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달리다
심윤경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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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름다운 정원] 이라는 작품을 기억한다.

나에게 심윤경이란 작가를 알려준 [나의 아름다운 정원]을 만난 계기는 꽤나 독특했다.

그러니까, 내가 군대를 전역하고 3년째인가, 4년째. 동원 예비군 훈련을 2번째였나, 3번째 받았다가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그 지역 버스를 타고 터미널로 향하는 중이었다. 

 공군 특기병 출신인 나는 동원훈련을 병과에 따라 서울에서 3시간 내에 갈 수 있는 거리에 있는 공군 비행단으로 2박3일동안 받으러 갔어야 했는데, 그 때가 충북 청주비행단이었는지, 대전 공군대학이었는지 기억이 잘 안 난다. 군사훈련이란 어지간한 남자들은 군복을 벗는 순간 다 잊어버리는(잊기위해 노력하는) 것들이니까. 오죽하면 총쏘는 방법도 매번 까먹어서 4년 내내 매년 새로 배워야 할까. 

 여하튼, 그러던 시절, 그 지방 버스 안에서 흘러나오던 지역방송 라디오에서 '어디시청과 함께하는 독서캠페인 이달의 책~ 이번달 책은 [나의 아름다운 정원] 이라는 책입니다.' 라며 짧은 책 소개를 해주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내용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책의 줄거리는 거의 다 비껴가고 작품의 주제의식과 작가의 문장력, 전체적인 짜임새등을 5~10분정도 간략하게 정리한 매우 세련된 리뷰였다는 것은 확실히 기억난다.  

 무튼 몇시간을 더 기차였는지 버스였는지를 타고 서울역에 도착해서 3일동안 훈련받는다고 용쓴 몇몇 동네 사람들과 반주를 곁들인 저녁식사를 해치우고 집에 와서 열심히 검색했다. 당연히, 저자 이름도, 책 제목도 반쯤 잊혀져 있었으니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저자 이름은 떠오르지 않고, 제목은 계속 황석영 작가님의 [오래된 정원] 만 떠올랐더랬다. 

라디오에서 들었던 '한겨레' '수상' '정원' 이런 단어들을 조합하여 검색해가며 힘들게 찾아서 구입한 기억이 난다. 


 [나의 아름다운 정원] 은 정말 너무나 멋진 작품이었다.

소년의 성장기였고, 소년은 나처럼 여동생이 있었고, 광주항쟁과 80년대 한국의 격동기를 다루되 직접적으로 드러내지는 않는, 하지만 그 주제의식은 또렷하게 띄우는 무척이나 세련된 작품이었다. 마지막 페이지는 언제 읽어도 눈물을 삼키게 만들었고, 그럼에도 전체적인 분위기는 굉장히 따스하고 정겨웠더랬다. 

이 작품은, '심윤경'이라는 이름을 기억하게 만들었지만, 한 작품으로 작가의 역량을 평가할 수 는 없다는 웃긴 생각을 했더랬다.(내가 뭐라고!!ㅋㅋㅋ) 


 그 다음으로 접한 책은 [이현의 연애] 였다.

10대 중반에는 순정만화가를 꿈꿨던 나는 20대 초반까지 사실 어지간한 연애소설은 수두룩하게 섭렵했더랬다. 일찌감치 채털리 부인을 알았고, 남회귀선과 북회귀선의 은유를 깨우쳤으며, 홍루몽은 물론 할리퀸과 캔디캔디, 오스칼 프랑소와 드 자르제와 마리 앙뜨와네뜨(베르사이유의 장미에 나오는 주인공들. 오스칼은 작품상의 가상인물) 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숱한 연애 창작물들이 사실은 현실 연애와 견주어 접점이 아무것도 없음을 깨닫고는 '연애' 를 소재로 다룬 책들은 여지없이 내쳐버렸더랬다. 심지어 [닥터 지바고]와 [대위와 딸]조차도 '이건 연애얘기 주제에 왜 세계문학이냐!!! [설국] 이건 뭐야, 이건 그냥...불륜인지 아닌지 애매모하지만 어쨌든 문란한 연애질이야기잖아!!! 이런 소설이 노벨 문학상인거냐!!! 셰익스피어, 이 사람은 -비극들 빼면- 다 연애얘기야!!!  그 와중에 [폭풍의 언덕] 은 인생의 책으로 자리잡았다. 그렇지, 사랑과 연애는 이런거라고. 고통, 기다림, 엇갈림, 고통, 괴로움, 또 고통, 또 괴로움, 이게 진짜, 레알, 현실연애다!! 

이런 나였는데...

 [이현의 연애] 이 제목이란. 이현이라는 사람이 연애질하는 내용일게 뻔하다. [나의 아름다운 정원]의 감동을 다 잊어버리고 심윤경이라는 세 글자마저 잃어버릴 때 쯤, 병원 갈 일 있어서, 진료를 기다릴때 보려고 집어 들었더랬다. 시간은, 잘가겠지. 기다리는 지루함은 달달한 연애얘기로 잊어보자, 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이현의 연애] 는 [폭풍의 언덕] 과 함께 내 마음속의 2대 현실연애+사랑이야기로 자리잡는다. 달달하기는 개뿔. 역시 진짜 연애란, 진짜 사랑이란, 고통을 더 큰 고통으로 덮는 과정인 것이다. 그렇게 고통이 더 큰 고통으로 덮이면, 전에 겪은 고통은 오히려 행복이었던 것으로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행복해지리라는 희망을 지리하게 이어가며, 고통을 되풀이하는 것. 그것이 연애이고 사랑인 것이다!!! 


 [사랑이 달리다] 는 바로 [이현의 연애] 에 등장하는 한 챕터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래서, 나는 이번에도 꽤나 고통스럽고 폭력적인 사랑의 감정이 그려질 것으로 예상했었다. 제목부터 '달리다' 이다. 폭주 기관차처럼. 광란의 질주를 거듭하는 스포츠카처럼. 폭력적이고 파괴적이어서 결국은 너도 나도 다 만신창이가 되고마는 그런 사랑 이야기. 


 일단, 거침없이 절반쯤을 읽어나간 첫인상은, '흐으으으으음???' 이었다.

유머와 위트를 가득 안고 김학원의 자가용처럼 거침없이 내닫는 문장과 스토리 텔링은 보다 원숙해지고 능란해졌지만 전작들이 보여주었던 날카로운 주제의식들이 보이지 않았다.  주인공 혜나는 물론이고 그 가족들이나 주변인물들까지도 하나같이 경제적으로 큰 불편 없는 상황 설정도 그다지 와닿지 않았으며, 그런 상황 설정 속에서 돈없다고 징징대는 혜나나 그 가족들에게 또한 쉽게 몰입할 수 없었다.


 나는 지금까지 심윤경 작가가 베틀에 앉아 물레를 돌려가며 꼼꼼하게 베를 짜듯 이야기를 얽어나가는 스타일이라고 생각해왔다. 

단어들을 모아 문장의 실들을 잣고, 정해진 계획과 그에 맞는 규칙에 따라 씨실과 날실을 짜맞추듯, 인물과 상황들을 꼼꼼하게 짜맞추는 작가라고 생각해왔다. [나의 아름다운 정원] 에서도, [이현의 연애] 에서도 그 방식은 매우 달랐지만, 직조해나가는 느낌은 동일했더랬다. 

