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불로문의 진실 - 다시 만난 기억 에세이 작가총서 331
박희선 지음 / 에세이퍼블리싱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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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은 서울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궁인 동시에, 가장 한국다운 정원이 있는 곳이다.

빽빽하고 빡빡하게 우뚝우뚝 솟아있는 나무들 사이에 분명 인위적이지만, 인위적으로 보이지 않는 길들이 나 있고, 아름다운 단청을 지닌 건물들이 고요하게 자리잡고 있다. 확실히, 그곳은 공기부터 다르다. 창덕궁 주변만 가도 공기가 다르다. 무성한 수풀은 담장 위로도 거침없이 뻗어있고, 자동차의 매연이 느껴지지 않을정도로 청아한 공기를 내뿜는다.

한국에 고궁들을 찬찬히 살펴보면 어디나 통일성을 해치는 듯 한 구조물들이 자리잡고 있다. 수 세월동안 전쟁이나 재해로 소실된 부분을 증축하거나, 일제 강점기 일본의 만행으로 통째로 드러내지거나, 갖다 심어진 건물들도 있다. 그리고, 이 작품에 등장하는 불로문이나 청의정, 기암괴석들 처럼 의도적으로 세워진 건축물들도 있다.

 

이야기는 일제시대에서 시작된다.

경성대학 법학부에 재학중이던 청년 시형은 우연히 일본 730부대의 대장 와타나베를 습격하는 독립군들을 목격하게 된다. 와타나베를 암살하고 그가 가지고 있던 서류가방을 빼앗는데 성공한 독립군 무리. 하지만, 시형은 수많은 일본군과 730부대의 부대장인 겐조에게 쫓기는 것을 안타깝게 바라볼 뿐이었다. 자취방으로 돌아가던 시형은 일본군에게 쫓기던 독립군 중 한명이었던 인국과 마주치게 되고, 엉겁결에 시형은 인국이 가지고 있던 와타나베의 서류가방을 건네받게 된다. 서류 가방 안에는 오래된 고서인 '동굴궐지'  한 권과 괴이한 문양을 본뜬 탁본 한 장, 그리고 말라 비틀어진 정체를 알 수 없는 식물의 뿌리가 들어있었다. 시형은 이렇게 수천년의 역사를 지닌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마칠 퍼즐처럼 많은 조각들을 하나하나 맞춰나가는 듯한 작품인 '불로문의 진실' 은 '다빈치 코드' 의 열풍 이후 우리나라를 휩씁고 지나갔던 '팩션' 이라는 장르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간 수 많은 작품들이 팩션이라는 이름 아래 솟아났다 사라졌지만, 개인적으로 다빈치 코드가 제시했던 '팩션' 의 정형에 가장 부합한 작품이 바로 이 작품이 아닐까 싶다. 과거와 역사를 아우르는 설정과 시간을 넘나드는 방대한 퍼즐, 얼키고 설킨 인간관계. 그리고 그것을 짜 맞춰 나가는 과정은  뛰어난 어드벤쳐 게임처럼 논리적이고 인과적으로잘 맞아 들어간다. 게다가 요소요소에 숨겨둔 캐릭터들 또한 상당히 흥미롭다.

  

하지만, 안타까운 점은 그런 훌륭한 아이디어들이 적재적소에서 명민하게 활동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먼저, 스토리 텔링의 문제를 거론해야 겠다. 한 명의 독자로서, 이 작품은 플롯이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단순하고 일관적인 이야기의 흐름을 보여준다. 솔직히, 그냥 긴 시놉시스라 봐도 무방하다. 중간중간 들어있는 과거의 장면들을 빼고 본다면, 메인 스토리 텔링은 그냥 '대화' 이다. 주인공이 찾아가서 대화를 나누고, 또 다시 찾아가서 대화를 나눈다. 작은 사건들이 일어나긴 하지만, 주인공의 행보나 심경에 어떠한 변화도 주지 않는다. 사건의 흐름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냥 퍼즐들이 평이하게 죽 하나하나 맞춰져 나간다. 극적인 효과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중간 중간에 들어가는 과거 일화들은 오히려 좀 낫다.

 

진시황대 서불의 이야기와 조선조 숙종의 이야기가 한 편씩 끼어 있는데, 서불과 숙종의 이야기엔 오히려 몰입감이 강하다.

