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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테리오스 폴립 ㅣ 미메시스 그래픽노블
데이비드 마추켈리 지음, 박중서 옮김 / 미메시스 / 2010년 12월
평점 :
일단, 딱 한마디로 소감을 풀어보자면, 퓰리쳐 소설상에 노미네이트 된 미국 현대소설을 한 편 감상한 느낌이었다.
문학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치들 중, 현실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가감없이 풀어낸다는 점을 포함시키는 데에 동의한다면, 이 한 편의 만화는 문학의 범주에 넣어도 무방하리라.
만화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치들 중, 주인공의 내면이나 자아를 시각적인 표현, 즉 그래픽 내러티브로 구현해 낸다는 점을 포함시키는 데에 동의한다면, 이 한 편의 만화는 충분히 높은 반열에 올려 놓아도 무방하리라.
유망한 건축학과 교수로서 탄탄대로의 인생을 걸어왔지만, 이혼남. 돌싱인 '아스테리오스 폴립'은 오십번째 생일에 차가운 비를 맞으며 자신의 전재산이 화마에 집어 삼켜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아스테리오스 폴립은 반백년을 산 몸뚱이 하나와 지갑안에 든 얼마간의 현금만으로 오랫동안 자신의 보금자리였던 맨하탄을 떠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아스테리오스 폴립은 '페이퍼 아키텍트' 라고 불리우는 인물이었다. 그는 존경받는 건축가였지만, 그의 명성은 어디까지나 설계 때문이었고, 그 설계를 가지고 실제로 지어진 건물 때문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의 설계 가운데 실제로 지어진 건물은 하나도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수많은 공모전에서 입선했고, 온갖 상을 받았으며 이것만 가지고도 상당히 성공적인 경력을 얻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그가 전재산을 송두리째 날려버리고 무작정 떠나서 도착한 '어포지' 라는 시골 마을에서 얻게되는 직업은 자동차 수리공이었다.
이전까지는 종이 위에서나 가능한, 이론과 상상 속에서만 가능한 것으로 돈을 벌었지만, 이제 그는 실제로 존재하는 자동차를 수리하게 되고, 나아가 부품들을 가지고 거의 못 움직이게 된 자동차를 수리하게 되기도 한다.
자동차 수리점 사장의 집에서 하숙하게 된 아스테리오스 폴립은 지난 50년과는 완벽히 다른 환경속에서 새로운 삶을 경험하게 된다. 그다지 화목하지도, 그렇다고 불행해 보이지도 않는 자동차 수리점 사장 '스티플리 메이저' 부부와 그 아들, 그리고 주변인들과 섞여들면서 지나온 세월들을 돌아보게 된다.
작가는 마치 현실인식, 자아성찰, 현대문명, 자본주의, 가족, 연인, 외로움, 사랑, 타인과의 관계 등 인생의 거의 모든 것들을 모두 담아내려 한 듯 보인다. 어쩌면, 작가인 데이비드 마추켈리가 품고있는 모든 사상을 그려낸 것이라고도 볼 수 있을 터다. 재미있게도 모든 페이지에 넘버링이 되어있지는 않지만, 책 정보에 적혀있는 344페이지에 달하는 볼륨이 그것을 증명한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작품 초반에 작가는 "만약 우리가 인식하는 현실이 단순히 자아의 연장이라면 어떨까?" 라는 질문을 던진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면 각 개인이 이 세계를 경험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줄 것이고, 그 때문에 어떤 이들은 별 어려움 없이 서로 잘 지내는 듯 보이는 반면, 어떤 사람들은 안 그런지 설명할 수 있을 것" 이라고 말한다.(더불어 개인적으로는 인간이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한 설명이 되기도 한다고 생각한다) 작품 초반에 던지는 이 화두야말로 아스테리오스 폴립의 삶을 통해 작가가 증명코자 하는 명제이다.
대학이라는 공간과 교수라는 직함은 아스테리오스 폴립에게 다른 사람의 세계관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권위를 부여했다. 때문에 그는 각자 자신의 세계를 가진 수 많은 학생들을 평가하고, 때론 모욕할 수 있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세계관을 주장하고 내세울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사랑하는 아내(였던) '하나', 그리고 그 주변의 예술가들과 아스테리오스 폴립이 어포지에서 겪고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 그들은 모두 각자가 경험하는 자기만의 현실을 살아가고 있었다. 아스테리오스 폴립은 어포지에서 새로운 삶의 방식을 선택하고, 새로운 사람들과 어울리는 동안 자신이 저질렀던 실수들을 깨닫게 된다. 특히 그가 사랑하는 아내, 하나에게 저질렀던 실수를 인식하게 되는데, 그는 그녀가 가지고 있는 그녀만의 세계를 충분히 존중하고 인정하지 못했음을 깨닫는다. 아스테리오스 폴립은 모든 상황을 자신의 현실속에서 풀어내려 했고,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인 하나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기 자신이라는 필터로 걸러내기 바빴던 것이었다. 한마디로 그는 너무 오만하고 자기중심적인 사람이었다. 지금까지는 그의 그러한 행동 방식이 타인에게 어떤 결과를 주는지 알 수 없었다. 왜냐하면 위에 언급한대로 주변 환경들이 그에게 그런 권위를 부여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와 가장 가까이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하나에게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의 근원이었던 셈이다.
