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수사대 박스 세트 - 전4권 - 진정한 협객의 귀환!
이충호 글 그림 / 애니북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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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림수사대]는 사실 아주 새롭지는 않다. 아니, 오히려 아주 익숙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장풍을 쏘고, 하늘을 걸어다니는 환타스틱한 무협의 세계를 서울이라는 도시로 끌고 왔을 뿐이다. 녹림방, 흑룡방, 개방 처럼 무협지나 무협영화에서 익히 보아왔던 무림 세력들이 존재하고, 치열한 암수와 화려한 무공들이 빠짐없이 등장한다. 절정의 무공과 절세의 비급, 신묘한 무술들도 모두 등장하며, 세상의 일과 무림의 일을 구분짓는 무협물의 특색도 여지없이 등장한다. 


 재미있는 부분이 있다면, 무림이 아닌 무림 바깥, 즉 세상일을 담당하는 '경찰' 이 주인공인 것이고, 이 경찰 내부에 '무림' 일에 관여하는 부서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무림' 이란 일종의 초인집단이다. 우리 사는 세상 속에 일반 상식이 통하지 않는 또다른 세상이 존재하는 셈이다. 무공을 사용하는 인물들은 '초인' 으로서 일반 소시민들과 접촉하는 일을 줄여야 한다. "강호의 일은 강호에"(강호와 무림은 내용상 동의어이다.) 많은 무협물들은 고강한 무공을 이용해 정부와 역사에 관여하려는 집단과, 그것을 막으려는 집단간의 갈등을 그리기도 했다. 

 [무림수사대] 에서는 애초에 그런걸 막는 공권력을 지닌 무림인 집단이 존재하는 것이다. 제목과 같은, 대한민국 경찰에 소속되어있는 무림수사대인 것이다. 이들은 무림인들이 무공을 사용해 평범한 시민들에게 범죄를 저지르는 것을 막는다. 무림인들끼리의 정당한 대결은 용인하지만, 그것이 무공을 익히지 않은 일반 시민들에게 해악을 준다면 공권력의 이름으로 응징하는 것이다. 


 주인공 '지후'는 바로 무림수사대 소속 경찰이다. 

1년 전, 파트너를 잃고 방황하다가 서울 마포구 소속 무림수사대에 파견된 지후. 그곳에서 지후는 새로운 파트너, 팀원들과 새로운 사건을 맡게 된다. 대한민국 무림의 최고수들인 '오대신군' 들이 한명씩 살해당하기 시작한 것이다. 대한민국 무림을 떠받치는 큰 문파의 장문인들이기도 한 이들은 사실상 힘으로 모든것이 좌우되는 무림 안에서 서로가 서로를 적절하게 견제하면서 미묘한 균형을 이뤄내고 있기도 했다. 최고수들과 그들의 세력이 흔들린다면 무림은 다시 혼란 속에 빠져들 것이고 그것은 일반 시민들의 사회에 통제할 수 없는 혼란을 가져올 수도 있었다. 무림수사대는 그러한 점을 막기 위해 오대신군의 살해 사건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되고, 지후와 팀원들 역시 사건의 중심에 서게 된다. 사건을 조사하면서 지후는 1년전에 죽은 파트너, '이현' 의 존재를 발견하게 된다. 


 이야기의 큰 틀은 전형적인 무협물의 그것과 같다.

장르의 특성상, 클리셰는 피할 수 없다. 이미 '무협' 이라는 장르 안에서 나올 수 있는 플롯은 모두 다 나와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 '무공' 이라는 소재가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는 핸디캡도 있다. 결국 정해진 틀 안에서 정해진 소재를 가지고 어떻게 빚어내느냐가 관건이다. 결국은 클리셰를 얼마나 잘 갖고 노느냐가 관건이다. 

'만화' 는 이야기의 클리셰에는 비교적 관대한 편이다. 연출자의 역량이 너무나 크게 좌우되는 장르이기 때문이다. 그림 실력과 그림체, 컷의 모양과 크기, 배치, 앵글, 캐릭터 디자인, 디자인적 센스, 회화적 센스는 물론, 대사와 말 주머니 모양, 효과음의 레터링까지. 거기에 문학적인 연출기법까지 활용하면 한가지 플롯으로도 수백가지의 다른 작품이 나올 수 있다. 


 이충호 작가는 오랜 필력답게 그 모든걸 다 활용해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먼저 명랑 만화 [마이러브] 에서부터 시작되던 소년 만화틱한 그림체에 기괴할 정도의 변형을 대담하게 주고, 먹을 많이 사용해서 그림에 무게감을 얹었다. 비교적 어두운 이야기의 흐름에 맞게 그림체를 변화시킨 것이다. 덕분에 '무협' 과 '경찰' 이라는 소재들과 어우러져 느와르 영화같은 분위기를 잔뜩 풍기게 됐다. 컬러의 사용 또한 탁월했다. 전에 웹에 연재할 당시 작가 본인이 직접 설명하기도 했는데, 작품이 가지고 있는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메시지를 컬러를 활용했다. 작가의 메시지를 전함과 동시에, 흑백의 나눔이 분명한 원화와 톤으로만 변화를 준 컬러링이 절묘하게 어우러지며 작품 자체의 완성도를 끌어 올릴 수 있었다. 그 뿐 아니라, 마이크 미뇰라의 [헬보이], 마크 밀라의 [씬씨티] 등을 효과적으로 벤치 마킹하여 웹툰의 그래픽 노블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며 웹툰이 가지고 있던 부정적인 이미지 - 그림 퀄리티의 하락 - 를 일소하는게 크게 기여했다.  


