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목시계의 교양 - 내 손목에 있는 반려도구의 인문학
시노다 데쓰오 지음, 류두진 옮김 / 한빛비즈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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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명품을 즐겨하지 않는다. 명품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내 몸에 두르고 있는 물건'이 값진 것보다 '나 자신'이 값진 것이 더욱 가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내 겉모습은 비록 못 생기고 후줄근해 보일지라도 나와 몇 마디 말을 섞어본 이들은 '나의 뛰어난 가치'에 놀라 깜짝 놀라기도 한다. 이런 나의 가치를 알아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늘 손에서 놓지 않는 한 권의 책'을 보고 유추하는 것이다. 늘 손에 들고 있는 책이 일주일 동안 서너 번씩 바뀌는 모습을 눈여겨 본다면 나의 교양이 얼마나 차고 넘치는지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나 어릴 적만해도 한 번에 한두 명씩은 꼭 도서관에 파묻히다시피 살아가는 '문학소년'과 '문학소녀' 들이 있곤 했다. 내가 그 당시에 이처럼 책을 파고 들었더라면 그 친구들과 일찌감치 '지음(知音)'이 되어주었을 것을 안타깝게도 나는 서른 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책을 즐겨 읽기 시작했고, 뒤늦게 교양을 쌓기 시작했다. 그렇게 10년간이나 책을 읽기만 했더니 마흔 살 즈음에야 겨우 글을 술술 쓸 수 있게 되었다. 말인즉슨, 무엇이라도 술술 풀어낼 수 있게 되기 위해서 이토록 오랜 시간이 쌓이고 또 쌓여야 한다는 말이다.

 

  이 책, <손목시계의 교양>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명품시계'를 낱낱이 분석해낸 책이다. 다시 말해, 명품이 왜 명품일 수 있는지 그 소상한 내력을 풀어내었단 말이다. 그래서 명품시계를 좋아라하는 분들이 읽으면 참 좋을 책일 수도 있겠으나 명품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독자들이 읽어도 좋을 책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만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쏙쏙 감춰진 책이기도 하다. 그것들은 교양이 없으면 절대로 보이지 않는 고급정보들이기도 하다.

 

  우리는 흔히 '명품시계의 가치'는 비싼 값으로만 따지곤 한다. 적게는 몇 십만 원에서 많게는 수백 억에 이르는 다양한 명품의 세계를 알아볼 수 있다면 소매끝에 슬쩍 보이는 시계만으로 그 사람의 부를 가늠할 수 있는 척도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명품'도 세월의 풍파를 직격으로 맞으면 부서지고 망가질 수 있기에 '고침(수선)'의 과정을 거치기 마련인데, 10억 원에 상당하는 명품시계의 순정부품 가격만해도 몇 천만 원이 훌쩍 넘으며, 거기에 전문가의 '수리비'까지 청구가 되면 '유지비'만 수 억 원씩 들기 마련이라 웬만큼 부를 쌓지 못했으면 감히 손목에 두르고 외출할 용기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허나 '명품시계의 가치'가 고작 가격만으로 평가된다면 명품이랄 수 있을까? '다이얼'에 수놓인 화려한 보석과 복잡한 '무브먼트'가 정교하게 맞물려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을 정도로 정확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조그맣고 얇은 '케이스' 속에 감춰져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선수(?)들 사이에서는 짜릿한 전율까지 느낄 수 있어야 명품이랄 수 있을 것이다. 이게 뭔소린고 하니, 값싼 전자시계와 최고급 명품시계의 차이는 단지 '겉모습'에만 있지 않다는 얘기다. 보통 유리덮개 아래로 보이는 '화려함'만으로 그 차이가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대개 금속으로 이루어진 '뒷덮개'를 열어서 볼 수 있는 '복잡하지만 정교한 부품'들이 그 차이를 명확하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실제로 값싼 제품일수록 뒷덮개를 열었을 때 '단순함'을 한 눈에 엿볼 수 있다. 하지만 '명품시계'라면 확실히 다르다. 적게는 수십 개에서 많게는 백여 개가 넘는 톱니바퀴 따위의 '부품(파츠)'들이 그 복잡함과 정교함을 자랑하며 일주일이란 시간이 흘러도 아주 근소한 오차만을 보여주어야 비로소 '명품시계'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다. 이런 복잡한 '무브먼트'와 정교하고 정확한 '시간'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두께'도 두꺼워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명품시계'는 그 두꺼움조차 허용하지 않고 '최대한 얇게' 도전하고 있다. 이때 얇으면 얇을수록 슈트 안쪽에 쏘옥하고 자연스럽게 감출 수 있기에 '패션'에 민감한 명품애호가들 사이에서 더욱 각광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정교하고 오차를 허용하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명품의 가치'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비결인 것이다.

 

  정교함에 대해서 말이 나왔으니, 손목시계에 '시각' 뿐만 아니라 '달력'까지 담아내는 완벽함을 추구하는 것도 '명품의 가치'에 포함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그레고리우스력'은 4년마다 '윤년'이라 2월에 하루를 보태 29일까지 표기하곤 한다. 그런데 명품시계는 그런 4년마다 찾아오는 '이벤트'까지 특별한 조작 없이도 정확히 표기한단다. 보통 '윤년'은 4로 나누어 떨어지는 해에 하루를 더해 366일로 치는데, 4로 나누어 떨어지는 해일지라도 100으로 나누어 떨어지는 해는 평년으로 쳐서 365일로 친다. 그러나 100으로 나누어 떨어지는 해라도 400으로 나누어 떨어지는 해는 다시 윤년으로 치는 복잡한 셈법을 톱니바퀴에 오롯이 담아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고 정확히 표시하겠다는 시계장인의 열정과 수고가 담겨 있어야 비로소 '명품의 가치'가 돋보인다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정확한 시각'을 나타낼 수 있는 시계가 필요하게 되었을까? 그건 시대와 나라의 사정마다 서로 다른 이유가 있었지만, 대표적인 이유로는 '하늘의 변화'를 시간으로 표현하였기에 저마다 '하늘의 자손'이라 일컫던 왕실에서는 '천문의 변화' 또한 정확히 관장할 필요가 있었다. 이를 테면, 해와 달이 가려지는 일식과 월식의 '정확한 예측'이 왕실의 존폐를 정할 정도로 중요시되었기에 '정확한 시계'가 필요했던 셈이다. 또 하나는 '대항해시대'를 열어야 했던 유럽의 각국에서는 망망대해에서도 길을 잃지 않고 정확한 목표지점까지 항해할 수 있는 방법이 필요했는데, 그때 항해에 참고했던 것이 하늘에 떠 있는 천체인 '해, 달, 별'이었다. 즉, 해와 달, 별이 떠있다면 자신이 타고 있는 배가 지구의 어디쯤을 항해하고 있는지 정확한 '위도와 경도'를 셈할 수 있어서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었지만, 망망대해에서 아무런 육지나 섬도 보이지 않는데, 날씨까지 흐려서 '천체'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을 때, 길을 잃고 헤매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그나마 '위도'는 잠시잠깐이라도 해나 별자리를 보는 것으로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있었으나, '경도'는 도무지 알 도리가 없었던 셈이다. 이때 '정확한 시간'을 알면 항구에서 출발한 지 '얼마나' 지난 것인지 셈할 수 있게 되어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있었기에 '정교한 시계'를 서로 만들기 위해 각축을 벌였다고 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시계들이 '명품시계'의 원조격이 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으니 '손목시계'는 겨우 시계일 뿐이 아니라 그 안에 '우리가 한 눈에 알아보기 힘든 숨은 가치'를 품고 있게 된다. 여기에 '기술력'까지 헤아릴 수 있게 된다면 '시계에 담겨진 교양'도 한층 더 깊이 쌓을 수 있게 된다. 흔히 '방수시계'라고 표현하지만 실제로 손목시계를 차고 수심 100미터, 200미터를 잠수하는 이들이 차지는 않는다. 그런데도 '방수기능'은 왜 필요한 걸까? 그건 '정교한 부품'이 물로 인해서 망가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뿜어낸 기술력인 셈이다. 아닌 게 아니라, 명품시계 고장의 원인 1순위는 '빗물'과 '땀'이 시계안으로 스며들어서 망가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손목시계에는 수심 몇 백미터의 압력에도 끄떡없는 '방수기능'이 필요했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방수기능'보다 '자성'에 특출한 내구성을 띤 명품이 등장하고 있단다. 왜냐면 우리가 쓰는 일상용품에 '자석'이 달린 것이 너무나 많고 '자기장'을 뿜어내는 전자기기들도 너무나 많기 때문에 '정교한 시각'을 나타내야 하는 복잡한 무브먼트가 쉬이 '자성'을 띠면서 망가지기 때문에 '명품의 가치'에 흠집을 내곤 한단다. 이렇게 '명품시계'는 망가지기도 쉬우므로 쉽게 망가지지 않는 튼튼함(?)까지 돋보여야만 하게 되었다.

