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eBook] 엄마와 물건 - 물건들 사이로 엄마와 떠난 시간 여행
심혜진 지음, 이입분 구술 / 한빛비즈 / 2022년 10월
평점 :
우리는 '역사'를 배우면서 거창한 것만 떠올리기 일쑤다. 교과서에서조차 '임금의 업적'만 나열을 하고 '위인들의 생애'만 다루며, 인류사에 큰 영향력을 끼친 '굵직한 사건' 들을 예로 들면서 스케일을 한껏 키우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사'로 오면서 역사의 범위는 점점 복잡해지고 사건사고는 끊이지 않으며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했다 사라지길 반복하면서 위대하고 유구한 역사의 흐름만을 따라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그렇게 늘 거창해야만 하는 걸까?
한편, 임금이나 위인이나 모두 같은 사람인데, '그들'만 역사의 주인공이 되란 법이 있느냔 말이다. 더구나 무릇 역사란 '승자의 기록'이라고 하던데, 그 말이 맞다고 친다면 '개인의 취향'이 얼마든지 반영될 수 있다는 증거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다면 '나만의 역사책'에는 내가 주인공이고, 내가 '아는 사람'이 얼마든지 위인이 될 수도 있는 법이다. 이를 테면, '엄마' 같은 위인 말이다.
엄마가 왜 위인이냐고 되묻는다면, 이렇게 답하겠다. "당신은 엄마를 존경하지도 않으신답니까? 세상에는 인류 모두를 위해 헌신하는 위인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정작 나를 위해 모든 것을 헌신하신 엄마를 떠올리지 않는다면, 사람도 아니다."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엄마의 모든 것'을 역사책으로 쓸 수도 있다. 특히, 엄마 때부터 '즐겨 쓰던 물건에 담긴 현대사의 질곡'을 주제로 삼아 역사책을 쓴다면, 바로 이 책일 것이라고 소개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책이 <역사책>은 아닐지라도...
그렇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떠올리신 분들이 꽤나 많을 게다. 왜냐면 대한민국만큼 '빠르게' 변천한 나라도 드물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신발만 보아도 그렇다. 지금 100세를 살고 계신 분이 살아계신다면 그분은 어릴 적에는 '짚신'을 신으셨을 것이고, 비가 오는 날이면 '나막신'도 신어보셨을 것이다. 조금 형편이 나아지면 '고무신'도 신어보셨을 것이고, '가죽신'을 신고 폼을 내기도 해보셨을 것이다. 젊어서 직장에 다닐 때에는 '구두'를 신고 다녔을 것이고, 평상시에는 '운동화'를 신고, 근래에 들어서는 '기능성 신발'을 신으며 발건강에 신경 쓰면서, 요즘처럼 부쩍 추워진 날씨에는 발을 따뜻하게 보호하는 '털신'을 신으며 평생 자신이 신어본 '신발의 변천사'를 떠올리실 수도 있을 게다. 이렇듯 '신발' 하나에도 동서양을 아우르고 전통과 현대, 그리고 시대별 유행까지 모두 담겨 있고, 시대마다 첨단을 달리는 '과학기술의 발전'까지 수용하였으니, 우리 주위에 널려 있는 사소한 물건들을 보면서 '대한민국의 역사와 발달사'를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의 내용은 글쓴이와 글쓴이의 엄마가 나눈 '대화'가 주를 이룬다. 지금 현재의 '나'는 이런 물건을 쓰는데, 과거의 엄마, 또는 엄마의 엄마는 어떤 물건을 써왔었는가하고 말이다. 이런 내용의 글을 읽다보니, '나 어릴 적의 추억'이 떠올라 색다른 감상에 빠지기 일쑤이기도 했다. 이런 점이 책의 첫 번째 매력이었다. 또 다른 매력은 글쓴이가 '여성'이기에 느낄 수 있었다. 사실 '남자'들은 늘 쓰던 물건에 그닥 애착을 갖지 않는 편이다. 그저 손에 익숙하고 편하면 그뿐, 그 이상도 없고, 쓰다가 없어도 그만이기에 물건 하나하나에 '의미'를 담는 편이 아니다. 더구나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거나 '까라면 까..'라는 묘한 신조(?)