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의 기원 1 - 해방과 분단체제의 출현 1945~1947 현대의 고전 16
브루스 커밍스 지음, 김범 옮김 / 글항아리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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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에 세 권의 번역본을 올려놓고 사진을 찍어봤다..

하나는 86년판 청사출판사 본, 또 다른 하나 역시 86년판(하지만 내 책은 2008년판 12쇄) 일월서각 본,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올해 나온 2023년판 글항아리 본이다. 

세계명작을 제외하고, 사회과학 서적에 세 권의 번역본이 있는 것은 그리 흔치 않은 일이다(.. 라고 쓰려는데, 갑자기 프란츠 파농의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이 떠올랐다.. 역시 세 권이다)..

90년대 말, 어느 여름에 내가 읽었던 판본은 86년판 청사 본이었다. 헌책방의 서가를 기웃거리다가 우연히 발견해서 구입한 책. 그 때도 이미 이 책은 충분히 낡아 있었다.. 아직 <해방 3년사/8년사>라는 테제가 대학가에는 남아 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이 책이 세미나 커리로 사용되는 걸 본 적은 거의 없다. 대개 그 당시에 읽었던 책은 <다현사>나 아니면 <청년사>였으니까.. 이 책은 이미 그 시절에도 대개는 다 아는, 하지만 같이 읽지는 않는, 그런 책이었다. <다현사>류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내게 이 책은 사회과학적인 의미에서의 절제, 혹은 균형과 함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열정이 전해지는 텍스트로 기억된다. 꽤 많은 밑줄이 그어져 있다.  

일월서각본 역시 마찬가지로 그로부터 한참 후 어떤 헌책방에서 우연히 구입한 것 같은데, 이 책은 한 두 챕터를 훑어보긴 했지만, 완독하지 않았다. 같은 해 번역출판되었는데, 결국 일월서각판만 살아남았다. 물론 일시적인 지속이었고, 얼마 후 현세의 삶을 다하였지만.. 그래도 12판까지 낼 수 있었던 것은 번역이 더 좋았기 때문인지, 아니면 단순히 출판사의 힘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번역에서 커다란 차이는 느끼지 못했으니까.. 일월서각은 여전히 의문스러운(일본어의 不思議라는 표현이 적절한데) 출판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산 이유는 무엇이었는지 잊어버렸다. 

그리고 올해 알라딘에서 대대적으로 크라우드 펀딩을 한다는 광고를 보고, 출판되자마자 이 책도 구입해버렸다. 더구나 이번엔 지금까지 소문으로만 전해져 내려오던 2권까지(2권의 한 두 챕터는 예전에 창비에 번역 소개된 적이 있지만, 전권이 번역된 것은 이번이 처음. 영어판과 일본어판까지 구입했는데, 읽지 못했다). 그러고보니 10여년 전에 어느 술자리에서 한 서울 사립대 역사학과 교수와 이야기를 나누다, 뜬금없이 이 책 2권의 번역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 <한국전쟁의 기원> 2권은 언제 번역되나요?

에? 번역이 안 되었나요?

네. 역비에서 영문판은 출간됐지만, 번역은 아직.. 모르셨나요? 

글쎄요. 전혀 몰랐네요..

네. 그런데 왜 번역이 안 되는 것일까요?


이 분은 조선 시대 전공이라, 현대사에 대해 묻는 것 자체가 실례이긴 했지만, 뭐 그래도 이 땅에서 역사학을 전공으로 하는 사람이라면, 현대사, 그리고 이 책의 소재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그런 근거 없는 전제를 깔고 취기에 기대어 던진 물음이긴 했지만.. 정말 궁금한 질문이기도 했다.. 그런데 한국현대사에 대한 그 지대한 관심에도 불구하고 왜 정작 한국에서 2권은 번역이 안 되는 걸까..


