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기의 끝 그리폰 북스 18
아서 C. 클라크 지음, 정영목 옮김 / 시공사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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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필요없는 최고로 사색적인 상상력의 절정을 보여주는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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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리맨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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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최고라 손꼽아도 부족함 없는 명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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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기의 끝 그리폰 북스 18
아서 C. 클라크 지음, 정영목 옮김 / 시공사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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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왜?"

사람은 누구나, 어떤 일이 벌어졌을때 "왜?" 라는 의문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

이유가 무엇인지, 원인지 무엇인지 알고싶어한다.

특히, 연애할 때 수천번 수만번 듣는 질문이 바로 이 "왜?" 일 것이다.

물론 대한민국 역사에 수천번 등장하는 그 "왜" 는 절대 아니다. 그런 쪽발스러운 한자어를 '사람은 누구나' 로 시작되는 문장 안에 넣을 이유는 지구가 두쪽, 아니 만쪽이 나도 있을 리 없다. 

인류의 위대한 선각자들은 가끔은 "왜??? 왜요??? 왜인가요???" 라고 물어대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대답하곤 했다.

"야 일단 믿어. 묻지 말고 믿어. 외워!! 무조건 외워!!  그게 바로 믿음이야!!! " 

라거나 

"야 너 지금 시장통에서 독화살 한대 맞은 사람이야. 치료부터 해야지, 누가 왜 내게 독화살을 쐈을까? 고민하지 말란말이다~~!! "

 

 인류가 갖고 있는 수많은 욕구들 중 가장 강력한 건, "지식욕" 이라고 생각한다.

조금 더 넓은 의미로 풀어본다면 "정보를 수집하고자 하는 욕구" 일터다. '수집' 이라는 단어에는 정리해서 기록하는 것을 포함한다. 

인간은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동물들 중 가장 약하고, 가장 복잡한 시스템으로 조립되어있다. 이게 얼마나 복잡한지, 아주아주아주 작은 한 부분만 이상이 생겨도 외모가 변할 정도로 큰 이상이 나타난다. 예를들어, 유전자 염기배열이나 신경줄기들 중 하나, 림프샘 같은. 말도 안되게 작고 어처구니 없이 미미한 변이가 신체 전반의 큰 변화를 가져온다. 인간들은 이러한 모든 것에 "왜?" 라는 호기심을 가졌고, 그 무한한 지식욕을 발휘하여 엄청난 양의 정보들을 쌓아대기 시작했다. 특히 인류의 생존 그 자체와 관련된 정보들은 개인의 의지에 관계없이 유전자에 자동으로 저장된다. 인간들은 이러한 점에 착안하여 인간의 두뇌와 엄청나게 비슷한 연산 시스템을 갖춘 기계를 개발했다. 이 과정  역시 정보수집에 대한 욕구에 의해 발현된 것이다. 인간의 뇌 용량으로 저장할 수 없는 엄청나게 많은 것들을 저장하고, 연산을 통해 예측한 정보를 원한 것이다. 인류의 생존에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지식과 정보이다. 

 

 그렇다면, 과연 인류는 어떤 방향과 어떤 모양으로 진화하게 될까?

 

SF라는 장르가 탄생한 근본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사회적, 생물학적, 물리적, 화학적. 모든 과학적인 상상력을 동원하여 그려보는 것이다.

인류의 미래를.

 

 소위 'SF의 3대 거장Grand Master' 이라 불리는 이들이 그 거대한 칭호를 획득한 것은 그들이 작가의 영역을 벗어나 '과학적 상상력' 의 극한으로 실제 일어날지도 모르는 진짜 미래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3대 거장인 아이작 아시모프와 아서 C 클라크, 로버트 A 하인라인은 모두 실제로 일가를 구축한 뛰어난 과학자들이었다. 각자 자신의 영역에 특화된 작품들을 선보였는데, 특히 아서 C 클라크는 우주와 행성 전문가였다. 영국 왕실 천문학회와 영국 영국 행성학회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고, 2차 세계대전 중에는 레이더 장교로 복무하며 최초의 인공위성이 발사되기 12년 전에 이미 정지궤도상에 위성을 띄워 통신에 이용하는 저서를 발표해 큰 관심을 받았던 인물이기도 하다. 그 밖에도 우주 정거장이나 인터넷과 비슷한 개념의 광범위 쌍방향 통신 수단, MP3와 같은 음악 재생기등을 입안한 뛰어난 과학자였다. 아이작 아시모프의 '로봇' 개념이 실제 로봇공학으로 연결된 것은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이다.