가로 연출에 익숙한 출판만화 시대의 작가가 웹툰에 적응하기란 아주 만만치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비교적 훌륭하게 세로 연출 작품을 만들어냈고, 그것을 다시 가로 연출로 편집한 애니북스 편집부측의 센스도 충분히 칭찬할 만 하다.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라고 할만한 강렬한 도입부인데, 마지막 부분, 책의 양면이 나뉘는 부분을 활용한 모양새가 정말 빼어나다.

책 곳곳에 이런 센서블한 편집들이 눈에 띈다. 웹툰으로서도, 웹툰을 책으로 옮긴 작품으로서도 대단히 높은 완성도를 보여준다. 






강렬한 색채의 대비. 

작가는 의도적으로 테마 컬러를 적절히 활용한다. 

캐릭터의 성격과 시퀀스의 성격을 동시에 드러내며 그 안에서 작가의 함의를 찾아볼 수 있다. 






물론 액션씬들을 빼놓을 수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스타일을 유지하는데, 이 부분은 작가의 고집이 느껴지기도 한다. 전체적인 완성도에서는 훌륭하지만, 전반적으로 지나치게 정련되고 무거운 느낌이라 다소 경직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이 부분에서 세로 연출을 처음 하는 가로 연출 전문 작가의 조심스러움이 느껴졌다. 연재때는 느끼지 못했지만, 그래픽 노블에 대한 의식을 많이 한 듯, 구어체의 대사도 지나치게 사용한 감이 있어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하기도 했다. (후속작들에서는 이러한 경향들이 많이 감소되었다.) 


[무림수사대]는 전반적으로 아주 훌륭한 작품임은 확실하다.

'무협' 의 주제는 어디까지나 '권선징악' 이다. 작품의 성패는 나쁜놈은 얼마나 악랄한가, 주인공은 얼마나 큰 고비를 겪어내며 영웅적인 모습을 보이는가, 그리고 나쁜놈은 어떻게 응징되는가에서 갈린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은 100점짜리 무협장르물은 아닐수도 있다. 권선징악보다는 주인공 지후의 내면적인 성장과 과거의 청산에 대해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 이 부분은 태생이 '소년'만화가인 작가의 본성일 터. 장르에 충실하지 못했다기보다, 장르의 장점을 최대한 활용했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주인공 지후는 몸은 어른이지만 소년같은 인물이다. 소년만화의 특징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지만, 가족처럼 따르던 동료들의 죽음에 대한 자책감이 깊게 박혀있다. 지후의 과거가 '이현' 이라면 지후의 현재는 '백운' 이다. 그리고, 지후는 '소년' 이기에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것은 과거를 직시하고 현재를 밟아야만 가능하다. 이충호 작가는 이러한 메시지를 무협이라는 '과거' 와 웹툰이라는 '현재', 그래픽 노블이라는 '미래'로 담아냈다. 지후는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일면이기도 하지만, 한국 만화가 처해있는 모습이기도 하다. 


한국 출판만화 시장은 죽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일터다.

하지만, 언제나 생로生路는 사로死路 안에 있고, 영웅은 난세에 태어나는 법. 

웹툰은 새로운 만화의 활로로 발전해 나가고 있고, 지금도 수많은 작가들이 골방에서 종이와 펜과 잉크로, 타블렛과 모니터로 꿈을 그려가고 있다. 그들에게 언제나 따뜻한 위로와, 응원과 격려를 보낸다.  



ps. 비슷한 느낌의 무협만화를 한편 소개하자면, 단연 '브레이커' 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이충호 작가와 같은 시기에 혜성처럼 나타났던 스토리 작가 '전극진' 이 글을 쓰고 '카마로' 라고 필명을 쓰는 '박진환' 작가가 그림을 그린 '브레이커' 라는 작품이다. 1부가 10권으로 완결되었고, 2부[브레이커 N.W] 가 다음 웹툰에서 연재중이며 현재 3권까지 발간되었다.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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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패단의 방문
제니퍼 이건 지음, 최세희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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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미국 문학을 꽤나 좋아하는 편이다. 로빈쿡, 존그리샴, 리처드 매드슨, 스티븐 킹은 물론, 헤밍웨이, 레이몬드 카버, 토니 모리슨, 하퍼 리, 폴 오스터, 코멕 매카시는 물론 최근에 접한 마이클 셰이본과 팻 콘로이, 조너선 샤프런 포어 까지. 그래픽 노블 스토리 텔러와 드라마 작가들까지 합치면 어마어마할거다. 엔터테인먼트가 가득한 장르에서부터 르포타주에 가까운 리얼리즘까지. 

 뿐만 아니라 문학적 표현의 폭도 굉장히 넓다. 언제나 참신한 화법의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고, 실험적인 표현들이 시도된다. 아, 그러고 보니 잭슨 폴록, 앤디 워홀 같은 예술가들도 미국 문화의 범주 안에 넣어야 겠구나. 다양한 문화가 모인 덕인지 미국 예술은 정말 다양하다는 표현이 부족할 정도로 다양하다. 문학에서도 그러한 특징은 유감없이 발휘된다. 우리의 편협한 시각 속에서 "이것도 책이야? " "이것도 소설이야?" 라고 부를만한 작품들은 대부분 메이드 인 유에스에이 일 것이다. 아 난 물론  가카같은 '종미'는 절대 아니다. 미국엔 가본적도 없고, 미국 친구도 없고, 사실 그닥 가고싶지도 않다. 하지만, 미국 문화가 가지고 있는 다양성 만큼은 존중하고, 좋아한다.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에서 보았던 깜짝 놀랄만한 파격적인 '문학적 표현' 들을 [깡패단의 습격] 안에서도 여지없이 발견할 수 있었다. 다만, [깡패단의 습격]이 좀 더 세련된 방식으로, 모든 세대에 고루 어필할만한 포인트가 있었으며, 메시지가 좀 더 보편적이었다는 점이 '2011 퓰리처 소설상' 이라는 영예를 안겨주었을 터다.   



