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주의의 기원 1 한길그레이트북스 83
한나 아렌트 지음, 이진우, 박미애 옮김 / 한길사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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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한나 아렌트H. Arendt󰡔전체주의의 기원󰡕을 읽고 있다. 물론 이 번역본이 몇번째 판본인지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477페이지에 달하는 초판이 2차대전이 끝난 지 6년 후인 1951년에 나왔다는 점, 그리고 이 저작을 쓰게 된 동기가 잘 알려진 것처럼 나치의 유대인학살에 대한 소식을 <풍문으로> 접하게 된 것 때문이라는 점은, 독일계 유대인이자, 조국에서 추방당하고 미국으로 망명한(그리고 한동안 무국적자로 살았던) 한나 아렌트에게 있어 이 저작이 자신과 자신의 민족에 대한 실존적 물음, 그리고 유대주의를 둘러싼 온갖 언설들과의 격투의 산물이라는 점을 알려준다. 또 이 저작이 그 평가가 어찌됐건 이후 전체주의와 권력론을 이야기하는 많은 논자들에게 일종의 <텃밭>이 되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에서 뜬금없어 보이는 절대주의 시대의 <인종주의>에 대한 푸코의 강의에서부터, <호모 사케르>에 대한 아감벤의 논의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그림자는 짙게, 그리고 길게 드리워져 있다. 아니, 조금 더 강하게 말한다면 <호모 사케르>연작은 아렌트에 대한 주석에 다름 아니다.

 

2. 일단 이 방대한 저서의 1부에 해당하는(2부와 3부는 각각 제국주의와 전체주의) <반유대주의>에서 흥미로운 대목.

2-1. 나치의 유대인 학살의 이유로 이야기되어왔던 두 교리-<희생양이론><전통적 반유대주의>-의 허구를 지적하면서, 근대의 반유대주의를 국민국가의 발전이라는 보다 일반적인 틀 속에서 규명한 점. ,19세기 말 제국주의, '승리 아니면 죽음'이 피할 수 없는 선택지가 되던 순간, 전쟁의 실제 목표가 적의 완전한 분쇄가 되고, 국민국가 체제가 급작스럽게 붕괴하면서, 한 번도 국민국가에 속해 본 적이 없던 유대인들의 운명이 결정되었다는 설명이 주는 참신함.

2-2, 또 하나, 반유대주의의 원천을 지난 세기 동안 유대인이 수행했던 역할에서 규명하고자 한 점. 특히, 중세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유럽사회에서, 특히 독일에서 유대인이 수행해온 역할에 대한 신랄한 지적은, 이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고발되는 유대민족 내부의 카스트--그리고 심지어 아우슈비츠와 같은 죽음의 수용소로 보낼 유대인들을 분류하고 관리하는 역할을 담당한 계층이 바로 동족인 상층 유대인(그 많은 수가 랍비)이었다는 사실--에 대한 강력한 비판의 단초라는 점에서도 주지해둘 필요가 있다. 그녀는 <유대민족의 사랑스러운 딸>이라는 안온한 입장을 처음부터 거부했던 것이다.,

 

3. 이렇게 적어두었던 것이 일주일 전이었지만, 아직까지도 책을 다 읽지 못했다. 집중하며 책을 읽기에 이래저래 하찮은 일들로 너무 바빴고, 또 날씨도 나빴다. 무엇보다, 반유대주의에서 보여주었던 놀라운 통찰력에 비해 호흡이 너무 길어져버린 후반부의 장들이, 두꺼운 볼륨의 책을 강도 있게 볼 수 있게 만드는 <긴장감>을 저해하는 요인이기도 했다.

3-1. 하지만 2부의 마지막 장인 <국민국가의 몰락과 인권의 종말>은 예외이다. 이 장에서 그녀는 미국으로의 망명 후 한동안 <무국적>으로 살아야했던 자신의 체험을 곰씹으면서-물론 자신도 인정하듯, 그녀의 무국적 경험은 무수한 무국적자들 중에서 예외에 해당하는 <정치적 망명>에 해당하는 것이긴 하지만- 유럽 사회에서의 <무국적>의 출현과 이의 전후 버전이기도 한 <난민> 개념, 그리고 <인권>의 원천을 역사적으로 추적해낸다. 역사적 권리에서 자연권으로 간주되었던 인권이, 현재는 <인류> 자체로부터 보장받아야 한다는 그녀의 결론은 인간의 삶의 조건에서 정치적 공간이 갖는 중요성에 대한 역설이기도 하다(이 논리가 그녀의 후기저작인 <인간의 조건>에서 더욱 발전하는 것인가?).

