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셋 파크
폴 오스터 지음, 송은주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3월
평점 :
품절


 몇년 전, 폴 오스터의 책만 몇만원어치를 사서 쌓아놓고 미친듯이 읽어제꼈던 후로 오랜만에 다시 접한 폴 오스터였다.

[달의 궁전] 을 시작으로 [폐허의 도시],[우연의 음악],[환상의 책],[뉴욕 삼부작] 과 [거대한 괴물]에 [어둠속의 남자] 까지 쉬지 않고 한번에 몰아 읽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폴 오스터의 많은 작품들에서는 화자인 주인공이 마치 고행을 갈구하는 구도자처럼 스스로를 지나칠 정도로 가혹하게 몰아부치는 상황들이 종종 등장한다. 


 '선셋파크' 역시 그와 같이 스스로가 일종의 '징역형' 이라고 명명한 떠돌이 생활을 하는 '마일스 헬러' 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결코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는 크나큰 죄의식속에 빠져있는 마일스는, 어느날 갑자기 주변과 모든 연락을 끊고 잠적하게 된다. 무려 7년이라는 시간동안 가족들의 곁을 떠난 마일스. 마일스는 정들었던 고향과 가족, 좋아하던 대학생활과 전도 유망하던 미래 전체를 거부하며 7년동안 미국 여기저기를 떠돌이처럼 돌아다니다가 플로리다에서 '필라' 라는 고등학생 소녀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그녀와 얽힌 어떤 사건으로 인해, 플로리다를 떠나야 할 상황이 벌어지게 되고, 그나마 오랜기간 쭉 연락을 해오던 고등학교 동창인 '빙 네이선'의 도움으로 고향 뉴욕으로 귀향하게 된다.

 뉴욕 변두리 '선셋파크' 라는 외진 동네에서도 아주 구석에 위치하고 있는 버려진 건물에 불법으로 무단점거하게 된 빙과 그의 친구들 - '엘런', '앨리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합류하게 되는 마일스. 어찌보면 '홈리스' 들이기도 한 20대 후반의 젊은이들이 각자의 사연과 절망과 희망을 안고 삶을 꾸려 나간다. 

 

 전체적인 이야기는 '마일스 헬러' 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엄청난 죄의식을 지니고 큰 상처를 입은 마일스. 그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어마어마한 죄의식은 2차 세계대전 당시의 귀환병이나 베트남 전쟁 당시의 파병 군인들과 다를 바 없다. 작품 안에서도 끊임없이 마일스가 겪은 일을 '전쟁' 과 비교하곤 한다. 과거의 죄의식에 묶여 하루하루 지옥같은 삶을 '연명' 해나가는 마일스. 마일스가 작품 초반 가지고 있던 직업인 "주택보존 서비스" 가 버려진 집들을 정리하는 일이라고 한다면, 작품 후반, 선셋 파크에서 시간떼우기로 주로 했던 일이 "공동묘지 배회하기" 와, 결국 마지막에는 빙의 직업이었던 "망가진(버려진) 물건들의 병원" 이라는 점도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마일스는 '버려진 것들' 즉 과거에 묶여있는 삶을 살고 있다. 과거에 겪었던 사건의 죄의식에 묶여 있기도 하고, 하는 일들과 갖는 직업들도 하나같이 '과거'이다. 스스로를 계속 과거의 기억에 가두면서 끊임없이 죄의식을 불러 일으키게 만든다.  

 

 이런 절망적인 상태에서 마일스는 '필라' 라는 희망을 만나게 된다.  아직 10대인 필라는 마일스로 하여금 '미래' 를 꿈꾸게 만든다. 앞으로 쌓아갈 수많은 지식들, 그리고 둘이서 키워나갈 커다란 사랑. 미래를 바라봄으로써 마일스는 비로소 죽음에서 벗어나 삶의 공간으로 들어오게 된다. 그리고 마일스가 삶의 공간으로 들어오게 해주는 통로는 아이러니하게도 '불법 거주' 중인 선셋파크의 버려진 주택이었다. 

짧은 시간이지만 빙과 엘런, 앨리스와 함께 불법 거주하게 되는 마일스의 상황은 전 세계적인 불경기로 삶의 어려움을 겪고있는 젊은이들에게 하나의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는 이른바 '생협 - 생활협동조합' 을 떠오르게 한다. 사정과 나이가 비슷한 젊은이들이 서로 상호간에 생활을 보조해주는 일종의 공동체를 꾸리는 것이다. 버려진 건물을 불법점유하고 있는 것이긴 하지만, 이 친구들은 서로에게 현실적인 도움을 주고받으며 힘겹지만 착실하게 하루하루를 꾸려내는 이른바 '생활 자체' 를 위한 일종의 공동체 생활을 하게 된다. 

 이에 대비되는 세대가 바로 마일스의 부모인 '모리스'와 '메리-리' 일 것이다. 각자의 위치에서 어느정도 뚜렷한 족적을 남겼고, 지금까지 누려온 것도, 이뤄낸 것들도 있지만, 그렇다고 모든게 순탄하고 탄탄하지만은 않다. 사업체는 휘청거리고, 자식들은 통제할 수 없고, 부부관계마저 위태롭기도 하다.    

