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열린책들 세계문학 158
하인리히 뵐 지음, 홍성광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도 참 웃긴다. 이 책을 2011년에 샀는데(무려 7년 전에!) 도대체 어디에 두었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지난번에 읽은 <천사는 말이 없었다>를 빌리러 도서관에 갔다가 이 책도 빌려서 같이 읽었다. 분량이 적어서 부담이 없었다.

 

1952년 가을의 어느날 서독의 대도시 쾰른에서 시작된 프레드 보그너 씨의 이야기는 48시간에 걸쳐 진행된다. <천사는 말이 없었다>에서 바로 종전 당시의 풍경을 하인리히 뵐이 묘사했다면,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에서는 종전 뒤, 제법 시간이 흐른 뒤 폐허된 독일에 대한 살풍경한 모습을 다루고 있다. 소설의 주인공은 어느 성당 산하 관청의 전화 교환수로 일하는 프레드 보그너다. 자신의 월급 320마르크를 모두 아내 캐테(카타리나)에게 가져다 주고 자신은 지인들에게 돈을 빌려 호텔방을 전전긍긍한다.

 

주택관리 위원회 회장으로 힘깨나 쓰는 프랑케 부인 때문에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지내지 못하고 부랑자 같은 거리생활을 하는 중이다. 전쟁이 끝나고 별별 일들이 벌어진다고 하는데, 노동자가 안식할 곳이 없어 거리를 방황하는 게 확실히 정상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보그너 씨의 그런 행동이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랬다. 자신이 한 달 동안 벌 수 있는 수입이 뻔한데, 그렇게 지인들에게 빚을 지다가는 언젠가 결국 모두에게 외면당하는 상황이 오지 않겠는가 말이다. 이미 다수의 지인들이 그의 방문을 두려워하지 않았던가. 하긴 오죽 했으면 자신이 과외를 맡은 집에서 일하는 하녀에게 돈을 빌릴 생각을 다 했을까.

 

하인리히 뵐은 이 소설을 1953년에 발표했다. 당시만 하더라도, 패전국 독일이 라인 강의 기적을 이룰 것이라고 누가 예견했을까. 지금은 사실상 유럽 대륙의 패자로 프랑스와 더불어 통합유럽을 이끌어 가는 쌍두마차가 되었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패전으로 인한 민족의 자존감 상실 그리고 빛이 보이지 않는 미래에 대한 암담함이 소설의 곳곳에 산재해 있다. 어쩌면 독일의 민족의 미래와 주인공 프레드 보그너의 그것은 동일시해도 괜찮을 정도로 말이다.

 

소설의 또 다른 시선의 보그너의 아내 캐테의 것이다. 보그너 아저씨가 어쨌든 빚을 내서 거리에서 슈납스와 굴라시 수프를 먹고, 핀볼 게임을 한다면 온전하게 세 아이의 육아를 맡은 캐테의 시간들은 더욱 갑갑하게만 느껴진다. 남의 더부살이를 하는 신세에, 이미 쌍둥이를 잃은 경험 그리고 설상가상으로 임신했을 가능성이 대두되면서 캐테의 고민은 더욱 깊어간다. 전쟁 중에 통신병이었던 보그너 씨는 비니차와 세바스토폴 같이 한때 무적의 독일군이 석권했던 러시아 평원의 격전지에서 독일 본토로 연락을 했었다고 했던가. 그런 과거의 영광이 지금의 폐허 같이 신산한 삶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캐테에게 지금 중요한 것은 일용한 양식과 지옥 같은 시간들을 버텨낼 현금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전히 사랑하는 보그너 씨와의 이별을 상상한다.

 

그런데 여전히 가부장적 시스템이 작동하는 독일 사회에서 애가 셋이나 딸린 여성이 남편의 경제적 부양 없이 가정을 유지하는 게 과연 가능했을까? 게다가 막둥이는 갓난쟁이가 아니었나. 물론 캐테의 그런 결정을 내리게 된 배경에는 무력감에 빠진 보그너 씨가 행사하는 가정폭력을 하나의 원인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도저히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가난이 횡행하는 가운데서도, 하나 같이 살찐 가톨릭 사제들과 드로기스트(일종의 쁘띠 부르주아)들의 구호가 난무하는 쾰른이라는 대도시의 삶은 사회적 양극화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지금의 그것과 다를 게 없다는 느낌이 불쑥 들었다.

 

제발트 선생 덕분에 독일 폐허문학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현장에서 패전 이후 독일의 비참한 현실을 직접 경험한 하인리히 뵐의 글을 통해 폐허문학의 실체와 마주하게 되었다. 며칠 전에 7년 전에 산 책을 드디어 서가의 귀퉁이에서 발견했다. 집에 멀쩡하게 있는 책을 두고 도서관에서 빌려다 읽었다니. 리뷰도 어떻게 대강 쓴 그런 기분이다. 리뷰가 나의 기록을 위한 것이라는 걸 생각한다면 썩 나쁘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책은 빨랑 읽고 나서 바로 기억이 휘발되기 전에 써야 한다니깐.