 

  또한, 방수기능을 위해 '금속케이스'가 많이 쓰이는데, 대표적인 금속이 '스테인리스'다. 하지만 요즘엔 보다 튼튼함을 보완하기 위해 '텅스텐'을 쓰기도 하고, '골드'를 쓰기도 하는데, 텅스텐은 조금만 연마를 하려해도 불꽃을 튀기며 폭발하기 때문에 매끈하게 거울처럼 광을 내기 위해선 스치듯 한 번 연마한 뒤에 충분히 식혀주는 과정을 반복해야 하기 때문에 작업속도가 더딜 수밖에 없다. 또한, 순수한 골드는 너무 무르기 때문에 '다른 금속'과 섞어서 쓰곤 하는데, 여기에도 섞는 비율에 따라 '광채'가 사뭇 달라지기 때문에 '옐로골드'와 '레드골드'로 나뉘고, 또 다른 금속을 적절히 섞는 비결로 '색다른 빛깔의 골드'를 만들 수 있기에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다고 한다. 물론, 그 비법은 비밀에 부치고 말이다.

 

  어떤가? 고작 손목시계에 담겨진 교양이 참으로 다채롭지 않은가. 물론 몰라도 그만, 알아도 그만인 '정보'들이다. 한편, 시계의 본질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쓸데없는 정보'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의 참 진리는 '교양'과 맞물려 있다. 교양은 아무런 지식이나 많이 쌓는다고 높아지지 않기 때문이다. 진정한 교양은 '가치'를 높일 때 비로소 드높아지는 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정한 교양은 구중궁궐의 담벼락만큼 높게 쌓아올린다고 빛나지 않는다. 그토록 높게 쌓아올린 담벼락을 채우고 넘쳐흐를 때 비로소 찬란하게 빛나기 때문이다. 고작 손목시계 따위가 '명품의 반열'에 오른 까닭도 마찬가지다. 그 작은 손목시계에 인류가 쌓아올린 '교양의 가치'를 담뿍 담아내고서 찬란하게 빛을 발하게 만들었기에 비로소 '명품시계'가 탄생한 것이다. 그러니 단순히 값비싼 물건을 명품이라 부를 게 아니라 '교양의 가치'를 높인 물건에 '명품'이란 이름을 붙여주어야 할 것이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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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배우는 불멸의 역사 - 연금술사에서 사이보그까지, 인류는 어떻게 불멸에 도전하는가 한빛비즈 교양툰 19
브누아 시마 지음, 필리프 베르코비치 그림, 김모 옮김, 홍성욱 감수 / 한빛비즈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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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연 인간은 영생을 꿈꾸는가? 먼 옛날부터 인류는 '불로장생'을 꿈꿨다고 하고, 오래도록 '젊음'을 유지하길 바라며 '노화'하고, '고통'받으며, '죽음'에 이르는 걸 극도로 싫어한 것은 같다. 하지만 정말로 인간이라면 모두가 '불멸의 존재'가 되길 바라는 걸까? 나이가 들면 들수록 의아스런 대목이다. 반백살이 다 되어가는 나는 벌써 '사는 것'이 지겹기 때문이다. 물론, 노화로 인해 몸의 이곳저곳이 삐그덕거리기 시작하니 드는 생각일 수도 있다. 만약, 내 건강이 아직도 20대만큼이나 팔팔하고 고통을 모르는 혈기왕성한 젊음을 유지하고 있었더라면 생각이 달라졌을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사는 것'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 이상 점점 재미없어진다는 사실이다. 늘 같은 일을 하고 비슷한 일상을 보내며 만나는 사람마다 '살기 힘들다'는 얘기만 듣다보면 어느새 '사는 것'에 큰 매력을 느끼기보다 하루하루가 힘에 부치고 버겁다는 느낌만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과연 인간은 영생을 누리길 바라는 걸까? 회의적인 생각이 들곤 한다.

 

  하지만 '과학기술의 발전'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필멸의 존재인 인간이 '불멸의 존재'로 거듭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자꾸 전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냉동인간' 기술은 '젊음'을 유지한 상태로 미래를 맞이할 수 있다고 하며, '인공지능' 기술은 모든 '기억'을 컴퓨터에 저장해두어 육체만 업그레이드(?)하면서 영생을 누릴 수 있다고도 말한다. 아니, 어쩌면 '노화'를 멈추거나 '죽음'을 거부할 수 있는 '유전공학적 기술'이 첨단으로 발달한 미래에는 '늙음'이라는 단어가 사라질 수도 있다고 호언장담하는 과학자들도 있을 정도다. 물론 과거에는 허무맹랑한 소리라고 일축해버렸을 법한 말이지만, 현대과학기술은 '가능성'을 예고하기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해 '불멸의 존재'가 가능해진다면, 인간은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불멸의 존재'가 될 수 있는 비용이 천문학적으로 들 것으로 예상하며 일부 소수의 '부유한 계층만의 특권'이라고 비판하기도 하지만, 인류의 역사가 늘 그랬듯이 초기에는 '소수의 특권'이었다가도 머지 않아 '대중화'가 이루어지면서 '선택의 문제'로 떠오르기 마련이었으므로 '불멸' 또한, 선택의 문제가 될 가능성은 매우 높다. 더구나 '인간사회'는 언제나 무리와 집단을 이루며 '다수의 구성원'으로 살아갔지 '선별된 소수 집단'만이 생존하는 사회는 얼마가지 않아 소멸하고 만다는 섭리를 굳이 따르고 싶지 않다면, 결국엔 '불멸' 또한, 선택의 문제로 부각될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불멸을 택할 사람이 많아질 것인가?

