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소설은 나의 현재
울고 있는 사이 계절이 가고 있다. 봄의 마지막 절기인 곡우(穀雨)를 앞두고 있는 4월 중순. 이 시간이 지나고 나면 곧 여름이 시작된다. 언제나 그렇듯 계절은 내가 느끼고 만끽하려 할 무렵 서둘러 이별을 준비한다. 봄옷을 제대로 입지 못하고 반팔을 찾는 심정이다. 그런 것 같다. 봄에 입으려 사둔 원피스는 쇼윈도에서 하늘거릴 때만 아름답다. 아, 목이 타는 봄 날 오후여. 당신의 봄도 나와 같은가. 오래전 농촌 어르신들은 이 무렵이 나무에 물이 가장 많이 오르는 시기라 깊은 산속으로 곡우 물을 먹으러 가는 풍습이 있었다 한다. 일부러 나무에 상처를 내고 통을 달아 며칠씩 수액을 받아 두었다가 약처럼 마셨던 것이다. 그들은 수액을 마시며 어떤 갈증을 풀었을까. 무엇을 희망하였던 것일까. 막연히 봄비는 슬프지만은 않다고 여겼는데 그것은 아마도 봄비가 잘 내려야 농사가 잘된다는 공동체의 믿음을 우리 모두가 유전자로 간직한 이유가 아니었을까.
성석제의 소설은 울고 있는 이 계절에 참 시의적절한 듯하다. 지난번 김영하 소설을 덮으면서 주제넘지만 독자로서 소설이 사라진 이 시대, 소설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생각해보았다. 김영하, 김연수가 타자의 고통을 끌어안는 초능력자로서 공감의 메신져였다면 그들보다 윗 세대인 성석제는 어떤 고통도 함께 나눌 수 있는 가족을 전면에 내세웠다. 혹시나 가족은 진부하고 새롭지 않다고 외면할 생각이었다면 당신의 생각은 옳지 않다. 내가 생각할 때 가족은 보수언론을 향해 잘 포장한 빅 엿이다.(성석제 소설가는 내가 읽는 신문에 단골 칼럼 기고자 이시다) 이 소설을 덮으면서 소설이라는 것이 자기 처한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읽힐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실감했다. 작가가 말했듯이, 혹은 신문에서 평가했듯이, 아니면 출판사에서 홍보하듯이 ‘우리 안에 근원적으로 존재하는 가족성에 대한 욕망’으로 받아들였다면 아마도 당신은 지금 ‘위풍’도 ‘당당’한 사람에 속할 것이다. 지금 그와는 전혀 반대인 내 입장에서 이 소설은 가족이 보이지 않았다. 백번 양보해서 가족해방의 서사가 표면적 스토리 구성에 실마리를 주고 있다고 쳐도 이 소설에서 ‘위풍당당’해야 할 주체로서의 가족 구성원은 그저 ‘쫄지마’를 외쳐대는 오합지졸 마이너들로 밖에 해석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소설을 보는 시각이 곧 나의 현재이다. 내 심사가 꼬여 있는데 소설에서 훈훈한 가족애를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는 뜻이다.
#2. 소설은 당신의 과거
줄거리를 간략히 정리하자면 강 좋고 산 좋은 어느 숲속 청정마을에 느닷없이 나타난 조폭무리를 피한방울 섞이지 않은 마을 구성원들이 보기 좋게 때려잡아 추방했다는 이야기이다. 그 다음 모두가 ‘우린 드디어 가족이 되었어’라며 알콩달콩 행복하게 잘 살았는지는 모르겠다. 영화로 치자면 *이 망가진 보스가 고장난 배를 타고 탈출하는 장면이 마지막이므로 반드시 *을 복구하여 속편으로 귀환할 것이다. 중요한 건 전국구 꽃미남 조폭의 우두머리가 머리도 식히면서 사업을 구상할 조용한 별장을 짓겠다는 그곳이 하필이면 파란만장한 과거를 묻고 제 2의 인생을 살아보겠다고 숨어사는 실패자들의 마지막 안식처였던 것이다. 조폭으로부터 마을 습격의 빌미를 제공한 처자가 물고기의 이름인 ‘새미’였다는 점. 소설 중후반부에 집중적으로 마을에 서식하는 식물과 동물, 자연환경이 사건을 인식하는 감각의 주체자로 기능한다는 점에서 이 소설을 4대강으로 상징되는 환경을 파괴하는 권력의 오만함으로 읽어도 무방해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소설의 첫 문장과 마지막문장은 공교롭게도 ‘강. 강이다.’에서 ‘강이다. 강.’으로 끝난다. 앞에 강은 개발되기 전의 강, 뒤의 강은 파괴된 후의 강, 이것이 내 결론이다. 보스 정묵과 가장 여산이 결투를 벌일 때 기다렸다는 듯이 등장하는 건 ‘거대한 기계괴물’의 군대행렬이었다. 도대체 이 나라의 4대강을 무식하게 짓밟은 자들은 누구인가. 몇 명 살지 않는 마을에 제 멋대로 불도저와 포크레인, 덤프트럭을 몰고 온자들은 누구란 말인가. 내가 모르는 누군가가 있다면 알려주시라.