때문에 [사랑이 달리다] 의 인물과 이야기들 안에서도 그런 짜임을 기대했었다. 복선을 찾아보려 했고, 은유를 찾아보려 했다. 마치 커다란 그림 속에서 빨간 줄무늬 옷을 입은 월리를 찾듯 배경속에 숨겨있는 사람들에게서 작가의 의도를 찾아다녔다.


 하지만, [사랑이 달리다] 는 이야기가 달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달리는 것이었다.

책의 중반을 넘어서야, 김학원이 사제끼는 자동차에도, 미친듯이 질주하는 그의 운전습관에도, 김철원이 소유하고 있는 회사와 등기이전의 음모 속에도 그 어떤 다른 의도는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건 그냥 삶 속에서 일어나는 단순한 사건인 것이다. 수백가지의 우연과 수십가지의 필연이 얽혀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단순하고도 자연스러운 사건. 음식을 먹었으면 화장실을 찾듯이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생기는 화학적인 작용들로 인해 우연하도고 필연적으로 생겨나는 여러가지 '일' 들. 사건 인과를 얽기위해 필연적으로 등장하는 사건이나 복선, 은유나 상징, 그런건 애초부터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 이 작품은 이야기, 사건 중심의 작품이 애초부터 아니었다.


 이 작품의 이야기의 핵심은 '인물이 무엇을 했느냐?' 가 아니라, '그걸 한 인물이 누구냐?' 인 것이다. 

이야기를 위해 만들어진 인물이 아니라, 인물이 만들어가는 이야기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작가가 독자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것이 아니라, 인물을 보여주고 싶다는 느낌이 들었다는 것이다. 이 작품은 '그래서 이게 뭔 이야기야?' 를 파고들기보다, '그래서 얘는 대체 어떤 사람인거야?' 를 파고들어보면 보다 풍성하게 즐길 수 있다. 그렇게 읽어가면, 각 인물들에 걸려있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고스란히 읽힌다. 작품의 중심 인물인 혜나와 학원. 거울처럼 똑 닮은 두 남매의 삶. 하지만, 거울이기에 반대편으로 흘러간다. 

 그렇게 인물들에 걸려있는 이야기가 읽히기 시작하면 자연스레 인물 중심으로 이야기를 즐길 수 있게 된다. 이야기의 짜임새가 아닌 인물에 집중하며 작품을 읽어나가다 보면,  역시나 세련되게 배치되어 있는 에피소드들을 발견할 수 있다. 혜나의 감정 흐름대로 틀 없이 자유분방하게 진행나가는 듯 하지만, 역시나 작가 특유의 세련된 호흡으로 길이를 조절하고 감정의 파고를 설정한다. 누르고, 잡고, 터뜨리고, 모으는 타이밍이 기가막히다. 문장 곳곳에 숨겨있는 유머와 냉소적인 위트도 적절하게 들어온다. 그런 전반적인 흐름의 기술이 탁월하다보니 이야기의 흡입력도 상당하다. 혜나와 함께 웃고 낄낄대고 안쓰러워하다보면 어느새 이야기는 종장을 향해 치닫는다.     


 독서에는 많은 독법이 존재한다. 

문학성을 따지는건 학자들이지만, 다독가, 애독가들에게도 자신만의 독법이 있고 자신만의 기준이 있다.

누구는 [폭풍의 언덕] 을 인류역사상 최고의 소설이라고 하기도 하고, 누구는 최악의 소설이라고 하기도 한다. 어떤 대학의 어떤 교수들이 인류사적으로 가치가 있는 문학으로 분류했다고 해서 그 책을 읽는 모든 사람들이 그 책 안에서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찾아낼 수는 없고, 찾아낼 필요도 없다. 누구에게는 [파리대왕]이 노벨문학상 감이지만, 누구에게는 어린애들을 미친 폭력 살인마로 몰아가는 미치광이 같은 작품일 수도 있다. [롤리타] 는 어떤가?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는? [채털리 부인] 은?? [더버빌가의 테스] 는?? 무엇이 음서와, 명작의 기준이 되는가?


 [사랑이 달리다] 를 읽으면서, 나는 내가 갖고있는 편협한 독법에 크게 놀랐고, 또 많이 생각했다. 

내가 참, 스토리, 사건에 천착하고 있었구나, 라고 스스로를 되돌아봤다. 지금까지 내가 읽어온 모든 책들을 다시 읽어봐야 하는게 아닐까, 싶은 마음도 들었다. 어쩌면 재미없다고 읽다 덮은 작품들이나, 취향이 아니라고 제껴둔 책들도 다시 다 읽어봐야 하는게 아닐까, 싶었다.

그러면서 거침없이 달려가는 혜나의 삶이 문득 부러워졌다. 

확실히 독법을 바꿔서 혜나를 바라보니, 혜나에 대한 작가의 애정이 느껴졌다. 한편으로는 작가가 지나치게 애정을 담았어!! 이건 비판받아 마땅한 부분이야! 라고 외치고 싶기도 하지만, 어쩌랴. 혜나는 작가에게도, 독자에게도 너무나 사랑스러운걸. 


 한국 사람들은 유독 드라마를 좋아한다.

드라마란, 잘 짜여진 이야기의 틀 안에 딱 맞는 옷을 입은 캐릭터들이 모여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사랑이 달리다] 는 그런 관점에서 볼땐, 잘 짜여진 틀 안에 잘 짜여진 인물들이 제자리에 들어있는 드라마는 아니다. 감정은 들쭉날쭉하고  이야기는 정신없으며 주제의 구심점도 잘 안 보인다.

그런데, 너무나 매력적이다.

생동감 넘치는 인물들이 아글다글 모여 자유롭게 자신의 길을 간다. 그러다 보면 불쑥불쑥 예기치 못한 사건들이 일어나고, 좌충우돌 부딪히며 사고도 일어나고, 어이없이 사고가 봉합되기도 한다. 인연과 이연이 되풀이되고, 서로를 울리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고, 사랑했다 미워하고, 미워했다 사랑한다. 


  책속에 항상 답이나 길이 있지는 않다

책속에 있는 길은 책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길이고, 어쩌면 작가의 길이고, 어쩌면 작가도 가보지는 못했지만 언젠가 가보고싶은 희망의 길일수도 있다. 모두가 공자처럼 떠돌이 개마냥 돌아다닐 수는 없고, 싯달타처럼 아사직전까지 굶어가며 앉아있을 수도 없으며(일단 며칠안에 엉덩이에 부스럼 생기고 치질에 걸릴 확률 99.999999%), 율곡 이이처럼 신사임당 같은 엄마를 만날 수는 없다.(읭??), '성공하는 몇가지~습관' 이런 책들을 읽는다고 성공하게 되는 것도 아니고, 시크릿 같은 책을 100번 읽고 외운다고 갑자기 부자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감동이나 성취감은 개개인의 취향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고. 혜나의 삶이나 그 주변 인물들의 삶이 내 삶에 영향을 줄 리는 없다. 나 또한 그들의 삶에서 뭔가를 얻어내거나, 해답을 얻을 생각도 없다. 

