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과 노스탤지어 - 근대 일본이라는 역사 경험의 근원을 찾아서
이소마에 준이치 지음, 심희찬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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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과 노스탤지어>를 다시 읽다..

예전 일본의 한 도서관에서 이 책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서 읽었던 기억이 있다..

물론 제목이 주는 매혹 때문이었다..

상실과 노스탤지어..

 

하지만 이 책이 번역되리라는 생각까지는 못했다..

일본 지성사에서 <종교>라는 영역은..

어찌됐건 제국 시기 <국가신도>라는, 사람들의 내면을 통제하는 강력한 장치를 가진 사회였고..

그래서 그 주박에서 벗어나기 위한 지식인들의 사투가 <종교사상사>라는 독특한 학풍을 만들어내는 등, 중요한 연구대상으로 간주되어 온 반면..

한국 사회에서는 근대사를 이해하는 데 있어 그 중요성(동학, 식민지의 종교통제, 샤머니즘, 각종 신흥종교의 발흥)에도 불구하고 이 부분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는 이들은 한줌에도 지나지 않는 상황이니까..

안타깝지만 이게 우리의 현실이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가시밭길을 걸어가고 있는/걸어가야 할 역자에게 감사를 표한다..

 

책에 대한 구체적으로 내용으로 들어간다면..

적어도 저자의 문제의식에 대해서만큼은 나 역시 전적으로 공감..

종교라는 기존 개념이 담아내지 못하는 우리 내면에 깃든 종교성-막연한 죽음의 불안이나 죄악감, 이에 대한 갈등과 희구에 어떠한 언어를 부여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담론의 동질화에 대한 반작용으로 생겨나는 <여백>을 다시 담론 내부에 기입할 수 있는 표현의 공간을 재구성해야 한다는 것..

이러한 자신의 문제의식을 저자는 호미 바바나 사카이 나오키의 이론틀을 빌려서 나름 성공적으로 재구성하고 있다.. 그리고 적어도 야스쿠니의 제사나 야나기다 쿠니오의 조령제사론과 같은 기존의 담론들을 비판하는 데 있어서만큼은 이 이론틀은 효과적으로 작동한다.. 마루야마의 사상사적 논의를 근대 일본의 종교라는 장으로 옮겨 놓은 듯한 <내면을 둘러싼 항쟁>과 같은 장은 그 자체로 훌륭한 (비록 오리지널리티는 떨어지지만) 연구이다.. 하지만 문제는 논의가 항상 여기서 그친 채, 기존 자신의 문제의식을 선언처럼 반복하는 것으로 끝나버린다는 것이다..

 

적어도 이 책에서는 과거의 거장들, 카미시마 지로나 야스마루 요시오 등과 같이 민중들의 종교적인 실천이 내포하는 긴장과 모순, 전망과 한계의 착종된 상에 대한 정치한 분석 같은 것을 찾아보기 어렵다..

차라리 이 책의 부제를 원제 그대로 <근대 일본의 여백> 남겨두었으면 좋았을 것을.. <근대 일본이라는 역사 경험의 근원을 찾아서>라는 번역서 부제의 무게를 이 책은 견뎌내지 못한다.. 출판사의 선택이었을까..

이 글을 읽으면서 사상사의 고야스 노부쿠니의 글을 떠올리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이 겹침이 일본 학계의 어떤 트렌드를 반영하는 것은 물론이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더 하자면, 때때로 인용되는 무라카미 하루키나 무라카미 류 등의 소설의 한 대목들은 일반 젊은 독자들과 소통하려는 저자의 고민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기존의 논의에 녹아들지 못한 채 너무 생경하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그래서..

별은 세 개 반을 주기로 했다..

네 개에는 못 미치고, 세 개는 아쉽다..

그런데 3개 반을 표현할 방법이 없다..

어쩔 수 없이 앞서 리뷰를 쓰신 분이 5개를 주셨으니 3개를 줌으로써 균형을 맞추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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