정치적으로 해석하자면 이미 가진 게 엄청난 탐욕의 무리들이 겨우 누울 자리 하나 마련한 땅에 와가지고 지금부터 이 곳은 환경을 거시기 하게 개발할 터이니 조용히 나가주시라 협박하는 용역깡패와 죽어도 고롷게는 안되겠다며 인분을 투척하는 철거민의 대치모습으로 환기할 수 있겠다. ‘촌동네 병신새끼들’은 누구보다도 땅과 비슷하게 생긴 똥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잘 활용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10년 묵은 ‘분뇨’가 나는 왜 ‘분노’로 읽히는 것인가. 조폭을 똥통에 빠트린 마을 사람들이 그 댓가로 목격한 장면은 망루에서 얻어터지고 있는 새미의 동생, 장애인 준호였다. 안 그래도 힘없고 안타까운 우리 시대 최약자들만 모아 놓고 보기 좋게 불 지르고 물 뿌려댄 건 도대체 어떤 권력자의 머리에서 나온 생각이란 말인가. 내가 잘못 생각한 게 있다면 말씀해주시라.
소설에서 어머니를 상징하는 소희는 죽어가는 생명의 불씨를 살아나게 하는 치유의 상징이었다. 아버지역을 맡았던 여산은 강가에 떠 내려온 한 마리 물고기 같았던 새미를 데려다 살려 놓은 사람이었다. 조폭은 잘 살고 있는 사람도 기계로 밀어버리는 우리 시대 개발 권력의 표상이며 소희와 여산은 죽고 있는 사람도 살려내는 구원의 전도사가 아니던가. 마을에 모여든 사람은 하나같이 가족이 붕괴된 사연을 과거로 간직한 우리 시대 불행의 아이콘이었다. 원래 가족과 헤어진 사람들끼리 뜻하지 않은 가족이 된 사람들에겐 서로의 과거를 묻지 않는 불문율이 있었다. 소설가는 이것을 ‘장벽은 무너지고 강물은 풀려’라는 <과거를 묻지 마세요>의 노래 가사 첫 소절로 표현했다. (아... 부디 나의 과거도 묻지 마시라.)
장벽은 무너지고 강물은 풀려
어둡고 괴로웠던 세월도 흘러
끝없는 대지위에 꽃이 피었네
아 꿈에도 잊지 못할 그립던 내 사랑아
한 많고 설움 많은 과거를 묻지 마세요
구름은 흘러가도 설움은 풀려
애달픈 가슴마다 햇빛이 솟아
고요한 저 성당에 종이 울린다
아 흘러간 추억마다 그립던 내 사랑아
얄궂은 운명이여 과거를 묻지 마세요
<과거를 묻지 마세요>, 정성수 작사, 전오승 작곡, 나애심 노래
보스 정묵은 이들이 주막에서 한바탕 해방의 댄스 무대를 연출하자 꼭 아프리카 토인들이 춤을 추는 것 같다고 관람 평을 한다. 소설가는 영필과 소희를 우리 윗세대 어르신들로 여산과 이령을 장년층으로 새미와 준호를 다음 세대로 구분지어 삼대가 전통적 유대를 이어가도록 만들었다. 소희는 이들이 각자 과거로부터 받은 상처를 포용하기 위해 준비된 자연의 어머니였고 여산은 이들을 폭력으로부터 지키는 사냥꾼 아버지였다. 이들은 마치 원시사회 구성원들처럼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스스로 만들고 가족을 지키기 위한 역할에 충실한다. 만약 이 소설을 과거 실패한 가정의 경력자가 새로운 관계 재편을 통해 제 2의 인생으로 부활하는 회복의 서사로 받아들였다면 당신은 지금 가정과 가족의 의미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 상황일지 모른다.