하지만, 확실한 하나는,

내 삶 속에 혜나와 욱연, 그리고 학원이 불쑥 뛰어든 것이다. 유비와 조조가 뛰어들었던 것 처럼,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이 뛰어들었던 것 처럼, 롤리타와 험버트가 뛰어들고, 동구와 이현, 이진이 뛰어들었던 것 처럼.  

잠깐 미쳤다 돌아와도 별 일 없는 삶 속에서, 그들은 또 어떤 일들을 겪에 될까?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하는 나의 삶엔 또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



엉망진창 좌충우돌 내달린 이 리뷰를 어떻게 마무리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내가 무척 좋아하는 어떤 책의 마지막 구절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 작품속에서 그와 대구를 아주 잘 이룰 것 같은 문장도 하나 떠올랐다. 이 두 문장이면, 이 사태가 어느정도 수습될 듯 싶다. 



"잠깐 미쳤다가 돌아와도 아무 일 없다구" 

[사랑이 달리다/ 심윤경]p.28

"그래, 그거였어. 어떤 일이라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 그것이다."

[사우스 브로드/펫 콘로이]2권 p. 462 마지막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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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티미츠 Vol.2 : 국토안보 시공그래픽노블
마크 밀러 지음, 이규원 옮김, 브라이언 힛치 그림 / 시공사(만화)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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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터테인먼트의 강국인 일본과 미국의 '만화' 컨텐츠 활용법은 사뭇 다르다.

일본에서는 한 만화가 큰 인기를 끌면, 원작과 크게 다르지 않은 애니메이션과 드라마, 영화등을 제작한다. 매체의 특성상 전체 스토리가 압축되거나 생략되는 경우는 있겠지만 이야기의 큰 틀은 크게 다르지 않게 다른 매체로 '이식' 된다. 일본의 만화 구매층은 내용은 같지만, 각기 완벽히 다른 작품이라고 인식하고, 각기 그 매력을 만끽한다.

반면, 미국에서는 만화를 같은 내용으로 다른 매체로 이식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스파이더맨' 이나 '아이언 맨' 과 같은 영화들은 그래픽 노블을 기반하고 있지만, 단지 '모티프' 에 불과할 뿐이다. 영화는 영화대로, 그래픽 노블은 그래픽 노블대로 '캐릭터' 를 재해석한다. 때문에 같은 주인공을 여러번 등장시켜서 매번 새로운 영화를 만들어도 미국의 관객들은 크게 좌우되지 않는다.

'스파이더맨' 같은 경우도 이미 1편부터 3편까지 나왔지만, 관객들은 완전히 새로 이야기가 시작되는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을 큰 위화감 없이 '새로운 시리즈' 라고 받아들인다. 우리나라 관객들에게는 이런 새로운 시리즈에 '리부트REBOOT' 라는 개념을 설명하게 이해시켜야 하지만, 여전히 위화감이 남는다.  

이러한 차이는 일본의 만화도 캐릭터 중심이고, 미국에서도 캐릭터 중심이지만 이야기를 대하는 자세에서 비롯된다.

일본 만화는 캐릭터 중심이지만, 연속된 긴 이야기를 통해 캐릭터를 드러내고, 미국에서는 단막으로 끊어져 있는 옴니버스식 이야기를 통해 캐릭터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즉, 일본 만화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에피소드와 에피소드가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지만, 미국 만화는 기본적으로 그렇지가 않다. 가끔 에피소드를을 유기적으로 결합시키기 위한 프로젝트를 선보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미국문화의 수많은 스토리들은 옴니버스형식을 기반한다.

 

지금 소개할 [얼티미츠] 라는 작품 또한 그렇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영화 [어벤저스] 의 캐릭터들이 등장하지만, 영화와 스토리적인 연관성을 찾는다면 제대로 된 즐거움을 누릴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이미 국내에 정식 발매된 [아이언맨: 익스트리미스] 나 [시크릿 워][시빌 워] [토르] 등의 작품들과 스토리의 접점은 결코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얼티미츠] 에 등장하는 캡틴 아메리카, 아이언맨, 토르, 헐크 등은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배경 지식들을 깡그리 잊고, 새로 접한다는 느낌으로 받아들여야 진정한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일단, 그렇게 딱 2권짜리 [얼티미츠] 를 충분히 즐긴 뒤에, 다른 작품에 등장한 캐릭터들과의 차이점이나 연관성을 찾으면 더욱 재미있게 접할 수 있는 것이다.

 

[얼티미츠]는 히어로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제법 냉소적이다.

아이언맨은 기존의 다른 시리즈에서처럼 백만장자에 천재이지만 재수없고 바람둥이 기질이 다분한 졸부로 그려지고, 토르는 자연주의자 사기꾼, 캡틴 아메리카는 시대에 뒤떨어진 고지식한 군인, 헐크는 제어 불가능한 폭탄처럼 다뤄진다. 쉴드의 수장이자 사뮤얼 잭슨과 굉장히 비슷하게 그려놓은 캡틴 퓨리는 음흉한 속내를 지닌 정부 고위급 관료로 등장한다.  

등장인물들이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도 작가가 히어로를 바라보는 시선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같은 팀이지만 좀처엄 융화되지 않고 애초에 각자의 이익을 위해 모였기 때문에 물과 기름처럼 서로가 둥둥 떠있을 뿐이다.

그나마 1권에서 헐크가 폭주하는 대사건이 생긴 이후로 서로가 조금씩 인정하기 시작하고, 지구에 오랫동안 잠복해있던 차타우리와의 2권에 접어들며 각 캐릭터들의 진면모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역시나, '말 안듣는 것들은 헐크가 패주면 됨'. 이라는 사실은 [얼티미츠] 에서도 여지없이 증명된다.

 

이야기의 전체적인 짜임새는 영화 [어벤져스] 보다 좀 더 나은 편이다. 특별히 캡틴 아메리카에게 이야기의 포커스가 집중되어있긴 하지만, 다른 캐릭터들의 역할도 비교적 높은 비중으로 잘 분산되어 있고, 매력들도 잘 드러나 있다. 사건의 인과 관계나, 캡틴 아메리카의 과거와 현재의 사건이 연관되는 부분의 드라마는 상당히 잘 표현되어있다. 물론 화려한 일러스트를 연상시키는 탄탄한 뎃셍의 작화도 대단히 멋지다. 

 하지만, 역시나 시작은 창대하지만, 끝은 미미한 미국 그래픽 노블의 블록 버스터급 프로젝트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 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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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도니아의 騎士 1
니헤이 츠토무 지음, 김동욱 옮김 / 애니북스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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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의 오프닝부터 매우 독특하다.

딱 봐도, 거대한 무언가의 지하로 보이는 묘한 공간속에서 '타니카제 나가테' 라는 어려운 이름의 주인공이 훌쩍 등장한다. 솔직히 나도 일본만화 꽤나 봤지만, 이렇게 어려운 이름은 처음이다. 일본 만화의 이름들은 번역 관례상 모두 한글로 번역되기 때문에 한자를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타니카제' 라는 이름은 검색해보니 대충 谷風 이런 단어가 잡힌다. 

(일본 만화의 주인공 이름들은 뜻문자인 한자를 통한 여러가지 장치들이 되어있는 경우가 많아서 이렇게 특이한 이름들이 나오면 검색해 보곤한다. 그런데 사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그런 장치가 되어있는 이름들은 작품을 통해, 혹은 작가의 입을 통해 의미가 나오기 마련이다. 한자를 읽는 방법이 몇가지가 있어서, 너무 복잡하면 자국 독자들도 모르는 경우가 허다해서.ㅋㅋㅋ)

아무튼, 주인공 이름부터 강하게 잡아끈다.