  

  폴 오스터의 작품들은 읽고 나면 가슴 한켠이 묵직해지는 느낌이 든다. 읽기가 그렇게 쉽지만은 않다. 

아, 그렇다고 문장이 난해하다거나 서사구조가 복잡한 건 절대 아니다. 폴 오스터의 문장은 매우 매끄럽다. 한편으로는 현학적이기도 하고 지나치게 유려한 면도 있지만, 그의 문장은 언제나 앞뒤가 딱딱 맞아 떨어지고, 이해하기 쉬운 표현들이 적절하게 사용되고 있다. 엄청나게 잘 읽히는 문장이다. 서사구조 역시 마찬가지이다. 때로는 실험적인 시도를 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작품들에는 주로 시간의 흐름 순이나 인물의 변화 순으로 읽기 쉬운 서사구조를 사용하고 있다. 한마디로, 그는 '기술' 로 독자들을 유혹하는 작가가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자주 애용하는 '열린결말' 역시 독자의 취향에 따라 상당히 호불호가 갈릴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굉장히 좋아한다.) 서두에 언급했듯, 스스로를 지나치게 몰아붙이는 주인공들 역시 마음이 불편하게 만드는 한 요인이기도 하고. 틀림없이, 그의 작품들은 펴들고 읽다보면 정신없이 빠져들어 순식간에 한 권을 덮게하는 엄청난 몰입감을 자랑한다. 하지만, 그렇게 다 읽고 책을 덮으면, 아득한 마음속 어딘가에 큼지막한 바위가 떡, 놓여지는 느낌이다. 그 바위에는 아마 '인생 별거 없어.' 라고 새겨져 있을것만 같다.

 

 하지만, 그것은 모든 소설들이 그렇듯, 읽는 사람의 감정 상태에 따름일 것이다.

폴 오스터의 작품이 갖고있는 큰 장점들 중 하나는 등장인물들을 바라보는 따스한 시선이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선셋파크' 의 주인공 마일즈도 마찬가지이다. 조금만 덜 고집부려도 좋을텐데, 저런 극단적인 생각을 하지 않아도 좋을텐데, 답답하고 안타깝기 짝이 없지만, 그가 그런 행동을 하는 요인과 그런 생각을 갖게 된 상황들을 매우 세세하게 풀어내주는 작가의 따스한 시각이 충분히 느껴진다는 것이다. 

때문에, 책 속 인물들이 비록 지금은 매우 절망적이고, 하루하루 살아내기가 버겁지만, 그 안에 소소한 행복들이 있고, 즐거운 시간들이 있으며, 언듯언듯 내비쳐지는 행복과 희망이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하게 만든다. 

 

 우리의 삶을 이루고 있는 시간들 중 대부분은 불행하다.

아니, 말을 바꿔야겠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 대체로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불행에 관련된 통증, 고통, 괴로움, 슬픔, 미움, 증오, 외로움, 두려움 등의 감정들은 행복감을 주는 기쁨, 쾌락, 환희, 즐거움, 들뜸, 설렘, 애정, 부드러움 같은 감정들보다 훨씬 오랫동안 기억 속에 머물게 된다. 이상하게도, 그렇게 된다. 좋은 감정들은 쉽게 잊혀지지만 나쁜 감정들은 오래토록 잊혀지지 않는다. 글쎄, 어쩌면 그런 '나쁜 감정' 들이 '죽음' 과 더 연관이 있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죽음을 최대한 피하기 위해 나쁜 감정을 주는 것들은 최대한 조심해야 할테니, 본능적으로 뇌가 나쁜 것들을 오래토록 기억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그렇게 나쁜 감정들이 더 오래 기억에 남기 때문에, 우리는 때로 삶의 대부분이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마일스는, 더더욱 그럴 수 밖에 없었을 터이고. 

 

어쩌면 마일스가 끊임없이 부모를 거부하는 것은 과거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방어기제가 아니었을까?

 

과거에 얽매여 살고 있으면서, 과거를 필사적으로 끊어내기를 갈구하는 욕망이 부모를 거부하는 현상으로 나타났던 것은 아닐까. 

하지만, 마일스의 부모는 미래를 향한 디딤돌 역할을 충분히 해줄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마일스는 결국 그 사실을 깨닫게 될까? 

책의 마지막 단락이 오랫동안 마음에 남을 듯 하다.

 

" 미래가 없을 때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는 것이 가치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지금부터 어떤 것에도 희망을 갖지 말고 지금 이 순간, 이 스쳐 지나가는 순간, 지금 여기 있지만 곧 사라지는 순간, 영원히 사라져 버리는 지금만을 위해 살자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P.328

 

그래, 어쩌면, 불안하기 짝이 없는 미래에 대한 헛된 희망을 꿈꾸기보다는, 지금 이 순간만을 위해 사는 것이 정답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지옥같은 현실을 하루하루 버텨내는 마일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지옥같은 현실을 이겨내는 방법은, 주변 사람들과 함께 하는 거야. 너를 사랑하고 챙기는 빙과 너와 비슷한 처지에서 현실을 바득바득 살아내고 있는 비슷한 또래의 엘런과 앨리스. 그리고, 너를 지켜보는 아버지. 그들이 바로, 네가 현실을 버티게 해주는 기둥이 될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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