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미나마타
이시무레 미치코 지음, 김경인 옮김 / 달팽이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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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번역서들 중에서는 가끔씩 소리 소문 없이 세상에 나와 잊혀져버리는 책들이 있다. 이시무레 미치코石牟礼道子의 <苦海淨土わが水俣病>(<슬픈 미나마타>, 김경인 옮김, 달팽이, 2007)도 그런 책들 중 하나이다. 내가 이 책의 소재를 알게 된 계기는 <歴史学研究> 569(1987) 특집 <과거를 향하는 마음>에 실린 타키자와 히데키滝沢秀樹의 글 <民衆史方法関連して>에서였다. 민중사의 시각에서 일본사회의 원()과 한국사회의 한()이라는 감정을 비교하면서, 민중들의 원한을 억압해온 일본사회의 문제, 그리고 한국 근현대사에서 <한풀이>라는 행위의 의미를 고찰했던 이 글은 전후 일본 사회의 감정의 구조structure of feelings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당시의 내게 매우 흥미롭고 신선한 시각을 준 텍스트로 기억된다. 이시무레 미치코의 세계는 이 글의 말미에 잠깐 소개되고 있었다. 메이지 이래로 일본 사회의 분노나 원한은 끊임없이 억압되어 왔지만, 결코 그것은 소멸되지 않고 전후에도 계속 터져 나온다, 이시무레 미치코의 일련의 작품들은 바로 그 세계를 그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은 60년대 일본 사회의 고도자본주의화에 경종을 울린 대표적인 공해병, <미나마타병>을 테마로, 미나마타 지역의 공동체에 장기간 거주하면서(이시무레 자신이 그 인근 지역 출신이기도 하다) 조사 취재한 기록문학작품으로, 그녀가 써내려간 미나마타 연작의 첫 번째 책이기도 하다.

이시무레가 그려내는 미나마타병 환자들의 증상은 처참함 그 자체다. 깨끗한 바다에서 바다음식을 먹으며 살아가던 그토록 건강했던 사람들이 갑자기 손이 저리기 시작하더니, 걸음을 잘 못 걷고(무도병 증세), 경기를 일으키다가 속속 죽어나가는 것이다.

 

심지어 수은에 중독된 어패류를 먹지 않은 신생아들마저 선천성 미나마타병 증세를 보이기 시작한다. 처음에 그들은 종종 젓가락을 떨어뜨리거나 문지방이나 미닫이에 걸려 넘어지거나 해서 버릇없는아이들로 야단을 맞았다고 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버릇없는> 행동조차 아예 볼 수 없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 아이들은 시각, 청각 등 감각이 모두 없어지고, 깊고도 조용한 잠 속으로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태반 속의 아기의 경우 어머니의 체내에 있는 오염물질의 중독으로부터 보호된다는 것이 일반적인 의학적 상식이었기 때문에, 신생아들의 경우는 미나마타병 인정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들의 증상이 미나마타병으로 인정되기 위해서는, 그 아이들 중 누군가가 죽어야 했고, 그 죽은 아이의 시체가 해부되어야 했다. 하나의 증상이 질병으로 공적으로 인식되기까지의 <잔인함>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물론 이는 보상금을 둘러싼 인정투쟁의 가장 비극적인 양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가능한 보상금을 주지 않으려는 회사 측의 의도 때문에, 말 그대로 가장 취약한 상황에 처해있던 아이들은 제대로 치료도 받지 못한 채, 누군가 빨리 한 명이 죽기를 기다리고 있어야만(그래서 그 아이가 해부대 위에 올라가 그들의 뇌와 장기가 미나마타병에 의해 침식되었음을 '과학적'으로 검증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미나마타병 자체가 당시로서는 전혀 원인을 알 수 없는 희귀병이었기 때문에, 그 증상과 원인을 '학문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인정투쟁을 위한 '증거'가 확보되기까지의 십여 년의 세월 동안 많은 주민들이 사회로부터 격리된 채 죽어나가고, 그 기간에도 공장은 계속해서 폐수를 방류했다는 사실에까지 이르면, 啞然해지지 않을 수 없다.

그 보상금이라는 것 역시 황당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미나마타병(정확히는 증상) 발병 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공장 측은 아직 병의 원인이 밝혀지기 전인 1959년 서둘러 환자모임과 '위로금' 계약을 체결하는데, 계약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이는 회사 측의 성실한 의무수행이라기보다는 자신들의 책임을 미연에 회피하려는 책략임이 너무나 분명하게 드러난다.