 

  적어도 나는 '필멸'로 남고 싶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인간은 '육체'와 '정신'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도 병들고 다친 '신체'를 일부 '기계'로 대신하거나 '이식'을 통해서 생명을 연장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신체 일부'일 뿐이고, 우리 몸의 전부를 '기계'로 대체하거나 '컴퓨터 정보'로 대체되어 살아간다면...그건 '인간'이라고 부를 수 없는 존재가 되고 말 것이라는 결론에 다다랐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책에서 말하는 '트랜스휴머니즘'은 미래인간의 모습을 '무한한 가능성의 존재'로 그려낼 뿐, 현존하는 인류의 모습 그대로 '영생'을 누리는 과학기술은 아직까지 존재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계로 대체되고, 정보로 대체되고, 그저 '0'과 '1'이라는 이진수로 표현되는 나노급 '데이타'로 쪼개졌다 다시 뭉뚱그려놓을 수 있다는 '가능성'만 그려내고 있다. 만약, 그게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인공지능'과 다를 것이 무엇이냔 말이다. 심지어 '인공지능의 능력'이 인간을 뛰어넘게 된다면, 그런 변화에 적응하고 살아남은 '미래인간'은 무어란 말인가?

 

  이를 테면, 미래에는 무한할 정도로 광활한 우주여행도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예언하고 있다. 필멸의 육체를 벗어던지고 '트랜스휴머니즘'으로 인간의 지능을 탑재한 신인류라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합니다. 마치 유체이탈을 한 인간의 영혼이 '육체의 한계'를 벗어던지고 자유롭게 날아갈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과연 인공지능처럼 변모한 '트랜스휴먼'이 새로운 인간이 될 수 있는걸까?

 

  사실, 이런 발상은 아주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초기 그리스도교의 한 종파인 '그노시스파'에서 불완전한 육체와 성스러운 영혼을 분리함으로써 불멸할 수 있다고 얘기했다고 한다. 물론 널리 인정받지 못하고 '이단'으로 박해를 받고 말았다. 하지만 '불멸의 전설'은 이뿐만이 아니고 메소포타미아의 '길가메시 전설'이나 고대 중국 '진시황의 불로장생', 고대 인도의 '영생을 약속한 음료, 소마' 등과 같이 다양한 버전으로 전해져오고 있다. 그리고 이런 전설은 '연금술사'에 의해 더욱 갈고 닦여져서 '현자의 돌'로 재탄생되었고,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기계장치'로 살아 움직이는 장면을 구현하면서, 드디어 신만이 창조할 수 있었던 '생명의 비밀'을 인간도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믿음은 소설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표현되었고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처럼 신이 아닌 인간이 창조한 생명체에 대한 이야기가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러면서 과학자들은 '인간의 몸'이 한낱 '기계장치'에 불과하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고, 인간의 경우 좀더 '복잡하다'는 것만 빼면 인간도 얼마든지 신과 같은 '생명창조'를 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실제로 '유전자의 비밀'이 하나둘 밝혀지면서 '동물복제'에 성공사례가 점점 늘었으며, 인간의 두뇌를 대신할 '스스로 생각하는 기계장치', 즉 '컴퓨터'가 등장하면서 '인공지능'도 더는 꿈이 아닌 현실이 되고 말았다. 이로써 인간은 못할 것이 없는 존재로 거듭나게 되었다. 신의 영역이라고만 여겼던 '생명창조'까지 과학으로 해결하게 되니 말이다.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게 되는 것이 '과학의 종교화'다. 이제까지 '과학의 영역'으로 불렸던 분야들이 종교에서 말하는 '신념'과 맞물리면서 과학이면서 동시에 종교가 되어 '종교집단의 맹목적인 신앙'으로 변질된 느낌을 지울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들은 전세계의 부유한 셀럽들과 연결되면서 점점 공신력을 갖게 되었고, 더 많은 추종자들이 생기면서 거대한 트랜드를 이끌고 있기도 하다. 심지어 구글과 애플을 비롯한 '실리콘벨리'의 거대기업들이 앞장서 후원하기에 이르렀고, 일론 머스크나 마크 주크버거 들도 '트랜스휴머니즘'에 거액을 아낌없이 투자하고 있다고 한다. 물론, 빌 게이츠나 워렌 버핏처럼 평범한 자선사업에만 후원하는 부자들도 많지만 말이다.

 

  암튼, 이제는 '트랜스휴머니즘'은 공공연한 비밀이 되어 미래첨단과학을 이끄는지경에 이르렀다. 일찍이 스티븐 호킹 박사는 '인공지능은 위험하다'면서 강력한 경고를 했다. 핵전쟁보다 더 무시무시한 결과를 낳을 거라면서 말이다. 심지어 '인류의 멸종'은 인공지능 때문에 일어나게 될 거라고도 했다. 하긴 멸종이라는 것이 자연적인 도태 뿐만 아니라 인간 스스로 육체를 버리고 '기계의 몸'으로 갈아입는 것으로도 이룰 수 있으니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때가 도래한 뒤에도 '인간적'이라는 말을 할 수 있을까?

 

  이 책은 '새로운 인류'의 등장에 대해 긍정적이지도 부정적이지도 않은 중립을 지켰다. 그래서 읽는 사람의 생각에 따라서 호의적으로도 읽히고, 비판적으로도 읽힐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난 '암울하게' 읽었다. 불멸의 존재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린다고 하더라도 난 '그 길'로 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 길로 들어선 순간부터 더는 인간적인 삶을 살 수 없으리라는 판단이 섰다. 내 몸안에 '딸깍'이는 소리를 내는 기계장치가 들어간다는 상상만으로도 끔찍한데, 온몸을 기계로 대체하거나 컴퓨터 '네트워크' 속을 헤매는 신세가 되거나 나의 후손이 '시험관'속에서 배양되어 완벽한 유전자만을 가진 채 태어나게 된다면...고통없이 영생을 누리게 되더라도 그다지 기쁠 것 같지가 않다. 어찌보면 '죽음'이라는 그림자가 있기에 '삶'이라는 밝은 빛이 더욱 돋보이는 법인데, 부정적인 것을 싹 제거한 채 온갖 좋은 것만 '탑재'하고 살아가는 삶이 좋을 턱이 있을까?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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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 미제라블 한빛비즈 문학툰
SunNeKo Lee 그림, 정미선 옮김, 빅토르 위고 원작, Crystal S. Chan / 한빛비즈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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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빛비즈의 <문학툰> 네 번째 책은 너무나도 감동스런 <레 미제라블>이다. 19세기 낭만주의 문학의 최고봉이라 불리는 이 책을 '한 권의 만화책'에 다 담는다는 것이 애초에 불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 책에는 다 담겨 있다. 비록 그 감동까지 다 담을 순 없을지라도 마지막 장을 넘길 때 흐르는 눈물을 참을 수 없는 것은 이 책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4주간 아이들과 함께 한 논술 수업의 <문학툰> 마지막 책으로 이 책을 골랐으며 '대작'을 축약해 어린이들도 충분히 읽을 수 있는 책들 가운데 이 책만이 줄 수 있는 감동 포인트도 함께 수업해보았다.

