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 프랑스 만화가의 좌충우돌 평양 여행기
기 들릴 지음, 이승재 옮김 / 문학세계사 / 2004년 9월
평점 :
절판


 

 

지금까지 국내에 소개된 프랑스계 캐나다 국적의 기 들릴 전작 두 편을 읽었다. <굿모닝 예루살렘> 그리고 <굿모닝 미얀마>. 그리고 나서 정말 두 달간의 짧은 북한 방문기를 다룬 <평양>이 보고 싶어졌는데 절판의 운명인지라 하는 수 없이 최근에 알게 된 전 세계를 상대로 무료 배송한다는 영국 북디파지토리에서 주문해서 어제 받아서 읽기 시작했다. 1일 날 주문했는데, 어제 받았으니 18일 정도 걸린 모양이다.

 

기 들릴 작가는 프랑스 최대 텔레비전 네트워크인 TF1과 북한의 SEK(Scientific Educational Korea) 스튜디오의 협업으로 북한에서 두 달이라는 짧은 체류기간을 갖게 됐다. 공항 검색대에서부터 기 들릴의 수난은 시작됐다. 보안검색에서 북한 관리는 작가가 가지고 온 모든 물건을 샅샅이 검사한다. 정확하게 작가의 방문시점이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김정일 시대에 방문한 것으로 보인다. 이웃이자 혈맹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에 질겁하며 쇄국정책을 고수하면서, 모든 재화와 정보가 국경 없이 통용되는 글로벌 시대에 뒤떨어진 주체사상을 유일사상으로 떠받치는 전체주의 국가 방문이 서양 이방인의 눈에는 어떻게 보였을지 호기심을 자극한다. 북한 여행을 준비하면서 기 들릴이 준비한 책이 조지 오웰의 <1984>라는 점은 탁월한 선택이 아니었을까. 외국인 클럽에 가서 디스코를 추고, 포켓볼 경기를 하는 것 정도의 오락거리가 없었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유령도시 평양에서 오웰의 <1984>를 읽는 것도 특별한 의미가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작가가 북한에 간 이유는 애니메이션 슈퍼바이저로 북한 기술자들을 아웃소싱하기 위해서였다. 의사소통 문제로 기술적 문제야 그렇다 치더라도, 철저히 통제되는 일상이 자본주의 국가 출신의 서양인에게는 아마 짜증나는 일이었던 모양이다. 가이드와 통역 없이는 외출도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외국인들이 머물러야 하는 외국인 전용 호텔도 지정되어 있고(저자는 양강도 호텔에 체류했다), 작가의 바람대로 북한 주민과의 접촉은 아예 차단되어 있다. 호텔에서도 개인의 프라이버시는 지켜지지 않는다. 개성 없이 1호 식당(1호식사칸), 2호 식당으로 구분된 호텔 식당의 서비스는 물론이고 선택의 여지도 없는 메뉴는 말할 것도 없다. 고난의 행군 시절이었던 90년대 서방의 경제제재와 가뭄 홍수 등의 재난으로 대규모 기아 사태가 발생해서 인도주의 단체에서 지원에 나섰지만 구호물품이 전용된다는 사실에 구호단체에서 지원을 중단했던 사태도 저자는 예리하게 지적한다. 만성화된 에너지난으로 전력부족은 그렇지 않아도 무채색의 도시 평양을 어둡게 만들고 있었다. 휴대가 금지된 물품인 라디오를 몰래 반입해서 음악방송을 들어 보려고 하지만, 라디오채널에서는 김씨 부자의 찬양과 프로파간다 일색일 따름이었다. 재즈 음악이 다른 사람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친 다는 말을 듣고는, 비슷한 방식으로 프로파간다에 대응하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작가에게 가장 이해가 되지 않는 점 중의 하나는 개인숭배였다. 위대하는 지도자, 친애하는 지도자라 불리는 김일성-김정일 부자를 신적 존재로 숭배하는 북한 주민들의 모습을 민주주의 국가 출신인 기 들릴은 절대 이해할 수 없었다. 무슨 놈의 금기사항이 그렇게도 많은지 현기증이 날 정도다. 어쩌면 두 세대 이상 그렇게 세뇌가 된다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어딜 가나 늘 달라붙는 가이드와 통역은 안내자라기보다 이방인의 일거수일투족을 철저하게 관찰하는 감시자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게다가 그들은 자유롭게 평양의 거리를 거닐어 보겠다는 작가의 시도를 갖은 이유를 들어가며 번번이 무산시킨다. 걷는 것이 북한에서는 천한 일로 취급되고, 차를 타는 것이 특권이라는 설정도 재밌다. 그러니 머리가 아파 좀 걷겠다는 작가의 행동을 가이드 캡틴 신과 통역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됐다.

 

말로는 여가시간에 갖는 자원봉사라고 하지만, 누가 봐도 뻔히 보이는 강제동원도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도대체 누가 일과를 마친 상태에서 도로공사와 다리 정비, 조경 사업 같은 일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싶어 한단 말인가. 모두가 전체주의 국가에서나 가능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한편, 외국인에게 허용된 관광은 대부분 김씨 부자와 관련된 조형물이나 주체사상탑, 태권도 홀, 오래 전에 나포된 푸에블로 호, 어린이 궁전 등의 코스일 따름이다. 무조건 크고 거대한 것이 좋다는 발상에서 만들어진 개성 없는 획일적인 조형물을 본 외국인들의 반응을 고려해 보기는 했을까.

 

한편, 이방인에게 그들이 보여주고 싶지 않아 하는 치부는 절대 드러내지 않고 싶어 한다는 느낌을 곳곳에서 엿볼 수가 있다. 작가가 어째서 수도 평양에 장애인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느냐고 묻는 말에, 가이드가 북한에서는 모두 건강하고 강하게 태어나서 장애인이 없다는 말은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들이 자랑하는 어린이 궁전에서 꼬마 연주자들이 이방인을 위해 필사적으로 악기 연주를 하는 모습을 보고 기 들릴은 거의 눈물을 터뜨릴 뻔했다고 고백한다. 문득 어린이 궁전의 어린이들에게 그들이 선전하는 대로 북한이 어린이들의 천국인지 묻고 싶어졌다.

 

워낙 평양에 사는 주민들과 접촉이 없다 보니(가이드와 통역의 선방으로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예루살렘이나 버마에서 현지주민과 같이 체험한 생생한 에피소드가 없다는 점이 좀 아쉬웠다. 만화를 보면서 재밌던 점 중의 하나는 작가가 한글을 몰라서 북한의 명소에 씌여 있는 한글을 모두 꼬불거리는 이미지처럼 처리해서 도대체 읽을 수가 없었다는 점이었다. 역시 이방인의 한계였다고 해야 할까. 위키피디아에서 <아시아옵스큐라>란 사이트에 올라온 앤디 디머의 패러디 평양방문기도 찾아 봤는데 상당히 흥미로웠다. 좀 더 색다른 관광체험을 원하는 서양인들이 북한을 찾는 모양이다. 기 들릴의 만화는 스티브 카렐 주연의 영화로 제작될 예정이었는데, 2014년 북한이 관계된 해커들의 위협으로 제작이 취소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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