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열린책들 세계문학 158
하인리히 뵐 지음, 홍성광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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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참 웃긴다. 이 책을 2011년에 샀는데(무려 7년 전에!) 도대체 어디에 두었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지난번에 읽은 <천사는 말이 없었다>를 빌리러 도서관에 갔다가 이 책도 빌려서 같이 읽었다. 분량이 적어서 부담이 없었다.

 

1952년 가을의 어느날 서독의 대도시 쾰른에서 시작된 프레드 보그너 씨의 이야기는 48시간에 걸쳐 진행된다. <천사는 말이 없었다>에서 바로 종전 당시의 풍경을 하인리히 뵐이 묘사했다면,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에서는 종전 뒤, 제법 시간이 흐른 뒤 폐허된 독일에 대한 살풍경한 모습을 다루고 있다. 소설의 주인공은 어느 성당 산하 관청의 전화 교환수로 일하는 프레드 보그너다. 자신의 월급 320마르크를 모두 아내 캐테(카타리나)에게 가져다 주고 자신은 지인들에게 돈을 빌려 호텔방을 전전긍긍한다.

 

주택관리 위원회 회장으로 힘깨나 쓰는 프랑케 부인 때문에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지내지 못하고 부랑자 같은 거리생활을 하는 중이다. 전쟁이 끝나고 별별 일들이 벌어진다고 하는데, 노동자가 안식할 곳이 없어 거리를 방황하는 게 확실히 정상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보그너 씨의 그런 행동이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랬다. 자신이 한 달 동안 벌 수 있는 수입이 뻔한데, 그렇게 지인들에게 빚을 지다가는 언젠가 결국 모두에게 외면당하는 상황이 오지 않겠는가 말이다. 이미 다수의 지인들이 그의 방문을 두려워하지 않았던가. 하긴 오죽 했으면 자신이 과외를 맡은 집에서 일하는 하녀에게 돈을 빌릴 생각을 다 했을까.

 

하인리히 뵐은 이 소설을 1953년에 발표했다. 당시만 하더라도, 패전국 독일이 라인 강의 기적을 이룰 것이라고 누가 예견했을까. 지금은 사실상 유럽 대륙의 패자로 프랑스와 더불어 통합유럽을 이끌어 가는 쌍두마차가 되었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패전으로 인한 민족의 자존감 상실 그리고 빛이 보이지 않는 미래에 대한 암담함이 소설의 곳곳에 산재해 있다. 어쩌면 독일의 민족의 미래와 주인공 프레드 보그너의 그것은 동일시해도 괜찮을 정도로 말이다.

 

소설의 또 다른 시선의 보그너의 아내 캐테의 것이다. 보그너 아저씨가 어쨌든 빚을 내서 거리에서 슈납스와 굴라시 수프를 먹고, 핀볼 게임을 한다면 온전하게 세 아이의 육아를 맡은 캐테의 시간들은 더욱 갑갑하게만 느껴진다. 남의 더부살이를 하는 신세에, 이미 쌍둥이를 잃은 경험 그리고 설상가상으로 임신했을 가능성이 대두되면서 캐테의 고민은 더욱 깊어간다. 전쟁 중에 통신병이었던 보그너 씨는 비니차와 세바스토폴 같이 한때 무적의 독일군이 석권했던 러시아 평원의 격전지에서 독일 본토로 연락을 했었다고 했던가. 그런 과거의 영광이 지금의 폐허 같이 신산한 삶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캐테에게 지금 중요한 것은 일용한 양식과 지옥 같은 시간들을 버텨낼 현금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전히 사랑하는 보그너 씨와의 이별을 상상한다.

 

그런데 여전히 가부장적 시스템이 작동하는 독일 사회에서 애가 셋이나 딸린 여성이 남편의 경제적 부양 없이 가정을 유지하는 게 과연 가능했을까? 게다가 막둥이는 갓난쟁이가 아니었나. 물론 캐테의 그런 결정을 내리게 된 배경에는 무력감에 빠진 보그너 씨가 행사하는 가정폭력을 하나의 원인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도저히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가난이 횡행하는 가운데서도, 하나 같이 살찐 가톨릭 사제들과 드로기스트(일종의 쁘띠 부르주아)들의 구호가 난무하는 쾰른이라는 대도시의 삶은 사회적 양극화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지금의 그것과 다를 게 없다는 느낌이 불쑥 들었다.

 

제발트 선생 덕분에 독일 폐허문학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현장에서 패전 이후 독일의 비참한 현실을 직접 경험한 하인리히 뵐의 글을 통해 폐허문학의 실체와 마주하게 되었다. 며칠 전에 7년 전에 산 책을 드디어 서가의 귀퉁이에서 발견했다. 집에 멀쩡하게 있는 책을 두고 도서관에서 빌려다 읽었다니. 리뷰도 어떻게 대강 쓴 그런 기분이다. 리뷰가 나의 기록을 위한 것이라는 걸 생각한다면 썩 나쁘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책은 빨랑 읽고 나서 바로 기억이 휘발되기 전에 써야 한다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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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북소녀 2018-11-21 12: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덕분에 웃어요^^ 저도 이런 웃긴 사례가 있어서요.ㅋ

레삭매냐 2018-11-21 13:24   좋아요 1 | URL
정말 당황스러운 장면 중의 하나는...
중고서점에 책 살 때, 이 책은 손님이
그전에 구매하신 책입니라 - 라는
멘트를 들을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만.

뒷북소녀 2018-11-21 13: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구매창에 팝업 뜰 때도 당황스러운데 직접 그 멘트를 날려주다뇨. ㅋㅋㅋ

레삭매냐 2018-11-21 14:22   좋아요 1 | URL
가끔 내가 이 책을 샀나 안 샀나 헷갈릴
때가 있더라구요...

그런데 도대체 책은 찾아볼 수가 없고...
읽고는 싶고. 분열하는 나의 자아

카알벨루치 2018-11-21 14: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달과 6펜스>2권 다른출판사꺼 샀다가 하나는 선물줬다는...근데 진짜 웃깁니다 다 읽고 난 후 발견한 책 ㅎ

레삭매냐 2018-11-21 14:24   좋아요 1 | URL
아 책 선물 ~~~

요즘엔 책 선물 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워낙 선수들 말고는 책을 읽지 않으니
말입니다...

저만 그런 게 아닌 것 같아 위로를 받
습니다.

카스피 2018-11-22 11: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 떄로는 책정리를 해야되요.저도 있는 책을 또 사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 사실을 확인하면 제 자산이 종 황당해지더군요^^;;;

레삭매냐 2018-11-22 14:13   좋아요 0 | URL
이사 핑계 대고 책정리한다고 하면서도...
선뜻 책장에서 책을 발라 내기가 너무
힘드네요.

이런 판에도 꾸준하게 책을 사대고 있으니
답답한 노릇입니다 ㅠㅠ 격하게 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