 

아이의 생명 연간 3만 엔

어른의 생명 연간 10만 엔

사망자의 생명 30만 엔

장례비 2만 엔

물가가 오르자 19644월에 생명의 가격이 조금 올라서

아이의 생명 연간 5만 엔

그 아이가 20세가 되면 8만 엔

25세가 되면 10만 엔

중증의 어른이 되면 115천 엔

(환자호조회)은 장래에 미나마타병이 갑(공장)의 공장 배수에서 기인한 것이 밝혀져도 새로운 보상요구는 일절 하지 않기로 한다.

 

이시무레는 아이 생명 연간 3만 엔, 어른 생명 연간 10만 엔이라는 바로 이것이 일본국 1950년대의 인권사상이 등에 붙이고 다니던 가격표라고 말한다. 또 하나, 의미심장한 구절은 아직 미나마타병이 공장의 폐수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점이 밝혀지지 않았던 그 시절, 회사는 장래에 미나마타병이 공장의 배수에서 기인한 것이 밝혀져도 새로운 보상요구는 일절 하지 않기로 한다는 조항이다. 말 그대로 이 조항을 붙임으로써, 병 때문에 생계를 꾸릴 수 없어 당장 한 푼이 아쉬운 가난한 어부들에게 말도 안 되는 액수의 위로금’(배상도 아니고, 심지어 보상도 아닌 위로금이다. 1965년 한일 협정 당시 일본으로부터 받은 돈의 명칭이 떠오르지 않는가. 배상도 아니고 심지어 보상도 아닌 독립 축하금’. 실로 동일한 논리가 흐르고 있는 것이다)협박처럼 들이대면서 자신들이 나중에 감당해야 할 책임을 미연에 회피해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회사는 자체 내 실험을 통해 폐수가 미나마타병의 직접적 증상임을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실험결과를 숨기고 공표하지 않았다.

 

결국, 미나마타병은 60년대로 접어들면서 일본 사회가 풀어나가야 할 사회적 이슈로 부각되고, 의학진과 사회운동가들이 대거 미나마타로 몰려오면서, 그리고 1965년 니가타에서 제 2의 미나마타병이 발병, 사회적으로 문제가 확산되기 시작하면서, 1968, 최초 발병이 있은 지 15년 만에 마침내 공해병으로 정식 인정된다(하지만 이미 그보다 6년 전인 1962년 구마모토대학 의학부에 의해 미나마타병의 원인이 밝혀졌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며, 이미 400호 고양이 실험을 통해 그 원인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구마모토 대학의 논리에 대해 공장에서 배출된 무기수은이 왜 신체에 들어가면 유기수은으로 바뀌는지 알 수 없다며 반론을 폈던 공장 측의 행태를 더더군다나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19696(미나마타병 제 1차 소송: 미나마타의 29세대 112명이 질소공장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냄)부터 진행된 일련의 재판들에서 피해 환자 측이 승소하면서, 점차 구제의 길도 열리게 된다. <공해 피해구제법>(1974년 공해건강피해보상법으로 바뀜)이 실행된 것도 이 해(1969)이다. 앞서 언급한 1959년의 위로금계약의 경우도, 계약 성립시 계약자의 '무지'(innocence)로 인한 경우에는 성립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판결에 의해 무효가 선언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여전히 간과해서는 안 될 문제는 이미 미나마타병이 발견되고 폐수가 첫 의혹을 샀던 1956, 혹은 첫 사망자가 나왔던 57, 그도 아니라면 이후 대량의 사망자가 속출하던 59년의 시점에, 아니 그 이후라도 신속하게 대처했더라면 수많은 사상자를 줄일 수 있었을 텐데, 회사 측의 방해와 정부의 늑장대응으로 더욱 큰 참사를 낳았다는 점이다. 이는 미나마타병이 하나의 의학적 차원을 넘어선 사회적 문제임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하라다 마사즈미 교수 등의 주도로 앞서 언급한 우이 준, 구와바라 시세이 등이 매주 강사로 참여한 미나마타학이라는 강좌가 개설된 이유도 바로 이러한 질병의 사회성에 대한 자각 때문이었다.

