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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의 제국 ㅣ 산책자 에쎄 시리즈 1
롤랑 바르트 지음, 김주환.한은경 옮김, 정화열 해설 / 산책자 / 2008년 9월
평점 :
절판
온갖 말(칼)들이 난무하는 강호를 거닐다보면 숨은 고수들이 참 많다는 사실을 새삼 절감하게 된다.. <기호의 제국>이라는 너무도 유명한, 하지만 아마 대다수가 읽지 않았을, 그래서 항상 이 책을 이야기할 때면, <텅 빈 중심>에서 이야기가 멈춰버리는, 이 책을 나 역시 한참이 지난 후에야 꺼내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이게 뭥미>였다.. 이건 이 책이 지니는 아름다움과는 별개의 문제다..
실로, 이 책은 아래 리뷰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향락비평, 혹은 방법적 나르시시즘의 괴서>임에 분명하다.. 이 리뷰를 조금 더 친절하게 풀어쓰자면, 역자들은 괜한 사족(몇 가지 아쉬운 점, p.202-203)을 달아서, 번역의 노고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무식>을 스스로 폭로했고, 정화열 선생 역시 <일본을 텍스트화하는 즐거움>이라는 제목을 통해 바르트의 의도를 잘 포착했으면서도, 메타주석의 마지막에서 자신의 무공으로 보이는 <삶의 경험의 현상학>을 꺼내들면서 바르트의 현학적 문화해석이 갖는 위험(고백적 자서전, 혹은 문화적 자기도취증, p.183)에 대해 꼬집어 이야기하면서, 아쉽게도 <꼰대>의 기질을 발휘하고 말았다는 것일테다..
상당히 날카로운 비판이다.. 확실히 역자는 자신이 번역한 책의 의미를 아쉽게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 같다.. 물론 정화열의 주석에 대해, 아메리카화한, 그래서 이 책의 번역될 수 없는 에스프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일방적인 비판은 과하다.. 그는 바르트의 글쓰기가 갖는 의미에 대해 정확하게 짚었고, 또 이 책이 오독될 수 있는 위험에 대해서도 충분히 경계하고 있었다.. 다만, 현상학자인 그에게, 구조주의적 기호학은 바르트 스스로가 언명하듯, 다시 한 번 비워져야 하는(현상학적으로) 혐의가 있는 접근방법이었을 뿐이다.. 뭐, 이건 <문파>가 상당히 다르니, 뭐라고 하기가 참 어려운 부분이다.. 그래도 결코 <사파>로 규정하고 있지는 않으니, 자신과 다른 주의들은 모두 <사파>로 싸잡아 욕하는 한국 사회의 일반적인 분위기에 비하면 훨씬 양반인 셈이다..
어쨌거나, 한 걸음 더 나가본다면, 결국 이 책을 어떻게 읽고 다시 전유할 것인가.. 즉 소화의 문제는 남아 있다.. 한 가지 걸리는 부분은 나르시시즘 앞에 붙어 있는 <방법적>이라는 형용사에 있을 것이다.. 방법이란 무엇일까.. 누군가가 말한 것처럼 그것은 아마 대상을 한 번 더 자신이 싸안아서, 역으로 그 대상을 이쪽에서 변혁한다는 <되감기>를 의미하는 것일테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자신에게 그 되감기를 할 수 있을 독자적인 무엇인가가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이렇게 글을 쓰다보니, 예전 누군가가 썼던 <<일본>의 기원: 글과 말의 사이에서>라는 글이 떠올랐다.. 물론 검색한다고 나올 수 있는 글이 아니다.. 그렇다고 내가 보르헤스적 기법을 쓰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이 글은 과거 한국의 어느 대학의 수업시간에 한 일본인이 썼던 소위 <발제문>이었다.. 대략 16페이지에 이르는 그 글은 지금의 기억으로도 조금만 더 수정하면 바로 간단한 논문이 될 수 있을 정도의 <완성도>를 갖춘 야심찬 글이었다(실제로 그의 글은 다시 고쳐쓰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을 밝혀둔다).. <일본단일민족신화의 기원>이니, <일본인의 경계>니 하는 논의들이 어느 정도 수입되어 있는 현재의 한국 학계에서야 <당연한> 이야기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지금으로부터 15년 전에 과연 그의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해 줄 수 있는 독자가 얼마나 있었을까..