 

  아시다시피, <레 미제라블>은 '불쌍한 사람들'이란 뜻이다. 또는 '비참한 사람들'이란 뜻도 있다. 시대배경은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정의 혼란을 겪으며 '공포정치' 시절을 지나 '제정'이 들어섰다가, 다시 '왕정복고'가 들어섰다가 또다시 '7월혁명'이 일어날 즈음의 1820년대를 관통하는 프랑스를 배경으로 삼았다. 시민들은 성직자와 귀족들의 수탈과 억압을 더는 참지 못하고 '제3신분(부르주아)'를 주축으로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는 것으로 혁명을 시작하였다. 그로 인해 '루이16세'를 단두대에 올려 시민들이 직접 왕정을 폐지하기에 이르렀지만, 국가를 운영하는 주축이 사라진 프랑스는 '내부 혼란'과 '외부 공격'이라는 두 가지 위기를 한꺼번에 맞게 되었다.

 

  이때, 등장한 영웅이 바로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다. 나폴레옹은 내부의 혼란과 외부의 침략을 '결속'으로 극복하는 한편, 시민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심어주며 '자유, 평등, 박애'라는 프랑스 혁명의 정신을 수호하는 듯 했다. 하지만 그런 그가 스스로 '황제'에 올라 '구체제의 모순(앙시앵 레짐)'을 다시 재현하는 모습을 보면서 실망하게 된다. 더 중요한 것은 '노동자들의 몰락'이다. 이는 프랑스 사회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였으며, 노동자들이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빵 한 조각'을 사기 힘들 지경에 놓이게 되면서 노동자들은 먹고 살 길이 막막해졌던 것이다. 이런 경제적 불안은 사회불만을 키웠고 조금이라도 힘이 약한 사람은 자기 것을 빼앗기고 절망에 빠지게 되었다.

 

  사회불안이 이어지자 프랑스 정부는 '법치주의'를 내세우며 법과 질서를 앞세우지만 당장 먹을거리가 부족한 시민들은 법과 질서보다 먹을 것을 달라며 아우성을 목놓아 외쳤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가혹한 형벌'과 '무시무시한 채찍질'이었다. 이렇게 프랑스 시민들은 너나할 것 없이 비참한 처지에 내몰렸다. 그러나 더욱 끔찍한 것은 그렇게 불쌍한 처지로 내몰린 사람들끼리도 서로 돕기는커녕 '범죄자'로 낙인 찍힌 이들을 차별하며 나락으로 내몰 정도로 사회분위기가 뒤숭숭해진 것이다. 누구라도 아무런 죄 없이 '범죄자'로 전락하는 사회에서 그 구성원들 하나하나가 '범죄자'로 낙인 찍히면 두 번 다시 사회로 복귀할 수 없도록 내몰았던 것이다. 이렇게 비참하다 못해 '비열한 사회'가 되어 버린 프랑스는 혼돈 그 자체였고, 조금이라도 지식이 있는 사람들은 '또 다른 혁명'을 꿈꾸며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불쌍한 두 사람 '팡틴'과 '장 발장'이 서로 만난다.

 

  팡틴은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 어여쁜 10대 소녀였던 팡틴은 아름다운 금발머리를 가지고 있었으며 멋진 남자와 달콤한 사랑을 나누며 결혼을 꿈꾸는 평범한 소녀였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멋진 남자는 팡틴은 '하룻밤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다가 헌신짝처럼 버렸고, 팡틴은 그만 버림 받았다. 비단 팡틴만의 잘못은 아니었다. '원작'을 보면 팡틴을 비롯한 다른 소녀들도 똑같이 사내들의 무정함에 버림받았던 것이다. 하지만 팡틴은 달랐다. 이미 그 남자의 아이를 뱃속에 가졌기 때문이다. 졸지에 미혼모가 된 팡틴은 어린 코제트를 데리고 일자리를 얻어 생계를 꾸려가려 했으나 어디에서도 받아주질 않았다. 결국, 팡틴은 테나르디에가 운영하는 여인숙에 소중한 딸을 맡기고 고향으로 돌아가 일자리를 구하게 된다.

 

  한편, 장 발장은 굶주리는 조카를 위해 '빵 한 조각'을 훔쳐 달아났다가 도둑으로 잡혀 재판을 받았는데, 형량이 5년이었다. 빵 한 조각을 훔쳤다고 5년 동안 감옥에서 썩어야 한다니 '말도 안 되는 판결'이었다. 더구나 자기 자신을 위해서 벌인 것도 아니고 어린 조카들이 굶어죽을 판이기에 어쩔 수 없이 벌인 죄값이었다. 그래서 장 발장은 탈옥을 결심한다. 허나 탈옥은 번번히 실패로 돌아갔고 다시 붙잡히길 반복하니 결국 19년이란 세월이 흐르고 말았다. 그렇게 '가석방'을 받아 자유를 만끽하는 것도 잠시, 범죄자의 신분으로는 일자리는 고사하고, 먹을 것도, 지친 몸을 잠시 뉘일 곳도 얻지 못하고 이곳저곳을 떠돌기 일쑤였다. 범죄자라는 낙인이 찍혔으니 지나가던 아이들도 돌을 던져대는 신세가 되자 장 발장은 어느새 분노와 복수라는 마음만 가슴 가득히 품게 되었다.

 

  그러다 겨우 눈을 부친 곳이 성당 문앞이었는데, 그곳에서 만난 '미리엘 주교'가 선뜻 맛있는 빵과 따뜻한 잠자리를 권해주어 실로 오랜만에 장 발장은 '안식'을 맞게 된다. 하지만 이미 가슴 가득히 분노와 복수 등 나쁜 마음을 품은 장 발장은 주교의 호의를 '도둑질'로 갚게 된다. 성당에가 가장 값비싼 '은식기'를 훔쳐 달아난 것이다. 그러나 그런 장 발장은 마을을 벗어나기도 전에 헌병에게 붙들려 성당으로 되돌아 오고 만다. 또다시 '죄인' 신분으로 말이다. 하지만 미리엘 주교는 장 발장은 범죄자가 아니라며 두둔했고, 남아 있는 '은촛대'마저 챙겨가라며 손수 가방에 넣어준다. 그리고 "잊지 마시오. 정직한 사람이 되기 위해 이 은식기를 쓰겠다고 약속한 것을"라고 말을 건낸다. 장 발장은 한 적이 없는 약속이라 얼떨떨했지만, 주교는 은은한 미소만 지을 뿐이다. 이제 장 발장은 악이 아니라 선에 속하는 사람이라는 말과 함께 말이다.