나는 작가가 아스테리오스 폴립의 삶을 통해 우리가 타인들과 맺는 관계에서 특별히 주의해야 할 점을 알려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 각자가 경험하는 현실은 오롯하게 그 사람만의 것이다. 대학교수에서 노숙자에 이르기까지 자신만의 현실을 경험하고 있고, 그것은 결코 타인이 범접할 수 없는 것이다. 각자에겐 그들 각자만의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타인과 교감할 수 없고, 결국은 스스로를 고립시키게 될 것이다. 그리고 특히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가장 큰 파국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상당히 심오하고 어렵기도 하지만, 그만큼 굉장히 매력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특히, 아스테리오스 폴립과 하나의 말다툼 장면이나, 발바닥의 물집에서부터 시작되는 파노라마같은 하나와의 기억 같은 씬들(다시 언급하지만, 책 전체에 페이지 넘버링이 전혀 없어서 페이지수를 적을수가 없다) 은 매우 현실적이면서도 환상적이고, 단순하고 평범한 듯 하면서도, 디테일하고 사랑스럽다. 종종 등장하는 팝아트와 모던아트를 넘나드는 참신한 발상의 그림들로 자아나 현실인식과 같은 형이상학적인 주제를 풀어내기도 하고, 평이한 흐름의 이야기를 실험적이고 기발한 컷 연출로 단조로움을 극복하기도 하고, 특히 깜짝 놀랄만한 마지막 페이지는 작품 전체의 여운을 오랫동안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이 세상에 60억명이 있다면, 60억개의 현실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수많은 현실들 중, 가장 잃지 말아야 할 것은, 사랑, 이라고 말하고 있다.
평생, 한번쯤은 꼭 읽어보고, 두번 세번 곱씹어볼 만한 작품임은 확실하다.
우리는 왜, 무엇을 위해 사는가?
왜 타인과의 관계에 몰두하는가?
그래, 어쩌면, 인간은 태생이 외롭기 때문일수도 있다.
다들 자기만의 현실이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이미 외롭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은 외로운 존재이기에 끊임없이 타인을 갈구한다.
수많은 의문과, 고민과, 고통 속에서도,
한순간의 행복.
그것이 우리의 삶을 가치있게 만들고, 살아갈 힘을 주는지도 모르고,
그리고, 그 행복은 아마도 타인과 함께 함으로써 생겨나게 되리라.
마지막으로 작품의 클라이맥스에 아스테리오스 폴립과 하나가 키웠던 고양이 '노구치'의 죽음에 관해 나눈 대화 부분을 옮겨보고자 한다. 나도 고양이를 키워서인지 쉬이 보아넘길 수 없었다.
하나: "...내 생각에 그 녀석은 잘 살다 간 것 같아."
아스테리오스 폴립: "그게 다 당신 덕분이지."
하나:"당신도 알겠지만, 그 녀석은 내가 어떻게 생겼든,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내가 무슨 행동을 하든, 내가 어떤 상태에 있든 전혀 상관하지 않았어. 가끔은 밤에 내가 정말 안좋은 모습을 보이는 때도 있었는데도...
그 녀석은 늘 나를 찾아와서 내 옆에 몸을 둥글게 말고 잠을 잤어.
심지어 마지막까지도 말이야. 그 녀석 신장이 고장나고, 폐가 고장나고...
그런데 난 차마 그 녀석을 보낼 마음이 없었어. 그럴 힘도 없었고...
그래도 그 녀석은 여전히 오는 거야. 마치 나를 위로하려고 하는 것처럼...
그건 마치, 자기가 무슨 일을 겪든 간에 아무 상관없이, 언제든지 가능한 한 행복을 부여잡으려고 하는 것 같았어.
그게 겨우 매일 5분에 불과한 시간이라도 말이야.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 시간 내내 나는 그 녀석이 정말로 행복했다고 생각한다는 거지."
아스테리오스 폴립:" 아마도...그거야말로 우리 모두가 바라는 거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