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한때, 단편은 반드시 뚜렷한 기승전결이 압축되어 있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이야기가 있어야 했고, 살아있는 인물들이 있어야 했다. 그리고, 그들이 어우러지는 간결한 이중 삼중의 플롯들이 겹쳐 있어야 했고, 뒷머리를 짜르르 울리는 반전도 있어야 했다. 문장은 주제와 메시지를 중심으로 응결되어 있되, 단어들은 적당하게 중의적이어야 했다. 플롯에 따른 인물들은 때로 다르게 해석될 수 있어야 했고, 인물에 따른 플롯 또한 때론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 있어야 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야기는 완벽하게 닫혀야만 했다. 작품의 시작을 알리는 첫 글자에서부터, 끝을 알리는 마침표 하나까지. 군더더기가 없이 꽉 맞물려 있어야 했다.

내가 생각했던 단편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

각기 다른 돌들이 마치 테트리스 게임처럼 완벽하게 계산된 틀 안에서 꽉꽉 맞물려진 모양.

장편이 긴 호흡의 자유로운 이야기라면, 단편은 순식간에 숨통을 틀어막는 일격 필살과도 같은 정련된 날카로움이라고 생각했다.

때론 긴 여운도 괜찮았다. 이야기의 구조상으로는 정확하게 짜여있지만, 의도적으로 뒷문만 열어놓은 모양새. 결말까지 가는 인과관계가 차근차근 맞아떨어지며 결말에 가서는 보다 여러 의미로 재해석 될 수 있는 활짝 열린 결말.

 

하지만, 그런 편견들은 독서의 폭을 아주 약간 넓히는 순간 와장창 부서져 버렸다.

삶이란 언제나 완전무결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도 알 수가 없다. 이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그래서 누가 어떻게 될지.

삶 속에서 일어나는 일은 그 어떤것도 완결되지 않는다. 때론 그 어떤것도 완결시키지 못한 채, 삶 자체가 종결되어지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종결일 뿐, 완결일 수 없다. 어쩌면, 내가 살면서 벌려놓은 수많은 일들은 대를 이어 어떤 누군가가 끊임없이 연결시켜 나가기 때문이다. 영원히 끝나지 않는 이야기이다. 영원히 이어지고, 때론 영원히 되풀이 된다.

 

[로봇] 에서 수경은 자신이 '로봇' 이라고 주장하는 한 남자와 잠깐동안 만남을 갖는다. [로봇] 은 완전하게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다. 사랑은 인간이 가진 감정 중에서 가장 폭력적이고 가장 복합적이며, 가장 혼란스러운 감정이다. 수 많은 사람들은 사랑을 갈구하지만, 그만큼의 사람을 사랑을 회피한다. 하지만, 살아있는 동안 사람은 사랑이라는 감정을 피할 수 없다. 그것은 언젠가 누구에겐가 어떻게든 찾아든다. 어느날 갑자기 자신을 로봇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눈 앞에 나타날 수도 있고, 그 사람과 사랑에 빠질 수 있다. 그리고, 이윽고 그 사람을 위해 죽을 수도 있게 될 것이고, 그 사람을 죽일 수도 있게 될 것이다. 사랑에 빠지는 순간은 삶 속에서 가장 불완전하고, 가장 위험한 순간일수도 있다.

 

사랑은 때론 이유없는 집착을 불러오기도 한다. [여행] 에서 한선은 다른 남자와 결혼을 앞둔 수진과 마지막으로 여행을 떠나고 싶어한다.

생각만해도 소름끼치는 순간이기도 하다. 옛 연인이. 물론 꽤나 깊은 관계였던 남자이긴 하지만, 결혼을 불과 며칠 앞두고 집요하게 여행을 떠나고 싶어한다. 한선은 인생에 중요한 무언가를 그녀가 가지고 갔다고 생각한다. 그 공허함을 이해할 수 있다. 사랑, 연애란 자기 마음을 통째로 남에게 들이 미는것이다. 줘버리는 것이다. 오랫동안 연애를 못하는 남녀들은 대부분 자기 마음을 남에게 맡기기가 두려운 경우가 많다. '이 사람에게 내 마음을 줘도 될까? 내 마음을 받아줄까? 내 마음을 맡겨도 될 만큼 능력이 있는 사람일까? 줬다가 다시 잘 찾아올 수 있을까??' 한 번 줘 버린 마음은 온전히 되찾아올 수 없다. 어떤 식으로든. 연애가 중간에 깨지고 다시 남남이 되든,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부부가 되든. 마음을 떼어 주는 순간, 삶은 더이상 혼자만의 것이 아니게 된다. 때문에 사람은 사랑했던 대상에 어떻게든, 어떤 식으로든 집착하게 된다.

 

[악어] 는 '재능' 에 관한 이야기이다.

