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말해서 '다독'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독서논술지도 20년 경력이라면 믿어주실만도 하리라 믿고 말씀드리는 거다. 그럼에도 대다수의 학부모와 학생 들은 '숫자'에 민감한 편이다. 그리고 끊임없이 되묻는다. 초등학생은 몇 권 정도 책을 읽으면 좋겠느냐고 말이다. 그래서 난 자신있게 대답해준다. [초등 1000권 / 중등 500권 / 고등 500권]해서 모두 2000권의 책을 독파하면 서울대 갑니다요~ 라고 말이다. 이렇게 자신있게 말하는 근거는 다름 아니라 '배경지식'이 풍부해지기 때문이다. 탁 까놓고 말해서 '요리사'가 꿈인 학생이 <요리책> 2000권을 읽었다면, 요리박사가 되고도 남을 것이다. 그렇게 '배경지식'을 빵빵하게 탑재하고서 본격적으로 '요리공부'를 시작하면, 세계적인 요리사는 못 되더라도 박학다식한 '요리' 컬럼리스트가 되어 전세계 맛집투어를 다니며 <요리책>을 직접 저술하며 먹고 사는 걱정없이 살 수 있을 것이다. 안 그런가?

 

  단순 계산을 해서, 초등6년, 중고등 6년, 12년 동안 2000권의 책을 읽는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 절대 아니다. 1년은 12달이니까 12 X 12=144달이다. 2000권을 144로 나누면 약 14권(13.88)이 나온다. 한 달에 14권 정도 읽으면 된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를 다시 4주로 나누면 14 ÷ 4=3.5권으로 일주일에 3~4권 정도를 독파하는 독서습관을 기르면 충분히 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물론 초등시절에는 '그림책(약 32~36쪽 분량)'과 '동화책(약 150~200쪽 분량)'이니 일주일에 5권 이상 읽는 습관 들이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문제는 중고등시절이다. 워낙 학습분량이 넘쳐나는 시절이다보니 책읽는 시간이 절대 부족한 탓이다. 그럼에도 초등시절부터 꾸준히 독서를 해온 학생이라면 중고등시절에도 시험공부, 수행평가 하는 와중에도 틈틈이 독서를 해나갈 수 있다. 중고등학생이 읽어야 할 청소년책들이 대략 250~300쪽에 육박하고, 그 분량을 훌쩍 넘는 일명 '벽돌책'도 있긴 하지만, 역시나 '독서습관'이 충족된 학생들이라면 어렵지 않게 읽어나갈 수 있다.

 

  그런데 정작 이런 질문을 던지는 학부모나 학생 들이 대부분 초등 고학년(5~6학년)이거나 중학생이라서 '학창시절의 절반'을 넘겨버린 경우가 대부분이란 점이 문제다. 그럴 때도 나는 어김없이 '2000권의 분량'을 제시한다. 아직 절반의 시기가 남았으니 '주당 7권'의 독서습관을 기르라고 말이다. 그렇게 1년의 시절을 넘기면 그 뒤부턴 순풍에 돛단듯이 술술 읽어나갈 수 있을 것이고, 그만큼 배경지식도 풍부해져서 '모르는 지식'이 없게 될 것이라고 덧붙이곤 한다. 1년은 52주이니 일주일에 7권씩 1년을 꾸준히 읽으면 364권을 읽게 되고, 그렇게 5년만 더 읽으면 1820권을 읽으니 얼추 2000권이 되는 숫자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다독'은 수많은 독서습관 가운데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럼에도 '숫자'에 민감하고, '숫자'로 각인해야 이해가 빠른 분들에게 살짝 귀띔해주는 바다. 12년 동안 2000권의 책을 읽게 하라고 말이다. 그럼 서울대 정도는 가뿐하게 들어갈 것이다. 그렇게나 많은 '배경지식'을 쌓았는데도 서울대 정도도 못 들어간다면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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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많은 사람들이 묻는다. 그렇게 많은 책을 읽는 비결이 뭐냐고 말이다. 물론 그 질문에 앞서 "왜 그렇게 책을 많이 읽느냐?"고 먼저 묻곤 하지만, 별로 대답하고 싶지는 않다. 왜냐면 진지하게 묻는 질문이 아니라 "넌, 좀 이상한 사람 같아"라는 뉘앙스를 풀풀 풍기기 때문이다. 요즘 같은 세상에 '볼것'이 얼마나 많고, 재밌는게 얼마나 많은데 책따위나 읽고 있는게 그냥 신기해서 묻는 질문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다 종종 진짜 책 좀 읽어보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되서 '독서비결'을 묻는 사람들을 만난다. 그러면 좀 진지하게 대답해주는 편이다. 물론, 두 번째 질문조차 그저 형식적인 질문인 경우가 많기에, 그냥 대충 얼버무리는 경향이 없지는 않지만, 대부분은 최선을 다해서 '나만의 다독 비결'을 자세히 말해주는 편이다.