 

 

우리는 평등하게 태어나지 않았다. 우리는 상호 간에 동등한 권리를 보장하겠다는 우리의 결정에 따라 한 집단의 구성원으로서 평등하게 되는 것이다. 인권의 상실에 함축된 역설은, 한 사람이 일반적인 인간이 되는 순간-직업도 없고 시민권도 없으며, 의견도 없고 그의 정체와 고유한 점을 알려줄 행위도 없는- 그리고 그 자신만의 절대적으로 독특한 개성을 나타내면서 일반적으로 차별화 되는 순간 그런 상실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 개성은, 하나의 공통된 세상 안에서 표현되고 그 위에서 행동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하면 모든 의미를 상실한다.

  

4. 오늘 다시 3부인 <전체주의>를 읽으면서, 왜 그녀가 몇백 페이지에 걸쳐 전체주의 운동에 대한 지루한 서술을 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결국 그녀가 이 3부에서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강제수용소>라는 장치의 <예외성>에 관한 것이었다. 물론 그 강도가 프리모 레비나 장 아메리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특히 수용소의 <회색지대>적 성격에 대한 레비의 통찰은 아우슈비츠라는 체험을 통해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에 도달한 자가 아니라면 결코 쓸 수 없는, 인용한다는 것 자체가 부끄러워지는 기술이다. 그것이 한동안 한국 역사학계에 불어닥친 <회색지대론>에 대한 나의 불신의 이유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그녀로서는 결여된 체험에 기인하는 것이자, 어디까지나 그녀의 본업은 <정치학>인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이해의 영역에서 벗어나 있는 강제수용소의 절망적 상황에 대해 그녀는 최대한 감정을 자제하면서도 다음과 같이 토해낸다.

 

나치 돌격대의 맹복적인 야만성의 배후에는 사회적으로나 지적으로 또는 육체적으로 더 나은 사람들, 그러나 이제 자신들의 야만적인 꿈이 이루어진 것처럼 자신들의 손아귀에 들어온 사람들에 대한 깊은 증오와 적개심이 자리잡고 있었다. 나중에도 수용소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던 이 적개심은 인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감정의 마지막 유물처럼 느껴진다.

 

5. 언젠가 다시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할 수 있기를 바라며 오늘은 문구만을 끄집어내면서 글을 마무리하기로 한다.

 

서구 세계는 가장 어두운 시기에도 이제까지 살해한 적에게 기억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다. 강제수용소는 죽음 자체를 익명으로 만들기 때문에(어떤 수감자가 죽었는지 살아 있는 지 결코 알 수 없게 만들기 때문에) 죽음에서 완성된 삶의 종말이라는 의미를 빼앗았다.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한 개인의 고유한 죽음조차 앗아가버렸다.

도덕적 인격이 살해되었을 때 인간이 산 송장이 되지 못하게 하는 유일한 것은 개인의 차이, 즉 그의 유일무이한 정체성이다. 그런 개성은 불모의 형태로 끝없는 금욕을 통해 유지될 수 있었다. 전체주의 지배 아래 살았던 많은 사람들은 권리도 양심도 없는 인격의 절대적인 고립 속으로 도피했고 매일매일 도피하고 있다. 인간 인격의 이 부분은 본질적으로 자연에 의존하고 또 의지로 통제할 수 없는 힘에 의존하기 때문에 분명히 가장 파괴하기 힘들다(파괴되었다 해도 가장 쉽게 복구할 수 있다).