  아서 C 클라크는 과학 지식과 판타지 전반을 아우르는 SF라는 장르 안에서도 소위 '하드 SF' 라 불리우는 세부 장르 안에서는 거의 신적인 존재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하드 SF' 란 말 그대로 엄격한 과학 지식 토대 안에서 펼쳐내는 이야기를 말한다. 

당시의 SF소설들은 대부분 비슷한 기조를 갖고 있었다. 수많은 매니아들이 작가의 작품 발표회를 찾아가 과학적 오류를 지적하며 질문을 퍼부면서 작가의 진땀을 쏙 빼놓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아서 C 클라크는 후대의 SF작품들을 평가하는 지나치게 높은 기준점이 되기도 해서 과학적 지식을 어느정도 무시하고 우주를 날아다니며 로맨스와 스펙타클을 추구하는 '스페이스 오페라' 라는 또다른 세부 장르가 탄생하는데 일조를 하기도 했다. 

 아서 C 클라크는 특히나 외계 문명과의 조우에 관해 다루는 것을 좋아했으며, 최후의 순간까지 외계 문명의 존재를 굳게 믿은 것으로 잘 알려져있다.  적의가 있는지, 선의가 있는지 알지 못하는, 정말 아무것도 알 수 없는 미지의 문명과의 조우. 그리고 그 미지의 문명이 인류의 미래에 끼칠 지대한 영향. 

 [유년기의 끝] 은 그런 경향을 무척 잘 드러냄과 동시에, 제목 그대로 인류 진화의 최종형태를 고민하게 한 작품이기도 하다.

 

어느날 아침, 눈 떠 보니 전 세계의 주요 도시 위에 거대한 원반들이 꽉 차 있다.

지금은 '외계인의 침공' 하면 누구나가 상상하는 장면이지만, 도시의 전체를 꽉 채울 정도로 거대한 원반에 대한 상상과 달 뒷편에 위치한 외계인들의 중계기지와 같은 발상은 아서 C 클라크가 최초다. 

그렇게 세계 주요 도시 위에 그 도시만큼 거대한 원반을 띄움으로써 지구를 점령한 외계인 종족은 스스로를 '오버로드' 라고 부르는 종족이었다. 그들의 목적은 인간을 섭식하거나, 지구의 자원을 강탈하거나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순수하게 인류의 번영과 행복을 추구한다. 엄청난 과학력으로 인간들의 무기는 그 어떠한 것도 통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버로드는 무력으로 인간을 제압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이 진정 인류에게 해악을 끼치지 않으려는 의도는 "인간들끼리 서로 죽여도 좋소. 하지만 당신들이 음식이나 방어 외의 이유로 다른 동물을 죽인다면 당신들에게 책임을 물을것이오." 라는 명령과 그 책임을 묻는 방식에서 드러나게 된다. 오버로드가 투우를 즐기는 스페인 투우경기장의 관객들을 징벌한 일이었는데, 모든 관중들을 투우장 한 가운데의 황소와 공감을 시키는 방법을 사용한 것이다. 투우사의 창이 황소의 몸에 닿는 순간, 그 고통을 경기장 안에 있는 모든 관중을 다 함께 느끼며 비명을 지른다. 얼마 시간이 지난 후 관중들은 자신의 몸에 아무런 이상이 없음을 알아채지만 그 이후 지구상에서 투우는 사라지게 된다. 오버로드는 인간들이 어리석은 영토분쟁과 자원고갈로 스스로 이룩한 문명들을 파괴하며 자멸해갈 것을 방지하는 진정한 보호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실제로 인류는 오버로드의 관리 감독하에 세계연방을 이룩하고, 그에 반대하는 운동가들과 대치하기도 하지만 차근차근 진화의 단계를 밟아나간다. 