작품상 가장 중요한 인물, 아니, 이 작품 안에서 이런 표현은 의미가 없을터다. 작품상 기준점이 되는 인물인 '베니' 는 음반 회사의 프로듀서이다. 밴드를 발굴, 기획, 관리는 물론 전체적인 활동의 컨셉까지 잡아주는 역할이다. 베니의 비서인 '샤사' 가 '알렉스' 와 만나 하룻밤을 보내는 내용을 시작으로, 이야기는 각 챕터별로 시간과 화자가 끊임없이 바뀌게 된다. 첫 챕터가 현재의 사샤의 이야기이고, 두번째 챕터는 첫 챕터보다 과거의 베니의 이야기이다. 세번째 챕터는 갑자기 베니가 고교시절이었을 무렵의 '리아' 라고 불리는 소녀의 이야기가 진행된다. 네번째 챕터는 리아가 친구 조슬린, 그리고 베니의 밴드가 함께 만났던 '루' 라는 늙은 음반 프로듀서의 이야기가 진행된다. 물론 시간은 세번째 챕터보다 훨씬 과거로 젊은 시절의 루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런 식으로 매 챕터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시간과 공간, 화법을 자유자재로 넘나든다.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주인공 시점으로, 3인칭과 1인칭을 왔다 갔다 하고, 각종 도표로 꽉 찬 PPT 화면 같은 연출로 한 챕터가 이어지기도 하고, 기사와 편짓글이 반씩 나뉘어 실려있는 연출도 있다. 한마디로, 집중하지 않으면 순식간에 흐름을 놓쳐버릴 수도 있다. 전 챕터의 인물에 대한 이야기가 세 챕터쯤 뒤에 흘러가듯 지나가기도 하고, 몇 챕터 전 이야기 안에서 지나가듯 흘러간 인물이 이번 챕터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앞에 나왔던 사건의 원인이 훨씬 뒤에 나타나기도 하고, 챕터 별 캐릭터의 행동 요인 역시 챕터 곳곳에 파편처럼 흩어져있다. 챕터가 총 19개인데, 19명의 화자, 주인공이 등장한다는 의미이다. 한마디로, 정말 읽기 까다로운 작품이다. 이런 비슷한 화법을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 에서 본 적이 있다. 하지만, [내 이름은 빨강]의 경우엔 서사의 흐름에 따라 화자만 바뀌는 형식이어서 읽기가 어렵지는 않았다. [깡패단의 습격] 은 [내 이름은 빨강] 보다는 좀 더 까다롭다. 


 집중해서 책을 읽다보면, 예전에 한때 인터넷 상에서 큰 관심을 모았던 '케빈 베이컨 놀이' 가 떠오른다. 

미국의 한 대학에서 일군의 학생들이 '케빈 베이컨' 과 함께 다른 배우들을 함께 출연했던 영화로 연관시키는 놀이에서 시작된 이 법칙은, 최대 4다리만 거치면 모두가 케빈 베이컨과 연관이 되는 재미난 현상을 보여주었더랬다.

예를들어, 마이클 더글라스와 케빈 베이컨을 연결하려 해 보면, 마이클 더글라스는 블레어 브라운이라는 배우와 센티널이라는 영화에 함께 출연을 했고, 블레어 브라운은 러버보이라는 영화에 케빈 베이컨과 함께 출연을 했다. 마이클 더글라스는 두단계만 거치면 케빈 베이컨과 연결된다. 재미있는 점은 어떤 무명 배우를 떠올려도 거의 네 단계 안에 다 연관이 된다는 점이다.

예를들어 송혜교 같은 국내 배우를 떠올려봐도 된다.

송혜교는 이병헌과 '올인'이라는 드라마에서 함께 연기를 했었다. 그리고 이병헌은 '나는 비와 함께 간다' 라는 영화에서 엘리아스 코티즈와 함께 연기를 했고, 엘리아스 코티즈는 노보체인이라는 영화에서 케빈 베이컨과 연기를 했다.

이렇게 송혜교도 3단계만 거치면 케빈 베이컨과 연관이 된다. 

이 놀이는 여러 대학에서 SNS의 파급력을 연구할때 비슷한 방식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페이스 북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나도 모르게 수많은 사람들과 연결되어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데, 이 놀이에서 '함께 출연한 작품' 을 '함께 다닌 학교' '함께 다닌 교회' '함께 가입한 온라인 커뮤니티' 등으로 연관시키면 엄청나게 크고 복잡한 거미줄 같은 인맥을 발견할 수 있을터다. 

이 작품은 이런 사회 현상을 너무나 절묘하게 잡아내고, 묘사하고 있다.