 

  첫 번째 비결은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다'이다. 길을 걸을 때도, 버스나 지하철을 탈 때에도, 동영상 시청을 할 때에도 나는 늘 책을 손에 들고 있다. 걸으면서 책을 읽는 것은 '일상'이 되었다. 대중교통을 기다리거나 탈 때에도 손에 책을 펼쳐서 읽는다. 그리고 동영상을 시청하면서도 잠시 잠깐 한 눈을 팔 때에는 책을 펼쳐 단 몇 줄이라도 읽어재낀다. 이미 눈치 채셨겠지만, 난 '짬짬이 독서'라고 해서 틈 날 때마다 책을 읽는다. 이게 내 첫 번째 비결이다.

 

  두 번째 비결은 '완독해야 한다는 강박을 내던진다'이다. 세상에는 재밌는 책이 차고 넘친다. 그러니 내가 읽는책이 마침맞게 재미가 없다면 과감히 던져버리고 재밌는 책으로 갈아타면 된다. 물론 '완독'은 참 멋진 습관이다. 하지만 재미도 하나 없고, 너무 난해하고, 읽기만 해도 졸음이 쏟아지는 책을 만났을 때 '완독'해야 한다는 강박에 매몰되어버리면 책읽기는 '진도'를 나아갈 수 없게 된다. 어쩌면 '그 책'이 여러분이 읽는 마지막 책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읽다가 재미없으면 던져버려라. 팔아먹을 책이 아니라면 힘껏 던져도 상관 없다.

 

  세 번째 비결은 '동시다발적으로 여러 분야의 책을 읽는다'다. 취향이 확고한 분들이라면 이 방법을 좀처럼 쓰기 힘들겠지만 다양하고 다채로운 독서취향을 가진 분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방법일 것이다. 인문학책 읽다가, 소설책 읽다가, 만화책으로 기분전환시키고, 다시 과학책 읽다가, 동화책 읽다가, 그림책 읽다가, 다시 만화책으로, 인문학책으로, 메뚜기마냥 이책 저책을 넘나들면서 읽으면 생각보다 많은 책을 짧은 기간안에 몽땅 읽을 수 있게 된다. 사람의 기억력은 '비슷한 내용'은 곧잘 헷갈리지만, 확연하게 '다른 내용'이라면 그닥 헷갈리지 않고 오래 기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꽂히는 책'을 만나게 되면 후루룩 읽어내려가며 독파할 수도 있고 말이다.