 

 90년대 중~후반을 지배했으며,  수많은 오타쿠들과 작가, 애니메이터 지망생들은 물론 일본 컨텐츠 업계 전체를 요동치게 만들고, 아직까지도 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신세기 에반게리온] 은 그야말로 일본 SF만화의 틀 자체를 크게 바꾸어 놓았다.

 에반게리온 이전까지 거대 로봇물이건 리얼 로봇물이건, 피아의 구분은 명확하기 그지없었다. 주인공의 숙명이나 운명도 매우 또렷했다. 하지만, 에반게리온은 그 제목에 당당하게 붙은 '신세기' 라는 단어를 증명하듯 매우, 매우 새로웠다. 피아의 구분도 애매하고, 주인공도 우울증에 걸린 소심하기 짝이없는 민폐덩어리였다. 그 주변 캐릭터들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특히 수많은 애니메이션 팬들에게 컬트적으로 추앙받은 히로인 '아야나미 레이' 는 답답을 넘어 지나치게 무심하고 시크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그게 상당한 매력이었고, 결국 '츤데레'(겉으로는 차갑고 무심한 척 하지만 속으로는 엄청 챙겨주는 성향) 캐릭터의 원형이 되었다.) 주인공이 속해있는 '네르프' 라는 기관은 소속 기관원들에게조차 냉혹하고, 심지어 무엇을 위해 누가 만들었는지도 명확하지 않은 수수깨끼 같은 기관이었다. 심지어 후반에는 거의 적처럼 되어버린다. 주기적으로 등장하는 '사도' 라는 거대 괴물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지능이 있는지도 애매하고, 왜 자꾸 지구로 쳐들어오는지도 밝혀지지 않는다. 

한마디로, '엄청나게 불친절한' 작품인 것이다.

TV판의 엔딩은 아직까지도 수많은 팬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으며, 그 팬들은 완결편을 앞둔 극장용의 새로운 에반게리온에 대한 우려를 감추지 못하고 있다.

에반게리온을 통해 컬트적인 색채를 지닌 감독으로 각인된 안노 히데아키가 신 극장판을 통해 에반게리온의 깊고 깊은 수수깨끼를 풀어주려는 것이 아니라, 수수깨끼를 오히려 증폭시키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음모론이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후자를 지지한다. 안노 히데아키는 작품을 통한 논쟁을 즐기고 팬들과 두뇌싸움을 즐기는 타입이다. 기분좋게 볼 수 있는 작품을 만들어내는 감독이 절대 아니다. 어딘가 불편하고, 어딘가 미심쩍은 구석을 항상 남겨놓고 여지를 남겨놓는 타입이다.)

 

 이러한 '불친절' 은 일본 애니메이션 팬들에겐 큰 충격이었다.

1970년대 중반, '우주전함 야마토' 라는 애니메이션을 통해 작품에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는 작품의 전체적인 세계관과 설정들을 발견하며 보다 깊이있게 세계관 전체를 파고들어가는 이른바 '오타쿠 문화' 가 촉발된 이후 가장 거대한 팬덤이 생겨났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지나칠 정도로 불친절한 스토리 텔링은 오타쿠 한두명이 작품을 들이 판다고 해서, 작품 전체에 깔려있는 설정과 세계관을 해석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작품에 등장하는 단어 하나와 메카닉의 이름 하나하나가 모두 그 거대한 세계관의 하나로써, 작품을 벗어나 전문 지식쪽으로 시야를 넓혀야 메타포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성경에 등장하는 용어로써 '예수님의 제자' 를 뜻하는 '사도' 라는 단어는 에반게리온의 세계관에 등장하는 가장 무시무시한 적의 이름으로 쓰였고, 창세기에 등장하는 태초의 여성 '이브' 에서 온 것이 확실한 'EVA', 그리고, 기독교 성경 중 '위경' 으로 분류되는 부분에서 아담의 첫번째 부인으로 등장하는 '릴리스' 라는 존재의 등장 등, 유대인의 신화를 모티프로 한 것이 분명한 여러 장치들은 어지간한 전문가들이 아니면 발견하기도 힘든 것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네르프NERV' 와 '제레SEELE' 등 생소한 독일어 단어들이 활용된 소속 기관명 등 역시 전문지식이 없으면 이해할 수 없었다.

심지어 그 시기는 지금처럼 인터넷 인프라가 넓게 퍼지기 전이었으니, 지혜를 모으기 위해서는 일단 팬들은 모여야만 했다. 

오타쿠들은 괴로워했고, 즐거워했다. 안노 히데아키를 욕하면서 찬양했고, 에반게리온을 짜증내면서 구입했다.

캐릭터 디자인의 아름다움과 메카닉 디자인의 유려함에 열광하는건 한참 낮은 수준의, '오타쿠' 라고 불릴 수도 없는 '팬' 수준이었다.(물론 메카닉의 기계적인 논리를 파헤치는 '메카닉 오타쿠' 들도 성행했다. 실제로 이 메카닉 오타쿠들은 나이도 많고 학력도 뛰어난 전기, 로봇 공학자들이 상당히 많고, 아톰이나 건담등의 애니메이션 팬들이 일본 로봇산업의 근간을 다졌다는 이론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지금 오타쿠들의 이미지는 그 시기의 오타쿠들이 제공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일본의 애니메이션 잡지인 '뉴타입' 은 연일 지면을 통해 전문 지식들을 내보냈다. 애니메이션 전문 기자들은 각종 기사를 통해 '릴리스' 가 유대인들의 신화상 인물이라는 사실이나, 1940년대 후반에 발견되었다는 '숨겨진 사해문서' 등에 대한 기사를 쏟아냈다. 마침 그 즈음 한국판 '뉴타입'이 런칭되면서 한국 또한 에반게리온 신드롬에 휩싸였다. 일본문화가 완전 개방되기 전이었음에도 비디오 대여점에 [신세기 에반게리온] 이 떡하니 진열되어 있었고, 특히 똑똑한 친구들이 이 만화에 열광했다. (참고로 이 작품를 내게 전파해준 절친은 고교 3년내내 전교 1등을 도맡았고, 서울대 3~4학년 과 수석, 못해도 차석질을 했으며 지금은 모 대기업에서 근무중이시다....근데 나는??!! @.@) 

 

[신세기 에반게리온] 은 일본의 컨텐츠 흐름 전체에 새로운 세기를 마련했으니,

 

그것은 '불친절' 이다. (그리고 츤데레)

 SF장르는 기본적으로 독자들에게 친절한 장르이다. 세계관에 대한 구구절절한 설명들이 많다. 이 행성과 이 행성의 역사는 어떻게 되었으며, 이 외계인과 저 외계인의 생체적 특성은 어떻고, 그들의 과학기술 수준은 어떠하며, 이런 과학기술은 어떻게 발달되었는지 등등에 대한 설명이 또렷하게 제공되는 편이다. 

하물며 SF애니메이션이라면야.

하지만, [신세기 에반게리온] 은 그야말로 '졸라게' 불친절했다. 