사샤의 이야기로 첫 문을 연 [깡패단의 습격]은 케빈 베이컨 놀이와 비슷하게 챕터와 챕터; 인물과 인물의 이야기가 물리고 물린다. 사샤가  모시던 상사 베니, 베니와 학창 시절을 함께 보냈던 리아, 리아와 잠깐 인간적인 관계가 있었던 늙은 프로듀서 루, 루가 젊은 시절 낳은 아들 롤프, 루가 정부였던 민디, 아들 롤프, 딸 샬린과 함께 떠났던 아프리카 사파리 여행, 죽어가는 루가 임종을 앞두고 불렀던 과거의 친구들, 그 자리에 참석한 리아, 학창시절 리아, 베니 등과 함께 밴드를 결성했던 스코티... 이런 식으로 끊임없이 연결되어 간다.  


우연같은 만남은 필연적으로 또다른 우연을 낳는다. 우연과 우연 속에서 인연과 인연이 연결되고, 촘촘하게 얽힌 인연과 우연의 거미줄 사이로 또다른 우연이 걸려드는 것은 필연일 것이다. 결과는 원인을 낳고, 원인은 결과를 낳으며, 그 결과는 또 다른 원인을 낳는다. 필연적으로 보일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원인이 모두 결과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고, 대부분 하나의 결과는 여러개의 원인이 복합적으로 맞아 떨어졌을 때 발생되는 경우가 많다. 원인들이 우연히 결합되고, 그 결합된 것들이 우연히 결과를 도출해내고, 그 결과 역시 우연히 다른 무언가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시간이란 그렇게 우리에게 결코 선택권을 순순히 내어주지 않는다.  


 누구나 늙는다

그리고, 누구나 죽는다. 

 시간의 흐름은 죽음을 인식하는 순간부터 급격하게 빨라진다. 우리가 젊었을 때는 마치, 죽지 않을 것만 같이 느껴진다. 죽음을 앞둔 노인들이 다른 세상 사람처럼 느껴진다. 시간은 영원히 내 편일 것만 같고, 영유하는 모든 시간들은 영원처럼 길게 느껴진다. 하지만, 젊음을 지나 육체가 서서히 쪼그라들어가는 시점이 찾아오면, 시간은 더이상 내 편이 아니고, 모든 시간들은 칼날처럼 육신을 쪼아대기 시작한다. 무덤을 향해 한발 한발 걸어가다, 옆에 놓여있는 삽을 주워들고 열심히 웅덩이를 파기 시작하면, 언젠가 그 웅덩이 위로 종잇장처럼 팔랑대며  고꾸라질 터다. 삶이 결국엔 무덤을 향해 걸어가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순간, 젊음이 눈부시게 느껴진다. 

 그래, 어쩌면 [은교]의 이적요 처럼, 그런 눈부신 젊음 앞에 눈이 멀지도 모른다. 그 때가 되면, 젊음은 다른 세상처럼 느껴질터다.

아아, 그래서 제니퍼 이건은 "시간은 깡패다" 라고 말하고 싶었던 걸까?

그렇게 우리는 깡패같은 시간에게 모든 걸 내어주고, 비참하게 쪼그라들어 죽어야만 하는걸까?


수많은 사람들의 행동들이 수많은 결과를 낳고, 그 수많은 결과들이 또다시 수많은 행동 요인이 되어, 스코티는 시간이라는 깡패와 대면하게 된다. 한때는 화려한 뮤지션이었으나, 이혼당하고 노숙자로 살아가던 스코티 하우스먼. 


"시간은 깡패야. 그렇잖아? 그 깡패가 널 해코지하는데 가만있을 거야?"

p.451


 우리는 필멸의 존재이다. 태어나는 그 순간, 죽음으로 가는 카운트 다운이 시작된다. 째깍째깍. 시간은 우리의 모든것을 앗아간다. 그렇게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누구와 우연히 만나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또 다른 누구를 우연히 만나고, 또 사랑하고, 또 미워하게 될 것이다. 사실, 시간이라는 깡패는, 너무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늙더라도, 약해지더라도, 또 다른 누군가는 태어나고, 자라는 법이니까.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면, 시간이라는 깡패는 우리에게 어떠한 해코지도 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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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트맨 : 웃는 남자 세미콜론 배트맨 시리즈
에드 브루베이커 지음, 김동욱 옮김, 더그 만케 그림 / 세미콜론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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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폭력과 증오가 판치는 고담시에 짐 고든이 부임한 시기와 배트맨이 나타난 시기는 거의 같았다. 

그로부터 1년.

메트로 시티와 키스톤 시 등에서는 '슈퍼맨'이나 '플래시'같은 슈퍼 히어로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고담시는 부패한 시의회와 밀착되어있는 경찰은 아직 완벽하게 믿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짐 고든 반장이 직접 관리하는 부서는 쓸만한 경관들로 채워졌다. 고담시의 강력 범죄들은 짐 고든과 정의롭던 시절의 하비덴트를 계승한 몇몇 검찰들, 배트맨에 의해 조금씩 줄어들어가고 있었다. - 아니, 그런 것 처럼 보였다.



이엄청난 살육의 현장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죽은지 한달이 다 된 시신도 있던  지옥도와 같은 현장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날, 하얀 얼굴의 괴인이 나타나 고담시에 선전포고를 한다.


"모두 죽여버리겠다!"

는 무시무시한 협박을 한다.


요구사항도, 교환조건도 없었다.

일방적인 '살육예고'.

그에 앞서 괴인은 몇몇 인물의 이름을 거론하며 그들을 먼저 죽이겠다고 예고한다.