과거 우리의 <이두>나 <향찰>과 같이 다양한 <음독>과 <훈독>의 변이형을 갖고 있는 일본어에 착목해서 <日本>이라는 국명의 기원을 추적해들어가는 시도는 사료적 입증이 가능한가의 여부와 관계 없이 흥미로웠다.. 특히 발제문의 핵심 논의이기도 한 기원이 책봉체제를 근원으로 하는 당시 동아시아의 국제법 체제에서 일본어의 특징인 글과 말의 차이를 이용해서, 책봉체제에 저항하고 <자주권?>을 지킨 일본 측의 세련된 국제적 감각에 있다는 주장은 두 가지 결론을 이끌어낸다..
1. <일본>은 중국(당나라)의 외교담당자의 반응을 먼저 고려해서 글자로 먼저 선택되었던 것이기 때문에, <니혼>이냐, <닛뽄>이냐를 놓고 싸우는 것은 한 마디로 우습다고밖에 할 수 없다는 것..
2. <일본>(해가 뜨는 나라)은 중국을 중심에 놓고 동쪽에 있기 때문에 <일본>인 것이며, 그것이 <분열증적>일지 모르지만, 사실 <일본>은 그러한 국칭이라는 결론이 주는 참신함.. 이는 일본 국사학계에 던지는 <야유>지만, 동시에 더욱 더 고루한 한국 국사학계로 되돌아오는 부메랑이기도 하다..
사실, 그의 이러한 <독특한> 사고의 배경에는 훈독과 음독이라는 복잡한 변이형을 보여주는 일본어의 특성에서 기인하는, 그래서 지금도 여전히 굳건한 일본학의 두 전통, 구미중심의 <보편주의적> 연구경향(일본어는 잘 모르지만, 국제학계는 영어를 쓰는 우리거야~) vs. 일본 중심의 <특수주의>적 연구경향(일본어도 잘 모르는 주제에~ 결국 일본에 대해서는 일본어로 쓸 수밖에 없다는 <일본밀교>)에 대한 나름의 <지겨움>이 깔려 있었으리라.. 이 <훈독>이라는 장벽이 깨어졌을 때 이 지겨운 <보편/특수>라는 자동인형은 돈을 넣어도 커피가 아니라 맹물이 나오는(아니면 설탕이 빠지거나 프림이 빠진) <먹통>이 될 것이고, 그런 점에서 그는 일말의 <기대감>을 안은 채, <훈독>이라는 마의 장벽을 가장 잘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한자문화권>의 한국인 연구자를 찾아 여기까지 왔던 것이 아닐까.. 이는 <추측>이 아니라 발제문에 실린 그의 <고백>이기도 했다,.
이런 대립구조의 지식은, 혼미한 일본연구를 정리하는 데에 아마 유용할 것이다 하지만 정리를 한다고 해도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단 이미 아는 바와 같이 상기의 대립구조는 일문/영문, 일본인/구미인, 내부인/외부인, 특수/보편이라는 대립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리고 이 외국인 내지는 <외부자들>(outsiders) 안에 중국인/한국인들이 포함되어 있는가에 관해서는 이제까지 거의 검토가 없었다. .. 물론 두번째의 기술적 문제인 훈독은, 이들 나라들에서도 여전히 문제로서 남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 훈독의 장벽을 넘어갈 수 있으면, 금후 일본 연구의 특수/보편의 이항대립은 흔들릴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본 보고자는 한국인 학자의 일본연구에 큰 기대를 하고 있다..
<기호의 제국>을 읽다 보니, 불현듯 그 시절의 발제문이 다시 떠올랐다.. 그 사람이었다면 바르트의 이 책은 전형적인 서구중심주의적 글쓰기라고 한 방에 날려버렸을 것이다.. 그리고 그게 꼭 잘못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어찌 됐건 일본인이 이 책을 보고 허허 헛웃음을 짓는다면, 그것도 즐겁지 않겠는가.. 아마 바르트도 웃어줄 것이다.. 다만, 그 때 그 발제문이 말을 건 대상은 파란 눈의 서양인이 아니라, 바로 옆 나라, 그것도 한자문화권에 속하는 한국의 젊은 연구자들이었다.. <환대>에 대한 데리다의 텍스트가 잘 지적하고 있듯이 주인은 손님의 손님이며, 손님은 주인의 주인이다. 즉, 환대의 주체는 <주인>이 아니라 <이방인>인 것이다.. 이렇듯 손님이 주인이 되고 주인이 손님이 되는 치환은 모두를, 그리고 각자를 상대방의 <인질>로 만든다는 것, 이것이 <환대>의 법인 것이다.. (물론 그 방식이, 혹은 그 의도가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허허) 과연 그 <환대>에 우리는 어떻게 응답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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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쯤이나 웃으며 강호를 거닐 수 있을지..
笑傲江湖를 흥얼거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