이런 개성의 말살은 법적, 정치적 인간의 분노와 도덕적 인간의 절망보다 훨씬 강렬한 전율과 공포를 야기한다. 비로 이 공포가 본질적으로 모든 인간은 야수라고 하는, 충분히 설득력 있는 허무주의적 일반화를 등장시킨 장본인이다. 실제로 강제수용소의 경험은 인간이 인간적 동물종의 표본으로 바뀔 수 있으며, 인간의 '천성'은 인간에게 극히 부자연스러운 것, 즉 인간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는 한에서만 '인간적'이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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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제국 vs. 자이니치 - 대결의 역사 1945~2015
이범준 지음 / 북콤마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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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이니치`라는 존재를 처음 접하는 이들에게는 입문이 되기에 충분한 책. 평이한 언어로 글을 쓰면서도 시종일관 진지함을 잃지 않는 보기 드문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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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의 문화 인문과학 코스모스 4
이로카와 다이키치 지음, 박진우 옮김 / 삼천리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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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마음이란 간사한지라, 책을 주문했을 때의 마음과 책이 도착했을 때의 마음이 다르다..

그 며칠 사이에, 혹은 몇주 사이에 다른 일상이, 또 다른 관심이 끼어들면서, 처음 그 책을 주문했을 때의 절실함이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책은 때가 되어야 읽는 이에게 말을 거는 것일까..

두 달 전 주문했던 이로카와의 책을 꺼내 읽으면서, 왜 이 책을 주문했는지, 그 때의 마음이 되살아났다..

예전 일본의 도서관에서 근대사 관련 리뷰를 하면서, 목록 1순위에 뽑아두었던 역사가..

하지만 그 묵직하고 값나가는 <메이지 정신사>를 도저히 살 수가 없어서, 공짜 복사카드로 열심히 돌렸던 기억이 난다.. 박스 어딘가에 잘 보관되어 있겠지만, 복사된 책이란 한 번 박스에 들어가면 좀처럼 나오기 힘든 법이다..

 

일본 민중사학, 특히 민중사상사 분야에서 이로카와 다이키치라는 이름은 보통명사로 통한다.. 주저인 <메이지 정신사>가 함께 소개된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메이지의 문화>라는 이 책만 보더라도-특히, 자유민권운동을 다루는 3, 4, 5장은 압권이다- 100여년이나 떨어진 과거, 지방 민중의 세계에 도달하고자 하는 저자의 각고의 노력이 잘 드러난다.. 그 세계를 규명하기 위해서는 좀처럼 찾기 힘든 사료를 찾아 몸소 지방의 여기저기를 뛰어야 하고, 운좋게 발견된 소수의 사료를 정밀하게 읽고, 또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하고, 여기에 역사적/문화적 상상력을 더하는 노력이 요구된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을 통해 조금씩 드러나는 민중의 세계는 결코 <진보>라는 이름의 사관으로 일관되게 정리될 수 있는 그런 공간이 아니다.. 그 공간에는 다양하고 모순적이면서 굴절된 가치관, 심성, 그리고 주의들이 충돌한다.... 서양의 한 정치사가는 이를 농민의 <도덕경제>라는 아주 훌륭한 개념어로 포착해냈다.. 물론 개념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한 차원 위의 수준이다.. 하지만 개념을 통한 정제된 논의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정도의 논의는 이미 60년대 이로카와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는 <통속도덕>이라는, 아직은 서술적인 개념을 통해, 근대 일본의 민중봉기는 통속도덕의 충실한 실천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쓰고 있다. 통속도덕이란 소생산자가 사회적 격동을 견디며 살아가는데 어울리는 생활원리를 말한다. 하지만 경제적 불황과 과중한 세금수탈로 사회가 파탄지경에 이르면서 이들은 막다른 길에 봉착하게 된다. 봉기는 이러한 통속도덕에 입각해서 합법의 계단을 올라가던 이들이 합법의 틀을 넘어서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그것은 결코 어떤 <-주의>, <-사상>의 성숙이라고 정리될 수 없는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봉기가 어떤 <매개>를 통해 일어나는가이다.. 여기에 민중봉기가 갖는 다양한 측면들이 또 한계들이 존재한다..