그 작은 두 토막의 이야기들에는 확연히 플롯이 존재한다. 독자의 호흡을 빼앗고 흥미를 유발시킬만한 요소들이 잘 스며들어 있다.

 

하지만, 이 이야기들 또한 메인 스토리의 흐름에는 오히려 독이 된다.

이 이야기들을 주인공이 찾아내는 방식이 아니라, 그냥 난데없는 과거사가 등장하는 것이다. 주인공 시형과 그가 살아가는 일제 강점기의 이야기엔 어떠한 영향을 미치지도 않는 설명적인 이야기에 불과한 것이다. 메인 스토리에 몰입되다가도 작가는 난데없이 독자들을 타임슬립 시키는 것이다. 독자들을 완벽하게 이야기에서 제외시켜 버림으로서 작품은 또 다시 흡인력을 잃게 된다.

 

등장인물들의 캐릭터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는 없다.

캐릭터는 독자를 안내하는 동시에, 독자를 이야기속으로 끌어 들이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플롯이 빈약해도 캐릭터가 강렬하면 재미있는 작품이 될 수 있다. 하지만, 플롯이 아무리 제 역할을 다 한다 해도 캐릭터가 빈약하면 작품은 그만큼 더 재미가 없어진다. 독자들은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캐릭터를 통해 감정을 이입하고, 일종의 간접경험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로문의 진실] 에 등장하는 캐릭터는 안내자로서의 역할에만 충실했지, 이야기속으로 독자들을 끌어 들이는 데에는 완벽하게 실패했다. 오히려 캐릭터들 또한 이야기에 밖에 머무는 듯 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어떠한 갈등이나 고민없이 퍼즐들을 풀어나가고 있다. 그냥 누군가를 찾아가서 물어보면 답이 툭툭 나온다. 그 누군가를 찾아 나가는 과정도, 그냥 어떻게 알아서 간다. 가면, 거기 답을 잘 아는 사람이 떡 하니 버티고 있다. 마치, 수학 문제집을 풀다가 막히면 바로 해답지를 보는 듯 하다.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는 과정이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런 빈약한 캐릭터들은 빈약한 플롯과 만나 아무런 매력이 없어져 버린다. 갈등을 겪지 않는 캐릭터는 독자들에게 어필 할 수가 없는것이 당연하다.

이들의 성격조차 작가의 서술 한두마디로 설명되고 있다.

"시형은 어떠어떠한 성격의 어떤 인물이었다. 인한은 이런이런 성격이었다."

이렇게 말이다.

그러다 보니, 후반부에 자리잡고 있는 인물 반전들이 그다지 충격적으로 와닿지 않는다.

캐릭터들에 이입이 되어있지 않은 상황이기에 인물을 통한 반전이 독자들의 감정에 그다지 큰 반향을 불러 일으키지 않는것이다.

차라리, 이야기 속에 짜투리로 등장하는 서불과 숙종이 훨씬 매력적으로 보일 정도이다.

설정이 메인스토리가 되어버린 격이다.

 

위에도 언급했지만, [불로문의 진실] 이 가지고 있는 소재들은 [다빈치 코드] 의 그것보다 나으면 나았지 부족할 건 없었다.

건축물, 괴이한 문양들, 한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고궁인 창덕궁. 거기에 진시황과 숙종을 아우르는 폭넓은 역사. 불로초라는 매력적인 식물.

조금만 더 작가가 욕심을 부리고, 플롯과 캐릭터에 공을 들였으면 어땠을까 싶다.

 

한국형 팩션은 수 년 전 등장했던 [건축무한육면각체의 비밀] 로 거슬러 올라간다.

[다빈치 코드] 의 열풍보다도 훨씬 예전부터 우리의 작가들 또한 역사적인 픽션을 시도해 왔다. 그도 그럴것이, 어느 나라의 역사에든 미스테리가 존재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건축무한육면각체의 비밀' 이 '이상' 이라는 조금 매니악한 인물을 포커스에 맞추고 있었지만, [불로문의 진실] 은 위에도 언급했듯, 보다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열광할만한 소재들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아쉽고, 또 아쉽다.

차라리 이 작품이 이렇게 단번에 책으로 출간되었을 게 아니라, 신춘문예나 여러 공모전을 통해 많은 심사위원들에 눈에 비춰지고, 그로 인해 다듬어질 기회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다.

 

올해, 아니 최근 몇년간 내가 읽었던 몇 권 안되는 한국 문학들 중 가장 아쉬운 작품으로 꼽아볼 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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