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의 기원 2-1 - 폭포의 굉음 1947~1950 현대의 고전 16
브루스 커밍스 지음, 김범 옮김 / 글항아리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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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으로 <한국전쟁의 기원 Vol.2 폭풍의 굉음> 등정을 시작한다. 

번역본 2-1이 다루는 시간은 해방 3년사의 중간에 해당하는 1947년이다.. 그리고 대상은 이 시기 냉전 체제를 새로이 구축했던 미국, 그리고 한국의 정치..


장문에, 문학적 비유가 많아 번역이 어려웠다는 예전의 소문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번역자인 김범 선생의 역자 후기가 증명하듯, 2권은 서문(1장 책을 시작하며: 미국 외교정책의 방법과 이론에 대한 회고)의 첫 문장부터 문학적 수사로 시작한다.. 눈의 결정이 가진 신비를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로부터, 해방 3년이라는 이 미묘한 시간에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가, 그 연구 방법에 대해 다루는 서문은, 사르트르의 변증법 논의와 역사유물론자들의 영원한 고전인 K. 맑스의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이 교묘하게 뒤섞인 매혹적인 글이었다.. 


가장 접근하기 어려운 과학의 비밀 가운데 하나는 눈의 결정이 수없이 다양하게 보이면서 숨막힐 정도로 대칭성을 지녔다는 점이다. 땅에 떨어질 때 눈은 임의성과 결정론이 뒤섞인 미지의 명령을 따른다. 똑같은 것은 하나도 없지만 모두 조화로운 구조를 갖고 있다. 하나 위에 다른 하나가 쌓이면서 독특한 구성 요소는 전체를 부드러운 아름다움으로 변모시켜 지상을 균일한 광명으로 덮는다. 눈이 내린 것이다. 


하지만 눈 결정은 그 비밀을 아무리 파헤치기 어렵더라도 물리적 법칙을 따르는, 즉 보편 법칙의 한계 안에서 반응하는 반면, 인간은 인간의 법칙을 따르기 때문에 정치에는 늘 비밀스럽고 예측하기 어려운 측면이 존재한다는 것.. 다시 말해 현미경 유리 아래 고정시켜 검사할 수 있는 개별적 정치 사건은 존재하지 않기에, 현미경과 이론이라는 유리를 이용해 들여다보려는 인간의 열정과 관심이 수반된다는 것을 전제로 해야 한다는 것.. 즉 정치를 분석하는 사람은 모두 참가자이자 관찰자일 수밖에 없다는 것.. 사적 유물론의 기본적 입장을 잘 표현한 문장이라는 생각이 든다.. 왠지 커밍스가 1장의 제사에 사르트르의 문장을 쓸까, 맑스의 문장을 쓸까.. 망설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제사를 선택하는 커밍스의 탁월한 감식안에 대해 이미 한 표를 던지긴 했지만..). 하지만 커밍스 역시 감히 맑스의 문장을 제사로 쓰는 데는 다소의 주저가 있었을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역사를 만들어가지만, 그들이 바라는 꼭 그대로 역사를 형성해가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 스스로 선택한 환경 아래서가 아니라 과거로부터 곧바로 맞닥뜨리게 되거나 그로부터 조건 지어지고 넘겨받은 환경 아래서 역사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모든 죽은 세대의 전통은 악몽과도 같이 살아 있는 세대의 머리를 짓누르고 있다."


2권의 1부는 냉전의 심화과정에 따라, 루스벨트의 <국제협력주의>에서 <봉쇄>로, 그리고 <반격>으로 전환하는 미국 외교정책의 변화과정을 꼼꼼하게 추적한 글이다.. 냉전체제를 만들어간 가장 중요한 행위자들이 미국의 정치가들이라는 점에서, 세계주의와 고립주의라는 미국의 오래 된 두 가지 정치적 전통이라는 큰 틀 속에서, 트루먼과 맥아더, 딘 애치슨, 조지 케넌 등의 국무부, 군부(육군성), 그리고 한국의 이승만 주변의 미국인 실력자들-굿펠로, 로버트 올리버, 미국의 냉전체제를 구축했던 주요 행위자들 사이의 복잡다단한 이해관계의 실타래를 추적해나가는 커밍스의 시도는 나름 흥미로웠다.. 

이러한 글쓰기는 예전에 미국의 그 유명한 '똑똑이들'이 왜 베트남전쟁이라는 수렁에 스스로 빠지고 말았는가라는 D. 핼버스탬의 거작(벽돌책) <최고의 인재들The Best and The Brightest>을 떠올리게 했는데.. 핼버스탬의 마지막 유작이 한국전쟁을 다룬 <더 콜디스트 윈터>라고 하니 함께 읽어봐도 좋을 듯 싶다.. 아무래도 국제정치, 외교사에 해당하는 이 영역은 내게 낯선 분야니만큼.. 일단은 커밍스를 따라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2권의 후반부를 아직 안 읽은 상태에서 확언하기는 어렵지만, 커밍스가 북침을 주장했다는 식의 '설'은 왠지 커밍스가 1949-50년 초 미국의 외교정책의 핵심으로 지적하는 <개입> 이론을 혼동한 결과처럼 보이기도 하는데(진짜 그럴 것 같아서 정말 걱정되긴 하지만..), 이 역시 후반부까지 읽어봐야 할 듯.. 