 


댓글(8)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뒷북소녀 2018-11-21 12: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덕분에 웃어요^^ 저도 이런 웃긴 사례가 있어서요.ㅋ

레삭매냐 2018-11-21 13:24   좋아요 1 | URL
정말 당황스러운 장면 중의 하나는...
중고서점에 책 살 때, 이 책은 손님이
그전에 구매하신 책입니라 - 라는
멘트를 들을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만.

뒷북소녀 2018-11-21 13: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구매창에 팝업 뜰 때도 당황스러운데 직접 그 멘트를 날려주다뇨. ㅋㅋㅋ

레삭매냐 2018-11-21 14:22   좋아요 1 | URL
가끔 내가 이 책을 샀나 안 샀나 헷갈릴
때가 있더라구요...

그런데 도대체 책은 찾아볼 수가 없고...
읽고는 싶고. 분열하는 나의 자아

카알벨루치 2018-11-21 14: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달과 6펜스>2권 다른출판사꺼 샀다가 하나는 선물줬다는...근데 진짜 웃깁니다 다 읽고 난 후 발견한 책 ㅎ

레삭매냐 2018-11-21 14:24   좋아요 1 | URL
아 책 선물 ~~~

요즘엔 책 선물 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워낙 선수들 말고는 책을 읽지 않으니
말입니다...

저만 그런 게 아닌 것 같아 위로를 받
습니다.

카스피 2018-11-22 11: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 떄로는 책정리를 해야되요.저도 있는 책을 또 사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 사실을 확인하면 제 자산이 종 황당해지더군요^^;;;

레삭매냐 2018-11-22 14:13   좋아요 0 | URL
이사 핑계 대고 책정리한다고 하면서도...
선뜻 책장에서 책을 발라 내기가 너무
힘드네요.

이런 판에도 꾸준하게 책을 사대고 있으니
답답한 노릇입니다 ㅠㅠ 격하게 공감합니다.
 
브루투스의 심장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스타에 등장한 짧은 북트레일러를 보고 자그마치 30년 전에 발표된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 <브루투스의 심장>을 읽었다. 정말 오래 전부터 읽고 싶었던 책인데 이제야 읽게 됐다. 역시 책읽기에는 타이밍이 있는 모양이다.

 

중견 산업기계 제조업체인 MM중공업에서 흙수저로 자기 능력 하나만 믿고, 사장의 둘째딸과 결혼해서 기업을 통째로 삼키겠다는 야심에 불타는 남자 스에나가 다쿠야는 니시나 도시키 전무에게 접근하기 위해 아마미야 야스코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다. 문제는 친밀한 관계를 넘어 성적 관계까지 갖다가 그만 덜컥 아이가 생겨 버린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야스코와 관계를 맺은 사람이 자신 뿐만 아니라 MM중공업의 미래의 후계자이자 개발실장 니시나 나오키와 라이벌 하시모토 군도 있다는 점이다. 각각의 이유 때문에 야스코를 제거하기로 결의한 세 남자는 ABC 알리바이로 A가 야스코를 죽이고, 뒤에 대기하고 있던 B와 C가 시체를 릴레이로 운반하는 작전을 세워 야스코를 제거할 계획을 세운다. 경찰의 추적을 피하기 위한 기발한 아이디어가 아닌가.

 

어린 시절, 부모에게 학대받으며 로봇전문가로 자수성가한 남자 다쿠야는 냉정하기 그지없는 남자다. 오로지 성공을 위해서라면, 자신과 몸을 섞은 여자 혹은 자신의 아이를 가진 지도 모를 야스코를 눈 하나 깜짝 하지 않고 없애버릴 수 있다. 물론 소설은 세 남자의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는다. 야스코라고 생각하고 인계 받은 시신이 알고 보니 총 계획의 수립자였던 나오키라는 사실에 다쿠야와 하시모토는 경악한다.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일이 틀어진 것일까? 초짜 장르 소설작가답지 않게 히가시노 게이고는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법에 정통한 면모를 보여준다.

 

일단, 범인이 누구인지에 대해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둔다. 그리고 연쇄살인 프로젝트는 계속된다. 만년필에 장치한 청산가스에 교살된 나오키에 이어 두 번째 희생자 하시모토가 죽는다. 다쿠야도 비슷하게 죽을 뻔한 위기를 모면한다. 도대체 범인은 누구인가? 자신을 죽이려는 계획을 눈치 챈 야스코가 선수를 친 걸까? 사야마 형사는 집요하게 범인의 뒤를 추적한다. 세상에 완전범죄는 없다고 생각하는 형사는 공모자들의 알리바이를 깨기 위해, 살인 동기와 행적을 집요하게 추적한다. 최근에 읽은 그렉 올슨의 소설에서 에스더 반장도 그랬었지. 속된 말로 아다리가 들어맞지 않기 때문에 사건 종결 뒤에도 추적을 멈추지 않는다.