 

또 하나, 그 동안 미나마타병 환자들은 질병이 주는 신체적 고통뿐만 아니라 전염이나 천형등 의학적 지식의 부재가 불러일으키는 사회적 편견과 낙인, 또 미나마타병 논란의 여파로 회사가 철수하면 지역경제가 붕괴될 것을 우려하는 지역시민들의 시선 때문에 맘대로 고통을 호소하지도 못하는 이중의 고초를 치러야 했음을 덧붙이지 않으면 안 된다. 어디 미나마타뿐이랴, 20113월 후쿠시마 방사능 누출사고 이후 다시 재조명되고 있는 것처럼 중앙과 지방의 착취-피착취 관계-왜 도쿄전력의 발전소가 간토에서 그렇게 떨어진, 오히려 도호쿠 지역에 가까운 후쿠시마에 위치해 있어야 하는지-, 그리고 그러한 관계가 지역 주민들의 동의에 입각한 헤게모니적 지배 아래 작동하고 있는 현실은 근대 일본의 역사에서 끊임없이 변주되어 왔다.

 

법정에서의 승리. 하지만 미나마타병임을 어떻게 인정받을 수 있는가라는 벽이 남아있었다. 실제로 고양이가 100퍼센트 멸종된 시라누이해 연안에 살던 20만 명의 사람들 중, 미나마타병으로 인정된 환자는 2,265, 즉 기껏해야 1퍼센트에 지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도 미나마타병에 걸렸다고 하소연했지만, 환경청과 미나마타병 의학전문가 회의는 계속해서 이를 거부하며, 심지어 재판소의 미나마타병은 의학적이지 않다고 항소했던 것이다. 그리고 보상금을 둘러싼 난항과 환자들이 보상금을 바라는 이익집단으로 변질되어 버리는 상황 속에서 주민들은 분노하기 시작한다. 실제로 우리도 종종 소위 학문적글들에서 확인하지 않는가. ‘객관적 가치중립이라는 입장에서 주민들이 토해내는 일련의 목소리, 그리고 행위들을 이해관계전략'strategy이니 하는 식으로 기술하는 글들을. 과연 그들은 한없이 추락해가는 '절망의 심연', 그리고 그 심연에서 터져 나오는 '원한'이라는 감정을 최소한 이해하려는 시도라도 하고 있는 것일까.

 

돈은 한 푼도 필요 없어. 그 대신 회사의 잘 난 사람들, 위에서부터 줄줄이 수은모액 마시라고 해. 위에서부터 차례로, 42명이 죽을 때까지. 그 부인들도 마시라고 해. 태아성 미나마타병 환자가 태어나게. 그리고 그 다음에 순서대로 69, 미나마타병에 걸리라고 해. 그러고 또 100명 정도 잠재 환자가 돼보라고 해. 그거면 충분하니까!

 

여기서 '수은모액'19685월 질소공장이 결국 미나마타병의 원인인 아세트알데히드 생산을 중지하고, 그에 부수한 유기수 폐수 100톤을 의미한다. 공장은 이 100톤의 폐수를 한국으로 수출하기 위해 드럼통에 주입하던 중, 공장의 조합에게 들켜 저지당했고, 이후 이 유기수은모액은 죄업의 상징으로 남았다고 한다. ‘황당한이야기이기도 하고, ‘어쨌거나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당시 한국에서라면 충분히 가능한이야기이기도 하고, 그래서 '착잡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3의 미나마타병(2의 미나마타병은 60년대 중반 일본의 니가타에서 발생했다. 지역사회의 신속한 대응과 회사와의 투쟁으로 이 사건은 '다행히' 조기에 수습되고, 또 이 지역의 운동세력 이후 미나마타 지역과 연대하면서, 미나마타 지역에 대한 보상의 길로 발전하기도 했다)이 한국에서 발생할 수 있었을 위험을 미연에 구해준 회사의 노동조합에 감사라도 해야 하는 것일까.

 

처음 책을 읽으면서, 계속 뇌리를 떠나지 않았던 것은 근대 일본 사회의 민중들의 원한(み・)이라는 문제였다. 메이지시기를 거쳐 '전후'에 이르기까지 일본 사회는 민중들의 분노나 원한의 감정을 끊임없이 억압해온 사회라는 것은 이제는 일반적인 정설이다. 다시 말하면, 근대 일본이라는 윤리적세계는, 분노라는 감정을 항상 부정적인 것으로 평가하는”, 즉 그러한 감정을 계속 가지고 있는 것 자체를 “‘미덕에 반하는것으로 폄하하는, 그래서 ()과 한()을 잊어버리는 것이 바람직한 사회라는 것이다. 패전 직후 일본 사회 내에서 소위 <전쟁 체험파戦争体験派>를 중심으로 분노를 망각해버린 사회의 문제점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전개된 바 있지만, 이 역시 전쟁의 그림자가 걷혀 가면서 소멸되어 버렸다. 이렇게 분노나 원한을 잊어버리는 것이 바람직한 사회에서 일본사회의 민중들은 항상 권력에 순응하며 살아왔다는 그런 '편견'으로부터 벗어나, 그들의 원한이 어떻게 새로운 정치로 전화될 수 있는가, 그 가능성의 한 측면을 찾고 싶었던 것이 이 책을 꺼내 들게 된 이유였다. 그러나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이 책은 좋은텍스트는 아니다. 저자의 강력하면서도 감각적인 문체, 그리고 미나마타병이라는 실체의 압도적인 무게감에 짓눌려, 다른 생각들을 펼쳐나가는 것 자체가 곤란해지기 때문이다.