그러던 어느날, 글항아리에서 1-2권 전권이 번역출간된다는 소식을 우연히 듣고, 감회가 새로웠다. 아마 두 종류의 번역본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새로운 번역본을 선뜻 구입한 것 역시(만만치 않은 가격에도 불구하고) 그 기쁨이라는 감정이 불러일으킨 비합리적 충동의 산물이 아니었을까.. 그래도 구입 후 대개의 책들의 운명이 그렇듯이 바로 서가의 깊숙한 곳으로 향하지 않고 책상 근처에 놓여 있다가 이틀 전 손에 걸리게 것은 역시 '우연히' 듣게 된 <정전협정> 체결 70주년 뉴스 때문이었다..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는 <정전협정>이긴 하지만, 그래도 70주년이니까.. 이 책을 읽는 것으로 내 나름의 방식으로 기념해볼까. 홉스봄 선생님이 <제국의 시대> 어딘가에서 <-주년>이라는 방식의 기억/기념은 근대적인 현상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었는데, 그러고보면 이런 방식의 책읽기도 굉장히 근대적인 것이다(나는 <마들렌>이라는 기표를 나름 좋아한다).   


그런 연유로 이틀 전부터 이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사실 초중반부분부터 조금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책 출간 이후 50여년이라는 세월의 무게를 이 책 역시 비켜가기는 어려우리라.. 냉전체제, 더구나 군부 독재 시절의 암운이 남아 있던 시절, 거침없이 미국과 한국 친미보수주의자들의 선조들(반일을 반공으로 바꾸는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던 '보신'의 달인들)에게 비판의 칼날을 들이대던 저자의 문체도, 많은 후속연구들, 그리고 사회운동과 민주화를 통해 이제는 한국현대사에서 나름 당연한 '상식'이 되어버렸다는 것도 그 이유일 것이다(물론 그 <상식>을 다시금 뒤집으려는 세력이 여전히 커다란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한국 사회의 역동성일 수 있겠지만). 아마 이 책이 출간되던 당시 가장 논란이 되었던 대목은 이 책의 2부 1945-1947년 중앙의 정치상황일 것이다. 

루스벨트 사후 미국 정치의 두 파벌인 국제주의와 군부로 대표되는 일국점령파의 대립이 결국 후자의 승리로 귀결되는 가운데, 남한으로 들어온 미군정의 거듭되는 뼈아픈 실책(실책일까, 아니면 필연일까), 한민당과 미군정의 영합, 그리고 신탁통치 여론의 혼란을 틈타 결국 주도권을 확보하면서 단독정부 수립으로 향해가는 양자의 움직임, 그리고 대중의 압도적 지지라는 정치적 여론의 힘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이러한 반동적 정치세력들의 공세에 주도권을 뺏긴 채 점차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가는 건준, 인공까지.. 이런 이야기들은 이제 더 이상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또 남침설 vs. 북침설을 둘러싼 논쟁 역시 이 책의 1권을 읽다보니 그닥 중요한 논쟁은 아닌 것 같다.  


아.. 하지만.. 괄목상대刮目相對.. 라고 했던가.. 이 책을 다시 읽으면서, 눈에 다시금 힘을 주기 시작하기 시작한 것은.. 한낮의 더위가 한풀 꺾이고, 어스름이 드리우기 시작한 저녁 무렵.. 이 책의 3부 <1945-1947년 지방에서 발생한 한국인과 미군의 충돌>을 읽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그리고 저녁 7시경부터 정확히 밤 11시 55분까지, 5시간은 근래에 보기 드문 몰입도를 보여준 시간이었다.. 아마 지금 이렇게 오전에 글을 쓰고 있는 것도 어젯밤의 여운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류학의 연구대상인 전통적인 마을/촌락은 대개 자급자족적이고 안정적이며 조화로운 공동체를 연상하기 마련이다.. 인류학자들은 그러한 마을에 들어가서, 사회를 연구한다. 하지만 그러한 이상형으로서의 <마을>은 과연 존재하는가? 아니, 마을이라는 연구단위야말로 안정과 통제를 본원으로 하는 사회과학의 산물이 아닐까.. 과연 마을에서 연구하는 사회과학자들은 마을이라는 연구단위가 갖는 이데올로기를 의식해 왔을까.. 