 

다쿠야를 몸종 부리듯 하는 MM중공업의 둘째딸 호시코의 행동도 전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오로지 출세를 위해 그녀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처럼 보이는 다쿠야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수중에 넣게 되면, 그동안의 수모를 갚기 위해 자신의 와이프도 처단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지 않은가. 무능해 보이는 임원과 자신에게 적대적인 성향의 안전과장을 내치겠다고 결심하는 장면은 그의 공격적 성향을 잘 드러내준다. 물론 더 놀라운 그의 인격이 결말 부분에서 기다리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사람보다 로봇을 더 사람답게 생각하는 그런 성향이라고나 할까.

 

물론 모든 계획이 주인공 다쿠야의 계획대로 실행되지 않는다. 경찰을 경찰대로, 가장 유력한 공모자로 다쿠야를 지목하고 그의 알리바이를 깨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가운데 의외의 인물이 등장해서 그의 뒷조사에 나선다. 아, 그리고 보니 소설의 처음에 등장한 로봇에게 어이 없이 죽음을 당한 유지의 이야기가 있었지. 장르소설에서 절대 어떤 등장인물도 소홀하게 대접할지 말아야 한다. 아무리 비중이 적은 선수라고 하더라도, 작가가 절대 허투루 등장시키는 법이 없으니 말이다.

 

나오키와 임신 2개월된 야스코의 죽음에 대한 의혹을 파헤치는 가운데, ABC 프로젝트에 가담한 또다른 인물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된다. 그러니까 네 번째 인물인 D가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야스코가 임신한 아이는 죽은 나오키와 하시모토 그리고 다쿠야의 아이가 아니라는 사실도 드러난다. 그럼 도대체 그 아이는 누구의 아이란 말인가? 진범은 과연 누구인가와 아이의 아버지는 누구인가라는 두 개의 중첩된 미스터리가 기가 막히게 어우러지면서 소설 <브루투스의 심장>은 종반으로 치닫는다.

 

몰입도가 대단한 책이었다. 다 읽을 때까지 뒷 부분이 궁금해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만큼 읽는 재미가 대단했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정갈하게 차린 정통 추리물이 선사하는 성찬의 즐거움을 도저히 거부할 수가 없었다고 고백해야 할 것 같다. 독서 슬럼프에 빠졌을 때, 읽으면 정말 단박에 탈출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은 그런 책이었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뒷북소녀 2018-11-20 12: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잠들기 직전에는 절대 읽으면 안되겠네요. 궁금해서 잠을 못 잘 수도 있을테니 말이죵.ㅋ

레삭매냐 2018-11-20 13:19   좋아요 1 | URL
그러게 말입니다 - 잠자기 전에 좀 만
읽고 자려다가 낭패를 봤네요 :>

카스피 2018-11-21 00: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흠 레삭매냐님의 리뷰를 보니 이 책은 과거 사회파 추리소설을 연상시키는 것 같아요.

레삭매냐 2018-11-21 08:38   좋아요 0 | URL
게이고 선생이 소설의 오락적 재미
뿐 아니라 그런 사회적 풍토까지
다룬 게 아닐까 싶네요. 물론 전자
가 더 파워풀하지만요.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6년 전 여름, 동명의 영화가 개봉한다는 소식을 듣고 한 번 극장에 가서 보고 싶었다. 원작 소설이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게 바로 마르케스이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이었다. 왠지 제목이 실린 ‘창녀’라는 단어 때문에 그동안 구입을 망설이고 있었다. 계산대에 있는 직원 분이 뭐 이런 변태가 다 있어라고 생각할까봐. 하지만 이번에 마르케스 전작 읽기에 도전하게 되면서 그런 오해 따위는 다 허공으로 날려 버렸다. 어제 바로 사서 읽기 시작했다. 어제 하루 동안에만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다>를 비롯해서 마르케스를 두 권이나 읽었다. 어제 리뷰에 담지 못한 미진한 이야기를 먼저 쓰려고 했는데... 기억이 휘발되기 전에 어서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부터 써야겠다.

 

위대한 마르케스의 마지막 작품의 내용은 겉보기에 아주 추잡해 보인다. 아흔 번째 생일을 맞은 전신 편집인이자 음악비평가 그리고 고장의 탁월한 칼럼니스트인 화자는 기념할 만한 자신의 생일에 무언가 특별한 것을 선물하고자 한다. 그것은 바로 처녀와의 하룻밤이다. 자신과 근 한 세기를 거래한 포주 로사 카바르카스에게 특별요청으로 중고품(!)이 아닌 반드시 처녀를 준비하라고 채근한다. 아니 노인네 기력도 좋으시지 정말. 화자는 반세기 동안 자그마치 514명의 창녀들과 잠자리를 함께 했고, 자신의 원칙대로 모두에게 대가를 지불했다고 한다. 문제는 오늘 그가 밤을 보낼 상대가 고작 열네 살짜리 소녀라는 것이다. 벌써부터 도덕주의자는 혀를 차기 시작한다. 이거 이야기가 어떻게 흐르려고 벌써부터 이러나 하는 노파심이 앞선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시라. 우리의 거장이 그런 추잡한 썰을 풀지는 않을 거라고 나는 기대한다. 그리고 나의 기대대로 ‘서글픈 언덕’은 비련한 소녀 ‘델가디나’를 취하지 않았다. 그는 단추 공장에서의 고단한 노동에 지친 소녀가 잠자는 모습을 그저 지켜볼 따름이다. 그러면 그렇지! 화류계에서 숱하게 뜨거운 밤을 보내느라 그만 피앙세와 결혼할 타이밍마저 놓치고 자의반 타의반 독신생활을 한 노인의 욕정은 한 세기라는 무게에 그만 짓눌린 걸까? 절대 그렇지 않다. 자신이 고백하는 것처럼, 서글픈 언덕 할아버지는 진정한 사랑을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이다. 그는 그저 하룻밤 풋사랑에 심취해서 하세월을 보낸 것이다.