 

  장 발장은 고뇌에 빠진다. 자신이 정말 다시 착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이미 절망을 맛본 상태에서 아무도 구원해주지 않는 비정한 사회를 향해서 다시 착한 사람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그렇게 고뇌의 찬 와중에 자신의 발밑으로 굴러온 동전을 본능적(!)으로 감추고 동전을 잃어버린 소년을 향해 꺼지라고 윽박을 지르고 만다. 장 발장은 다시는 나쁜 짓을 짓지 않겠다는 맹세가 얼마나 허망하게 사라질 수 있는지 경험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다시 감옥에 갈 자신의 처지를 생각했다. '빵 한 조각'을 훔친 죄로 19년을 억울하게 살았다 생각하면서 '동전 한 닢'을 훔치는 자신의 본성이 얼마나 추해졌는지 확인하는 계기가 된 셈이다. 장 발장은 자신은 절대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나쁜 사람이 될 수 없다고 뒤늦게 소년을 찾았지만 끝내 찾지 못하고 다시 도망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장 발장은 두 번 다시 '나쁜 사람'이 되지 않겠다고 굳은 다짐을 한다.

 

  시간이 흘러, 두 사람은 다시 만나게 된다. 장 발장은 '새로운 기술(구슬제조법)'로 제법 돈을 모았고 공장을 열어 수많은 직공들의 생계를 책임지는 사장이 되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의 신임을 얻어 '마들렌 시장님'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팡틴은 마들렌의 공장에 취직해 알뜰히 돈을 모으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팡틴은 좀처럼 돈을 모을 수 없었다. 하루 빨리 돈을 모아 자신의 딸 코제트를 찾으로 가야 하건만, 여인숙의 주인은 '사기꾼'에 '도둑놈'이었기 때문에 팡틴에게서 돈을 뜯어내 제 몫으로 취하고 코제트는 하녀 취급을 하기 일쑤였던 것이다. 그런 사실을 까맣게 몰랐던 팡틴은 테나르디에 내외가 달라는 돈을 넙죽넙죽 갖다바치기 바빴고, 액수는 점점 부풀려져서 끝내 감당하기 힘들어졌던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곱상한 팡틴을 두고 질투심에 불타던 동료직원들이 '팡틴의 비밀'을 공개하면서 결국 일자리도 잃게 되었고, 그 뒤로 팡틴은 여자로서 감당할 수 없는 치욕을 참고 견디며 코제트에게 필요하다는 돈을 송금하며 서서히 병들어 갔다.

 

  뒤늦게서야 마들렌(장 발장)은 이 사실을 알고 팡틴을 도우려 했지만, 이미 병든 팡틴의 목숨을 살릴 수는 없었고, 죽어가는 여자의 마지막 부탁인 '코제트'를 구하기 위해 떠나려 하지만 '자베르 경감'에게 정체가 들통나는 바람에 시간이 조금 더 미뤄지게 되었다. 자신을 대신에 억울한 재판을 받고 있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정체'를 당당히 밝히고 감옥에 수감되었기 때문이다. 암튼, 위기에 빠진 선원을 구하고 탈옥 아닌 탈옥을 한 장 발장은 '시장 시절'에 모아둔 돈을 챙겨 코제트를 구하려 떠난다.

 

  우여곡절 끝에 코제트를 구한 장 발장은 '코제트의 아빠'가 되어 세상의 큰 기쁨을 느끼게 되었지만, 자베르 경감의 집요한 추적 때문에 '도망자 신세'가 되었고, 포슐르방의 도움으로 수녀원에 숨어 지낼 수 있게 되었다.

 

  또다시 시간이 흘러, 마리우스의 이야기로 넘어간다. 마리우스 퐁메르시는 부유한 외할아버지의 귀여운 손자였지만 '왕당파'인 외할아버지와 '공화파'인 아버지 사이의 갈등으로 인해 가난하게 사는 청년이었다. 외할아버지는 아버지의 아들임을 포기하면 자신의 재산을 상속받아 부유하게 살 수 있다며 말했지만, 마리우스는 조국을 위해 헌신한 아버지의 핏줄임을 자긍심으로 삼았기 때문에 외할아버지의 재산을 받지 않을지언정 아버지를 부정하지 않는 꼿꼿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런 마리우스였기에 자연스레 '사회 부조리'에 눈을 떴고, '혁명'을 꿈꾸는 청년들의 모임에 들락거리거렸지만, 한 눈에 사랑에 빠져버린 소녀 때문에 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기도 했다. 그 소녀의 이름이 바로 '코제트'였던 것이다.

 

  하지만 '혁명'은 곧 시작될 것이고, '코제트와의 사랑'도 순탄치만은 않았다. 왜냐면 시위대를 진압하기 위해 경찰이 활동하기 시작했고, 이는 '마리우스'와 '장 발장'에게 위기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 경찰 가운데 자베르도 있었던 것이다. 경찰들은 시위대에 잠임해서 정보를 캐내는 한편, 자베르는 장 발장으로 의심되는 사람을 추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급박한 상황속에서 '마리우스'와 '코제트'는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장 발장이 자베르의 추격을 피해 영국으로 도망갈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마리우스를 짝사랑하는 에포닌은 마리우스와 코제트의 사랑을 곁에서 지켜보며 사랑의 달콤함 대신 쓰디쓴 고통을 느끼게 된다. 테나르디에의 큰 딸이었던 에포닌은 자신의 아빠가 '코제트의 아빠'의 재산도 노리고 '마리우스의 주머니'도 모두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 이 둘을 위기에서 구해내는 것뿐 아니라 끝내 경찰과 시위대의 격렬한 총격전이 벌어지는 와중에 마리우스를 구해내고 대신 목숨을 잃기 때문이다. 하지만 코제트와 이미 사랑에 빠져버린 마리우스는 에포닌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고도 그닥 슬퍼하지 않는다. 아니 슬프고 고맙긴 했지만, 코제트와 헤어질 아픔 때문에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은 절망에 빠졌었기 때문이다.

 

  끝내, 마리우스는 경찰과 총격전이 벌어지는 와중에 상처를 입고 쓰려져 죽을 위기에 처했지만, 장 발장이 때마침 구해서 다시 살아날 수 있었다. 그리고 마리우스와 코제트는 결혼을 하게 되었고, 장 발장은 코제트의 행복을 위해 모든 것을 뒤로 하고 홀연히 떠났다. 뒤늦게서야 모든 비밀이 밝혀지고 마리우스는 자신의 목숨을 구한 의인이 바로 장 발장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분을 범죄자 취급한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며 용서를 구하지만 이미 장 발장의 목숨은 꺼져가는 촛불과 같았다. 그렇게 이야기는 마무리 된다.

 

  어린 독자를 위한 '축약본'이 이미 많이 출간된 상태라서 대강의 줄거리는 이미 잘 알려진 상태다. 여기에 '만화형식'의 한계까지 더하게 되니 줄거리는 더욱 간결하게 표현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이 책만의 장점을 꼽자면, '시대배경'을 (그림으로 직접 보면서)눈으로 직접 확인하며 읽을 수 있기에 어린 독자들의 이해가 더욱 편리했다는 점이다. 또한 등장인물의 '표정'을 직접 눈으로 보면서 '대화'를 읽어나갈 수 있었기 때문에 '원작의 감동'을 더욱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물론, 원작이 주는 감동에 비할 바는 못 된다. 허나 이는 '장편소설'이 주는 위용과 거대한 물줄기를 타는 듯한 큰 감동과 여운에서 비롯된 것일테니, 만화에서 큰 감동을 느낄 수 없었다는 것은 단점이 아니라 꼬투리를 붙잡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오히려 원작의 내용을 알고 있기에 <문학툰>이 주는 감동은 또 새롭다. 그리고 그 새로움은 '새로운 이야기'로 펼쳐져 현대적인 느낌으로 되살리는 촉매가 될 것이고 말이다.

