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 어떻게 아프고 돌보고 죽을 거냐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실제 현장에 가보면 죽음은 ‘어떻게’의 문제라기보다는 ‘언제‘의 문제입니다. 타이밍이 주요 쟁점이 됩니다. 언제 죽느냐, 언제까지 살 수 있느냐. 이 타이밍을 제대로 측정해야 어떤 치료를 할 것인지, 시설로 이동을 할 것인지, 가족이나 보호자는 어떤 준비를 할 것인지 등등이 정해집니다. 이런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 연명의료결정법이 있으니 ‘내가 원하는대로 죽을 수 있겠지‘ ‘존엄사할 수 있겠지 하는 생각은 다시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오늘날 죽음은 사전연명의료의향서와 연명의료계획서를 위시한 실존적 결단이기보다는 당사자들(환자·보호자·의료진) 사이에서 벌어지는 지난한 협상의 산물이라고 봅니다. - P54

이제는 ‘우리는 다르게 죽기로 했다‘ 같은, 잘 죽을 권리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삶 못지않게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더 밝고 진지하게 나눌 수 있으면 좋겠어요. - P58

연명의료 중단이 윤리적으로 문제 없는지를 증명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수많은 서류작업과 행정 절차들이 오히려 의료진과 병원 관계자들에게 부담을 주어 ‘그냥 하지 말자‘는 식으로 일이 흘러 가게 만들어요. 환자가 연명의료를 중단해달라고 할 때 임종 과정에 들어갔다는 것을 판단하기가 힘들거든요. 그래서 의사 혼자 판단하지 말고 윤리위원회를 만들어서 판단하라고 하는 거죠. 가장 쉬운 방법이거든요. 연명의료 중단을 다수결로 결정하면 그건 윤리적인 것이라고 길을 열어놓은 것이죠. - P71

현재는 윤리위원회가 대학병원이나 대형 병원에만 있습니다. 권역별로 공용윤리위원회가 만들어지면 훨씬 더 많은 병원이 참여할 수 있을 텐데 아쉽습니다. - P72

보호자 입장에서는 ‘불효를 저지른다’는 생각이 들 수 있어요. 제가 그때마다 꼭 하는 말이 있어요. 이 계획서를 작성했다고 해서 환자를 포기했다거나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아니라고 말씀드립니다. 환자가 더 편안하게 생의 마지막을 보낼 수 있도록 치료의 방향을 ‘완화’로 바꾼 것이니 죄책감 갖지 말라고요. - P74

연명의료결정법의 취지대로 자기결정권이 존중될 수 있도록 의사결정 능력이 있을 때 논의가 되고 작성이 되면 좋겠다는 바람입니다. - P75

의사도 사람이라 취약하고 흔들리거든요. 거기다 죽음과 삶을 바로 앞에서 목도하기 때문에 환자의 상황이 자기에 대한 불안으로 전이돼요. 죽음을 터놓고 이야기하려니 그게 의사라는 정체성에 대한 배신이기도 한 거예요. - P82

보호자가 잠적해도 장기요양보험등록이 되면 한 명당 정해진 수가를 받을 수 있으니 냉정하게 말하면 일종의 ‘죽음 산업’ 입니다. 이게 사람들이 악랄해서가 아니에요. 사회가 급속히 변하면서 대비하지 못한 일을 사실상 요양원이란 공간으로 우리 모두가 몰아 넣은 거죠. - P86

‘우리’의 이야기를 망가뜨리지 않기 위해서는 이별을 준비할 시간이 필요해요. 그런데 그동안은 목숨 살리는 거 하나만 이야기해왔기 때문에 이런 논의가 우리 사회에 전무했죠. 의료인들도 마찬가지죠. 마치 십자군전쟁 때 ‘신이 그것을 원하신다’ 한마디에 무조건 뛰어갔던 것처럼 살리는 일에만 몰두해요. 좀 도발적인 질문이 필요한 때인 거 같아요. 그렇게 생명이 중요한가, 그렇게까지 살아야 하는가, 죽음이 꼭 나쁜가에 대한 이야기들이요.

사실 우리는 의학을 큐어(cure)로만 이해하지만 의학 안에는 케어(care)도 있고, 환자를 편안하게 하는 컴포트(comfort)라는 가치도 있습니다. - P87

간병이 특히 사각지대라는 생각이 듭니다. 의사는 치료를 하는 사람, 간호사는 의사의 치료 지시를 수행하거나 환자-의료진 간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사람이죠. 그런데 환자의 일상은 치료행위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화장실도 가고 밥도 먹고 옷도 입고 세수도 하고 산책도 하고 대화도 해야 하죠. 이런 일상적 돌봄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 P90

호스피스에서는 ‘의미’에 대한 이야기 못지않게, 때로는 그보다 더 많이 고통‘에 대해 이야기한다.

호스피스 단계 이전에는 ‘고통‘이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는다. 병의 진단과 치료를 거치는 과정에서 고통의 문제를 다룰 수 있는 전문가들이 부족하다. 사회적으로는 환자와 가족들이 가지고있는 질병과 고통에 대한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지 않다. 질병은 오직 치료해야 할 대상이며 삶의 장애물로 여겨진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환자가 고민하는 삶의 의미는 파편적으로 부서지거나 위축되고 만다. - P97

호스피스를 담당할 완화의료 전문가의 확충과 말기돌봄 시설의 개선을 지속적으로 정부에게 요구하자.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가능하면 끝까지, 고통을 최소화하여, 의미 있게 잘 살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진실로 잘 살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 P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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