어쨌거나 상당히 난해한 미로와 같은 여러 길들을 거쳐 만들어진 이론으로서의 <개입주의>에 대해, 커밍스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이론가였던(나는 이 방면에 무지함), 제임스 버넘의 이론을 정리하는 것으로 마무리하는데, 이 책 1부의 핵심을 관통하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제임스 버넘은 배외주의적 반격과 냉전 시대의 봉쇄 사이에서 역사에 남을 만한 타협을 이룬 총명한 설계자로 보아야 한다. 이 책에서는 그 혼합물을 개입주의라고 부르겠다. ... 그것은 봉쇄와 반격의 혼합으로 미국의 절대적 지배권에 내재한 현실을 전제로 했다. 미국은 세계정부나 민족주의의 후퇴와 자기만족이 아니라 '세계 제국'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책의 2부 한국은 1947년 당시 남한과 북한을 다룬다. 이 장들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시기인만큼, 46년 가을 봉기, 그리고 이어지는 봉기들을 거치면서 남한의 풀뿌리 인민위원회들이 몰락하고, 반면 그들을 무력으로 진압해가면서 우익 국가기구들이 성장해가는 이 시기를 읽는 것은 여전히 괴롭고 쓰라린 독서이다.. 이범석의 족청이나 서북청년회와 같은 우익 청년단체들의 폭력, 그리고 무엇보다 평가가 분분한 이승만의 '가공할' 정치력으로 이루어진 폭력적 지배기구로서 <남한 체제>가 점차 정치적 헤게모니를 구축해가는 상황.. 그리고 이러한 <남한 체제>에 대한 저항으로 남로당의 주도권 장악, 그리고 향촌/촌락을 중심으로 한 수많은 봉기들과,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피비린내나는 학살의 기록은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을 이지러지게 한다.. 


1947년 여름에 작성된 경찰과 정보기관의 보고서는 향촌으 혼란 상태를 기록한 끝없는 일지 같다. 향촌에서는 작은 투쟁이 수없이 일어났고 그것은 그 시기 한국을 찢어 놓은 분열의 축도였다. 


당대 중국과 같은 광활한 대륙이라면 이러한 향촌 봉기가 어떤 유의미한 성공을 거둘 가능성도 있었겠지만, (저자가 1권에서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듯) 동아시아 2위의 교통망(철도), 그리고 훈련받은 관료가 근무하는 근대적 기구를 군 단위 이하까지 밀어붙인 일제 식민지 체제의 유산은 향촌의 이러한 봉기를 진압하는 극도의 효율성을 보여주었다는 것. 그리고 맑스의 <감자 푸대>라는 유명한 메타포가 상기시키듯, 고립된 향촌에서는 정치 운동을 계속할 수 있는 이해관계를 공유한 공동체가 생겨날 수 없었다는 것이 1947년의 수많은 봉기들을 무력화시킨 요인이었다는 커밍스의 분석은 타당하다..

그러한 점에서, 48년 4월의 제주, 그리고 같은 해 10월의 여순 봉기는 예외일 수도 있겠지만.. 이미 수많은 봉기들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효율성을 정비해나간 남한의 폭력적 국가기구, 그리고 압도적인 물량 지원으로 이들을 후원하는 미군 앞에서, 두 사건은 철저히 진압되었다. 이는 이어지는 49년의 <유격대 투쟁>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분석은 이미 사건이 끝나버린 이후의 시점일 수밖에 없다. 후대의 역사가들이 보기엔 엉뚱한, 그리고 무모해 보이기까지 하는 이 봉기에 참여했던 당대 인민들의 <마음>을, 그리고 그 봉기가 성급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봉기에 가담했던 당대 활동가들의 <마음>을 읽어내야 한다.. 커밍스 역시 이 지점을 명확히 짚어내고 있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정작 더 깊이 들어가지는 않는다.. 물론 커밍스에게 이 이상을 요구할 수는 없다.. 그것은 피비린내 나는 학살과 시체들로 뒤덮인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과제일 테니까..


여순반란은 1주 남짓 지속된 격렬한 폭풍이었지만 궁극적으로는 찻잔 속의 태풍이었다. ... 규모와 중요성에서 여순반란은 1946년 가을 봉기와 비교할 수 없다. 그것은 불만을 품은 군인들이 일으킨 즉흥적이고 대단히 멍정한 반란으로, 전라남도의 강력한 좌익 기반에 대한 탄압을 더욱 강화했을 뿐이다. 실제로 투옥된 한 남로당원은 그 반란은 "성급했다"고 당국에 말했다. 이 말은 당이 대비하지 못했고 따라서 지도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럼에도 남로당 활동가들은 반란에 가담했다. 그것은 그 봉기가 "인민의 마음을 반영"한 것이고 인민은 "혁명을 일으킬 준비가 돼 있었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리고 당은 다음 기회에는 인민을 지도할 준비가 돼 있었다고 말했다. 이 보고서에는 진실이 담겨 있으며 증거와 합치한다. 이것은 남한 좌익의 묘비명이었다. 대중적 기반은 있었지만 지도력이 결여되어 있었다. 활동가들은 반란의 뒤를 따라가면서 그것을 혁명이라 불렀다. 여수의 역사적 중요성은 3년에 걸친 좌익 활동이 실패의 막을 내렸다는 그 반란적 특징에 있다. 


2-2권은 8월 14일 이후에나 읽을 수 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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