 

  실제로 아이들과 논술수업을 하면서 '프랑스 혁명'과 '6월 항쟁'을 비교하면서 읽어 나갔다. 프랑스 시민들이 꿈꿨던 새로운 세상과 대한민국 시민들이 꿈꿨던 새로운 세상을 분석하면서 말이다. 시대적 아픔이 시민들의 의식을 성장시키기 마련이다. 비록 혁명은 피를 부르고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치룬 다음에야 얻어지는 새 세상이지만, 이미 불쌍하고 비참한 상황에 놓인 수많은 사람들이 꿈꿀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안위'가 아니라 '미래 세대의 행복'을 위해서 모든 것을 내려놓을 '그 순간'에 펼쳐지기 때문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의 희망과 목숨을 맞바꾸면서까지 말이다.

 

  그리고 권력의 속성은 '그들만의 잔치'를 벌이기 위함이니 <동물농장> 속의 돼지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끊임없이 감시하고 정책을 바로 잡을 수 있는 교양시민으로 성장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도 강조했다. 민주주의는 선거가 끝난 뒤에 넋놓고 지켜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던진 '소중한 표'에 무한한 책임을 질 때 바로 설 수 있다고도 했다. 또한 정치인은 100% 사기꾼이고 예비 독재자이니 뽑고 난 뒤에 잘 관리하는 성숙한 시민이 되어야 민주주의가 바로 잡힐 수 있다고도 강조했다. 그래야 우리 모두가 '레 미제라블'이 되지 않을 수 있다면서 말이다. 결코 '그들만의 천국'을 좌시해선 안 된다고 또다시 강조하면서 말이다.

 

  끝으로 <문학툰>을 감상한 뒤에 '원작'을 다시 한 번 읽어보라고 권했다. <문학툰>으로 '원작의 맛'을 보았고, '대작의 감동'을 느낄 준비를 마쳤으니 어렵지 않게 즐길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이 책 <문학툰> 시리즈가 굉장히 훌륭한 점은 뛰어난 '각색'으로 원작의 재미를 놓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다수의 '축약본'이 각색을 하고 줄거리를 압축하면서 '원작'과는 사뭇 다른 '또 다른 이야기'를 하는 실수를 저지르곤 하는데, 이번 <문학툰>은 전혀 그런 것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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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나쁜 뉴스의 나라
조윤호 지음 / 한빛비즈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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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고 싶다. 아직도 우리 나라에 참언론인이 살아 있을 거라고 말이다. 주요 신문들은 '보수 정권의 나팔수'가 되어 버린지 오래고, 지상파 뉴스는 '기계적인 균형'을 맞추느라 나쁜놈을 나쁘다하지 못하고 있으며, 종편 뉴스는 태생부터 '한쪽 편'만을 들며 '뉴스의 가치'를 무색하게 만들어버리고 있다. 그래서 교양있는 시민들은 '종이신문'을 보지 않은 지 오래되었으며, '지상파 뉴스'도, '종편 뉴스'도 점점 보지 않고 있고, 그나마 읽고 보더라도 '믿지 않은' 지 오래 되고 말았다.

 

  대신 '인터넷(포털) 신문'이나 '너튜브 동영상' 따위를 통해서 뉴스를 접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다. 이들은 '언론'이 아닌데도 '언론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마저도 '기레기(기자+쓰레기)'가 낚기 위해 쓴 '허섭스레기' 같은 기사들이 점령하였기 때문에 제대로 정독하지도 않고 대충대충 읽고 보면서 어떤 '댓글'이 달렸는지만 훑어본 뒤, 평가를 내리곤 한다. 왜냐면 애초에 '뉴스의 가치'가 없는 선정적인 사진이 걸린 짤방(짤림방지)용이거나 기사의 내용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낚시성 제목'으로 클릭수만 늘리려는 기사들이 '메인'에 올라오기 때문이다. 더구나 '속보'랍시고 올라온 기사들도 정치인 누구누구의 말(인용문)을 그대로 옮긴 '따옴표 기사'가 대부분이라 기자의 주장이나 의견 따위는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기 때문에 읽을 가치가 전혀 없어져 버린 현실이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물론, 기자들의 고충도 이해할 점이 없지 않다. '가치 있는 기사'를 쓰기 위해 발로 뛰고 몇 날 며칠을 고민하며 쓴 기사가 '무가치한 낚시글'에 밀려 메인에 오르지도 못하거나, 소신껏 기자의 양심을 걸고 쓴 기사가 '데스크(언론사 국장급 이상)'의 검열(?)에 걸려 기사의 원본이 수정되거나 애초에 올려지지도 않는 등의 억압을 받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이런 난관을 뚫고 무사히 신문에 나오고 뉴스에 한 꼭지를 차지한다고 해도 '시민들의 무관심'이 이런 가치 있는 기사들을 무덤으로 보내고 마는 우리 현실이 더 안타깝기 그지 없다.

 

  어찌보면 총체적 난국이다. 기자는 '기레기'라 욕먹고, 독자들은 '교양없다'며 깎아내리며, 그렇게 우리 언론은 '언론다운 언론'이 되지 못하는 비극이 악순환처럼 되풀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어려움을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딱 하나 있다. 그 방법은 '진실'이 승리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리고 진실은 반드시 승리하기 마련이기에 반드시 헤쳐나갈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건 바로, '교양 시민이 되는 길'이다.

 

  아직도 '가짜뉴스'와 '편향적 뉴스'를 보면서 현혹되는 이들이 많다. 약간의 상식만 있어도 '가짜'임을 알 수 있고, '한쪽으로 치우친' 불공정한 뉴스라는 것을 파악할 수 있는데도 홀라당 속아넘어가는 까닭은 바로 '교양'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올바른 가치'를 배우길 멈추지 않아야 하는데,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도 이해가 부족한 이들이 '언론의 역할'에 대해서도 무관심할 수밖에 없다.

 

  이를 테면, 대한민국 국회의원들이 여야로 갈려 '정책적 대립'을 벌이고, '행정부의 수반'인 대통령의 정책에 반대의 목소리를 내는 것을 두고, 언론은 '정쟁'이란 표현을 곧잘 쓴다. 그리고 이런 뉴스를 접한 이들은 한결같은 목소리를 낸다. "국회의원이라고 뽑아 놓았더니 하는 일이라고는 싸움질밖에 없다"고 말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국회(입법기관)는 정부(행정기관)를 견제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러니 국회의원이 대통령의 권한과 정책에 '반대의 목소리'를 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더구나 국회의원들끼리도 '여야로 갈려 어떤 법을 만드는 것이 나라를 위해 좋은 일이냐'면서 정책토론을 벌이는 것이 당연한 일이고, 국민은 '그걸'하라고 뽑아놓은 의원들이다. 그런데도 이를 싸잡아서 '싸움질'이라고만 판단해버리는 국민들은 '교양'이 없는 셈이고, 그렇게 오해하도록 내비두는 '언론'은 쓰레기인 셈이다.