 

 이제야 다시 등장할 [시도니아의 기사] 의 '니헤이 츠토무' 는 사실 그러한 불친절함의 대가인 작가이다.

[블레임] 같은 작품은 대부분의 독자들은 아예 세계관을 파헤칠 의욕마저 들지 못하게 한 작품이기도 하다. 말 그대로, '여기는 어디, 너는 누구??'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거의 작품 끝까지 나오지 않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것이 작가와 작품의 개성이라고 할 지라도, 지나치게 독창적인 세계관은 오히려 외면받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였을까? 

[시도니아의 기사] 는 의외로 꽤나 친절하게 시작한다.

 어느정도는 에반게리온이 만들어준 '신세기' 를 따랐고, 어느정도는 [마크로스] 의 느낌이 난다. 메카닉 디자인은 독창성과 대중성을 두루 갖춘 [파이브 스타즈 스토리]의 '나가노 마모루' 느낌도 물씬 난다.(하지만 이 작품 또한 그 스토리는 상당히 불친절하고 복잡하기 짝이 없다.) 어...이럼 그냥 평범한 SF되는거 아냐? 싶어 찬찬히 읽어 나가보니, 작가가 독자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포기한 부분들이 많이 보인다. 세계관은 단순하게 벼렸고, 그림체도 많이 달라졌다. 전작에서 보여졌던 톤으로 뭉개지고 러프했던 선, 복잡하고 현란한 묘사들을 다 버렸다. 캐릭터의 개성도 또렷하게 등장하고, 각자가 가지고 있는 히스토리들도 친절하게 보여준다. 심지어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개그코드까지 등장한다. 사실 [시도니아의 기사] 에 등장하는 유머는 포복절도하게 웃기지는 않지만, 전작들에 비하면 확실히 '많다' 고 느껴질 정도이다. 아니, 많은 만화 팬들은 '니헤이 츠토무에게 이런 개그센스가 있었어????' 싶을 정도이다. 게다가 무려 주인공의 입을 통해 기본적인 세계관을 설명까지 해준다. 이전까지의 작품들은 본인의 세계관의 독창성을 자랑하기 위해 급급했다면, 이번 작품에서 확실히 '읽어주세요' 라는 간절함이 느껴진다. 독자들과 함께 호흡하고 싶다는 작가의 바램이 읽힌다.  

 

사실, 전작들에 비해 [시도니아의 기사]의 세계관은 굉장히 평범하고, 어디선가 많이 접해본 느낌이다.

거대 인간형의 외계의 생명체 '가우나' 에게 파괴당한 지구. 

생존한 인간들은 일종의 '노아의 방주' 쯤 되는 '시도니아'를 타고 우주공간으로 도망친다. 

계속해서 시도니아를 추격하는 가우나와 그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진 인간형 병기 '모리토' .

 

1980년대에 만들어진 애니메이션 [마크로스]의 판박이이다.

거대 인간형의 외계 생명체 '젠트라디' 에게 파괴당한 지구.

우주로 쏘아진 거대 도시형 우주선인 '마크로스' 에 타고 있던 사람들만이 기적적으로 생존하고, 계속해서 마크로스와 생존 인류를 추격하는 젠트라디와 그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진 인간형 병기 '발키리'.

 

일종의 '노아의 방주' 플롯이다. 

니헤이 츠토무가 가장 크게 양보한 부분이 이 세계관에 대한 부분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결국 니헤이 츠토무가 [시도니아의 기사]로 승부를 보려는 부분은 세계관의 독창성이나 아이디어가 아니라, 그 세계안에 녹아있는 사람들의 드라마와 수수께끼, 그리고 디테일한 설정들이다.

니헤이 츠토무는 세계관의 독창성을 버리고, 대신 그 안에서 자신의 독창성을 맘껏 발휘하기 시작한다. 예를들어 마지막 인류가 우주 공간에서 최대한 오랜 세대를 버티기 위해 광합성으로 에너지를 생산할 수 있고 자가 생식이 가능한 방식으로 신체를 개조하고, 클론을 배양하고, 수명이 다한 인간은 비료로 재활용하는 등의 아이디어는 무척이나 재미있다. 

뿐만 아니라, 인간과 가우나의 관계, 시도니아라는 거대 도시 우주선의 비밀, 모리토라는 병기의 비밀과 가우나에게 타격을 줄 수 있는 유일한 무기인 '카비자시. 카비자시는 어떻게 가우나에게 타격을 줄 수 있으며, 왜 28자루 밖에 없는가? 그리고 가우나가 갖고 있는 절대 방어막인 '에나'. 그것은 또 무엇인가? 등 수수깨끼들을 직접적으로 제시함으로써 독자들을 작품 안으로 적극적으로 끌어들인다.

 물론,  주인공 '타니가제 나가테'를 중심으로 촘촘하게 뻗기 시작하는 타인들과의 관계, 그 안에서 일어나는 여러 드라마들 또한 빼놓을 수 없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 조금은 '덜 떨어진' 타니가제 나가테는 1,2권만에 모두에게 인정받는 영웅에서 '전범자식' 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추락하고, 사랑의 시작과 동시에 실연을 경험하는 등 다이내믹한 감정의 쌍곡선을 경험하고 있다.   

무한한 어둠의 우주를 떠다니는 우주선에 고립된 채 압도적인 적들에게 끊임없이 공격당하는 인류.

그 고립된 사회 안에서, '자연의 선택'이 아닌 '인위의 선택'으로 인간은 과연 어떻게 진화할 것인가? 

 

장르만화는 그 한계가 명확하다.

최근 또다른 젊은 천재작가인 이사야마 하지메는 이러한 아이디어의 지상버전인 [진격의 거인] 이라는 작품을 연재중이기도 하다. 이 작품 역시 [신세기 에반게리온] [마크로스]는 물론 [시도니아의 기사] 와 날 것 그대로 비교당하며 물어뜯기고, 찬사를 받는다. 

UFC 파이터들이 8각의 '옥타곤' 이라는 틀 안에서 맨주먹으로 피를 철철 쏟으며 우열을 가리듯, 장르 만화가들은 비슷한 소재와 플롯 안에서 참신한 아이디어와 절절한 드라마, 송곳같은 유머센스로 독자들을 공략해 나간다.

[시도니아의 기사] 는 1,2권만을 통해 그 안에서 자신이 어떤 무기를 선택했는지 명확히 보여준다.

과연 그 위에서 [시도니아의 기사] 는 어떤 드라마를 보여줄지, 벌써부터 기대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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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인지킹의 후예 - 제18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이영훈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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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포세대' 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우연히 인터넷 기사에서 이 단어를 읽고 나는 우선 웃음이 먼저 나왔다. 황석영 작가의 [삼포 가는 길] 이 가장 먼저 떠올랐고, 군대에서 전자렌지에 돌려먹었던 [삼포만두]도 생각났다. 그리고, 내가 군대에서 근무했던 부대의 이름도 177대대 3포대여서, 같은 대대 예하의 포대끼리 매일 아침 무선 통신망 점검을 할때 다른 포대원들이 '삼포,삼포' 하고 우리를 찾곤 했다. 