 

  나는 이런 식으로 한 달에 2~30권의 책을 평균적으로 읽곤 한다. 물론 그 가운데 완독하는 책은 거의 대부분이다. 다 읽기까지 반 년이 넘게 걸리는 책도 있긴 하지만 '언젠간' 다 읽으니 말이다. 한 달이라는 '기간' 안에 다 읽는 책은 고작해야 십여 권에 불과할 뿐이다. 그렇지만 '꾸준한 독서'를 하기에 다달이 많은 책을 읽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그렇기에 나의 독서기록은 언제나 '완성된 리뷰'로만 작성되는 것이다. 읽은 책 기준으로 했더니 헤아리기가 너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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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에 예술을 들일 때, 니체 - 허무의 늪에서 삶의 자극제를 찾는 철학 수업 서가명강 시리즈 32
박찬국 지음 / 21세기북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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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수록 [서가명강]의 매력에 빠져든다. 처음엔 호기심에 몇 권 읽어보았고, 읽다보니 '서울대 강의'가 그다지 난해한 것만은 아니라는 느낌이 들고 난 뒤에는 '일반대중서적'을 읽어대듯 마구잡이로 읽어재끼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독학수준에 머무르고 있는 '인문학 분야'를 사사받는 기분마저 들게 되었다. 그간 홀로 '개똥철학'하느라 민망해 죽을지경이었는데 말이다. 올해는 [서가명강]과 함께 하려고 계획을 잡았다. 아이들 논술수업 교재로 삼고서 전권을 독파해보련다.

 

  이번 책은 [인문학-철학-예술철학] 분야로 '독일철학자 니체'의 <비극의 탄생>(1872년)에 관한 내용의 강의다. 니체의 첫 번째 책이기도 하고, 28살의 젊은 나이에 써서 '천재성'을 여실히 보여주었다고 정평이 난 책이기도 하다. 그 내용이 제법 난해하다고 하기에 아직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이 책 <내 삶에 예술을 들일 때, 니체>를 통해서 간접적이나마 전체적인 내용을 엿볼 수 있었다. 그렇게 엿본 주된 내용은 바로 '그리스 비극'을 통해서 현대문명의 병폐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제시했다고 하는데, 청년 니체가 쇼펜하우어에게서 영감을 얻어서 썼다지만, 니체만의 독자적인 철학이 돋보이고, 아울러 현대문명을 예리하게 비판한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밝음과 질서를 상징하는 '아폴론적인 예술'과  황홀경과 도취에 빠져드는 '디오니소스적인 예술'로 대비시켜 서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흔히 이야기하듯 '빛과 어둠'의 상반적인 요소를 예로 든 것이 아니라 '조형예술'과 '비조형예술'로 나누어 한 쪽이 대낮처럼 환하게 드러나게 볼 수 있는 대상이라면, 다른 쪽은 비록 눈으로 직접 볼 수는 없지만 우리가 감정적으로 느낄 수 있는 감동적인 대상을 예로 제시하였다.

 

  한편, 니체는 선과 악의 대립적인 구도를 타파하고 '강함과 약함'이라는 새로운 가치관을 내세웠다. 하지만 오해하면 안 되는 것이 '강한 것을 추구한다'고 해서 폭력적이거나 약육강식을 이야기하고자 함이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훗날 '위버맨시(초인)'라고 설명을 덧붙이며, 선하고 올바름을 바탕으로 한 강한 의지의 소유자가 많아진 세상이야말로 진정 아름다울 수 있다고 주장한 것으로 보아, 니체가 말한 '강자'는 결코 폭력을 일삼는 독재자가 절대로 아님을 짐작케 한다.

 