예술의 세계는 재능의 세계이다. 제 아무리 노력을 해도 살리에르는 모차르트처럼 될 수 없다. 내가 하루에 한시간만 자고 미친듯이 수영을 한다고 해도 박태환을 따라잡을 수 없다. 사실 하루에 몇시간씩 만화를 그렸지만, 일찌감치 데뷔하는 만화작가들의 발 뒤꿈치에도 못 미친다. 예술은 분명 타고나는 사람의 세계이다. 재능이란 말 그대로 태어나면서 부터 갖게 되는 일종의 능력이다. 왜? 왜 나에겐 없고 그에겐 있을까? 어째서?? 하지만, 아무리 의문을 갖고 발버둥치고 노력을 해도 그들의 세계에 가까이 갈 수 없다. 기술은 연습에 따라 능숙해질 수 있지만, 센스는 결코 연습할 수 없다. 예술의 세계는 언제나 소수의 천재들이 발전시켜 나간다. 아니, 어느 분야이든, 세상은 언제나 소수의 천재들이 발전시켜 나간다. 그건. 거부할 수 없는 진실이다.       

 

그렇게 수많은 사랑과 증오, 복수와 만남등에 관한 이야기들이 김영하 작가 특유의 담담하고도 리얼한 서술로 펼쳐진다.

위의 세 작품들 말고도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품은 [조] 와 [퀴즈쇼], [오늘의 커피] 였다.

딱 한쪽(!!) 분량의 작품인 [명예살인] 도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조] 의 경우는 김영하 작가의 장편들이 떠오르는 작품이었다. 관음적인 느낌을 주는 서술도 대단히 인상적이었고, 뒷통수 치는 반전에 등장인물들이 가지고 있는 강렬한 인상도 마음속에서 좀처럼 떠나지 않았다. [퀴즈쇼] 는 꽤 인위적인 장치들이 대단히 흥미롭게 맞물려 있었다. 마치 김영하 작가가 작정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었다고 보여질 정도! 게다가 꽤나 해피한 엔딩도 오히려 김영하 작가였어서 굉장히 신선했다. 소설속의 소설을 보는 느낌이랄까? 온통 리얼리즘으로 가득한 다큐멘터리 사이에서 통속적인 드라마 한 편이 끼어있는 느낌이었다. 아마도 소설들의 배치 또한 그런 의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앞 뒤에 배치되어있는 '바다 이야기 2' 와 '오늘의 커피' 모두 그냥 눈 앞에서 벌어지는 일 마냥 리얼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커피]  역시 짤막한 작품이었는데, 김영하 작가가 가지고 있는 플롯을 만들어내는 능력에 감탄에 감탄을 더할 수 밖에 없게 했다.

아니 어쩜, 이런 이야기를 이렇게 재밌게 풀어낼 수 있지?? 할 정도.

아...역시...이래서 재능은 재능이구나... 하는 감탄만이 신음처럼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아...감상을 적어나가다 보니, 책에 수록되어있는 작품들을 다 언급할 것 같다.

 

최근 한국 문학의, 아니 개인적인 생각으로, 세계 문학의 흐름은 '판타지'이다. 누가 얼마나 더 절묘하게 비트느냐. 그리고, 그것을 얼마나 더 진짜같이 그려내느냐가 관건일 것이다. '판타지리얼리즘' 이라는 애매모호한 합성단어로 표현하기도 하는 듯 하다. 환상과 현실의 경계 사이에서 얼마나 절묘하게 줄타기를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독자들이 환상인지 현실인지 헛갈릴수록 좋다. 현실이 점점 더 싸이코틱해 지면서 이런 현대문학의 흐름도 점차 거세지고 있다. 끊임없이 팩션이 솟아나오고, 몇 년 간 발표되는 젊은 작품들은 문학성과 대중성, 거기에 참신한 발상까지 고루 갖춘 '판타지리얼리즘' 에 입각한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확실한건, 그 모든 근간은 결국은 리얼리즘이라는 사실이다.

현실을 글로 녹여내지 못하는 작가는 결코 환상과의 사이에서 균형잡힌 줄타기를 할 수가 없다.

수많은 대가들이 여전히 정통 역사물에 사명을 갖고 있으며, 현실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그려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말이다.

 

김영하 작가는 내가 알기엔 호불호가 극명하게 나뉘는 작가군 중 한명이다.

그의 작품은 언제나 가슴 깊숙히 묻어놓은 수많은 속물스러움들을 표면으로 어떻게든 끌어 올리기 때문이다. 이번 작품집도 여전하다. 한결 능란해진 유머와 위트, 그리고 리얼한 묘사들 사이로 바득바득 속물스러움들을 찾아낸다. 울렁거리는 목을 움켜잡지만, 꾸역꾸역 입 밖으로 쏟아낸다. 내가 쏟아낸 나의 본성들을 바라보며, 다행히 역겨워하지는 않게 되었다. 그냥, 나도 사람이고, 결국 나도 속물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작가와 함께,  나도 나이를 먹어가고 있다는 증거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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