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의 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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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완벽한 서사. 처음부터 끝까지 꽉 조여진 탁월한 완성도. 무엇하나, 어디하나 흠잡을 데 없는 최고의 이야기였다. 

작품을 읽어가는 내내 기리노 나쓰오와 미야베 미유키같은 작가가 떠올랐다. 태생은 장르 문학이었으나, 그 틀을 가볍게 넘나들어 문학적 완성도와 장르적 재미를 자신의 품 안에 너끈히 쓸어담는 탁월한 이야깃꾼들. 

엄밀히 따지자면, 이 작품은 전형적인 '장르문학' 이다. 굳이 비교하자면 최근 큰 주목을 받았던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 나 기리노 나쓰오의 [아웃] 을 동일한 선 상에 놓고 가늠해 볼 수 있으리라. 

국내 문학은 장르문학의 천국과 지옥이 공존한다. 대여점에 가보면 커다란 공간의 한쪽 면에 두겹 세겹으로 꽂혀져있는 수많은 킬링타임용  장르문학들을 목도할 수 있고, 장르 문학 작가들은 마치 70~80년대 대본소 만화 공장처럼 판타지, 무협 소설을 찍어내듯 써나가고 있다. 문학판에서는 당연히 이들을 천시하고 홀대한다. 'SF적' '판타지적' 이라는 애매모호한 형용사를 남발하면서 장르문학과 순수문학을 바득바득 나누고 있다. 'SF적' 상상력이 사용되었으나 이 소설은 절대 SF소설 같은 장르문학이 아님을 만천하에 알리고 싶은거다. 

애초에 순수문학과 장르문학을 과연 어떤 잣대로, 얼마나 객관적인 기준으로 나눌 수 있느냐의 문제는 차치하자. 애초에 나는 그런걸 뭣하러 나누냐는 쪽의 사람이다. 어쨌든 이 작품은 구태여 그런 틀에 맞춰 구분하자면, 분명 [화차] 나 [아웃] 과 같은 포커스를 가지고 있는 작품이다. 사건이 있고, 미스테리가 있으며, 액션도 있고, 복수와 과거와 비밀도 있다. 


제목처럼 이 이야기의 시작은 '7년전 어느 날 밤' 에 일어난 한 사건에서부터 시작된다.

야구선수 출신이었던 보안업체 관리팀장 '최현수' 가 가족들과 함께 '세령호' 라는 곳의 '세령댐' 에 댐 보안 팀장으로 부임 하면서부터이다. 현수에게는 아내 '강은주' 와의 사이에 '서원' 이라는 아들이 있었고, 현수의 가족은 댐 직원들을 위한 사택에 살게 되는데, 여러 이유때문에 부하직원인 '승환' 과 한 집에서 살게 된다. 방은 둘뿐인 작은 아파트여서 안방은 현수와 은주가, 작은 방에서는 아들 서원이가 승환과 함께 생활을 하게 된다. 

한편, 세령댐 직원을 위한 사택은 세령 수목원 내에 있었고, 그 거대한 부지는 치과 원장인 '오영제' 의 것이었다. 대를 이어온 거대한 동산과 부동산, 지방의 유지의 아들로 태어나 역시 그 지방의 유지로 자라난, 마치 한 지방의 영주처럼 군림하게 된 오영제에게는 아내 '문하영' 과의 사이에 '세령' 이라는 딸이 있었다. 

 이야기의 시작은 정석대로, 살인사건으로부터 시작된다. 

그것은 사고였다. 안개가 자욱한 밤, 술에 잔뜩 취해 자가용을 몰고 부임지로 향하던 현수가 영제의 딸 세령을 차로 친 것이다. 그리고 현수는 간신히 숨이 붙어있는 엉망진창이 된 세령을 확실히 죽여 아무도 없는 세령호에 던져버린다. 


 이야기는 7년 후.

서원의 시점에서 시작된다. 사건 당시 서원은 초등학생에 불과한 어린 꼬마였다. 살인자의 자식으로 세상에 낙인찍힌 서원의 삶은 그리 호락호락 하지 않았다. 친척의 집을 전전하다가, 그 시절 같은 방에서 함께 지냈던 승화을 찾아 함께 지내게 된다. 서원에게 주홍글씨처럼 새겨진 낙인 '살인마의 아들' . 그렇다. 현수는 연쇄 살인마로 사형을 앞두고 있다.

 과연 7년 전 그날 밤 무슨 일이 있었는가?

그리고, 그 뒤 7년동안 어떤 일이 진행되고 있는걸까? 


'범죄자의 가족' 이라는 소재는 장르문학의 천국인 일본에서는 꽤나 자주 등장하는 소재이기도 하다. 

단순히 사건 - 범죄자 - 형사 혹은 탐정 이었던 미스테리 추리물의 구도는 장르문학에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아내는 이른바 '사회파 추리물' 이 태동하던 시기부터 등장해왔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편지], 요시다 슈이치의 [사요나라 사요나라]등은 살인자의 가족들이 이야기의 중심 인물로 등장하면서 실제로 일본 사회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던 작품이기도 하다. 