배트맨과 짐 고든이 예고된 연쇄살인을 막기위해 노력하지만, 매번 한발씩 뒤쳐진다.

괴인이 예고한 인물들은 철통같은 보안 속에서도 속수무책으로 괴이한 죽음을 맞이했고, 고담시 언론들은 그 괴인을 '조커' 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배트맨 역시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광기어린 천재 싸이코 패스 범죄자를 맞아 고군분투하며 그의 정체와 최종 목표를 찾기 위해 노력하지만, 오히려 큰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그럼 대체 내가 무슨 수로 광인의 속셈을 읽는단 말인가?

이런 상황은 결코 예상치 못했다.

애당초 이 일을 시작할 때 내가 예상한 상대는 어디까지나 살인자, 약물 중독자, 성범죄자 같은 자들이었다.

극한 상황에서 앞뒤 가리지 않고 발악하는 자들 말이다.


이번 조커 같은 상대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p.53



'배트맨' 타이틀을 꾸준하게 펴내고 있는 '세미콜론' 에서 펴낸 이번 타이틀엔 표제이기도 한 [웃는 남자] 와 [나무로 만든 것] 이라는 두 작품이 실려있다. 그 중 [웃는 남자]는 배트맨과 조커의 첫 조우를 다루고 있는 작품으로, 이전에 국내에서 정식 출간되었던 [배트맨: 이어원] 과 [킬링 조크] 와 함께 보면 아주 좋다. 그림의 스타일과 분위기, 이야기의 흐름도 완벽하게 유기적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웃는 남자]의 전체적인 내용은 팀 버튼 감독이 연출했던 첫번째 [배트맨] 영화와 유사하다. 조커 역시 우리에게 잘 알려진 히스 레저의 조커보다는 당시 잭 니콜슨이 연기했던 조커와 상당히 비슷한 느낌이다. 

[웃는 남자] 에서 쓰인 대량 살인의 플롯은 사실 만화와 영화를 막론하고 가장 많이 쓰인 플롯이다. 클리셰에 가까운 플롯이지만, 사실 이 플롯 자체가 '조커' 라는 인물 그 자체와 다름없기에 백번이고 천번이고 되풀이될 수 밖에 없다. 조커는 이 작품 안에서도 기발한 양동작전으로 배트맨과 고든의 눈을 속이고 고담시의 시민 모두를 죽이기 위한 잔혹한 계획을 세우고 진행시켜 나간다.

배트맨은 '탐정' 기질을 앞세워 조커가 일전 자신이 마주쳤던 '브라더 후드' ([킬링 조크] 참조) 라는 범죄자임을 간파해내고, 그가 저지르는 연쇄 살인을 막고, 그 이면에 숨겨놓은 대량 살육의 계획을 분쇄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두번째 작품인 [나무로 만든 것] 은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고든이 고담시 경찰청장까지 맡았다가 정년 은퇴까지 한 뒤를 다룬다. 

 
배트맨 타이틀에서는 '짐 고든'이 '배트맨' 만큼 중요한 인물이다. 대부분의 이야기들은 그의 시점에서부터 시작되는데, 이 작품집에 실린 두편의 작품 모두 그러하다. 배트맨 타이틀은 특히 '제 3자가 배트맨의 활약을 감상하는' 식의 스토리 텔링 기법이 많이 쓰이는데, 이번에 배트맨을 관찰하는 사람은 제 1대 그린 랜턴 '앨런 스콧' 이다. 




의문의 연쇄 살인 사건에 휘말리게 된 전 청장 짐 고든. 그와 배트맨은 이번 연쇄 살인이 40여년전에 있었던 연쇄 살인사건의 연장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범인을 찾기 위해 각자 자기만의 방식대로 수사를 시작한다. 그러던 중, 40여년 전 연쇄 살인 사건에 직접 관여를 했던 당사자이자 반지의 힘 '스타하트' 덕에 조금도 늙지 않은 그린 랜턴 앨런 스콧이 배트맨과 행동을 함께 하게 된다. 


강력한 반지의 힘으로 초인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는 앨런 스콧과는 달리 평범한 인간인 배트맨.

그는 현재와 과거의 접점을 찾아 범인을 파악하고, 범인의 심리 상태를 프로파일링 하며 정석대로 사건을 추리해 나가고, 초인인 그린 랜턴  앨런 스콧은 그런 배트맨의 방식에 큰 감명을 받게 된다. '인간 본연의 강함' 을 느끼게 된 것이다. 한편, 현직에서 물러났으나 사건을 모른척 할 수 없던 짐 고든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동원해 차근차근 범인을 추리해 나간 결과, 범인의 정체를 거의 알아내게 되고, 그 순간 크나큰 위험에 빠지게 된다. 

 

DC의 영웅 모임인 [저스티스 리그 오브 아메리카] 의 양대 거물인 슈퍼맨과 배트맨은 서로를 각각 '보이 스카우트' 와 '탐정 나으리' 로 부르곤 하는데, [나무로 만든 집] 은 배트맨이 왜 '탐정 나으리' 로 불리우는지 아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배트맨의 탐정 기질을 아주 잘 드러내고 있다. 마치 고전 추리물처럼 차근차근 진실에 가까이 다가가는 정석적인 추리 서사 기법을 만화로 잘 풀어내고 있다. 외려 그렇기에 조금은 지루하게도 느껴지지만, 클래식한 스토리 텔링이 주는 즐거움을 충분히 만끽할 수 있는 작품이다.





이런식으로 충분히 상세하게 담긴 각주의 해설도 친절하다. 



