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5년 4월
평점 :

6년 전 여름, 동명의 영화가 개봉한다는 소식을 듣고 한 번 극장에 가서 보고 싶었다. 원작 소설이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게 바로 마르케스이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이었다. 왠지 제목이 실린 ‘창녀’라는 단어 때문에 그동안 구입을 망설이고 있었다. 계산대에 있는 직원 분이 뭐 이런 변태가 다 있어라고 생각할까봐. 하지만 이번에 마르케스 전작 읽기에 도전하게 되면서 그런 오해 따위는 다 허공으로 날려 버렸다. 어제 바로 사서 읽기 시작했다. 어제 하루 동안에만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다>를 비롯해서 마르케스를 두 권이나 읽었다. 어제 리뷰에 담지 못한 미진한 이야기를 먼저 쓰려고 했는데... 기억이 휘발되기 전에 어서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부터 써야겠다.
위대한 마르케스의 마지막 작품의 내용은 겉보기에 아주 추잡해 보인다. 아흔 번째 생일을 맞은 전신 편집인이자 음악비평가 그리고 고장의 탁월한 칼럼니스트인 화자는 기념할 만한 자신의 생일에 무언가 특별한 것을 선물하고자 한다. 그것은 바로 처녀와의 하룻밤이다. 자신과 근 한 세기를 거래한 포주 로사 카바르카스에게 특별요청으로 중고품(!)이 아닌 반드시 처녀를 준비하라고 채근한다. 아니 노인네 기력도 좋으시지 정말. 화자는 반세기 동안 자그마치 514명의 창녀들과 잠자리를 함께 했고, 자신의 원칙대로 모두에게 대가를 지불했다고 한다. 문제는 오늘 그가 밤을 보낼 상대가 고작 열네 살짜리 소녀라는 것이다. 벌써부터 도덕주의자는 혀를 차기 시작한다. 이거 이야기가 어떻게 흐르려고 벌써부터 이러나 하는 노파심이 앞선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시라. 우리의 거장이 그런 추잡한 썰을 풀지는 않을 거라고 나는 기대한다. 그리고 나의 기대대로 ‘서글픈 언덕’은 비련한 소녀 ‘델가디나’를 취하지 않았다. 그는 단추 공장에서의 고단한 노동에 지친 소녀가 잠자는 모습을 그저 지켜볼 따름이다. 그러면 그렇지! 화류계에서 숱하게 뜨거운 밤을 보내느라 그만 피앙세와 결혼할 타이밍마저 놓치고 자의반 타의반 독신생활을 한 노인의 욕정은 한 세기라는 무게에 그만 짓눌린 걸까? 절대 그렇지 않다. 자신이 고백하는 것처럼, 서글픈 언덕 할아버지는 진정한 사랑을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이다. 그는 그저 하룻밤 풋사랑에 심취해서 하세월을 보낸 것이다.
서글픈 언덕의 소녀에 대한 사랑은 글쓰기로 밥 벌어 먹고 사는 직업에도 대단한 영향을 미쳤다. 하긴 파블로 카잘스가 쇠막대기 같은 활로 벅벅 긁어대는 바흐의 무반주 첼로조곡을 즐겨 듣는 이에게 델가디나는 하나의 문학적 뮤즈로 작동을 한 것일까? 서글픈 언덕이 일하는 신문사로 독자들의 문의 편지가 쇄도한다. 어쩌면 타이프라이터로 쓴 기사보다 손글씨로 직접 쓴 올드 스쿨 스타일의 글이 대중에게 짙은 호소력으로 다가선 것인지도 모르겠다. 소설의 어디선가 만난 자크 티보와 알프레드 코르토의 이름은 너무나 반가웠다. 클래식 음악에 미쳐 살던 한 시절, 나의 귀와 연결된 심장을 쫄깃하게 만들어 주었던 전설의 거장들이 아니었던가. 좋아하는 작가의 책에서 이런 귀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다니, 또 다른 즐거움이었다.
서글픈 언덕은 자신의 사랑이 원웨이 티켓이 아닌지에 대해 숱한 고민의 시간을 보낸다. 더 이상 육체적으로 아름답지 못한 모습(아니 원래부터 그는 자신이 못생겼노라고 고백을 했지)은 물론이거니와 46년이라는 뛰어넘을 수 없는 시간의 무게는 도대체 어떡할 것인가. 소녀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순간, 로사 카바르카스의 하우스에서 끔찍한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포주는 사건을 무마하는 대가로 소녀를 권력자에게 바쳤다는 걸 서글픈 언덕을 알게 된다. 소녀가 이전의 순수함 대신 보다 성숙해진 아름다움이라는 매력을 발산하게 되자 업계에서 다년간 경험한 서글픈 언덕은 바로 그 사실을 알아채고 난동을 부린다. 그 결과 자신에게 로사가 청구한 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계산서였다. 그렇게 가는 거지.
칼럼니스트로 벌어들이는 형편없는 밥벌이 때문에 결국 그는 이탈리아 출신 어머니가 물려주신 보석을 시장에 내다 팔려고 한다. 문제는 그 보석들이 진짜가 아니라 가짜라는 점이었다. 어머니는 스러져 가는 가문의 영광을 지키기 위해 돈이 필요할 때마다 자신의 보석을 내다 팔고, 모조품으로 과거의 영광을 대체해온 것이다. 그리고 나서 서글픈 언덕은 예전에 자신과 사랑을 나누었던 창녀에게 자신이 구하던 진리를 얻었던가. 진정한 사랑이라는 경이를 맛보아야 한다고. 그렇지 바로 이거다!
어쩌면 콜롬비아 바랑키야의 화려한 화류계의 은밀한 속살을 기대했던 이들에게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은 기대 이하의 작품일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마르케스가 자신의 마지막 소설을 통해 전달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그게 아니다. 바로 진정한 사랑의 경이를 경험하라는 주문이었다. 나이가 아무리 많이 들었다 하더라도, 사랑의 감정은 쉬 사라지지 않을 테니 말이다. 얼마 가지 않아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누구나 알고 있지만, 이런 저런 걱정 때문에 사랑하지 못하는 우를 범하지 말지니. 과연 거장이 남긴 백조의 노래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