 

서글픈 언덕의 소녀에 대한 사랑은 글쓰기로 밥 벌어 먹고 사는 직업에도 대단한 영향을 미쳤다. 하긴 파블로 카잘스가 쇠막대기 같은 활로 벅벅 긁어대는 바흐의 무반주 첼로조곡을 즐겨 듣는 이에게 델가디나는 하나의 문학적 뮤즈로 작동을 한 것일까? 서글픈 언덕이 일하는 신문사로 독자들의 문의 편지가 쇄도한다. 어쩌면 타이프라이터로 쓴 기사보다 손글씨로 직접 쓴 올드 스쿨 스타일의 글이 대중에게 짙은 호소력으로 다가선 것인지도 모르겠다. 소설의 어디선가 만난 자크 티보와 알프레드 코르토의 이름은 너무나 반가웠다. 클래식 음악에 미쳐 살던 한 시절, 나의 귀와 연결된 심장을 쫄깃하게 만들어 주었던 전설의 거장들이 아니었던가. 좋아하는 작가의 책에서 이런 귀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다니, 또 다른 즐거움이었다.

 

서글픈 언덕은 자신의 사랑이 원웨이 티켓이 아닌지에 대해 숱한 고민의 시간을 보낸다. 더 이상 육체적으로 아름답지 못한 모습(아니 원래부터 그는 자신이 못생겼노라고 고백을 했지)은 물론이거니와 46년이라는 뛰어넘을 수 없는 시간의 무게는 도대체 어떡할 것인가. 소녀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순간, 로사 카바르카스의 하우스에서 끔찍한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포주는 사건을 무마하는 대가로 소녀를 권력자에게 바쳤다는 걸 서글픈 언덕을 알게 된다. 소녀가 이전의 순수함 대신 보다 성숙해진 아름다움이라는 매력을 발산하게 되자 업계에서 다년간 경험한 서글픈 언덕은 바로 그 사실을 알아채고 난동을 부린다. 그 결과 자신에게 로사가 청구한 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계산서였다. 그렇게 가는 거지.

 

칼럼니스트로 벌어들이는 형편없는 밥벌이 때문에 결국 그는 이탈리아 출신 어머니가 물려주신 보석을 시장에 내다 팔려고 한다. 문제는 그 보석들이 진짜가 아니라 가짜라는 점이었다. 어머니는 스러져 가는 가문의 영광을 지키기 위해 돈이 필요할 때마다 자신의 보석을 내다 팔고, 모조품으로 과거의 영광을 대체해온 것이다. 그리고 나서 서글픈 언덕은 예전에 자신과 사랑을 나누었던 창녀에게 자신이 구하던 진리를 얻었던가. 진정한 사랑이라는 경이를 맛보아야 한다고. 그렇지 바로 이거다!

 

어쩌면 콜롬비아 바랑키야의 화려한 화류계의 은밀한 속살을 기대했던 이들에게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은 기대 이하의 작품일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마르케스가 자신의 마지막 소설을 통해 전달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그게 아니다. 바로 진정한 사랑의 경이를 경험하라는 주문이었다. 나이가 아무리 많이 들었다 하더라도, 사랑의 감정은 쉬 사라지지 않을 테니 말이다. 얼마 가지 않아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누구나 알고 있지만, 이런 저런 걱정 때문에 사랑하지 못하는 우를 범하지 말지니. 과연 거장이 남긴 백조의 노래답다.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8-11-20 11: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1-20 13: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뒷북소녀 2018-11-20 12: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흐미~ 쫌 쉬엄쉬엄 읽으소서!
생각해보니, 마르케스의 소소한 작품들은 읽었는데, 나름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작품을 안 읽었네요. 겉보기에 추잡해 보여서 저한테 선택을 못 받은 탓인지.ㅋㅋ

레삭매냐 2018-11-20 13:30   좋아요 0 | URL
저도 비슷한 이유로 그동안 아예 외면하다가
어제 중고서점에 달려 가서 업어 왔답니다...

예상(?) 외로 그렇게 추접하지는 않더라구요 -

다음은 <콜레라>와 <백년>으로 가야지 싶습
니다. 일단 <콜레라>부터 구해야 하는데...