 

  교양 있는 시민이라면 당당히 목소리를 내야 한다. 국회의원의 싸움질(?)을 지켜보면서 '이 정책에 관해선' 누가 더 잘했는지 근거를 내세워 목소리를 내고, 참언론이 되려면 '국회에서 벌어지는 정쟁'에 대해서 교양시민들의 목소리를 적극 반영해 '제대로 된 여론'을 보도하면서 바람직한 정책 방향을 잡아나가려 노력해야 할 것이다. 물론, 제대로 된 국회의원이라면 '언론'이 보도하기에 앞서 시민들의 의견을 적극 수렴해 '입법 활동'을 하는 것이 바람직할테고 말이다.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야 '나쁜 뉴스', '가치 없는 뉴스'가 점점 사라지게 될 것이고 말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도 말하고 있지만, '독자들의 수준'이 높아져야 하고, '참언론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고 하면서도, 제왕적인 권력과 거대 언론에 주눅이 들어 있기에 바꾸기 힘든 현실만 탓하고 있다. 그래 가지고 무슨 개혁을 하고, 혁명적인 성과를 이룰 수 있겠느냔 말이다. 통탄할 일이다. 그러면서 '나쁜 뉴스'를 가려낼 스킬(?)만 화려하게 나열하고 있으니 답답할 노릇이다. 무릇 '내공'이 받쳐주질 않으면 화려한 스킬은 그저 '관상용(눈요기)'일 뿐이다.

 

  지금 우리 시민들에게 필요한 것은 '스킬'이 아니라 '내공'이란 말이다. 내공을 기르기 위해선 당장이라도 '공부(교양)'를 해야 하고 말이다. 무엇보다도 '인성', '도덕', '책임'과 같은 '선한 윤리의식'이 앞서야 한다. 내 이익을 앞세우기보다 남을 배려할 줄 아는 배려심이 밑바탕에 깔려 있는 사회에서 살아야 '사는 맛'을 느낄 수 있지 않겠느냔 말이다. 너나할 것 없이 '부'를 쌓고, '권력'에 다가가기만 하면 '인두껍'을 쓴 악귀처럼 갑질을 부리고, 국민을 개돼지로 만들어버리는 거지같은 사회에서 살고 싶으냔 말이다.

 

  가지나부랭이들이 '쓰레기'같은 기사를 쓰는 것으로도 모자라 돈벌이를 위해 '광고성 기사'를 퍼나르는 양심없는 짓거리를 일삼는 것도 '인성'이 내팽겨쳤기 때문이다. 그 따위 인성이 밥 먹여주는 게 아니라면서 말이다. 그러나 '인성'이 아니고 사람답게 사는 사회를 어떻게 만들 수 있다는 말인가? 언론을 쓰레기로 만들어 놓고 '뉴스'를 믿지 못하게 만들어 놓고, 어떻게 '바르게' 살기를 바라냔 말이다. 권력이 썩지 않게 하기 위해선 '언론'이 바로 서야 한다. 부패한 권력이나 부정한 세력이 '그들만의 잔치'를 벌이지 못하게 막을 유일한 방법도 '바른 언론'밖에 없다. 그런 바른 언론을 만들고자 '교양 시민'도 필요한 것이고 말이다.

 

  정리하면, 바른 언론도 교양 시민도 하루 아침에 만들 수 없는 법이다. 하나씩 하나씩 쌓아나가야 한다. 한 사람이 바른 말을 하면 두 사람이 바른 말을 할 수 있는 분위기만 만들어도 좋다. 중요한 것은 '바른 말'을 가려낼 수 있는 '교양쌓기'가 필요하단 말이다. 이 책에서 '나쁜 뉴스'를 가려내는 스킬을 나열한 것과 마찬가지다. 숲을 제대로 보려면 '전체 숲'을 조망할 수 있는 안목도 중요하고, '나무 하나하나'를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는 실력도 중요하다. 언론을 제대로 보는 것도 마찬가지다. 뉴스의 전체 맥락을 파악할 수 있는 '교양시민의 안목'과 뉴스를 세세히 분석할 수 있는 '실력있는 언론인'이 함께 해야 한다.

 

  이 책이 쓰여진 지 6년이 지났는데도 슬픈 현실은 변함이 없다. 아니 언론은 그 역할을 더더욱 못하고 있다. '뉴스의 가치'를 무색하게 만들수록 기뻐하는 세력이 아직도 건재하다는 말이다. 이제 '언론'이 제스스로 바로 서기에는 힘든 상황이 되었다. 이젠 '독자들의 힘'을 보여주어야 할 때다. 당장의 내 이익만 챙기며 살다보면 '더러워진 세상' 때문에 더욱 살기 힘들어지기 마련이다. 내 주위에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과 '함께' 잘 살아보기 위해 작은 걸음을 모아야 할 때다. 그 작은 걸음이 모이고 모여서 '큰 걸음'이 되는 세상을 꿈 꿔야 비로소 세상은 바뀌게 된다. '착한 뉴스의 나라'가 되길 바라 본다. 더 나아가 '희망찬 뉴스의 나라'가 되어 전세계가 함께 힘찬 발걸음을 옮겨보길 바란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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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력의 유전자 - 협력과 배신, 그리고 진화에 관한 모든 이야기
니컬라 라이하니 지음, 김정아 옮김, 장이권 감수 / 한빛비즈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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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다에 사는 참다랑어는 희귀한 생선이다. 마구잡이 어획으로 개체수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어족자원' 보호 차원에서 참다랑어를 낚는 것을 금지하며 맛있는 참다랑어가 다시 많아지길 기원하고 있다. 하지만 도쿄 어시장에서 270킬로그램짜리 대형 참다랑어가 경매가 310만 달러에 팔렸다고 한단다. 한 마리만 낚아도 대박인 셈이다. 지금 참다랑어 어획량은 늘었을까? 줄었을까?

 

  이를 경제학 용어에서는 '공유지의 비극'이라 부른다. 한정된 자원임을 뻔히 알면서도 주인 없는 공유지에서는 '먼저 잡는 사람이 임자'라는 생각이 앞서 '개체수'가 늘어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마구 잡이로 경쟁에 뛰어드는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분명 '개체수'가 늘어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더 많은 수확량을 올리는 것이 모두에게 더 이익인 것을 알고 있음에도 다른 사람이 먼저 차지할 것을 걱정하며 '한정된 자원'이 바닥이 날 때까지 긁어모아 끝내 사달을 내기 일쑤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을 지켜보면서 '협력'이라는 말을 꺼낼 수 있을까?

 

  호모 사피엔스는 당당히 현존하는 '최강의 포식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초기 인류는 '포식자'는커녕 더 강한 포식자들의 먹잇감에 불과했는데도 뛰어난 지능으로 정보의 축척을 가능하게 했고, 본능적으로 삶을 영위하기보다 이성적으로 판단하며 '더 나은 삶'을 꾀하는 등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한 끝에 지금의 자리로 발돋움하게 된 것이다. 이런 '현생 인류'는 과연 어떤 유전자를 가졌기에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일까? 리차드 도킨스의 지적처럼 <이기적 유전자>를 갖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까? 아니면 니콜라 라이허니의 주장처럼 <협력의 유전자>를 가졌기에 가능했을까?