입가에 떠올랐던 미소는 기사를 읽는 순간 급격히 사라졌다.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삼포세대는 세가지를 포기한 세대였기 때문이다.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세대. 기사에는 등록금을 충당하기위해 알바에 매진중인 20대 대학생과, 20대 말미에 간신히 취업에 성공해서 학자금 대출 갚기에 여념이 없고 몇년동안 연애하던 연인과는 경제적인 문제로 결혼을 할 수 없어 이별에까지 이른 30대 직장인과, 결혼비용과 전셋값 대출 갚기에 여념이 없는 신혼부부의 인터뷰가 실려있었다. 그리고, 기사에는 가정형편이 좋지 못한 20대와, 취업을 하지 못한  30대는 그나마 이런 고민조차 할 수 없을거라는 기자의 소감이 짤막하게 실려있었다. 

 윗세대 선배들 중 혹자는 우리 세대가 배부른 소리나 하고 앉아있는 나약한 세대라고 비웃기도 한다.

IMF를 중고등학교때 맞이했던, 우리들 88만원 세대는 이제 삼포세대로 진입했다.


 '체인지킹의 후예' 

이 책을 넘겨가던 나의 표정도, 삼포세대의 기사를 읽던 때 처럼 서서히 일그러져갔다.

작품의 초~중반까지의 이야기는 비교적 순탄하고, 매끄럽다. 

영호와 채연의 만남은 업무상 필연이었고, 머리를 싹 밀고 나타난 채연의 외모는 영호에게 당연히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영호는 채연에게 강렬한 인상, 그 이상을 남겼고, 그로 인해 영호에겐 느닷없이 8살 연상의 아내와 아들이 생긴다. 

그와 발맞춰 영호에게는 '안'이라는 사람과 업무상 껄끄러운 일을 함께 맡게 되고, 채연의 아들이자 이제 호적상 자신의 아들이기도 한 샘과 침묵의 갈등이 생겨난다.

그 갈등을 풀어낼 유일한 실마리는 샘이 탐닉하는 특촬 전대물 [변신왕 체인지킹] 이라는 허접한 아동용 드라마.  

그렇게, 작품의 중반쯤 부터 이야기의 흐름은 영호와 안 , 영호와 샘 그리고 영호와 체인지킹의 세 축으로 나뉘게 된다. 


 이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현재 주인공 이영호와 비슷한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세대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작품은 사실 작품 안의 이야기 자체만으로도 상당한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고, 그 안에서도 충분히 할 이야기가 많지만, 결국 안 - 영호+민 - 샘으로 연결되는 세대의 흐름을 간과할 수 없었다. 결국 작가가 이야기하려는 부분도 사회와 세대에 대한 것이라고 느껴지기도 했다. 

 주인공 영호는 보험회사의 심사팀 직원이다. '보험'이란 사고를 대비해 들어놓는, 일종의 공포를 이용하는 금융상품이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미리 생각하고, 미리 걱정하고, 미리 고민해서, 미리 대비를 해 놓으라는 마케팅을 파생시킨다. 우리의 수많은 선인들은 일어나지도 않은 일은 미리부터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누워있을때 앉을 것을 생각하지 말고, 앉아있을 때 일어설 것을 생각하지 말고, 일어섰을 때 달릴 것을 생각하지 말라." 고 했다. 수많은 종교들은 '현실에 충실할 것' 을 설파하지만, 보험은 그와 정확하게 반대편에 서 있는 '상품'이다. 현대인들은 생각보다 많은 돈을 보험에 쏟아붓는다. 그렇다고 우리 사회가 과거 보험이라는 제도가 없을 때보다 더 위험한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평균수명은 더 늘어났고, 삶의 질은 더 좋아졌으며, 인구도 훨씬 더 늘어났다. 하지만, 사람들은 끊임없이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두려워한다. 환경과 자연, 지구의 미래에 관한 걱정은 그럴 수도 있다. 우리가 그만큼 많이 파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질병, 사고, 자연재해 등은 사실 돈으로 피할 수 있는 성질의 것들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끊임없이 돈을 보험에 쏟아붓고, 그 돈은 고스란히 대기업들이 배를 불리우는데 사용된다. 우리가 내는 대부분의 돈은 우리의 미래를 보장하기보다 수많은 성과급, 행정처리업무, 주식투자등 대기업의 '현실' 을 위해 활용된다. 영호를 우리 세대 전체의 메타포, 아이콘으로 이해한다면 영호가 몸담고 있는 보험사는 지금 이 사회 시스템의 메타포라고 이해할 수 있다. 우리 세대는 돈은 물론 노동력마저도 고스란히 부조리한 사회에 바치고 있다. 보험 그 자체가 부조리이고, 비합리이며, 불공정이고, 무가치한 단순한 철망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를 꽁꽁 얽어매고 있는 튼튼한 철조망. 그래, 영호가 무서워하는 바로 그 철조망. 


 자, 계속 그렇게 읽어나가보면, 영호와 함께 등장하는 보험사 직원 '안' 은 우리보다 10년쯤 윗세대, IMF를 신입사원으로 겪은 세대를 대변한다. '아버지' 보다는 약간 아랫세대로써 첫째 형님 같은 역할이다. 안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사회가 주는 맡은 바 소임을 충실히 다해내지만, 언제나 사회로부터 내쳐지고 고통받는다. 영호가 우리세대의 아이콘이라면, 안은 지금의 40대. 학생운동의 말미를 장식했던 선배들의 아이콘이다.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고 파헤치려고 노력했던. 결국 노무현 정권을 만들어냈지만, 이명박 정권을 무너뜨리지는 못했던. 하지만, 언제나 우리 세대에게 자극을 주고, 싸우라고 조언하기를 그치지 않는,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사회와 타협하고, 살길을 찾아나가는. 딱 10년 정도의 윗세대들. 영호도 안도 사회의 부조리함 안에서 헤어날 수 없는 존재들이다. 


"우리는 아버지 없는 세대의 마지막 생존자야."

p.276


안도, 영호도 모두 아버지 없는 생존자들이다. 안은 아버지 없는 생존자의 마지막에서 두번째 인 셈이고, 영호와 우리 세대는 아버지 없는 세대의 마지막 생존자인 셈이다. 


그렇다면, 샘을 보면서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

그렇다.

광우병 파동때 촛불을 들고 나온 고등학생 아이들이다.


"변신왕을 보는 동안 그애는 직감했을 거야.

아버지가 없는 자신의 마지막을. 비로소 깨달은 거지. 자신에게 살아갈 방법을 가르쳐줄 사람은 없다는 걸.

그애는 이제 스스로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려는 거야. 맞설 준비를 하는 거지. 이 세계의 압력에. 그 확연한 질감에 맞서 자신의 인력을 찾으려는 거야.(...) 어쨌거나 그애는 이제 걸음을 뗀 거야. 굉장하지 않아? 그렇게 어린 나이에. 누구의 인도도 받지 않고 스스로."

p.276


얼마 전 있었던 대선 결과처럼 우리 세대는 확실히 아버지가 없는 세대가 되었다.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세대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많은 부모들은 자식들의 많은 시도에도 불구하고 자식들을 위한 길을 밝히짐 못했다. 이번처럼 세대간 공약이 갈린 대선판도 없었다. 무엇이 자식들을 위한 길이었을지는 보수 지지층도 잘 알고 있었을터다. 

대통령 한명으로 사회가 얼마나 많이 바뀌는지 우리는 충분히 경험했다.