그렇게혜윰 2018-11-20 15: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래 전에 영화랑 같이 봤는데 인상적이었어요. 어떻게 받아들일까하는 문제는 그 다음이었구요^^

레삭매냐 2018-11-20 16:29   좋아요 1 | URL
뒤늦게 영화를 구해 보려고 하니 쉽지
가 않네요...

그래서 가능할 때 영화고 책이고 보고
읽어야 하나 봅니다.

대장물방울 2018-11-21 00: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 좋지요? 이건 마르케스 중에서 정말 읽을만했던 축에 들듯합니닼

레삭매냐 2018-11-21 08:37   좋아요 0 | URL
난 마르케스 책들 다 재밌던데...

그래서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읽고
있잖아 ㅋㅋ

다음 번에는 <콜레라> 읽어야지 ~

AgalmA 2018-11-25 23: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로맹 가리 말년 작품도 그랬지만 노작가들이 말년엔 ‘진정한 사랑‘이란 주제에 천착하게 되는 걸까 싶더군요. 밀란 쿤데라도 역시 그런 작품을 내지 않을까 싶고요. 밀란 쿤데라 옹도 곧 부고 소식 들릴까봐 불안불안하네요;

레삭매냐 2018-11-25 11:02   좋아요 0 | URL
말씀해 주신 대로
노대가의 정착점은 결국 사랑이 뭐라더냐
뭐 그렇게 가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눈에 띄는 젊은 작가들은 계속 줄어드는
느낌이고, 노장들은 은퇴하게 되네요.
아쉽습니다...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58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18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늘 마르케스의 신간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다>가 도착했고, 단숨에 다 읽어 버렸다. 다음 주자는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이 될 것이다. 이미 책은 준비되어 있다. 읽기 위한 넉넉한 시간이 필요할 뿐.

 

왜 마르케스는 그렇게 집요하게 자신의 책에서 죽음이라는 주제를 빼놓지 않고 다루고 있는 걸까라는 생각이 든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죽음이 등장한다. 마을의 트럼펫 연주자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몸단장을 하는 대령. 트럼펫 연주자의 자연사는 마을에 수년 만에 발생한 일대 사건이라는 점에서 특이점을 지닌다. 그만큼 아무 일 없이 죽기가 어렵다는 말일까. 한편, 소설의 화자인 전직 대령은 참전 군인 연금을 기다린다. 그가 직면한 지독한 가난의 근원을 찾아보자. 지난 15년 간 대령은 금요일마다 자신에게 도착할 군인 연금을 기다린다. 아내의 닦달을 이기지 못한 대령은 변호사를 교체하는 강수도 마다하지 않지만, 언제 연금이 도착할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 변호사 말대로 수백 년이 걸릴 지도 모르겠다.

 

대령 가족이 감내해야 하는 가난의 이유 중의 하나는 아들 아구스틴의 죽음도 한몫한다. 아마 재단사로 일하던 아들이 살아있는 동안, 끼니를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겠지. 아들은 군부독재에 항거하는 비밀 전단을 투계장에서 유포한다는 이유로 투계장에서 총에 맞아 죽었다. 유일한 아들의 죽음을 대령 부부는 어떻게 견디어 냈을까. 아들이 남긴 수탉이 부부의 유일한 희망이라는 점은 역설에 가깝다. 사람도 살기 위해서는 먹을 게 필요하지만, 1월 투계장에 나설 수탉 역시 원기 회복을 위해선 충분한 옥수수가 필요하다. 이놈의 집구석에는 부족한 것 투성이다. 대령은 바닥난 커피 깡통을 박박 긁어 대지만, 영혼을 달래줄 한 줌의 커피도 없는 현실을 직면해야 한다.

 

그나마 대령에게 호의를 보여주는 이는 의사 뿐이다. 콤파드레 사바스는 목에 뱀을 두르고 약을 팔던 약장사다. 대령 부부는 팔아서 돈이 될만한 것은 이미 모두 팔아 치웠다. 그것으로도 부족해, 대령의 아내는 결혼반지를 그리고 대령의 마지막 존엄을 상징하는 수탉마저 900페소에 협잡꾼 사바스에게 팔려고 한다. 가난에 굴복해서 수탉을 팔고 연금이 도착할 때까지 어떻게든 버텨 보자는 아내의 제안에 대령을 거의 굴복할 뻔한다. 하지만, 수탉이 상징하는 건 단순하게 미래의 돈벌이 뿐이 아니다. 대령과 마을 사람들을 대표하는 존엄으로 대치할 수 있는 그 무언가란 말이다. 바로 여기에 소설에서 다루는 결정적 갈등이 분출한다. 먹고 살아야 한다는 아내의 주장과 서서 죽더라도 존엄마저 내팽개칠 수 없다는 대령의 목소리... 나라면 과연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아마 어떻게 해서든 그전에 세상과 타협해서 그런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지 않았을까.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1956년 10월이다. 대령이 의사에게 빌려 읽는 신문의 국제란을 보면 수에즈 위기에 대한 나온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소설에서 더 중요하게 다뤄지는 사건은 콜롬비아의 천일전쟁이다. 대령은 자유당 게릴라 소속으로 내전에 참전했던 것 같다. 정부는 대령에게 군인 연금을 약속했지만 대령의 가난을 한 방에 해결해 줄 수 있는 로또 같은 연금은 결코 도착하지 않는다. 그래서 도착하지 않는 연금에 대한 기다림은 대령의 일상이 되었다. 아들 아구스틴의 죽음과 가난이 가져다 준 곤궁함은 대령과 아내에게 정신적 고통을 의미한다. 천식에 시달리는 아내의 질병과 변비로 고생하는 대령에게 육체적 고통도 피해갈 수가 없다. 연금이라는 형태의 구원의 손길이 도착하지 않는 이상, 그리고 아구스틴이 남긴 수탉이 투계판에서 연전연승해서 소득을 가져다주지 않는 이상 대령에게 고난의 행군을 멈출 다른 방법은 전혀 없어 보인다.