  하지만 우리는 곧잘 '강자'가 되어 모든 것을 마음대로 누리는 삶을 꿈꾸곤 한다. 덩치도 크고 힘도 쎄며 머리도 똑똑할 뿐만 아니라 경제력까지 차고 넘쳐서 '무엇'이라도 할 수 있고, '누구'라도 될 수 있는 '절대강자'가 되고픈 유혹에 빠지곤 한다. 그렇지만 그런 '강자'는 아무도 존경하지도 않고, 오히려 배척의 대상이 될 뿐이다. 비록 강한 위세에 눌려 앞에서는 굽신거릴지라도 뒤돌아서면 언제든 '없애'버릴 궁리만 받게 될 존재가, 절대로 '강자'라 불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진정한 강자는 '도덕적인 우월함'과 '정의로움', 그리고 모두를 사랑할 수 있는 '관대함'까지 갖춘 존재여야만 한다. 니체는 바로 이런 '선한 존재'를 강함의 진면목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니체가 말하는 '절대강자'를 힘으로 적을 굴복시키는 부류로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니체는 술의 신으로 알려진 '디오니소스'마저 알콜에 쩔어 헬렐레하며 '현실도피'나 하는 나약한 존재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적 영감의 극대화'라고 할 수 있는 시, 음악, 춤과 같은 것에 흠뻑 도취하기도 했다. 실제로 니체는 '바그너의 음악'을 최고라 칭하면서 진정 음악을 즐길 줄 아는 사람만이 진정한 삶을 말할 수 있다고까지 하였다. 현대인들이 음악과 춤에 빠져들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그것'을 즐기는 것을 보면, 니체의 해석이 맞아 떨어진다고도 할 수 있다. 이처럼 니체의 철학은 온통 '긍정적'이고 밝다. 그렇지만 나는 아직까지 '예술적인 소양'이 부족한 관계로 이 책에서 말하는 '예술'에 대해서 뭐라 썰을 풀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기회가 된다면 예술적 소양을 닦은 뒤에 다시 니체철학의 진면목을 이야기해보련다.

 

  이런 니체의 철학이 '염세주의(비관주의)' 철학자로 유명한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 아이러니할 정도다. 물론 나중에 니체는 쇼펜하우어를 비판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아무런 목적도, 의미도 없이, 모든 것이 덧없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뿐이라는 '니힐리즘'에서 영감을 받을 수 있었을까? 이 점에 대해서는 좀더 '관련책'을 살펴보고, 연관지어 파악해보아야겠다.

 

  아무튼, 니체의 철학은 '건강미'로 가득한 듯 싶어 매력적이었다. 특히, 강함을 추구하면서도 약자를 괴롭히고, 착취하는 것과는 멀리하겠다는 '의지'를 말할 때 멋져보였다. 그러면서 '권력을 쥐고 뒤흔드는 자'에 대해 비열하고 위선적인 자들이라고 날선 비난을 던질 때, 전세계 정치인과 종교인 들의 덜 떨어진 행위에 대해 '니체의 철학책'을 함께 직구로 날려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렇게 날아가는 '니체의 책들'을 보면서 선한 강자를 떠올리며 함께 비판을 해주길 상상해보기도 했다. 진정한 강자의 모습이 '어떤 모습'인지 두 눈으로 확인하고, 제발 좀 '부끄러움'이 뭔지 깨닫길 바란다고 말이다.

 