대통령 또한 나라의 아버지라면, 분명 우리 세대는 그로부터도 버림받는 세대가 될 것이 자명하다.


 한 세대 전체가 비슷한 특질을 가지게 되는 데에는 당연히 사회 전체 구성원들의 역할이 크다. 급격한 산아제한, 마구잡이식 경쟁구도, 불합리한 권위주의, 불공정한 교육 시스템, 충분치 못한 최저 생계 보호 수단...우리 세대는 그 안에서 갈피를 못잡고 이리저리 우왕좌왕 끌려다니기만 했다. 영호가 어린시절 엄마와 철조망에 관한 경험으로 치명적인 트라우마가 생겼듯, 우리 세대에게는 권위에 대한 공포가 마음 속 깊히 자리잡고 있다. 사회는 더 영악해져서 형님 세대처럼 권위에 대항할 마음의 싹을 잘라버렸다. 세대간 경쟁을 심화시키고 밥줄을 움켜쥐었다. 우리는 아버지처럼 살 수 없었다. 그래서는 안되는 세상이 되었다. 결국 우리는 우리의 세상 안에 틀어 박혀야 했다. 그게 무엇이 되었든지간에. 스스로를 보호해야 했다. 혼돈의 세대였다. 귄위주의와 탈권위주의,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모든게 조금씩 조금씩 다 섞여있는 혼돈 속에서 태어나고 자란 세대이다. 

 우리 다음 세대는 다행히 좀 더 진화한 세대였다. 그래. 체인지킹 처럼.

그리고 그들의 판은 우리의 형님 세대- 캐물어 따질 줄 알고, 때로는 몸에 칼빵을 맞을 줄도 알고, 소싯적엔 돌도 들어보고 각목도 들어보고, 경찰한테 욕도 해봤던 바로 그 - 와 우리세대가 확실히 연합하여 짜 주어야 한다. 영호는 안의 도움 덕에 조금은 '살벌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영호와 같은 우리 세대의 또다른 아이콘인 '민' 역시 조금씩 스스로의 세상을 무너뜨리고 '우리' 사회를 바라보게 된다. 그렇게 세대간의 교류와 공감, 그리고 사회에 대한 대면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시청앞에서 수일동안 벌어졌던 반값 등록금 집회를 떠올리면 된다.

 40대인 탁현민 교수가 판을 벌여주었다. 30대인 김제동씨가 전면에 나섰다. 그리고 그 판 위에서 20대 초반의 대학생들이 웃으며 구호를 외치고, 춤추며 구호를 외쳤다. 그렇게 우리는 서울 시장을 바꾸었다. 서울 시립대학은 바로 반값 등록금이 시행되었고, 서울의 가난한 학생들은 물론 지방의 가난한 학생들까지 선호하는 대학이 되었다. 알바할 시간에 더 많은 걸 할 수 있게 되었다. 등록금을 위한 알바가 아니라 베낭여행을 위한 알바가 가능해졌다. 쪼들리는 돈을 메꾸기 위한 알바가 아니라 청춘의 풍요를 즐기기 위한 알바가 가능해졌다. 학자금 대출이 필요 없어졌다. 학자금을 갚는데 걸리는 기간은 졸업후 평균 2~3년이다. 평범한 남자가 대학 입학부터 군대, 졸업까지 공란없이 달렸을때, 그 직후 망하지 않을법한 회사에 입사해 열심히 일했을때 - 30살은 되어야 그나마 통장이 0 가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정도로 뭔가 엄청나게 많이 바뀌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렇다고 '안' 과 형님세대를 무조건 옳다고 할 수 만은 없다. 

영호도 안을 보고 캐묻고 따지고 대들 수 있어야 한다. 영호는 윤필의 가족을 보며 의아함을 느끼지만, 좀 더 깊이 파고들지는 못한다. 하지만, 언젠가 비슷한 일이 다시 생긴다면. 그 때는 많이 다를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세상은 조금씩 바뀔 것이다. 


 [체인지킹의 후예] 속에 등장하는 '변신왕 체인지킹' 은 살아남기 위해 아버지까지 스스로 죽이게 된다.

무한 경쟁이란 바로 그런것이다. 내가 '마지막 생존자' 가 되어야만 하는 바닥.

다 함께 살 수 있다.


손을 내려 샘의 손을 잡았다.

아주 작은 손이었다. 그 손은 땀에 젖어 끈끈하고 따뜻했다.

고개를 들었다. 입을 벌려 바람을 마신 후 샘이 말했다.

"심장소리가 들려."

다시 크게 심호흡을 하고,

"내 소리와 다른 심장소리가."

샘일 말했다.

샘을 돌아봤다.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나. 어떤 이야기가 필요할까.

천천히 입을 열었다.

"생명의 힘으로."

가만히 있었다.

"힘을 모아."

샘이 말을 받았다. 우리는 피식 웃었다.

p. 388~389


그래. 그러면 된다.

손을 잡고.

서로의 심장소리를 듣고.

생명의 힘으로,

힘을 모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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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해지지만 않는다면 괜찮은 인생이야 - 삶의 본연을 일깨워주는 고요한 울림
세스 지음, 최세희 옮김 / 애니북스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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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리뷰는 제가 전에 썼던 리뷰를 [알라딘 8회 리뷰대회] 참여를 위해 보완하고 다듬은 리뷰입니다. 




  만화의 시작을 이야기 할 땐 회화와 함께 알타미라 동굴 벽화가 언급된다. 미국이나 영국등 서구 사회에서는 유수의 언론들이 '올해의 픽션', '20세기에 꼭 읽어봐야 할 픽션' 같은 것을 뽑을 때, 주제 사라마구나 엘프리데 옐리녜크 같은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들의 문학 작품들과 함께 앨런 무어나 프랭크 밀라의 그래픽 노블들이 함께 뽑히기도 하고, 프랑스나 독일 같은 나라에서는 대형 서점의 '회화' 코너에 진열되어 있기도 하다. 그 뿐 아니라, 그래픽 노블 원화들로 이루어진 미술 전시장도 있고, 그런 원화들은 미술가들의 회화 작품과 비슷한 수준의 가격으로 거래된다. 뿐만 아니라, 그런 그래픽 노블의 스토리를 집필한 작가들은 상당한 수준을 지닌 '라이터Writer' 로 인정받고,  공을 많이 들이는 그래픽 노블 프로젝트의 경우엔 오히려 이미 충분히 검증받은  유명한 소설가를 스토리 작가로 픽업해서, 우리 식으로 말하면 '만화 스토리' 를 쓰게 한다. 