개인적으로는 국내에 정발된 마블과 DC의 작품들 중, 보다 완성도 높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작품들은 대부분 DC의 작품들이라고 생각한다. 마블의 작품들이 영화 '어벤저스' 의 영향 때문인지 과거의 명작들보다는 비교적 최근에 진행되고 있는 대형 프로젝트 위주로 런칭하는 반면, DC의 작품들은 이야기의 시작과 끝이 명확한 원 이슈의 작품들을 위주로 런칭하기 때문이다. 이런 작품들은 주로 뛰어난 스토리 텔러들을 영입하여 짜임새있는 이야기를 구성하기 때문에, 완성도가 상당하다. 

[배트맨: 웃는 남자] 도 상당히 깔끔하게 완성되는 두편의 이야기가 잘 담겨져 있다.

상당히 만족스러운 작품집.

배트맨과 조커에 대한 다른 시각을 또 느껴볼 수 있는 작품.

기회가 된다면 꼭 [배트맨: 이어 원] 과 [배트맨: 킬링 조크] 를 함께 읽는것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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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의 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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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완벽한 서사. 처음부터 끝까지 꽉 조여진 탁월한 완성도. 무엇하나, 어디하나 흠잡을 데 없는 최고의 이야기였다. 

작품을 읽어가는 내내 기리노 나쓰오와 미야베 미유키같은 작가가 떠올랐다. 태생은 장르 문학이었으나, 그 틀을 가볍게 넘나들어 문학적 완성도와 장르적 재미를 자신의 품 안에 너끈히 쓸어담는 탁월한 이야깃꾼들. 

엄밀히 따지자면, 이 작품은 전형적인 '장르문학' 이다. 굳이 비교하자면 최근 큰 주목을 받았던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 나 기리노 나쓰오의 [아웃] 을 동일한 선 상에 놓고 가늠해 볼 수 있으리라. 

국내 문학은 장르문학의 천국과 지옥이 공존한다. 대여점에 가보면 커다란 공간의 한쪽 면에 두겹 세겹으로 꽂혀져있는 수많은 킬링타임용  장르문학들을 목도할 수 있고, 장르 문학 작가들은 마치 70~80년대 대본소 만화 공장처럼 판타지, 무협 소설을 찍어내듯 써나가고 있다. 문학판에서는 당연히 이들을 천시하고 홀대한다. 'SF적' '판타지적' 이라는 애매모호한 형용사를 남발하면서 장르문학과 순수문학을 바득바득 나누고 있다. 'SF적' 상상력이 사용되었으나 이 소설은 절대 SF소설 같은 장르문학이 아님을 만천하에 알리고 싶은거다. 

애초에 순수문학과 장르문학을 과연 어떤 잣대로, 얼마나 객관적인 기준으로 나눌 수 있느냐의 문제는 차치하자. 애초에 나는 그런걸 뭣하러 나누냐는 쪽의 사람이다. 어쨌든 이 작품은 구태여 그런 틀에 맞춰 구분하자면, 분명 [화차] 나 [아웃] 과 같은 포커스를 가지고 있는 작품이다. 사건이 있고, 미스테리가 있으며, 액션도 있고, 복수와 과거와 비밀도 있다. 


제목처럼 이 이야기의 시작은 '7년전 어느 날 밤' 에 일어난 한 사건에서부터 시작된다.

야구선수 출신이었던 보안업체 관리팀장 '최현수' 가 가족들과 함께 '세령호' 라는 곳의 '세령댐' 에 댐 보안 팀장으로 부임 하면서부터이다. 현수에게는 아내 '강은주' 와의 사이에 '서원' 이라는 아들이 있었고, 현수의 가족은 댐 직원들을 위한 사택에 살게 되는데, 여러 이유때문에 부하직원인 '승환' 과 한 집에서 살게 된다. 방은 둘뿐인 작은 아파트여서 안방은 현수와 은주가, 작은 방에서는 아들 서원이가 승환과 함께 생활을 하게 된다. 

한편, 세령댐 직원을 위한 사택은 세령 수목원 내에 있었고, 그 거대한 부지는 치과 원장인 '오영제' 의 것이었다. 대를 이어온 거대한 동산과 부동산, 지방의 유지의 아들로 태어나 역시 그 지방의 유지로 자라난, 마치 한 지방의 영주처럼 군림하게 된 오영제에게는 아내 '문하영' 과의 사이에 '세령' 이라는 딸이 있었다. 

 이야기의 시작은 정석대로, 살인사건으로부터 시작된다. 

그것은 사고였다. 안개가 자욱한 밤, 술에 잔뜩 취해 자가용을 몰고 부임지로 향하던 현수가 영제의 딸 세령을 차로 친 것이다. 그리고 현수는 간신히 숨이 붙어있는 엉망진창이 된 세령을 확실히 죽여 아무도 없는 세령호에 던져버린다. 


 이야기는 7년 후.

서원의 시점에서 시작된다. 사건 당시 서원은 초등학생에 불과한 어린 꼬마였다. 살인자의 자식으로 세상에 낙인찍힌 서원의 삶은 그리 호락호락 하지 않았다. 친척의 집을 전전하다가, 그 시절 같은 방에서 함께 지냈던 승화을 찾아 함께 지내게 된다. 서원에게 주홍글씨처럼 새겨진 낙인 '살인마의 아들' . 그렇다. 현수는 연쇄 살인마로 사형을 앞두고 있다.

 과연 7년 전 그날 밤 무슨 일이 있었는가?

