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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번역가의 이중생활
알라 알카이시 지음, 서제인 옮김 / 글항아리 / 2026년 6월
평점 :
지인의 소개를 받고 읽기 시작한 책..
한 살짜리 아이를 키우면서, 그리고 아마 이래저래 바쁜 시간을 쪼개면서 생활하고 있을 그/녀가, 최근 <필사>를 하며 읽고 있다며, 메일로 소식을 전하면서 알려준 책이었다..
이북도 있었지만.. 왠지 이 책은 페이지를 손으로 한장 한장 넘겨가며 읽고 싶었다..
이곳에 며칠 들른다는 지인이 있어, 책을 부탁했고 얼마 전 건네받았다..
최근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
햇볕이 몸에 좋다는 핑계를 대면서.. 근처 고쇼를 산보하고 있다..
숲길을 따라 걷다가 빈 의자가 있길래 앉아서 책장을 넘기기 시작한다..
하지만 책장이 쉬이 넘어가지 않는다..
이스라엘군의 점령, 일반인 시설에 대한 폭격, 군대 투입에 대한 소식들을 띄엄띄엄 뉴스를 통해 전해 듣기는 했지만.. 그리고 초기에는 오카 마리 선생의 강연이나 팔레스타인과 가자 지구 분쟁의 역사적 기원에 대한 일란 파페의 책들도 한국어로 번역 소개되면서 한동안 관심을 가지고 읽기는 했지만..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 발발하고.. 또 페르시아만을 둘러싼 미국과 이란의 갈등이 전면화되는 등.. 여러 긴급한 국제정세들 속에 가자 지구에 대해서는 한동안 무심하게 뉴스를 흘려듣고 있었던 것 같다..
사실, 최근에는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소식보다는, 네타냐후의 혐오스러운 얼굴이 더 빈번히 나와서(대개 항상 비슷하게 혐오스러운 트럼프의 얼굴과 항상 함께 나온다).. 그냥 채널을 돌려버리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본질은 동일하다.. 가산 카나파니의 잊혀지지 않은 문장.. "그들은 왜 물탱크의 벽을 두드리지 않았을까"라는 물음은 잘못된 것이다.. 세상이 들으려고 하지 않았던 것, 아니 들었지만(빤히 지켜보았지만) 무관심하게 외면했을 뿐이라는 것.. (물론 그것이 오래 전.. 가산 카나파니의 작품이 우리에게 던진 메시지일 것이다.. 그의 작품집도 최근 복간되었다.. 이전 작품집에 실렸던 <하이파에 돌아와서>가 빠진 것이 조금 안타깝다..)
가자 지구에 대한 이스라엘의 전쟁 기구의 작동-우아하게 말하면 '통치성'이겠지만-에 대해서는 이미 (한국에도 소개된) 미셸 음벰베가 <죽음정치necro politics>에서 탁월하게 정리한 바 있다.. 가자 지구와 서안 지구에 대한 후기 근대의 식민 점령에 나타난 죽음권력이라고 부르는 특정한 공포 구조의 특징을 그는 이렇게 정리한다. (1)봉쇄와 정착촌의 확장과 같은 영토 파편화의 역학, (2)수직적 주권에 의한 도시형 광학장치 정비와 게이티드 커뮤니티와 같은 분열적 점령, (3)적의 사회적, 도시적 기반시설망에 대한 계획적이고 체계적인 파괴, 즉 인프라전쟁.. 이 세 가지 권력의 결합, 그리고 포위상태(계엄상태)를 지속함으로써 식민 권력은 점령지 주민들에 대한 절대적 지배력을 갖는다. 가히 탁월한 정리다..