  박수 칠 때 떠나는 모습만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성찰'하고 진정 '반성'하는 모습이 더욱더 아름다운 법이다. 인간은 누구나 실수를 하는 법이다. 그리고 그런 실수는 너그러이 용서해주는 법이다. 그렇지만 실수를 밥 먹듯이 하고서도 '반성'하지 않는다면 결코 용서할 수 없다. 자기 자신에게 더욱 엄격함을 추구하는 '니체의 철학'이 절실한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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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의 동물대탐험 4 : 잎꾼개미와 지하 도시 - 지구 최초의 농사꾼, 잎꾼개미 최재천의 동물대탐험 4
최재천 기획, 박현미 그림, 황혜영 글, 안선영 해설 / 다산어린이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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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주제는 '잎꾼개미의 생태'를 통해서 개미사회의 생태를 집중적으로 살펴보았다. 우리가 이렇게 '다른 생물의 생태'를 유심히 살펴보는 까닭은 이들의 생태속에서 인간에게 유용한 점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의생학(바이오메틱스)'이라는 것인데, 자연을 흉내 내어 기술을 개발하는 학문이란다. 의생학의 가장 대표적인 예는 바로 '찍찍이 벨크로'다. 도꼬마리 씨앗의 '갈고리'에서 힌트를 얻어 개발한 제품인데, 운동화, 가방, 옷, 기타등등 안 쓰는 곳이 없을 정도로 대박을 친 히트상품이며, 인간이 쓰기에 매우 유용하다는 점에서 '의생학'은 매우 관심이 높은 분야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의생학에서 얻은 아이디어로 '거미줄'에서 강철 섬유를, '식물의 잎'에서 태양 전지를 모방하였고,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아이디어가 무궁무진하다는 점에서 의생학은 전도유망한 학문이기도 하다. 그런 까닭에 '개미박사'인 최재천 교수는 '잎꾼개미'를 통해 개미사회의 일면을 어린이들이 살펴볼 수 있게 펴냈으며, 어린이들은 '개미의 생태'를 살펴보며 무궁무진한 아이디어를 얻어 우리 일상에서 유용한 것을 창출해내었으면 바랄 것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개미사회'에서 얻을 수 있는 지혜는 무엇이 있을까? 지혜를 배우기에 앞서 '개미의 생태'부터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개미처럼 군집을 이루며 사는 생물한테는 '사회성'이 있다고 말들 한다. 허나 '인간사회'와 일률적으로 같다고 보기는 힘들 것이다. 왜냐면 개미와 같은 곤충들의 생태는 거의 대부분 '생존본능' 가운데 '종족번식'에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여왕개미는 알만 낳고, 일개미는 일만 하고, 병정개미는 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목숨을 다할 때까지 '자기가 맡은 바' 책임을 다한다. 이를 두고 인간들은 개미사회가 '희생정신'이 가득한 '계급사회'라고 이야기하지만, 이를 '인간사회'에 곧바로 적용하여 '철저한 계급사회'로 분업화시킨다면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 '개미사회'에서 인간이 배울만 한 유용한 점은 어디서 찾아야 할까? 개미사회를 이룬 집은 대부분 '어두운 지하'에 건설하였다. 빛이 한 점도 들지 못하는 곳에서도 '의사소통'을 하는 개미만의 방식을 눈여겨 볼 수 있을 것이다. 바로 '페로몬'이라는 독특한 호르몬으로 '눈을 감고도', '보이지 않아도', 서로의 의사를 정확히 소통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인간의 의사소통 '전달방식'에서 써먹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볼 수 있을 것이다. 지구온난화와 기후변화로 인해 인간들이 더는 '지상'에서 살 수 없게 된다면, 인간이 살 수 있는 터전으로 손꼽히는 곳이 바로 '지하도시'이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사회에서 '빛'이 없으면 삶을 살 수 없을테지만, 잠시 잠깐이라도 '어둠'이 짙게 깔리는 순간에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도록 '개미들의 의사소통'을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테면, '후각'의 시각화, '후각'의 청각화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문자'나 '말'로 전달하는 것보다는 좀더 단순한 형태로 전달하는 체계를 마련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마치, '빨강'은 위험, '노랑'은 경고, '초록'은 안전, '파랑'은 집중 따위와 같이 '특정한 냄새'에 고유한 메시지를 정해놓으면, 인간이 구별할 수 있는 '냄새의 종류'가 수백만 가지라고 하니, 냄새만으로도 간단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체계를 구축할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한편, 이 책에서도 다루고 있는 '곰팡이 살균 박테리아'를 이용해서 인간에게 유용한 '살균제'를 만들어 쓸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항생제 남용'으로 인해 슈퍼박테리아가 등장함으로써 치료가 불가한 질병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새로운 항생제를 개발해야만 하는 절실함에 도달하고 말았다. 