 반면, 일본 '망가' 의 영향을 받아 '만화' 로 발전한 우리나라에서 만화는 그저 아이들이나 한번 보고 재활용 휴지통으로 내보내는 무의미한 유희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예술'의 범주에 넣을 것이냐 말 것이냐는 오히려 너무 앞서간 논쟁이며, 어떤 사람들과 어디서 누가 논쟁을 벌여야 하는지도 명확하지 않다. 확실한 건, 한국에서 만화가는 예술가에 포함되지 않고, 한국예술가협회에 가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생각하는 '만화' 와 미국과 유럽 등 서구사회의 '만화' 는 개념이 완벽하게 다르다는 의미이다. 우리에겐 예술이냐 아니냐를 두고 다투는 정도의 것이지만, 그들에게 이미 만화는 예술분야 - 회화이며 문학이다. 최근들어 웹툰으로 인해 책들이 좀 더 고급화 되고, 영화, 드라마화 등 멀티 유즈가 활발해지며 조금씩 그 위상이 높아져 가고 있긴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만화는 아직 '킬링 타임용 무료 서비스 컨텐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런 한국 독자들에게 이 작품은 매우 충격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아마도 대부분의 독자들에게도 그랬을 - 아주아주 생소한 캐나다의 작가 '세스' 는 자기 고백적인 작품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이 작품 역시 만화가인 스스로를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잭 캘로웨이' 라는 만화가의 삶을 뒤쫓는 내용이다. 

 가족들과 크리스마스 휴가를 보내기 위해 '온타리오 런던'(캐나다의 한 도시)에 도착한 세스는 중고서점에 들러 옛 잡지들과 단행본을 구입한다. 한 세대쯤 전의 옛 잡지들을 보던 세스는 '캘로' 라는 작가가 그린 카툰에 푹 빠지게 된다. 하지만, 그 작가의 작품은 한두작품 외에 눈에 잘 띄지 않았고, 검색되는 작품도 별로 없었으며, 만화가들의 이름과 작품이 소개되어있는 일종의 만화가 인명사전에서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세스가 캘로의 작품을 발견했던 지면은 당대 최고의 카투니스트만이 작품을 기고할 수 있었던 잡지였다. '캘로' 는 만화가로서 재능을 인정받고, 나름대로 성공한 작가였던 것이다. 하지만, 어떠한 기록도 없고, 작품집도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이 의아했던 세스는 '캘로' 를 직접 찾아보기로 한다.    


 작품은 대체적으로 정적이고, 내레이션과 독백, 대사가 많은 미국식 그래픽 노블의 전형을 따르고 있다. (유럽풍은 반대로 그림이 많고 대사가 적다.) 그림체는 단순하고, 2도 인쇄로 꽤나 독특한 느낌을 준다. 작풍과 이야기, 메시지와 아주 잘 어우러진다. 

이 작품을 읽어나가는 동안, '폴 오스터' 의 [환상의 책] 이 떠올랐다. 하루아침에 가족을 잃고 삶의 모든것을 잃어버린 중년의 남자가, 한 세대 전의 코미디언 '헥터 만' 을 찾아 떠나는 이야기와 스스로를 구제불능에 외골수라고 여기고, 만사가 우울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세스가 한 세대 전의 만화가 '캘로' 를 찾아 떠나는 이야기는 묘하게 닮아있다.   

 [약해지지만 않는다면 괜찮은 인생이야]는 그보다는 좀 더 쉽고, 편하게 다가온다.


주인공 '세스' 를 보는 내내 내 자신이 아주 많이 이입되었다. 자신의 여러가지 단점들을 잘 알고있고, 외골수에, 가끔은 우울해하고, 크게 만족하지 못하지만, 크게 부족하지도 않은. 평범하고, 보통의 젊은 남자. 만화를 그리는 사람이며, 그걸 무척 좋아한다는 점도 비슷하고, 중얼중얼 불평 불만이 많은 것도 비슷하다. 가끔은 친구가 영화를 보러 가자그러면 주머니에 돈이 없어 거절할 때도 있다는 점까지.

만화가로서의 삶은 생각보다 그리 기쁘고 즐겁지 않다. 수시간동안 애써서 그린 그림은, 그냥 종이 한장에 불과하다. 디지털 작업이 많은 요즘엔, 수시간동안 애쓴 그림은 그냥 Delete 키 하나면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 처럼 사라지고, 며칠동안 그려서 올린 만화는 스크롤 몇번이면 끝나버리고, 허허한 댓글 한두줄로 대가를 지불받는다. 지금까지 내가 그려온 그림들 역시 나이먹고 이사다니는 사이에 폐휴지가 되어 어디론가 사라졌다. 대부분의 만화가와 미술가, 소설가들은 그렇게 사라져간다. 


"한 생 다 살고 나면 결국 이깟 종이 몇 장 남고 끝이란 말이야?"

p.108


세스가 찾아나서는 '캘로' 는 어쩌면 세스 본인의 미래의 모습일 수도 있다. 

태어나고, 꿈을 꾸고, 그 꿈을 좇다가, 어느정도 지점에 오르지만, 포기하고, 다른 길을 찾고, 가족을 이루고, 죽고. 

세상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이다. 


"인생은 좋은 선택과 나쁜 선택의 연속이 아니야.

흔히들 생각하는 것처럼 이 방향으로 간다고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저 방향으로 간다고 갈 수 있는 것도 아니야.

그냥 끌려 다니는 거지. 지난 날들을 돌이켜보면 '좀 다르게 살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게 마련이지만, 그것 정말 보통 의지로는 안 되었을 걸세. 그게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그러려면 정말 어마어마한 의지가 필요했을거야."

p.155


팀 보울러는 [리버보이] 라는 작품을 통해 도도히 흐르는 강물에 몸을 맡긴 소년을 통해, 그냥 그렇게 흘러갈 수 밖에 없는 것이 인생임을 에둘러 표현했다. 세스 역시 캘로를 찾아다니던 도중에 만난 캘로의 늙은 이웃에게 비슷한 뉘앙스의 한마디 말을 듣는다. '그냥 끌려 다니는 것. 그것이 인생'. 그냥 흘러가는 것. 그것이 인생. 


그렇다.

삶이란 사실,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니고, 사람이란 그리 거대한 존재도 아니다. 심지어 자기 삶 안에서도 말이다. 

우리가 '꿈' 이라고 거창하게 말하는 것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산다는거? 분명 축복받은 일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게 완전한 삶의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삶은 주로 작고, 소소하고, 하찮아보이는 일들의 반복으로 채워지고, 나머지도 어쩔수 없이 해야만 하는 일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이 제목에 더 공감이 가는지도 모르겠다.

작고 소소하고 하찮아 보이는 인생이고, 인간이지만 지나치게 우울해할 필요도 없다. 

딱히 강해질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딱히 지나치게 아둥바둥 발버둥 칠 필요 없다. 아프면 아파하고, 슬프면 울고, 미우면 미워하고, 기쁘면 기뻐하고, 행복하면 행복해하고, 사랑스러우면 사랑하고, 즐거우면 즐거워 하면 된다.  강해지려고 발버둥 치면 칠수록, 더 좌절하고 더 고통스러워질 뿐이다. 그리고 사실 그다지 강해지지도 않는다.

그저 약해지지만 않는다면,

제법 괜찮을 수 있는게 인생일터.


작품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 하다.

너무 아둥바둥 할 필요 없다고. 

약해지지만 않는다면

괜찮은 인생이니까, 

딱 서서, 

버텨보자고.


 

  

p.s 최근 국내에도 웹툰을 통해 자신의 자전적인 -신변잡기적인- 작품을 그리는 작가나 지망생들이 많은데, 그들에게도 일독을 권할 만하다.

자전적인 만화라고 주구장창 얼굴만 나오는, 독백과 내래이션만 나오는 만화는 '만화' 로서 좋은 작품이라고 하기는 힘들 테니. 이 작품은 '진짜' 자전적인 만화의 진수를 맛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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