 이 작품의 주인공 '서원' 도 그런 범죄자의 가족이다. 말 그대로, 단지 가족이라는 이유로 사회에서 격리되고 고통을 당한다. 우리나라에는 예로부터 '연좌제' 가 실제로 존재하는 시절이 있었다. 탈북자의 자식은 고스란히 탈북자와 마찬가지 취급을 당하며 '빨갱이' 로 낙인찍혀 사회의 주변부에서만 머물러야 했다. 서원 역시 그러한 연좌제와 같은 형벌을 당하게 된다. 


이 작품이 시종일관 독자들을 불편하게 만들며 긴장의 끈을 놓치 못하게 만드는 요소는 '세령을 죽인 현수'보다 '딸을 잃은 영제'가 더 나쁘고 더 악독한 놈이라는 데에 있다. 작품이 진행될수록 현수의 순간의 실수가 점점 더 아쉽게 느껴지게 되는 것이다. 현수는 순하고 성실한 사람이었다. 고통스러운 유년기를 이겨내 프로 야구로 성장했으나, 정작 중요한 순간에 행운은 그를 비껴가기만 했다. 은주와의 만남조차도 불운에 가까웠고, 세령을 차로 친 것도 불운이었다. 그는 천성이 순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반면, 딸을 잃은 영제는 현수의 완벽한 반대편에 있는 사람이었다. 유년시절부터 풍족했고, 약삭빠르고, 원하는 것은 어떻게든 손에 넣는 사람이었다. 성정이 잔혹했고, 아내와 딸을 무자비하게 폭행하는 싸이코 패스 기질이 다분한 놈이었다. 

 결국 독자들은 가해자, 즉 살인자의 편에서 이야기를 따라가게 되기 때문에 심한 불편함을 느낄 수 밖에 없다. 이것과 함께 위에서 언급한 서원이 범죄자의 가족이기때문에 당하는 부당한 사회적인 배척 또한 불편하게 느끼게 되고, 그 사건이 있은 지 7년간 서원의 등 뒤에 어른거리는 위태로운 검은 그림자에 또 불편하게 된다. 

이러한 불편함들이 작품 내내 독자를 잔뜩 긴장하게 만드는 요소가 되고, 세련된 액자식 구성의 연출은 이야기에 리얼리티를 부여하면서 독자들을 강력하게 빨아들인다. 


 시간의 흐름은 서사에 맞게 차근차근 진행되지만 시종일관 꿈과 현실, 상상과 실재를 복잡하게 오고가며 사건들의 인과관계와 등장인물들의 행동 요인을 섬세하고 치밀한 심리묘사로서 풀어낸다.  그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작품 여기저기 뿌려져있던 미스테리적인 요소들이 차근차근 모여나가며 클라이맥스의 대폭발을 예고한다.   


근래에 읽어본 미스테리물 중에서는 가장 완벽한 완성도의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확실히, 정유정 작가도 정말 엄청난 이야깃꾼이다. 완급조절도 훌륭하고, 달음박질 치는 듯 힘있는 문장력도 참 좋다. 그 와중에도 여성 작가 특유의 섬세한 인물묘사가 철저한 사전 준비작업을 통해 태어난 치밀한 디테일과 어우러져 엄청난 리얼리티를 뿜어낸다. 

개인적으로는 미스테리-추리 장르물의 결정판 처럼 느껴졌다. 수년간 그 장르만 파온 미야베 미유키나 기리노 나쓰오 같은 여성 작가들은 물론, 요시다 슈이치나 히가시노 게이고의 장점들을 다 합쳐놓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개인적으로는 과연 정유정 작가가 이 작품을 능가할 만한 작품을 또 낼 수 있을까 싶을 정도이다. 세계 어디에 내놔도 충분히 먹힐만한 보편적인 소재들을 아주 잘 활용했다고 느껴진다. 


때로 우리는 '운명' 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결코 피할 수 없는 사건에 직면하게 된다. 

'성공' 이 운명이라면, 당연히 그 반대편 '파멸' 도 운명일터. 내가 야구를 좋아하는 이유는 경기 안에 성공과 파멸의 운명이 끊임없이 왔다 갔다 하기 때문이다. 단순히 승패를 떠나 손가락에서 떠난 주먹만한 야구공 하나에 운명이 오락가락한다. 절호의 찬스를 놓친 4번타자는 빨리 다음 찾아올 운명의 순간을 준비해야 한다. 이번에 놓친 찬스에 연연하다가는 다음 찬스에서도 똑같은 일을 반복할 뿐이다. 복기는 하되, 얽매여서는 안된다. 홈런을 맞은 투수 역시 마찬가지이다. 다음 타자를 상대해야 한다. 포수는 재빠르게 경기의 흐름을 읽고, 운명의 순간을 맞이한 투수의 심경을 헤아려야 한다. 역시, 운명의 순간을 맞은 상대편 타자의 심경도 헤아려야 한다. 그에게는 파멸의 운명을, 우리 투수에게는 성공의 운명을 이끌어야 한다. 현수는 7년간. 2500여일의 밤 동안 다음 기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 자신이 놓친 절호의 찬스는 이미 그의 머릿속에서는 새까맣게 잊힌 지 오래였다. 그 시간동안 현수는 끊임없이 상대 타자를 분석하고, 우리편 투수의 심경을 헤아렸다. 

그리고, 사인을 냈다.

이제 투수는 공을 던질 것이고, 타자는 배트를 휘두를 것이다.

9회 말 투아웃. 

7년간의 경기는 그렇게 막을 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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