 

아주 간략히 이로카와의 방법론을 정리해보았지만, 이건 방법론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들의 세계를 복원해낸다는 것은 실증주의적인 작업을 넘어, 벤야민의 말처럼 어떤 위험의 순간에 섬광처럼 스쳐 지나가는 것과 같은 어던 기억을 붙잡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때문에 그는 이미 습기가 차서 읽기도 어려운 예전 문서들을 일일이 읽어나가면서, 지금의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전통의 세계에 갇혀 있는 그들의 정신에서, 봉기로 이어지는 계기들을, 그 도주선을 확인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것은 결코 어떤 논리-소위 '진보'-에 입각해서 그들의 움직임을 짜맞추는 작업이 아니다.. 다만 면면히 흐르는 지하수와 같은 그 생동력에서 가능성을 확인하는 것.. 그리고 그에게 자신의 역사적 작업은 1960년대, 내부로부터 변혁의 열기가 들끓어오르기 시작하던 일본 사회에서, 이 사회를 바꿔내기 위한 하나의 무기를 제공해주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우리에게도 민중사학의 시대는 있었다.. 저 신화처럼 이야기되는 80년대의 경험이 진보적 민중사학을 만들어냈고, 그 흐름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한국의 민중사학적 관점으로 씌어진 글들을 볼 때마다 드는 의문은 도대체 저자가 생각하는 <민중>이란 무엇일까 하는 것이었다.. 민중의 세계로 다가서려는 최소한의 학문적 고민도 없이, 민중이 (저자가 꿈꾸는) 역사의 원동력으로 호명되는 모습을 아마 한 번씩은 경험했을 것이다..

 

하지만, 또 돌이켜 생각해보면, 우리에게는 저 바다 건너 이로카와가 딛고 서 있는 땅과는 비교가 안 되는 거대한 민중 봉기의 경험이 있지 않은가.. 1894년 갑오농민전쟁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농민들은 왜 그 전쟁에 참가했을까.. 그들은 그 봉기의 과정에서 어떻게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전통의 세계관을 다시금 돌이켜보고, 또 이를 변형시키고, 또 파괴해가면서, 자신들이 결코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로 들어섰던 것일까..

 

섣불리 1894년과 1945년과 1980년 광주를 연결시키기 전에, 해야만 하는 많은 작업들을 우리는 스스로 방기해왔다.. 그리고 시대는 다시 수상해지고 있다..

 

과거로부터 희망의 불꽃을 점화할 수 있는 재능이 주어진 사람은 오로지, 죽은 사람들까지도 적으로부터 안전하지는 못하리라는 것을 투철하게 인식하고 있는 특정한 역사가뿐이다. 그런데 이들 적은 승리를 거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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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완 2017-09-22 2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1970년에 적혔을 우레 소리를 들으면서 떠나보낸 동지들을 이야기하는 저자의 짧은 후기를 보면서 현실의 혁명적 정세 속에서 단계적 진보로서의 과정이 아닌 역사의 순간 속의 인간을 살려내려고 하는 시도가 참 감동적으로 다가왔었습니다. 참 이 책을 읽으면서 한국 역사학의 저서 중에 이런 시도가 있는지 제가 과문해서 모르는건지를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생쥐스뜨 2017-09-25 1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이니치의 역사학까지 한국 역사학 안에 포함할 수 있다면, 조경달의 <이단의 민중반란>이 그나마 맞닿아 있는 시도라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많은 논의의 여지가 있습니다만..
 
전복과 반전의 순간 Vol.1 - 강헌이 주목한 음악사의 역사적 장면들 전복과 반전의 순간 1
강헌 지음 / 돌베개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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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최고의 책이라 하기엔 조금 그렇다.. 다만, 강헌의 책은 저작을 쓸 때보다 대중을 위한 강연을 할 때 더 완성도가 높다.. 기이한 일이지만, 어떤 의미에서 그는 저자라기보다는 이야기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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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자평전 박스 세트 - 전2권
수징난 지음, 김태완 옮김 / 역사비평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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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마어마한 가격이라 아직 구입하지 못했다. 하지만 책의 볼륨을 생각하면 비싼 것도 아니다. 그런 점에서 책은 항상 정직하다. 한 달에 한 번씩 책을 읽는 모임에서 내년 2월 이 책을 읽기로 결정했다. 전공자들의 말에 따르면, 이 책의 출간은 주자학 연구에 있어 일대 사건이라고 한다. 뭐 그렇다면 살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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