#3. 소설은 우리의 신세계
현재 이 책은 리뷰대회라는 이벤트를 진행하고 있는 소설이다. 소설이 의미하는 바와 나를 자극했던 이야기를 다시 곱씹어보고 그것들을 자기만의 개념으로 정리하고 있다면 아마도 당신은 리뷰대회를 준비하고 있는 독자일지 모른다. 리뷰대회에 적지 않게 참여해본 경험으로 말하자면 이 책은 리뷰대회와 상관없이도 작가의 네임 밸류와 작품성만으로 판매부수는 목표를 충분히 달성하고도 남을 책이다. 간혹 리뷰대회가 아니었으면 읽어보지도 않았을 작품들이 없는 건 아니다. 또 리뷰대회에 참가하는 글 치고 이 작품 형편없다고 하는 글은 찾아보기 어렵다. 리뷰대회에 참가하는 독자치고 내심 수상을 목표로 하지 않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출판 관계자들은 리뷰대회를 한다고 특별히 책이 많이 팔리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물론 백프로 다 믿는 건 아니다 ㅋ) 노래가 좋으면 아무리 듣지 말라고 해도 1위를 하는 것처럼 작품이 좋다면 어떻게든 사장되지는 않는다고 믿고 싶다.(책은 꼭 작품이 좋아서 베스트셀러가 되는 게 아니라는 점에서 자신은 없지만 ㅠㅠㅠ)
의미를 두고 싶은 것은 그래도 리뷰대회를 통해 소설의 의미를 생각하는 기회가 마련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개인적인 생각으로 인문서보다는 소설의 리뷰대회가 더 많은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소설은 해석이 다양할 수 있기 때문에 저마다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이야기가 자신에게 특별히 어떤 의미로 읽혀지는지 그렇기에 소설은 우리 일상에 나아가 인생에 어떤 역할을 하게 되었는지 한 번 더 생각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작금의 시대에 하필, 이 시기에 출간된 소설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 작가는 가족을 뒤로 무엇을 숨겨놓았는지, 저 흘러가는 강물위로 무엇을 비추고자 하였는지, 그리하여 우리에게 ‘강 같은 평화’란 무엇이라고 말하고 싶었는지 고민의 시간을 마련해주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특이하게도 마지막에 각 소제목과 제목을 발췌한 노래 원곡을 소개하고 있다. 어딘가 모르게 뜬금없이 느껴지던 노랫말(소제목)이 음악과 함께 깊은 울림의 시간을 선사한다는 것도 이 소설을 읽는 재미이다. 내게도 하나하나 찾아 들어보았던 재미가 새로운 경험으로 기억될 듯하다. 그 중에 이 작품 전체의 분위기와 잘 맞는다고 생각한건 드보르작의 신세계 교향곡 2악장이다. 소설에선 중간보스 양구가 일행을 이끌고 마을에 도착한 후 똥통이라는 함정에 빠지는 순간 이 음악과 함께 ‘지금은 사라진 동무들 모여 옥 같은 시냇물 개천을 넘어’ 라는 <꿈속의 고향> 한 구절을 차용했다. (드보르작은 뉴욕에서 고향을 그리며 이 곡을 작곡했다) 그러니까 똥통이 곧 그들의 고향이고 신세계인 셈이다. 이 얼마나 짜릿하고 시원한 셀프 그레이트 빅 엿이란 말인가. 몇 번이나 반복해서 듣다보니 어느새 마음이 평화로와지는 경험을 했다.
정말로 한나절 내게 강 같은 평화의 시간을 보내었다. 이 화사한 계절만큼 마음이 편하기 얼마나 어려운 시절인가. 교향곡을 들으며 계절이 가는 아쉬움을 달래보면 어떨까 한다. 이 음악을 혼자 듣는 순간이 듣기 전보다 행복하다면 아마 당신은 새로운 신세계를 꿈꾸고 있었을 사람이 틀림없다. 그래서 지금은 잠시 신세계를 보지 못하게 된 당신과 이 음악을 같이 듣고 싶다. 무릇 책이란 이렇듯 예술의 인접장르로 안내하는 역할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 위풍도 당당함에 조용한 박수를 보내고 싶다.
< 신세계 교향곡 제 2악장 - 뉴욕필 평양 드보르작 '라르고' NY Phill Dvorak 'Largo' Pyungy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