가 남자들 사이에 퍼져 있는 까닭에 망치가 있으면, 못을 박는데 쓰다가도, 밤송이를 깔 때도 쓰고, 땅을 팔 때도 쓰고, 심지어 밥 먹다가 이를 쑤실 때도 쓰는..무던한(?) 삶을 살아갈 뿐이다. 아무래도 '군대식 문화'라 남자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기에 그런 점이 없지 않나 싶지만, 확실히 '여성'들의 관점에서 물건에 대한 역사를 살펴볼 수 있어서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한편, 집안 살림을 하다보면 세탁기, 청소기, 밥솥, 김치냉장고 등과 같은 '전자제품'에 대한 위대함을 저절로 깨닫곤 한다. 나 어릴 적에는 부뚜막에서 아궁이에 불을 피울 정도는 아니었지만, '가스레인지'가 등장하기 전까지 '풍로', 또는 '곤로'라고 불리는 기구로 밥을 짓고 국을 끓이며 음식을 조리하곤 했기 때문이다. 지금에야 '전자레인지'에 1분만 돌리면 '즉석밥'이 뚝딱 만들어지는 세상에 살고 있지만, 어릴 적에 밥 타는 냄새에 눈을 뜨고, '삼층 떡밥'으로 대충 끼니를 때우고, 도시락도 싸지 못해 점심시간에 물배를 채우고 1시간 남짓 출렁출렁거리는 뱃속 장단을 치던 것이 '컵라면'의 등장으로 끼니를 때울 수 있게 되는 추억을 갖고 있는지라, 집안에 '전자제품'이 하나둘 들어오는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르곤 한다. 실제로 세탁기가 없을 적에 울 엄마는 화장실에서 빨래판에 빨래비누를 듬뿍 묻혀서 비비고 또 비비곤 하셨다. 좀 두꺼운 빨랫감에는 빨랫방망이로 흠씬 두들겨 패기도 했고 말이다. 그러다 세탁기가 들어오자 '세상 참 편해졌다'는 말씀을 하시곤 하셨다.
하지만 늘 처음에만 그러셨다. 세탁기가 들어와도 '빨랫감'이 줄어든 것은 아니었기에 빨래를 널고 걷고 개고, 다시 꺼내 입히는 수고는 똑같이 들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베란다에 널어서 빨래가 마르지 않으니 '연립주택' 앞마당에 집집마다 '빨간 빨랫줄'을 걸고서 널어놓기 일쑤였다. 빨래는 햇볕이 잘 들고 바람이 잘 통하는 날에 잘 말랐기 때문이다. 한여름에는 뽀송뽀송 잘 마르던 빨래가 한겨울이면 고드름을 주렁주렁 달려 있기 일쑤였다. 초창기 세탁기에는 '탈수기능'이 별로였기 때문이다. 어릴 적에는 그 고드름을 참 잘도 따먹었는데 말이다. 지금 생각하면 '세제성분'이 제대로 분해되지 않아 '화학물질 덩어리'였다는 생각에 먹지 않았겠지만, 그 당시엔 뭐든 참 잘 먹었다.
암튼, 전자제품이 쏙쏙 들어와서 '엄마의 수고'가 덜어진 듯 싶었지만, 집안살림이 줄어들지는 않았다. 그 당시 '남정네'들은 전자제품이 '여성을 게으르게 만든다'라고 단단히 오해했지만, 정작 '전자제품'이 집안살림을 대신한다고 '집안일, 그 자체'가 사라진 건 절대 아니었기 때문이다. 마치 젖은 손이 애처로워 '고무장갑'을 사주며 생색을 내도 '고무장갑'이 엄마 손을 보호해줄 수는 있어도 '설겆이, 그 잡채'를 대신 해주지는 않은 것처럼 말이다. 이것은 훨씬 더 과학이 발전한 미래에도 똑같을 것이다. 아무리 '인공지능 집안일 로봇'이 등장한들, '집안일, 그 잡채'는 여전할 것이다. '로봇청소기'가 그렇지 않느냔 말이다. 얘가 아니라 '물걸레 기능'까지 탑재되었다고 해도, 꼼꼼한 사람손길이 닿지 않는 구석구석까지 깨끗하게 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훨씬, 훨씬 더 나중에는 '꼼꼼한 사람손길'이 탑재된 전자제품이 등장한다고해도 그닥 달라질 것 같지는 않다.
새삼 옛일을 떠올려 아스라한 추억여행을 떠나게 해주는 책이기도 했고, 대한민국의 급속한 변천사를 들여다보는 역사기행을 떠나는 기분이 들기도 했고, 암튼 참 묘한 기분이 들게 하는 책이었다. 그래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누군가 쓰다 버린 '파란 비닐우산'이었고, 비가 오면 학교앞으로 우산을 들고 나를 데리러 오신 엄마가 있나 없나 살펴보던 추억이었다. 대개는 바빠서 학교앞에 오시지 못했지만, 간혹 오시는 날에는 친구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사기도 했다. 울엄마가 너무 예뻐서 말이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