이런 악순환을 막기 위해서라도 '천연성분의 항생제', 다시 말해 '자연생태에 해를 끼치지 않는 항생제'를 써야만 할 것이다. 이렇듯 '개미의 생태'를 비롯해서 자연에서 찾아볼 수 있는 모든 것을 의생학적으로 분석하면 인간에게 유용한 것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물론, 쉬운 일은 결코 아니다. 그렇기에 '기초학문'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이미 선진국이라 정평을 받은 대한민국이 언제까지 '다른 나라'가 성과를 올린 기초학문을 엿보고 훔쳐 배울 것인가. 그런 식의 자세로는 결코 '선도국가'가 될 수 없다. 당장의 성과를 얻을 수 없는 엉뚱한(?) 연구라 할지라도 과감히 투자하고 '우리만의 표준(스탠다드)'을 많이 만들어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선도국가'로 자리잡을 수 있고, 앞서 나갈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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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토머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 : 지적대화를 위한 30분 고전 49 지적대화를 위한 30분 고전 49
안형준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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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학은 '점진적'으로 발전하는 것일까? 아니면 '느닷없이' 확 바뀌는 것일까? 쿤은 '느닷없는' 쪽이 옳다고 말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대부분의 학문이 '지식 축적'이라는 방법으로 발전해왔다고 생각한다. 이를 테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과학)이 뉴튼의 만유인력을 거쳐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으로 정립되듯이 발전했다고 말이다. 하지만 쿤은 지적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적 과학지식을 아무리 '쌓아도' 뉴튼의 만유인력 공식이 나올 수 없고, 만유인력의 공식을 아무리 나열한다해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정립될리 만무하다면서, 과학은 점진적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혁명적인 구조'에 따라 패러다임(틀)이 바뀌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패러다임의 전환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다. 코페르니쿠스가 주장한 '지동설' 이전에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이 천문학의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했었다. 신이 지극히 사랑한 '지구'를 한가운데에 두고 그 둘레를 '달-수성-금성-태양-화성-목성-토성'의 순서로 완벽한 원을 그리며 돌고 있다는 천문학설은 하늘을 관측한 수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사고, 사회적으로 지배적인 위치에 있던 기독교의 교리에도 부합하는 아주 훌륭한 과학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몇몇 과학자들이 '이상한 점'을 발견했더랬다. 수성과 금성이 '완벽한 원'을 그리며 돌고 있음에도 '태양 근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를 천동설은 설명하지 못했고, 또, 화성, 목성, 토성은 완벽한 천구의 움직임에서 심지어 '역행'하는 것을 수차례 관측했기 때문이다. 이 또한 '천동설'은 설명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동설'은 태양을 한가운데 두고 태양이 있던 자리에 '지구와 달'을 가져다두고 설명을 하니, 수성과 금성이 태양 주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현상과 화성과 목성, 토성이 '역행'을 하는 까닭도 잘 설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천동설은 과학계에서 '설 자리'를 잃어버리게 되었고, 지동설은 천동설을 '대신해서' 과학의 새 패러다임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이전의 패러다임은 '폐기'되고, 새로운 패러다임이 '정립'되어 '정상과학'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쿤은 '과학혁명'이라고 말한 것이다. 혁명이 구체제를 사라지게 만들고, 그 자리에 신체제를 정립하기에 과학도 혁명적인 과정을 거친다고 말이다. 다시 말해, 천동설의 잘못을 고쳐나가며, 천동설의 바탕 위에 지동설이란 새로운 과학지식이 쌓여가는 것이 아니라, 천동설의 잘못을 지적하면 할수록 '정상과학의 지위'를 잃게 되고, 끝내 지동설이란 '새 패러다임'이 천동설을 완전히 밀어내고 '정상과학의 지위'를 차지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과학이란 학문은 '지식 축적'으로인해 점진적인 전환을 보여주지 않는 것이고, 혁명적인 과정을 거쳐 '새롭게 등장'하게 되는 것이란 말이다.