 

콜롬비아 정부가 지키지 못할 약속으로 대령의 배를 곯리고 자존감을 바닥으로 추락시킨다면, 검열과 독재는 좀 더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계엄 아래 출몰해서 사람들의 단속하는 군인들의 모습은 일상이 되었다. 도대체 비밀 전단에 담긴 내용이 무엇이기에, 사람을 총으로 벌집으로 만들 지경이라는 걸까. 공포의 시대를 경험해 보지 못한 독자로서는 미지의 영역일 수밖에 없다.

 

대령에게 유이하게 희망으로 작동하는 연금과 수탉 중에 개인적으로 수탉의 안위가 더 걱정되었다. 사바스에게 팔리기 전에 혹시 수탉이 덜컥 죽기라도 한다면, 또는 동네 꼬마들이 수탉을 잡아다가 치킨 수프라도 만드는 건 아닌가하는 조바심이 일 정도다. 물론 그 정도로 마르케스가 야박하지 않아 다행이었다. 희극과 비극의 변주는 교차되면서 결말로 치닫는다. 앞으로 무얼 먹고 사냐는 아내에게 대령이 마지막으로 던지는 대사는 최고였다.

 

오래 전 종서 스타일로 번역이 되었을 때,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다>외에도 다른 짧은 소설들이 들어 있었다고 하는데 이번에는 단독으로 출간되면서 번역을 맡은 송병선 교수님의 자세한 해설을 달고 다시 태어난 모양이다. 마르케스의 단편 중에서 최고라는 평을 듣는 이 소설을 너무 허겁지겁 씹어 먹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사실 100쪽도 안되는 분량이라 더 자시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일단 첫 번째 독서는 요렇게 마무리짓고 나서,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시 한 번 더 읽는 것으로.


[뱀다리] 소설에서 대령은 10월 타령을 자꾸만 하는데, 알고 보니 천일전쟁의 발발일이 1899년 10월이었다. 마르케스 선생, 자기 나라만 알 수 있는 걸 소설에 써먹으면 어떡하라는 거요 그래. 불친절하시기도 하여라.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3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뒷북소녀 2018-11-19 17: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쩐지 이 제목 낯설지 않다 했는데... 예전에 다른 버전으로 읽은 것 같은. 그런데 종서 스타일은 어떤 스타일인가요? 락 스타일? 긴머리 스타일? (농담입니당.ㅋㅋㅋ)

레삭매냐 2018-11-19 17:57   좋아요 1 | URL
아주 금방 읽습니다... 분량이 너무 적네요 -
센스쟁이 같으니라구 ~ ㅋㅋ

목나무 2018-11-19 18: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뷰 제목에서부터 확 끌리네요.
덕분에 마르케스를 읽고싶은 마음이 불끈합니다! ㅎㅎ

레삭매냐 2018-11-19 19:15   좋아요 0 | URL
아무래도 시간을 들여 다시 한 번
읽어야 할 것 같습니다만.

너무 급하게 읽은 느낌이어서요.

일단 마르케스의 책들을 섭렵한 다음
에 다시 돌아와서 읽는 것으로.

Forgettable. 2018-11-19 19:3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단편집도 정말 좋은데 한국엔 번역이 안되어있거나 너무 오래된 것 뿐이더라구요. 전 영어판으로 읽었지만 스페인어판으로도 이제 도전하려구요. 그러고보니 저도 전작하고 번역 안된 건 영어로도 찾아 읽고 원어의 맛을 느끼기 위해 스페인어도 배웠는데 정작 목적이었던 마르케스 원서 읽기는 등한시하고 있었네요. 전작하시는 분 만나 반가워 덧글 답니다. 쭉쭉 백년고독까지 포기하지 마시고 나가주세요!

레삭매냐 2018-11-19 20:24   좋아요 0 | URL
일단 지금 막 읽기 시작한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을 읽은 다음에,
<콜레라 시대의 사랑> 그리고 <백년
동안의 고독>으로 마무리하면 될 것
같네요 일단은.