 

인간의 문명은 사실 전쟁을 통해 급진적인 발전을 이뤄냈지만, 그렇다고 인간 문명의 발전에 전쟁이 반드시 필요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속도 차이는 있었겠지만, 인간들은 모두가 지극히 순수한 지적인 욕구가 존재하고, 전쟁이라는 비정상적으로 폭력적인 시기를 만나 수집한 정보와 지식들을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타인을 죽이는 방향으로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전쟁이 없었으면, 로켓은 달로, 우주로 나가기 위한 용도로 활용되었을 것이고, 인공위성은 통신과 탐사의 용도로 활용되었을 것이다. 무인 정찰기와 로봇은 지금보다 훨씬 빠른 시기에 미지의 행성들에 보내지거나 재난 현장에 투입되었을 것이며, 해저 깊은 곳에 있는 풍족한 자원들을 발견하고 개발하는 데에 사용되었을 것이다. 오버로드의 점령은 인간의 다른 욕구들을 제어하고, 지식적 욕구를 통한 종의 진화를 앞당기는 방아쇠가 된다. 

 

이 작품 전에 인류 진화의 최종 형태를 묘사했던 작품을 두 작품 만난 기억이 있다.

우선 배명훈 작가의 [신의 궤도] 에서는 우주 여행을 위해 최적화된 최종 진화형태가 등장했었고, 아서 C 클라크와 공동 작업을 하기도 했던 스티븐 백스터의 [타임십] 에도 등장을 한다. 

(한편, 현대 SF작품인 존 스칼지의 [노인의 전쟁] 시리즈에서는 우주 전쟁에 최적화된 진화형 인간이 등장하기도 하는데, 현대 SF에서 인류의 진화에 대해 깊이 다루는 작품은 보기 힘든게 사실이다. 또한 스타니스와프렘은 [솔라리스] 에서 거대한 행성으로 진화한 외계 종족을 그리기도 했고, [사이버리아드] 에서는 조물주를 거대한 인공지능 연산장치로 표현하기도 했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겠지만, 과연 인류는 앞으로 어떻게 진화할지 깊이 고민해본 적이 있다. 정말로 서로 싸우다 자원도 다 써버리고 결국 절멸할 것인가, 아니면 평화로운 공존공영을 통해 우주로, 우주로 나아갈 것인가. 인류가 우주로 나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구 안에서 모든 분쟁을 끝내야만 한다. 각 국가의 소모적인 군비경쟁이나 무의미한 자원소모는 우주에 대한 꿈을 끊임없이 녹여낼 뿐이다.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는 분명히 다르다.

다른 동물들은 끊임없는 투쟁을 통해 진화하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다. 인간 또한 끊임없는 투쟁을 통해서만 진화한다면, 왜 인간에게만 지성이 있을까? 지구에 있는 모든 종족들을 말살하고 혼자 살아남기 위해 생긴 지성일까? 지구의 모든 자원을 소모하고 함께 죽어가기 위해 생긴 종족일까? 자아를 깨닫고, 타자를 인지하고, 완전한 타자를 맹목적으로 사랑하고, 스스로를 희생할 수 있는 선한 마음들은 단지 인류의 보전만을 위해 발달한 돌연변이일까?   

 인류의 존재 의미에 대해서는 수많은 철인들이 고민해왔고, 가장 편한 대답은 '신' 이었다.

신을 위해 살고, 나아가 타인을 위해 산다. 하지만, 그 길은 너무나 힘들고 괴로운 길이기에 '신의 길' 이다. 남을 위해 죽음을 각오하는 일은, 세상의 그 어떤 인간에게도 쉽지 않다. 때문에 '희생' 이라는 덕목은 인류에게 가장 고귀한 가치이다. 모든 욕망과 본능을 이겨내는 유일한 능력이다. 희생이야말로 인간 지성의 정점이다. 

 이 작품 안에서는 인류의 최종 진화형과, 지성의 최종 진화형이 동시에 그려진다. 


SF는, 누구나 '허무맹랑하다' 고 촌평한다.

그 허무맹랑함은 무엇에 기준하는가??

그렇다면, 순문학은, 결코 허무맹랑하지 않을까?

오히려 SF는 독자들이 기를 쓰고 '현실에 빗대고자' 한다.

바득바득 '야 이 소설에서 1998년엔 인공지능 로봇이 나온다잖아. 근데 안나왔어. 그러니 허무맹랑하지.' 라고 한다. 

'야 이 소설은 배경이 2010년인데, 핸드폰도 안나와' 라고 한다. 물론 그 소설들은 대부분 1950~70년대에 쓰여진 소설이고. 

