로 부흥하지도 못하고 '조선의 문학'은 발전하지 못하고 만다. 안타까운 것은 '북학'도 제대로 꽃을 피우지 못하고 흐지부지 사그라들게 된 것이다. 정조의 이른 죽음과 '세도정치의 폐단'이 조선의 앞날을 어둡게 만들더니 끝내 근대화가 움트던 시기에 일제에게 더욱더 치욕스런 강제병탄을 당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으로 <열하일기>는 다양한 관점으로 읽기를 거듭해야 진면목을 느낄 수 있다. 그저 겉으로 드러난 것은 '조선 양반들의 무능함'을 풍자적으로 그려낸 유쾌함 뿐이지만, 조금만 곱씹어보면 그속에 '조선의 미래'를 위해 꼭 해야만 할 것들을 조목조목 나열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이는 대한민국의 미래에도 매우 중요하다. '북학파'를 재조명해야 하는 까닭도 바로 이것이다. 이용후생(일상생활에서 필요한 도구나 물건을 편리하고 효율적으로 쓴다), 실사구시(이론만이 아닌 실제 경험과 사실을 통해 진리를 탐구한다) 같은 당시의 구호는 오늘날에도 여전하다. 당시 조선 사대부의 무능은 '사물의 이치'에 통달했다면서 입으로만 나불대고, 실제로 검증하고 '팩트체크'를 하자고 하면 궤변을 늘어놓거나 '권위'를 앞세워 윽박지르기만 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하나 다를 것이 없다. '일본 핵오염수'가 위험하다고 지적하면 '과학적'으로 안전성이 검증되었다고 미친소리만 늘어놓다가 '직접 떠다가' 마셔보라고 하면, 한국의 원자력발전소에서 내보내는 폐수가 더 위험한대 아무 조치도 하지 않는다고 딴소리하고, 중국이 오래전부터 핵오염수를 방류해서 서해바다가 오염되었는데도 그동안 잘 먹어오지 않았느냐면서 헛소리를 지껄이고만 있다. 오늘날에 연암이 살아 있다면 뭐라고 했을까? 그가 쓴 <호질>에는 북곽선생과 과부 동리자와 그의 어리석은 다섯 아들을 '누구'에 빗대어 썼을지 몹시 궁금하다. <허생전>에서 이완대장은 현재의 누가 제격일까? 그리고 <광문자전>과 <예덕선생전>은 어느 분에게 걸맞는 이야기일까?

 

  그러고 보니 누군가 그랬다. 시절이 어지러울 때 '남의 고전'에서 지혜를 얻으려 들지 말고, '우리 고전'에서 지혜를 찾으라고 말이다. 우리 현실에 딱맞는 열쇠는 우리의 선조들이 미리 만들어 두었을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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