대단하십니다, 영어는 물론이고 스페
인어 원서까지 !!!

당장 읽어야 하는 책들이 읽어서 일단
<콜레라>와 <백년>은 내년에 읽는
것으로 할라구요.

Falstaff 2018-11-21 10: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음에 읽으실 노벨라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은 추억이 슬프다는 뜻인지, 창녀들이 슬프다는 뜻인지 막 헷갈렸던 적이 있습지요. ^^
매냐님은 왜 별 하나를 뺐을까, 지금 막 궁리중입니다. 어차피 읽을 거 같기는 합니다만.

레삭매냐 2018-11-21 14:23   좋아요 1 | URL
분량이 너무 사악해서요 ㅠㅠ
게다가 해설을 엄청나게 달아서 분량을
늘린 의도가 너무 빤하게 보여서 별
한 개 뺐습니다.

카알벨루치 2018-11-22 16: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거 언제 쓰셨어요? 제가 알라딘 출첵은 자주하는데 레샥매냐님 이거 쓴거 보고 깜놀! 이 책 지금 도착해서 검색해보니 ㅎㅎㅎㅎ굿뜨!

레삭매냐 2018-11-22 16:56   좋아요 1 | URL
지난 주말에 주문해서 월요일날 받아서
바로 읽고 나서, 일필휘지 아니 날림
으로 리뷰 작성했습니다만 ㅋㅋ

뒷북소녀 2018-11-28 13: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100쪽이 안 된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분량에 비해 해설이 너무 길어서... 깜놀했어요.^^

레삭매냐 2018-11-28 13:21   좋아요 0 | URL
아무래도 94쪽 내고서 만원
받는 게 미안해서 그런 게 아닐까요?

싸이러스님에 의하면 그전에 나온
판본에는 다른 단편들도 좀 섞어찌개
로 실려 있다고 하던데 흠...
 
썩은 잎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0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16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콜롬비아 출신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생전에 모두 6개의 장편소설과 5개의 단편소설을 발표했다. 그 외에도 많은 짧은 소설들을 발표한 것으로 알고 있다. <썩은 잎>은 1995년에 발표된 작가의 데뷔 소설이다. 이십대 청년이 훗날 자신의 문학세계의 근간을 이루게 될 마콘도에 대한 스케치를 데뷔작에서부터 구상했다는 점에서라도 <썩은 잎>이 갖는 의미는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마르케스의 모든 작품의 최종 종착점은 바로 <백년 동안의 고독>이 아닐까 싶다. <썩은 잎>도 마찬가지다. 번역을 맡은 송병선 교수가 후기에서도 밝히듯, 마르케스 작가의 작품세계를 알고 싶다면 콜롬비아 현대사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의 이해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콜롬비아 보수당 정권과 자유당 출신 반란군이 맞붙은 천일전쟁과 UFC(United Fruit Company)의 억압과 수탈이 빚어낸 시에나가의 바나나 대학살 사건은 마르케스 문학을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다.

 

가을에서 겨울로 접어드는 계절에 나는 어찌해서 마르케스에 반해서 만사 제쳐두고 그의 책들을 구해서 읽게 된 걸까? 그전에도 숱하게 작가와 만날 시간적 여유가 많았건 말이다. 사실 수년 전에 이미 난 <백년 동안의 고독>을 독서모임을 위해 읽다가 실패한 경험이 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약간의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 게 아닐까. 작가의 다른 소설부터 포위공략한 다음에, 최종적으로 그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게 어쩌면 현명한 선택일 지도 모른다는 자기위안을 하련다.

 

그의 썩은 몸에서 내뿜는 기분 좋은 냄새 (20p)

 

<예고된 죽음의 연대기>에서처럼 <썩은 잎>도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세 가지 주제 중의 하나인 죽음을 전면에 내세운다. 1928년 9월 12일, 전직 대령이 거둔 의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런데, 마콘도에 사는 모든 이들이 그의 죽음을 고소해 하며 의도적으로 장례식과 매장을 거부한다. 마을 사람들 모두가 반가워하는 죽음을 뒤로 하고 대령은 딸 이사벨과 손자를 데리고 주검을 수습하려 간다. 그 뒤를 따르는 두 번째 주제는 바로 고독이다.

 

아마도 군의관으로 유럽에서 벌어진 세기 초의 전쟁에 참전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의사는 물론이고, 딸 이사벨을 낳고 곧 죽은 첫 번째 아내를 둔 대령은 고독한 존재로 등장한다. 마콘도에 사는 어느 누구도 당장 죽어도 아쉬울 게 하나 없는 의사를 감싸고도는 대령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 여성들에게 개같이 음탕한 눈길을 주는 의사는 두말 할 것도 없다. 마르케스는 대령-이사벨 그리고 손자로 변주를 거듭하는 화자의 시선 이동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작가의 장기라고 할 수 있는 현재 시점에서 과거의 사건을 조립하고 재구성하는 기법은 확실히 매력적이다. 마르케스의 작품세계에서 플래시백 기법은 소설 구성에 있어 필수적인 요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다.