외려 SF는 지나치게 현실과 맞닿아있는 장르이다. 뛰어난 과학지식을 갖고 그에 걸맞는 통찰력을 지닌 작가들은 현실과 상상을 절묘하게 이어주며 과거와 현재, 미래를 향한 등불을 밝혀준다. 동시대의 수많은 독자들이 SF를 통해 미래를 상상하고, 우리는 도저히 볼 수 없는 세계를 그리게 해준다. 그를 통해, 누군가는 소설의 세계를 현실에 구현시킨다. 이처럼 현실과 밀접하게 닿아있는 문학장르가 있을까??

바로 이 작품. [유년기의 끝] 은 대담하게 인간에게 조물주의 정체를 묻고, 범인류적인 평화의 방법을 모색하며, 나아가 인류의 마지막 모습을 그려낸다. 

물론, 상상력이 부족한 사람이라면 결코 따라갈 수 없는, 엄청난 세상이 그려진다.

가끔은, 동네, 나라, 지구, 달. 나아가 무한의 우주와 인류의 잠재능력을 향해 시선을 돌려봐도 좋지 않을까?

실제로, 우주의 끝을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은, 지구상에서 인간에게만 가능할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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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 2 (완결) 노아 2
대런 아로노프스키 & 아리 헨델 지음, 이현희 옮김, 니코 앙리숑 그림 / 문학동네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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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혹시...혹시 이 세상에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편이 더 나은 건 아닐까? 

어쩌면 조물주께서는 우리가 함과 야벳에게 짝을 찾아주는 걸 바라지 않으실지도 몰라.

여기 이 동물들을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주는 것. 그걸로 인간의 임무는 끝인 거야.

그리고 인간은 사라지는 거지.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

 

1권 100~101p

 

 

우리는 살아가며 가끔씩 - 아니면 매우 자주 - 생각한다.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엄마 뱃속에서 나와서 무덤 속으로 간다는 매우 명쾌한 답이 있지만, 이 질문의 본질이 그것뿐이 아님은 모두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필이면 우리에겐 사유의 능력이 존재한다. 만약 이 능력이 없었다면, 엄마 뱃속에서 나와서 무덤 속으로 간다는 답 만으로 모두가 만족했을 텐데. 이와 거의 비슷하지만 만인에게 공감대를 끌어내는 답이 있다.

'신의 손 끝에서 태어나서 신의 품안으로 간다.'  는 답이다. 

생각이고 자시고, 이렇게 믿어버리면 제일 속 편하다. 누군가 나를 만든 고차원의 존재가 있고, 그 존재가 나의 삶에 목적을 부여했으며, 나는 삶을 통해 그 목적에 부합해가기 위해 노력하면 된다. 그리고 그 목적인 수천년전에 신의 말을 들을 수 있는 어떤 사람들이 방대한 양의 책으로 남겨두었다니, 명쾌하고 속 시원한 해답이 된다. 

 

반면 '그런거 생각하지 말고 눈 앞의 현실에 집중해' 라고 일갈한 성인도 있다.

'시장통에서 독화살에 맞았는데, 치료하기는 커녕 독이 퍼져가는 상황에서 독화살을 쏜 사람을 찾고 있는 격' 이라고 일깨워 주셨단다. 

 

인간을 만든 상위 존재; 조물주 가 있건 말건, 문제는 직면한 '현실'이다. 

 

 

 [노아]는 기독교 세계관을 독창적으로 해석하며 성경 안의 노아 이야기를 원형 그대로 가져오되 노아가 했음직한 고뇌를 디테일하게 풀어낸다. 무엇보다 조물주에 대한 접근이 같으면서도 다른 뚜렷한 차별성을 보인다. 

기독교의 신은 세상과 인간들을 창조해내고 삶의 목적은 주었지만 '자유의지' 라고 부르는 충분한 선택권을 허락했다. 기독교의 신은 성경 안에서 인간의 부모처럼 묘사된다. 구하면 주고, 두드리면 열어주고, 부르면 응답하고, 때로는 믿음을 시험하기도 한다. 자애와 사랑의 존재이며 때로는 엄하게 회초리를 들기도 하는 대화가 통하는 인격적 존재로 받아들인다. 

 [노아] 에서의 조물주는 그렇지 않다.