 

또한 근대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악마로서의 미나마타병에 대한 대립 항으로써, 저자가 그렇게 아름답게 묘사해내고 있는 근대 이전의 미나마타 사회라는 구도 역시 '엄밀한' 의미에서 검토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이를 단순히 사회과학적인 입장에서 근대의 대립 항으로 전근대를 찬미했다는 식으로 비판하는 것은 너무나 '쉽고', '가벼운' 비판이다. 왜 그녀는 지역사회 주민들, 그것도 미나마타병에 의해 처참하게 파괴되고, 또 그 자신들 역시 현재의 증상에 신음하는, 혹은 이들 환자들을 보면서 자신도 언제 발병할지 모르는 처지에 두려워하는 주민들의 구술을 통해, 이런 아름다운 전근대의 세계를 그려냈을까. 오히려 이 작품은 이런 아름다운 '환상'의 세계를 그려냄으로써 이 세상에서 추방당한 채, 고해정토(苦海淨土)를 헤쳐 나가는 사람들의 <그 후それから>를 포착하려는 시도가 아니었을까. 저자도 스스로 밝히듯이 이 책은 사회과학도, 엄밀한 의미의 르포도 아니다. 오히려 시의 언어와 산문의 언어가 서로 만나고 겹쳐지는 흔적trace과 같은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게 나을 듯싶다.

 

이 글은 예전 어떤 잡지에 서평으로 실은 글을 (참고문헌과 인용을 포함하여) 많이 축약한 것입니다.

 

   

 

 

 

밤 되면 가장 생각나는 것은 역시, 바다야. 바다가 제일 좋았어.
봄부터 여름이 되면 바다 속에도 온갖 꽃들이 만발하지. 우리 바다는 얼마나 아름다운지 몰라!
바다 속에도 명소라는 게 있어. ‘찻잔코’에 ‘맨살여울’에 ‘검은 해협’ ‘사자섬’까지.
빙 한 바퀴 돌면 익숙해진 우리 코에도, 여름이 시작될 무렵의 바다 향기가 풀풀 풍기거든. ‘회사’ 냄새하고는 차원이 다르지.
바닷물도 흘러. 굴이며 말미잘이며 청각채며, 바닷물이 출렁이며 흐르는 곳이면 어디나 꽃들이 한들한들거리지.
그 중에서도 특히 물고기가 아름답지. 말미잘은 만발한 국화꽃 같아. 청각채는 바다 속 절벽에 잘 뻗은 가지모양을 층층이 이루고 있지.
톳은 눈이나 죽백나무 꽃가지 같아. 해초는 대숲 같고.
바다 속 풍경도 육지하고 똑같이, 봄도 가을도 여름도 겨울도 있다우. 나는 바다 속에는 반드시 용궁이 있다고 믿어. 꿈처럼 아름다울 거야. 바다에 질리거나 하는 일은 죽어도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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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 간첩 할머니 : 근대에 맞서는 근대
공선옥 외 / 현실문화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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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생각들을 떠오르게 하는 책이다. 귀신, 간첩, 할머니라는 세 단어로 동아시아 근대를 이미지화하는 프로젝트라니. 직접 전시를 보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제주 4.3과 나부아(태국)와 인도네시아를 연결하기. 어쩌면 동아시아 근대의 사회적 상상력의 새로운 가능성을 여기서 찾을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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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 모던 - 새로운 중국 도시 문화의 만개, 1930-1945
리어우판 지음, 이현복 외 옮김 / 고려대학교출판부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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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리니스쿠의 논의를 재해석하여 동아시아 근대성 논의를 한 단계 끌어올린 노작. 올드 상하이를, 근대도시 홍콩을, 그리고 다시 상하이가 초근대도시로 도약해가는 현재적 상황에서 많은 영감을 주는 책이기도 하다. 이건 저자의 힘일까, 아니면 상하이라는 도시의 마력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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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저하는 근본주의자 민음사 모던 클래식 60
모신 하미드 지음, 왕은철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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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의식에는 공감하는데.. 뭘까 이 서사의 낯익음은. 왜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이 자꾸만 떠오르는 것일까.. 이 느낌은 패러디일까 아니면 표절일까. 노스탤지어에 집착하는 에리카가 아메리카라는 것은 수긍하지만, 뭐지. 이 찜찜함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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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과 노스탤지어 - 근대 일본이라는 역사 경험의 근원을 찾아서
이소마에 준이치 지음, 심희찬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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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과 노스탤지어>를 다시 읽다..