어쩌면 학사가 갖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질문일 수도 있는 이런 의문들을 품고 있던 시절에, 떠올렸던 책들이 그레고리 헨더슨의 <소용돌이의 한국정치>, 그리고 커밍스의 이 책 <한국전쟁의 기원>이었다. 아마 1940년대 후반이라는 남한의 정치적 현장을 동시대에 관찰했던 헨더슨의 통찰력이 <소용돌이vortex>라는 굉장히 논쟁적이지만 중요한 개념을 만들어냈으리라 여겨지지만, 이 책은 한국의 사회과학자들에게 그다지 인용되지 않은 저주받은 걸작이 되었다. 그리고 커밍스 역시 지방 인민위원회의 흥망성쇠, 그리고 그 마지막 불꽃으로서의 10월 봉기를 서술하면서 소용돌이라는 메타포를 쓰고 있다. 이 책의 3부를 읽고 있노라니 커밍스가 서론에서 헨더슨을 언급하는 이유를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었다. 

1945년 일제 식민지로부터 해방된 직후의 남한, 한반도 바깥으로 강제동원된 노동자들이 다시 유입되는 가운데 급격한 인구변화, 일제가 남겨놓은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발달된 교통(철도)과 통신 인프라, 토지 소유 관계에서 서울과 떨어진 정도(지리적 위치), 그리고 미군 진주까지 걸린 시간(공백기의 길이) 등의 변수가 각 지역의 인민위원회 성립과 발전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가를 개관한 8장, 그리고 경기도에서 제주도에 이르는 남한 각 지역의 지방인민위원회의 운명을 서술한 9장, 그리고 1946년 9월 총파업과 10월 봉기에 이르는 남한 사회의 소용돌이와 그 결말을 이야기한 10장은, 왜 이 책이 지금까지도 고전으로 남아 있는지를 깨닫게 해주는 이 책의 백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장들의 문장들 곳곳에는 당사자일 수 없는, 하지만 이 나라의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미국의 국민이라는 데서 오는 부끄러움(혹은 죄의식), 그리고 연구대상에 대한 거리, 그리고 객관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사회과학자로서의 직업의식과 패배한 자들에 대한 연민이 함께 묻어나온다.. 아마 그 문장들이 갖는 힘이야말로 70여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이 땅의 독자들의 등골을 시리게 하는 서늘한 냉기의 원천일 것이다. 


<테제>라는 것은 물론 한 시대의 정치경제적 소산임에 분명하다. <해방3년사>, <해방8년사>라는 테제가 필요한 시대가 있었고, 나 역시 그 시대의 끝자락을 통과한 세대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지금, 이미 신자유주의의 판타스마고리아가 모든 이들의 꿈을 지배하는 듯이 보이는 우리 사회에서 이런 테제들은 유의미한 것일까. 그리고 나는 과연 <패배의 기록>(누군가에게는 승리의 기록이겠지만..)으로 점철된 이 책을 2부까지 완독할 수 있을까.. 45년 해방이 가져다준 유토피아의 꿈에 도취되어 거리로 나섰다가 지옥을 경험한 후 꿈에서 깨어나 마을로 돌아온 사람들은 과연 '평온하게' 살아갈 수 있었을까. 마음을 다잡기 위해 이 책 10장의 마지막 결론을 적어본다..



미국은 공산주의자가 이끈 조직적 혁명을 찾으려고 했건만 대신 체계 없고 실험적이며 자연발생적인 농민 전쟁의 광범한 파편을 발견했을 뿐이다. 하나씩 살펴보면 지역주민의 수많은 원한의 산물이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해방된 한국의 체제에 불만의 절규가 쌓인 것이었다. 그러나 봉기는 지방적이고 자연발생적이었기 때문에 일본인이 남긴 근대적 통제 수단에 진압될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 미국과 한국인 우익 세력이 장악한 철도, 도로, 통신시설과 어떤 지역의 봉기든 투입돼 처리할 수 있는 전국적 경찰 조직은 결말을 이미 정해놓았다. .... 봉기 이후 한국 농민의 가장 큰 손실은 그들의 이익을 보호해준 지방 조직이 사실상 소멸됐다는 사실이다. 남한 전역에서 대부분의 인민위원회와 농민조합이 사라졌다. 전국과 지방의 중요한 좌익 조직의 지도자들은 죽거나 투옥되거나 체포되거나 은신했다. ... 모든 좌익이 연합해야 한다는 민전의 정확한 주장은 산산이 부서졌으며, 대중적 기반의 큰 상실과 좀더 과격하고 폭이 좁은 조직인 남조선노동당의 출현으로 이어졌다. 적어도 농민에게 합리적 선택은 평온한 농촌으로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국민국가, 냉전, 독재, 민중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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