작품 안에서의 조물주는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일방적으로 노아에게 환상을 통한 메시지를 전달할 뿐이다. 노아는 처음 몇번은 환상의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하지만, 신앙이 깊었기에 비로소 그 환상들이 명확한 조물주의 메시지임을 알아채고 스스로의 선험적 지식에 기인한 해석을 시도한다. 

작품 안에서의 조물주는 거대한 섭리이고, 노아는 그 섭리를 먼저 접한 선각자인 것이다. 선각자는 언제나 외롭고 고통스럽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며, 아무도 가보지 못한 곳으로 먼저 발을 내딛는 선구자, 선도자가 되어야 한다. 노아는 주도면밀하게 조물주의 환상을 해석하고, 그 메시지와 스스로의 역할을 깨달았다. 그 과정중에 살아오면서 느꼈던 인간에 대한 끝없는 불신과 인간사회에 대한 절망이 개입되며 다른 생명들에겐 구원자를, 인류에겐 심판자의 길을 선택한다. 단지 조물주의 말씀을 대신 하던 인간에서 조물주의 힘을 이용하는 대행자, 화신으로 거듭나게 된다. 

 인간의 존재 자체를 거부하기 시작한 노아는 결국 자기 자식들의 생사여탈에 관여하게 되고, 스스로가 해석한 조물주의 뜻과 스스로가 행해야 할 마땅한 행동 사이에서 고뇌하기 시작한다. 아직 다가오지 않은, 영원히 볼 수 없는 미래와 바로 두 손에 올려진. 지금 자신이 당면한 현실. 오지 않은 미래를 위해서는 그 어떤 것도 희생할 수 있는 두터운 믿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막상 희생의 순간을 직면하자 노아는 크게 흔들린다. 


 지금은 거의 발을 뗐지만, 개신교에 깊이 빠졌던 시기가 있었다.

교회활동을 열심히 하면서 봉사도 열심히 따라다녔고, 청년부 회장도 하면서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논의에 깊은 흥미를 가졌더랬다. 하지만 나는 결코 감화될 수 없는 벽이 존재했다. 그것이 그들이 말하는 '구원의 순간' , 혹은 '신을 영접하는 순간' , 또는 '접신', '만신', 그리고 ' 열반' '대오각성' 일지도 모르는, 어쩌면 모든 종교와 철학이 일맥상통하게 가지고 있는 벽일터다.

 정해진 신앙의 훈련을 착실히 받았던 노아는 결국 조물주와 완벽하게 맞닿는 순간을 경험하고 세상과 자신의 운명을 깨우친다. 노아로 인해 노아의 가족들은 구원을 받고, 새로운 민족의 기틀을 마련한다. 

그리고 누구는, 다른 길을 떠난다.  



[프라이드 오브 바그다드] 라는 작품으로 큰 찬사를 받았던 니코 앙리숑은 묵직한 이야기를 담담하게 그림으로 옮겨냈다. 동물의 시점과 시각, 화각을 자유자재로 활용한 다이내믹하고도 드라마틱한 연출이 돋보였던 [프라이드 오브 바그다드] 에 비해서는 전반적으로 평범하지만, 묵직한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한 의도로 보인다. 


 1권을 통해 예고되었던 함과 야벳의 형제간의 갈등, 함과 노아의 부자간의 갈등은 내 기대와는 다른 방향으로 풀려갔다. 개인적으로는 노아의 가족이 사방이 물로 막힌 200여일간의 표류가 보다 농밀하고 파괴적인 감정을 이끌어 내리라 생각했었는데, 뜻밖의 제3자가 개입되어 갈등의 표출이 그를 통해 표출되었다. 무엇보다 전사인 노아와 달리 함과 야벳, 셈은 너무 나약했다. 당시의 강력했던 부권을 표현하기 위한 의도였을 수도 있겠다 싶다. 노아가 조물주의 충실한 종이라면, 함은 조물주와 같은 아버지에 대항하는 구도를 좀 더 부각시켰어도 상당히 재미있는 드라마가 탄생했을 것 같다.

 1권 리뷰의 서두에도 언급했었지만, 신화는 창작자들에게 끝없이 샘솟는 영감의 샘이다. 

그 샘에서 퍼올린 맑고 시원한 한 바가지의 이야기.   