 

  놀랍게도 거의 모든 생물은 '경쟁'이 아닌 '협력'을 통해 종을 번식시키고 개체수를 증가시켰다고 한다. 글쓴이는 이를 증명하기 위해 너무나도 많은 예를 들고 있기에 믿지 않을 수도 없게 만들었다. 심지어 인간도 마찬가지란다. 서로 '협력'하며 살아간 종만이 번성할 수 있었다면서 말이다. 하지만 앞서도 예를 들었던 것처럼 '협력'보다는 '배신'을 때리는 것이 더 큰 이득을 불어오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이는 인간뿐 아니라 모든 생물에게서도 발견되는 현상이란다. 그런데도 글쓴이는 '협력'만이 유일하게 종을 번성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더 큰 이득은 저 멀리에 있는데도 말이다.

 

  그에 대한 설명은 '팬데믹'을 겪고 있는 사람들의 대처방안을 예로 들면서 설명하고 있다. 코로나19가 전세계적으로 확산되던 초기에 수많은 나라들이 두루말이 화장지와 신선식품을 사재기하며 대혼란을 겪었던 것과 병상확보를 하지 못해 수많은 환자들이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상황에서 많은 나라의 지도자들이 '자국의 백신'을 먼저 챙기면서 상대적으로 보건의료에 취약한 나라들이 어려움을 겪었던 것을 예로 들면서 말이다. 물론 초창기의 혼란을 겪으며 인간의 이기적인 모습을 엿볼 수 있었지만, 사스나 메르스에 비해 '치명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인지하면서 차츰 '자국 이기주의'를 내려놓고 인도적 차원에서 저개발국가들에게 백신을 나눠주며 '팬데믹의 위기'를 극복해나가는 모습을 나열했다. 이런 모습이야말로 '협력의 유전자'가 결국 승리했다면서 말이다.

 

  확실히 인간은 비겁하다 못해 비열할 정도로 '이기적인 모습'을 보여주곤 한다. 위기의 상황속에서 '나'를 더 먼저 챙기고, '가족'과 '친구'를 그 다음으로 챙기며, '아는 이웃'을 챙긴 다음에야 더 많은 사람들을 챙기는 양상을 보여주곤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이런 인간만 있는 것이 아니란다. 팬데믹의 초기 때부터 자기보다 남을 더 걱정하고 챙기는 '보편적인 인류애'를 보인 사람들이 더 많았고, 비록 자기가 감염되었다하더라도 '감염의 확산'을 막기 위해 '자가격리'를 실천하며 감염의 확산을 막으려 최선을 다했고, 재감염을 막기 위해 손씻기와 마스크를 몸소 실천하며 적지 않은 불편을 감수하면서까지 남을 배려하는 '자기 희생적인 모습'도 발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여타의 생물에게서도 발견되는 모습이다. 남미에 서식하는 개미 가운데 하나는 해가 떨어지면 '생존 가능성'이 매우 낮아지므로 자신들의 둥지로 서둘러 되돌아오곤 하는데, 이때 먹이활동을 벌이다 미처 복귀하지 못한 개미들은 '다른 포식자'들이 자기네 보금자리를 발견하지 못하도록 밖에서 입구를 막고 난 다음에 춥고 메마른 사막 한가운데로 행진을 벌인 뒤 최후의 순간을 기다린다고 한다. 이는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동일한 유전자'를 가진 동료들을 생존확률을 높이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 '협력의 유전자'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협력'하는 것이 더 이득이란 말인가? 앞서 보았듯이 '배신'을 밥 먹듯이 하면 홀로 로또 맞은 것처럼 대박을 낼 수 있는데도 말이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글쓴이는 '정규 상선의 선장과 선원'과 '해적선의 선장과 선원'의 생존률을 비교하면서 설명한다. 머나먼 항해를 떠나야 하는 위험을 감수한 대가로 얻는 뱃사람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크단다. 물론, 상선이나 해적선 모두 '무역'과 '약탈'의 대가로 얻는 이득은 로또 만큼이나 막대하기에 위험천만한 항해를 끝마치고 난 뒤의 엄청난 보수를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그 힘겨운 항해를 해내는 것이다.

 

  하지만 망망대해에서 기약없는 이득을 기다리기보다 '생존(안전)'을 택하는 일이 더 많이 일어난단다. 바로 '선상반란'인데, 선장을 죽이고 배를 빼앗는 일이 '정규 상선'과 '해적선' 가운데 어느 쪽이 더 많았을까? 결과는 놀랍게도 '정규 상선'에서 더 많이 더 끔찍한 선상반란이 일어나곤 했단다. 글쓴이는 그 까닭으로 고립된 선상 위에서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는 쪽이 어느 쪽이냐를 주목했고, 놀랍게도 무역을 하는 '정규 상선'에서 선장의 독재와 독단적 폭력이 문제가 된 적이 더 많았으며, '해적선'에서는 배 안의 모두가 평등한 민주적인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했기에 선상반란 같은 일은 덜 일어났다고 한다. 한마디로 '배신'을 때리는 쪽은 덜 협력적인 방식으로 항해를 했던 '정규 상선'이었다는 말이다. 반면에 '해적선'은 모두가 협력을 잘 했기에 갈등이 더 적었고, 규율이 더 잘 지켜졌으며 상대적으로 안전한 항해(?)를 했다는 것이다.

 

  비록 고립된 선상에서의 '극단적인 예'를 들어서 신빙성은 떨어지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행성, 지구도 우주에서 고립되기는 마찬가지다. 심지어 같은 태양계 안에서도 인간이 이주해서 살 수 있는 행성은 없다. 이렇게 고립된 지구에서 인간이 더 잘 살기 위해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하지만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더 많은 인간들은 '협력의 유전자'를 발휘해서 더 잘 살아갈 것이 틀림없다.

 

  참,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유전자에 '감정'이 없다는 점이다.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에서도 언급했지만, 유전자는 어떤 방향성조차 없다. 다시 말해, 유전자에는 목적도, 욕구도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유전자가 '이기적'인 것을 아는 것처럼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을 잘 찾아가는 것처럼 보인다고 설명했을 뿐이다. <협력의 유전자>도 마찬가지다. 유전자가 '협력하라'는 명령을 내릴리 없다고 단정한다. 그럼에도 '협력'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는 것을 잘 보여준단다. 이는 '배신'하는 종은 도태되고, '협력'하는 종이 생존하기에 그리 보일 뿐, 자연선택에서 '방향성'은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킨다. 물론, '목적성'은 더더군다가 없다. 단지, 인간은 '이성의 힘'을 갖고 있기 때문에 생존을 위해 유리한 선택을 할 수는 있을 것이다.

 

  거의 모든 종은 '협력'을 통해 더욱 번성했다. 우리 인간도 이런 생물들의 번성을 살펴보면서 '배신'이냐, '협력'이냐를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어떤가? 그리고 당신의 유전자는 뭐라 말하던가? 아무 소리도 못 듣는 게 '정상'이다. 자연선택은 아무런 강요를 하지 않는다. 단지, 선택의 결과만을 냉혹하게 보여줄 뿐이다. 짧은 순간의 이득을 위해 '배신의 길'을 걷는 인간들이 더 많아진다면, 인류의 미래는 어두워질 것이 분명하고 말이다. 물론, 강요는 아니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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