예전 일본의 한 도서관에서 이 책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서 읽었던 기억이 있다..

물론 제목이 주는 매혹 때문이었다..

상실과 노스탤지어..

 

하지만 이 책이 번역되리라는 생각까지는 못했다..

일본 지성사에서 <종교>라는 영역은..

어찌됐건 제국 시기 <국가신도>라는, 사람들의 내면을 통제하는 강력한 장치를 가진 사회였고..

그래서 그 주박에서 벗어나기 위한 지식인들의 사투가 <종교사상사>라는 독특한 학풍을 만들어내는 등, 중요한 연구대상으로 간주되어 온 반면..

한국 사회에서는 근대사를 이해하는 데 있어 그 중요성(동학, 식민지의 종교통제, 샤머니즘, 각종 신흥종교의 발흥)에도 불구하고 이 부분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는 이들은 한줌에도 지나지 않는 상황이니까..

안타깝지만 이게 우리의 현실이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가시밭길을 걸어가고 있는/걸어가야 할 역자에게 감사를 표한다..

 

책에 대한 구체적으로 내용으로 들어간다면..

적어도 저자의 문제의식에 대해서만큼은 나 역시 전적으로 공감..

종교라는 기존 개념이 담아내지 못하는 우리 내면에 깃든 종교성-막연한 죽음의 불안이나 죄악감, 이에 대한 갈등과 희구에 어떠한 언어를 부여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담론의 동질화에 대한 반작용으로 생겨나는 <여백>을 다시 담론 내부에 기입할 수 있는 표현의 공간을 재구성해야 한다는 것..

이러한 자신의 문제의식을 저자는 호미 바바나 사카이 나오키의 이론틀을 빌려서 나름 성공적으로 재구성하고 있다.. 그리고 적어도 야스쿠니의 제사나 야나기다 쿠니오의 조령제사론과 같은 기존의 담론들을 비판하는 데 있어서만큼은 이 이론틀은 효과적으로 작동한다.. 마루야마의 사상사적 논의를 근대 일본의 종교라는 장으로 옮겨 놓은 듯한 <내면을 둘러싼 항쟁>과 같은 장은 그 자체로 훌륭한 (비록 오리지널리티는 떨어지지만) 연구이다.. 하지만 문제는 논의가 항상 여기서 그친 채, 기존 자신의 문제의식을 선언처럼 반복하는 것으로 끝나버린다는 것이다..

 

적어도 이 책에서는 과거의 거장들, 카미시마 지로나 야스마루 요시오 등과 같이 민중들의 종교적인 실천이 내포하는 긴장과 모순, 전망과 한계의 착종된 상에 대한 정치한 분석 같은 것을 찾아보기 어렵다..

차라리 이 책의 부제를 원제 그대로 <근대 일본의 여백> 남겨두었으면 좋았을 것을.. <근대 일본이라는 역사 경험의 근원을 찾아서>라는 번역서 부제의 무게를 이 책은 견뎌내지 못한다.. 출판사의 선택이었을까..

이 글을 읽으면서 사상사의 고야스 노부쿠니의 글을 떠올리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이 겹침이 일본 학계의 어떤 트렌드를 반영하는 것은 물론이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더 하자면, 때때로 인용되는 무라카미 하루키나 무라카미 류 등의 소설의 한 대목들은 일반 젊은 독자들과 소통하려는 저자의 고민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기존의 논의에 녹아들지 못한 채 너무 생경하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그래서..

별은 세 개 반을 주기로 했다..

네 개에는 못 미치고, 세 개는 아쉽다..

그런데 3개 반을 표현할 방법이 없다..

어쩔 수 없이 앞서 리뷰를 쓰신 분이 5개를 주셨으니 3개를 줌으로써 균형을 맞추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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