그리고, 그 뒤 7년동안 어떤 일이 진행되고 있는걸까? 


'범죄자의 가족' 이라는 소재는 장르문학의 천국인 일본에서는 꽤나 자주 등장하는 소재이기도 하다. 

단순히 사건 - 범죄자 - 형사 혹은 탐정 이었던 미스테리 추리물의 구도는 장르문학에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아내는 이른바 '사회파 추리물' 이 태동하던 시기부터 등장해왔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편지], 요시다 슈이치의 [사요나라 사요나라]등은 살인자의 가족들이 이야기의 중심 인물로 등장하면서 실제로 일본 사회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던 작품이기도 하다. 


 이 작품의 주인공 '서원' 도 그런 범죄자의 가족이다. 말 그대로, 단지 가족이라는 이유로 사회에서 격리되고 고통을 당한다. 우리나라에는 예로부터 '연좌제' 가 실제로 존재하는 시절이 있었다. 탈북자의 자식은 고스란히 탈북자와 마찬가지 취급을 당하며 '빨갱이' 로 낙인찍혀 사회의 주변부에서만 머물러야 했다. 서원 역시 그러한 연좌제와 같은 형벌을 당하게 된다. 


이 작품이 시종일관 독자들을 불편하게 만들며 긴장의 끈을 놓치 못하게 만드는 요소는 '세령을 죽인 현수'보다 '딸을 잃은 영제'가 더 나쁘고 더 악독한 놈이라는 데에 있다. 작품이 진행될수록 현수의 순간의 실수가 점점 더 아쉽게 느껴지게 되는 것이다. 현수는 순하고 성실한 사람이었다. 고통스러운 유년기를 이겨내 프로 야구로 성장했으나, 정작 중요한 순간에 행운은 그를 비껴가기만 했다. 은주와의 만남조차도 불운에 가까웠고, 세령을 차로 친 것도 불운이었다. 그는 천성이 순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반면, 딸을 잃은 영제는 현수의 완벽한 반대편에 있는 사람이었다. 유년시절부터 풍족했고, 약삭빠르고, 원하는 것은 어떻게든 손에 넣는 사람이었다. 성정이 잔혹했고, 아내와 딸을 무자비하게 폭행하는 싸이코 패스 기질이 다분한 놈이었다. 

 결국 독자들은 가해자, 즉 살인자의 편에서 이야기를 따라가게 되기 때문에 심한 불편함을 느낄 수 밖에 없다. 이것과 함께 위에서 언급한 서원이 범죄자의 가족이기때문에 당하는 부당한 사회적인 배척 또한 불편하게 느끼게 되고, 그 사건이 있은 지 7년간 서원의 등 뒤에 어른거리는 위태로운 검은 그림자에 또 불편하게 된다. 

이러한 불편함들이 작품 내내 독자를 잔뜩 긴장하게 만드는 요소가 되고, 세련된 액자식 구성의 연출은 이야기에 리얼리티를 부여하면서 독자들을 강력하게 빨아들인다. 


 시간의 흐름은 서사에 맞게 차근차근 진행되지만 시종일관 꿈과 현실, 상상과 실재를 복잡하게 오고가며 사건들의 인과관계와 등장인물들의 행동 요인을 섬세하고 치밀한 심리묘사로서 풀어낸다.  그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작품 여기저기 뿌려져있던 미스테리적인 요소들이 차근차근 모여나가며 클라이맥스의 대폭발을 예고한다.   


근래에 읽어본 미스테리물 중에서는 가장 완벽한 완성도의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확실히, 정유정 작가도 정말 엄청난 이야깃꾼이다. 완급조절도 훌륭하고, 달음박질 치는 듯 힘있는 문장력도 참 좋다. 그 와중에도 여성 작가 특유의 섬세한 인물묘사가 철저한 사전 준비작업을 통해 태어난 치밀한 디테일과 어우러져 엄청난 리얼리티를 뿜어낸다. 

개인적으로는 미스테리-추리 장르물의 결정판 처럼 느껴졌다. 수년간 그 장르만 파온 미야베 미유키나 기리노 나쓰오 같은 여성 작가들은 물론, 요시다 슈이치나 히가시노 게이고의 장점들을 다 합쳐놓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개인적으로는 과연 정유정 작가가 이 작품을 능가할 만한 작품을 또 낼 수 있을까 싶을 정도이다. 세계 어디에 내놔도 충분히 먹힐만한 보편적인 소재들을 아주 잘 활용했다고 느껴진다. 


때로 우리는 '운명' 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결코 피할 수 없는 사건에 직면하게 된다. 

'성공' 이 운명이라면, 당연히 그 반대편 '파멸' 도 운명일터. 내가 야구를 좋아하는 이유는 경기 안에 성공과 파멸의 운명이 끊임없이 왔다 갔다 하기 때문이다. 단순히 승패를 떠나 손가락에서 떠난 주먹만한 야구공 하나에 운명이 오락가락한다. 절호의 찬스를 놓친 4번타자는 빨리 다음 찾아올 운명의 순간을 준비해야 한다. 이번에 놓친 찬스에 연연하다가는 다음 찬스에서도 똑같은 일을 반복할 뿐이다. 복기는 하되, 얽매여서는 안된다. 홈런을 맞은 투수 역시 마찬가지이다. 다음 타자를 상대해야 한다. 포수는 재빠르게 경기의 흐름을 읽고, 운명의 순간을 맞이한 투수의 심경을 헤아려야 한다. 역시, 운명의 순간을 맞은 상대편 타자의 심경도 헤아려야 한다. 그에게는 파멸의 운명을, 우리 투수에게는 성공의 운명을 이끌어야 한다. 현수는 7년간. 2500여일의 밤 동안 다음 기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 자신이 놓친 절호의 찬스는 이미 그의 머릿속에서는 새까맣게 잊힌 지 오래였다. 그 시간동안 현수는 끊임없이 상대 타자를 분석하고, 우리편 투수의 심경을 헤아렸다. 