이러한 전쟁 기구가 작동되기 시작한 것은, 물론 흔히 뉴스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최근 이스라엘에 대한 하마스의 공격 이후가 아니다.. 그것은 2차대전 직후, 그리고 가자지구의 탄생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런데도 우리는 종종 양비론에 빠질 것을 강요받는다(아니 양비론에 빠지는 것이 편하기 때문에 그냥 손쉽게 선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스라엘의 폭력도 나쁘지만, 하마스의 폭력도 나쁘다고.. 자신은 공정하다고 자위하면서..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무사유(thoughlesstness)일텐데.. 그리고 우리가 한때 사회과학을 열심히 공부했던 것은 어떤 현상 너머의 구조적 폭력에 대한 인식을 얻기 위함이었을텐데. <비판 사회과학>이라는 앎이 화석화되고 있는 <문송의 시대>에 새삼 자괴감이 든다..
물론 알라 알카이시의 이 책은 그러한 구조적 폭력의 얼개를 그리고 있는 책이 아니다.. 오히려 바로 그 폭력의 현장 안에서-매일 폭탄이 터지고, 이스라엘 군의 총격이 일어나고 사람들이 쓰러지는, 그리고 모든 기반 시설이 파괴된 지구를 둘러싼 봉쇄 하에서 - '살아가고 있는' 인간의 시선에서 보는 풍경에 대한 이야기다.. '살아가고 있는' 이라고 썼지만.. 가자 지구에서의 사람들의 삶을, 문자 그래도 '삶'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인가.. 아감벤의 현학적인 조에/비오스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삶이란 적어도 최소한의(minima) 어떤 존엄을 내포하는 단어가 아니었던가..
배고픔은 자신만의 언어를 키워낸다. 조용하게 사람을 갉아먹는 언어를. 그것은 극적으로, 혹은 요란하게 찾아오지 않는다. 그보다는 몸과 마음에 스며들어 둘 다 흐물흐물해지고, 구부러지고, 닳아 없어지게 만든다. 배고픔은 생각 위에, 기억 위에, 피부의 연약한 껍질 위에 먼지처럼 내려 앉는다. 한때는 나와 상관없는 시공간에 속해 있는 듯 보였던 조지 오웰의 말들이 이제는 내 안구 뒤쪽의 은밀한 현기증에 직접 말을 걸어온다. "굶주림은 사람을 완전히 등뼈도 뇌도 없는 것 같은 상태로 전락시킨다. ... 마치 해파리로 변해버린 것처럼." 한때는 기괴하고 이해할 수 없게 느껴졌던 저 비유가 이제는 정확하게 느껴진다. 이것이 내가 변해버린 모습이다. 구조 같은 거라곤 없이 떠다니는 존재. 생각을 의도에 고정해 놓은 능력이 없는 존재. 나는 생각을 향해 손을 뻗지만, 그건 붙들기도 전에 흩어져 버린다.
과연 이런 상황에서 글을 쓴다는 '행위'는 무엇일까.."은유가 부서져 나가는", "아름다움마저 상처에 섞여 오는" 그런 땅에서 그는 팔레스타인의 한 시인의 "비바람에 시달린 낮은 목소리"의 문장을 기억해낸다.
영혼이 한 번에 모두 죽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러나 그것은 허물어져, 한 번에 한 자아씩 죽어간다.
"한번에 모두 죽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이라는 문장을 읽으면서 마음이 이지러진다. 해석이 가능한가.. 하지만 한 번에 모두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이곳 가자에서는 한사람씩 한사람씩 단계적으로 쓰러진다.. 굶주림, 환멸, 박탈, 무감각을 차례로 겪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malgré tout/ 디디-위베르만이 썼던 것처럼) 그는 글을 쓴다.. 이것에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그 총체성에 저항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라고..
책장이 쉬이 넘어가지 않았다.. 산들 산들 가을 바람이 부는 공원의 벤치에서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다.. 이런 글에 대해 해설을 쓴다는 것 자체가 용납되지 않는다.. 이런 글에 대해서는 <응답>을 해야 한다.. 하지만 <응답>은 자신에게 어떤 책임을 지우는 일이기도 하다..
여전히 무력한 언어로..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