이 안에는 인간 개체의 존재론에서부터 신학, 개개인의 믿음과 행동에 관한 묵직한 화두들이 가득 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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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동물원 세미콜론 코믹스
다니구치 지로 글.그림, 오주원 옮김 / 세미콜론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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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구치 지로. 한때는 참 좋아하는 소설가인 아사다 지로와 종종 헷갈리기도 했는데, 그나마 다행인 것은 두 작가 모두 공히 자신의 분야에서 작품성을 인정받는 분들이라는 점일 터다. 나는 [신의 봉우리]로 다니구치 지로를 만났더랬다. 무척이나 남성적이고 야성적인 '산' 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하고자 하는 이야기들을 매우 섬세하게 풀어내고 있었는데, 전반적으로 차분하고 침착하다는 느낌도 빼놓을 수 없었다. 화면 가득 펼쳐진 거대한 산들은 섬세한 터치와 훌륭한 기술로 능숙하게 그려져 있었지만, 주인공은 언제나 '사람' 이었다. 산을 보여주기 위해 '산' 을 택한 것이 아니라, 그 거대한 산 등성이에 점보다도 작게 박혀 있는 '사람' 을 그리기 위해 산을 택한 것이었다.

 

 이 작품은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최근 한국에서는 웹툰이 큰 인기를 얻으며 소위 '일상툰' 이라는 자전적인 만화들이 난맥하고 있지만, 일반적으로 만화계에서 자전적인 이야기는 기량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나 가능한, 최후의 '밑천' 으로 여기는 소재이기도 하다. 물론 만화를 처음 배울 땐 자신의 이야기나 주변의 소소한 이야기들을 소재로 습작을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습작으로만 가능한 일, 철저히 '대중성' 을 담보하는 만화계에서 자전적인 이야기란 연출과 표현에 대한 완벽한 기량을 갖추지 못했다면, 불필요한 과장과 허구가 잔뜩 들어간 무늬만 '자전적' 이 되는 경우가 많다. 

 

 [겨울 동물원] 은 1998년에 발표된 작품으로 실제 섬유공장에 다녔고, 만화가 문하 생활을 거친 작가의 경험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자전적 픽션' 이다. 문학으로 치면 수필과 소설의 경계에 머물러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하면 될 듯 하다. 글의 첫머리에 언급했듯 사실적인 연출과 서정적인 드라마를 펼쳐내는 작품들로 잔뼈가 굵은 작가 답게 소소한 이야기들을 잔잔하고 능숙하게 펼쳐내고 있다. 의류 잡화 공장 직원으로 일하면서 겪은 일들과 이후 만화가 문하에 있으면서 얽히게 되는 이야기들까지. 1인칭 시점으로 동료, 가족, 선생님 등 주변 인물들과의 일화들을 담담하고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주인공 하마구치의 곁을 스쳐간 여성들. 말 그대로 '스쳐갔을' 뿐인 사람들이었지만, 그녀들과의 순정적인 일화들이 평범한 일상을 매혹적으로 바꿔내고, 하마구치의 삶에도 알게모르게 변화를 이끌어낸다.  

특히나 이 작품의 안정적인 구도와 컷 연출은 특별히 눈여겨 볼 만 하다. 자연스럽게 시선의 흐름을 잡아 채면서 손을 놓지 못하게 하는 흡인력은 오롯하게 그래픽 내러티브의 힘이다. 과장되지 않고, 무리하지 않고. 힘은 뺐지만, 한 컷 한 컷에 작가의 철저한 계산과 끊임없는 고민과 연구가 고스란히 녹아있다. 

 

 진정성은 언제나 통한다는 통설은 글월에서나 가능한 전제였다.

만화에서는? 

적어도 '자전적 이야기' 에서 만큼은 택도 없다. 자전적 이야기와 진정성은 기본적으로 폭넓은 공감을 전제한다. 그리고 폭넓은 공감이란, 디테일과 그 디테일을 극화로 활용하는 기법을 통한다. 하지만 바로 그 디테일을 잡아내고, 그것을 활용하는 능력이야말로 진정한 재능의 영역에 속한다. 그것들을 활용하는 작품이란 결코 쉽지 않은 작업이다.

만화 연출과 표현에 대해 완벽한 기량을 갖췄다면, 통한다. 통하지 않을 수 없다. 

대한민국에서 자전적 이야기를 그리는(꿈꾸는) 모든 웹투니스트들에게 꼭 권하고 싶은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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