 

  이는 과학이라는 학문의 특성 때문일 것이다. 다른 학문은 '이전의 학문'을 반박하고, 틀림을 지적했다고 하더라도 '새 것만이 옳고, 헌 것은 틀렸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저것은 저래서 옳고, 이것은 이래서 옳다'고 말할 뿐이지만, 과학에서만큼은 '이전 과학'을 잘못을 지적하고, 틀림을 증명하는 순간 '폐기'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이렇듯 '야멸치게' 사라져버리는 냉철한 과학계의 모습 때문에 '혁명'이라는 무지막지한 단어로 표현된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간과하고 놓친 부분은 바로 '과학혁명의 과정'이 한순간에 반짝하고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에 '틀림'이 있다는 것은 코페르니쿠스 이전부터 발견되었던 사실이며, 그로 인해 천동설도 숱하게 '수정, 보완' 과정을 거쳐왔다. 그 과정이 짧게는 100여 년이 넘게 걸렸으며, 심지어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장한 뒤에도 세상은 크게 바뀌지 않았고, 코페르니쿠스에게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뉴튼도 <프린키피아>를 세상에 내놓고 50년이 지나서야 겨우 빛을 볼 수 있었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공인받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과학혁명'은 정말이지 느리디 느린 혁명인 셈이다. 그럼에도 과학분야의 특성은 '새 패러다임'이 주류가 되는 순간 '이전 과학'은 완전폐기되어 사라져버린다는 점 때문에 가히 '혁명답다'할 것이다.

 

  그렇다면 '쿤의 과학혁명구조'가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건 바로 '오래된 믿음'이 무조건 옳지는 않으니 끊임없이 '의문'을 던져야 된다는 말이다. 그래야 비로소 '진정한 발전'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천동설만으로도 지구에서 살아가는데 아무런 불편함을 느끼지 못한다. 아침에 눈을 떠서 동쪽 하늘을 바라보면 '태양'이 떠올라서 서쪽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 결코 태양은 가만히 있는데 지구가 '스스로' 돌아간다고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동설이 아무리 옳아도 '불편한 진실'이라 느껴지고 오히려 천동설이 더 편하게 느껴질 뿐이다. 그러나 '천동설'은 진실이 아니다. 진실이 아닌 것은 '발전'을 이룰 수 없고 '걸림돌'로밖에 작용하지 않게 된다. 그러니 당장의 편리함에 젖어버리는 것에 만족한다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지경에 다다르게 될 뿐이다. 그렇게 천동설에 '의문'을 던지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한 결과, 우리는 태양이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돈다'는 사실에 더 편함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지구를 떠나 우주로 나아갈 준비도 할 수 있게 되었다. 만약 '천동설'을 고집하고 변화를 거부했더라면 절대 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비단 '과학'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지금의 것에 '잘못'이 있다고 느낀다면 '의문'을 품고 진실을 밝히는데 망설임이 없어야 한다. 내가 지금 옳다고 믿는 것이 있다면 더욱더 의문을 품어야만 할 것이다. 적어도 그 '옳음'이 나만을 위한 것은 아닌지, 다른 사람에게 불편을 끼치는 것은 아닌지 충분히 살펴본 뒤에, 잘못이 드러나면 과감히 '칼'을 들이대는 용기도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낡게 되고, 썩게 되어, 냄새가 고약해지고, 그렇게 되면 '도려내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결국엔 완전히 갈아엎을 수밖에 없게 된다. 그게 바로 '혁명'이기 때문이다. <과학혁명의 구조>라는 책은 순수한 학문조차, '지식 축적' 위에 차곡차곡 쌓이면서 점진적으로 발전한다는 것은, 착각이라고 한순간에 깨버린 토마스 쿤의 역작이다. 지금 우리가 더 나은 대한민국을 위해 깨버려야 할 '오래된 착각'이 무엇인지 고민하면서 읽어도 좋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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