 

도대체 의사는 왜 마콘도 주민들에게 집단적 원한과 적대감의 대상이 되었을까? 소설 <썩은 잎>에 등장하는 여러 가지 수수께끼 중의 하나다. 하지만 이에 대한 호기심은 의뢰로 쉽게 풀린다. 부정선거 문제로 정부군이 개입해서 난폭한 총격전이 벌어져 마콘도 주민들이 의사의 도움을 요청했을 때, 의사는 자신은 의학적 지식을 모두 잊어 버렸다며 자신의 문 앞에서 죽어가는 주민들을 돕지 않았다. 그것이 바로 집단적 적대감의 시발점이었다. 의사는 자신이 언젠가 비참하게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자신의 시신이 독수리밥이 되길 바라지 않는다고 대령에게 말한다. 다시 말해 자신의 사후를 부탁한 것이다. 대령이 한 때 의사의 은인이었으나, 전세가 역전되어 대령이 죽을 병에 걸렸을 때 사신으로부터 그를 구한 것이 또 의사가 아니었던가. 그러니 대령의 부채는 의사를 정당한 방식으로 매장해 주는 것이었으리라. 마콘도 주민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적대감을 뚫고 그것을 이행하기란 쉽지 않았겠지만. 그런데 왜 의사는 주민들의 치료를 거부했을까.

 

그 외에도 이사벨을 버리고 떠난 마르틴에 대해 수수께끼, 대령의 가족들은 전쟁을 피해 마콘도에 정착했지만 주민들의 적대감 앞에서는 무력할 수밖에 없었던 고독감. 의사와 같은 날 마콘도에 도착한 “풋내기” 신부의 전설 등등. 소설의 많은 부분들이 마치 대작 <백년 동안의 고독>을 위한 사전 정지작업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호랑이로 변장하고 부엔디아 대령 앞에 나타난 말보로 공작 이야기는 신간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다>에도 등장하더라. 미국 제국주의를 상징하는 “썩은 잎”이 흥청거리는 동안, 재미를 보았지만 바나나로 비롯된 호경기가 지나가자 마콘도의 몰락은 어쩌면 필연적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스페인을 상징하는 종교권력인 앙헬 신부가 자살한 의사의 매장을 거부했다면, 미국으로 대변되는 권력자 읍장 역시 시신이 부패해서 냄새가 나기 전까지 매장을 위한 사망증명서를 발급해 주지 못하겠노라고 버틴다. 대령이 두 시간 전에 그에게 알렸지만, 주민들의 적대감에 동조해서 느지막하게 등장해서 고작 하는 말이 그렇다. 마콘도 주민들의 무의식적 적대감으로 각인된 의사에 대한 반감을 상상을 초월했다. 의사의 시신을 담은 관이 드디어 세상의 빛을 보게 되는 순간, 소설을 끝을 맺는다.

 

숨 가쁘게 마르케스를 읽고 있다. <사랑과 다른 악마들>을 필두로 해서, <예고된 죽음의 연대기> 그리고 <썩은 잎>을 읽었다. 오늘 도착한 마르케스 최고의 단편이라는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다>를 절반 정도 읽었고, 중고서점에 가서 <네 슬픈 창녀들의 추억>도 입수했다. 중고책에는 콜롬비아행을 꿈꾸던 청년이 집안의 반대로 콜롬비아에 가는 대신 마르케스의 책으로 대신한다는 슬픈 이야기가 적혀 있더라. 모든 꿈들이 이루어지는 건 아니니까.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카알벨루치 2018-11-19 16: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르케스 전작읽기군요! 역쉬 독서의 내공이 쌓인분의 책읽기는 남다릅니다 꾸벅 ~

레삭매냐 2018-11-19 16:55   좋아요 1 | URL
일단 각개격파가 상대적으로 쉬운 작품들
부터 해치우고 나서, 맨 끝에 <백년 동안
의 고독>으로 마무리를 짓는 것으로...

북프리쿠키 2018-11-19 17: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품번 170번 <썩은잎>이 솔 벨로우의 <오늘을 잡아라>작품으로 바뀌어 절판되었네요. 마르케스 작품 전작읽기를 응원합니다.^^;

레삭매냐 2018-11-19 17:42   좋아요 1 | URL
지금 마구잡이로 읽어대고 있답니다 -
오늘도 한 권 읽었고 학 학

솔 벨로우의 책은 사실 관심이 없었는데
이제 없어졌다고 해서리 지난 번에 중고
서점에 가서 업어왔습니다.

응원 감사합니다.

가르시아 2022-04-13 16: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소설의 줄거리는 가물대지만, 백년동안의 고독을 읽었을 때 환성적인 느낌은 잊혀지지 않네요. 썩은 잎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레삭매냐 2022-04-13 17:52   좋아요 0 | URL
<백년 동안의 고독> 읽다 말았는데...
재도전해야 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