그리고, 사인을 냈다.

이제 투수는 공을 던질 것이고, 타자는 배트를 휘두를 것이다.

9회 말 투아웃. 

7년간의 경기는 그렇게 막을 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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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연속 세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0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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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정말. 정말정말, 정말정말정말이다, 정말. 정말 이야깃꾼이구나. 이 사람은 정말정말 정말 정~~말 이야깃꾼이구나. 라는 생각을 온다 리쿠의 책을 한번 읽을때마다 100번씩 생각했는데, 이번 책에서도 100번쯤 되뇌었다. 

개인적으로 온다 리쿠 작품의 특색을 꼽아보라고 한다면 가장 먼저 [대화]를, 그 뒤로 [회상] [여행] [고교생] 을 꼽을 것이다. 그녀의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단어이고, 어쩌면 온다 리쿠의 작품 대부분을 설명할 수 있는 단어이기도 할 터다.

음반 기획자인 '다몬'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 작품집은 안에 실려있는 작품들 또한 그러한 온다 리쿠만의 색채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단편의 형태를 가지고 있는 다섯편의 이야기들이 실려있는 이 작품집은 주인공 다몬이 겪는 다섯가지의 이야기가 옴니버스식으로 들어있다고 해도 좋고, 연작 단편 소설집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다섯 작품 모두에 다몬을 중심으로 그 주변인물들이 등장하지만 작품간의 연관성은 전혀 없다.


[나무지킴이 사내] [악마를 동정하는 노래] [환영 시네마] [사구 피크닉] [새벽의 가스파르] 라는 작품들이 모여있는데, 각 작품들 모두 주인공 다몬이 개인적인 관계로, 혹은 일 관계로 알게되는 사람들과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면서 겪는 수수깨끼 같은 일들을 풀어내고 있다. 물론 대부분의 이야기에는 작은 사건이 있고, 그 사건은 대부분 다몬의 추리력과, 주변인물들과의 대화를 통해 풀어져 나간다. 

책의 말미에 붙어있는 두 페이지짜리 작가의 노트를 통해 주인공 '다몬' 이 이미 한참 전에  [달의 뒷면] 이라는 작품에 처음 등장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주인공 다몬은 주변 상황에 예민하고 민감하지만, 성격은 느긋하고 모나지 않아 누구에게나 잘 어울리고 어디에나 잘 스며드는 물과 같은 사내이다. 온다 리쿠의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 주변 모두는 물론 자기 자신까지 관조하는 듯한 자세를 가진, 중성적인 느낌의 인물이다. 그럼에도 언제나 주변에 따뜻한 시각을 가지고 있고 상상력도 풍부하고 논리적인, 어떤 면에서는 초월자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온다 리쿠는 이런 인물들을 통해 이야기 전체가 조금은 몽환적이고 어딘가 붕 떠있는 듯한 분위기를 이끌어 내곤 한다.  

이 작품집에 모여있는 다섯편의 작품 모두 그런 온다 리쿠 작품만의 독특한 색채를 풍부하게 담아내고 있고, 말장난처럼 아주 사소한 것도 등골이 오싹 해 질 정도로 철렁이게 만드는 탁월한 스토리 텔링도 여전하다. 


역시 작가 노트를 통해 작가가 작품집 전체의 제목인 '불연속 세계'를 상징할 만한 작품으로 [새벽의 가스파르]라는 작품을 꼽았는데, [달의 뒷면] 에서부터 주이공 '다몬'에 이입해온 독자라면 쇼킹할 정도로 재미있는 반전을 가지고 있다. 사실 이 작품이 단편집이자 옴니버스식의 장편이 될 수도 있는 부분이 바로 이 반전때문이랄 수 있겠다. 

다몬은 작품 안에서 사실 쭉 객관적인 관찰자의 시점을 유지하고, 사실은 그 때문에 모든 작품들이 분절성을 갖게되지만 [새벽의 가스파르] 에서는 그 공식이 깨어지기 때문에 앞의 네 작품을 새롭게 재해석할 수 있게 된다. 

이 작품집은 몇년간 써 온 작품들이 묶인 것이기에 사실 작가가 처음부터 그걸 의도한 것은 아닐터이지만, 묘하게도 그런 즐거움이 생겨버린것이다.  

   

이제 다몬이 처음 등장했다는 [달의 뒷면]을 읽으려고 준비중이다.

언제나 온다 리쿠의 이야기는 기대 이상이다. 세상 모든 것이 미스테리. 아니, 세상 모든 것에 이야기가 있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준다.

같은 작품을 여러차례 읽어도 그 독특한 위화감이 뱃속을 간질인다. 

작품이 쌓여갈수록 온다 리쿠의 필력도 나날이 높아지는 것도 확실히 느껴진다. 이야기의 힘을 충분히 전달해준다. 

그녀에게 온 세상 모든 것은 미스테리고, 수수깨끼고, 이야깃거리일터.

앞으로 또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들려줄까??

나날이 기대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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