썩은 잎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0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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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롬비아 출신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생전에 모두 6개의 장편소설과 5개의 단편소설을 발표했다. 그 외에도 많은 짧은 소설들을 발표한 것으로 알고 있다. <썩은 잎>은 1995년에 발표된 작가의 데뷔 소설이다. 이십대 청년이 훗날 자신의 문학세계의 근간을 이루게 될 마콘도에 대한 스케치를 데뷔작에서부터 구상했다는 점에서라도 <썩은 잎>이 갖는 의미는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마르케스의 모든 작품의 최종 종착점은 바로 <백년 동안의 고독>이 아닐까 싶다. <썩은 잎>도 마찬가지다. 번역을 맡은 송병선 교수가 후기에서도 밝히듯, 마르케스 작가의 작품세계를 알고 싶다면 콜롬비아 현대사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의 이해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콜롬비아 보수당 정권과 자유당 출신 반란군이 맞붙은 천일전쟁과 UFC(United Fruit Company)의 억압과 수탈이 빚어낸 시에나가의 바나나 대학살 사건은 마르케스 문학을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다.

 

가을에서 겨울로 접어드는 계절에 나는 어찌해서 마르케스에 반해서 만사 제쳐두고 그의 책들을 구해서 읽게 된 걸까? 그전에도 숱하게 작가와 만날 시간적 여유가 많았건 말이다. 사실 수년 전에 이미 난 <백년 동안의 고독>을 독서모임을 위해 읽다가 실패한 경험이 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약간의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 게 아닐까. 작가의 다른 소설부터 포위공략한 다음에, 최종적으로 그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게 어쩌면 현명한 선택일 지도 모른다는 자기위안을 하련다.

 

그의 썩은 몸에서 내뿜는 기분 좋은 냄새 (20p)

 

<예고된 죽음의 연대기>에서처럼 <썩은 잎>도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세 가지 주제 중의 하나인 죽음을 전면에 내세운다. 1928년 9월 12일, 전직 대령이 거둔 의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런데, 마콘도에 사는 모든 이들이 그의 죽음을 고소해 하며 의도적으로 장례식과 매장을 거부한다. 마을 사람들 모두가 반가워하는 죽음을 뒤로 하고 대령은 딸 이사벨과 손자를 데리고 주검을 수습하려 간다. 그 뒤를 따르는 두 번째 주제는 바로 고독이다.

 

아마도 군의관으로 유럽에서 벌어진 세기 초의 전쟁에 참전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의사는 물론이고, 딸 이사벨을 낳고 곧 죽은 첫 번째 아내를 둔 대령은 고독한 존재로 등장한다. 마콘도에 사는 어느 누구도 당장 죽어도 아쉬울 게 하나 없는 의사를 감싸고도는 대령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 여성들에게 개같이 음탕한 눈길을 주는 의사는 두말 할 것도 없다. 마르케스는 대령-이사벨 그리고 손자로 변주를 거듭하는 화자의 시선 이동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작가의 장기라고 할 수 있는 현재 시점에서 과거의 사건을 조립하고 재구성하는 기법은 확실히 매력적이다. 마르케스의 작품세계에서 플래시백 기법은 소설 구성에 있어 필수적인 요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다.

 

도대체 의사는 왜 마콘도 주민들에게 집단적 원한과 적대감의 대상이 되었을까? 소설 <썩은 잎>에 등장하는 여러 가지 수수께끼 중의 하나다. 하지만 이에 대한 호기심은 의뢰로 쉽게 풀린다. 부정선거 문제로 정부군이 개입해서 난폭한 총격전이 벌어져 마콘도 주민들이 의사의 도움을 요청했을 때, 의사는 자신은 의학적 지식을 모두 잊어 버렸다며 자신의 문 앞에서 죽어가는 주민들을 돕지 않았다. 그것이 바로 집단적 적대감의 시발점이었다. 의사는 자신이 언젠가 비참하게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자신의 시신이 독수리밥이 되길 바라지 않는다고 대령에게 말한다. 다시 말해 자신의 사후를 부탁한 것이다. 대령이 한 때 의사의 은인이었으나, 전세가 역전되어 대령이 죽을 병에 걸렸을 때 사신으로부터 그를 구한 것이 또 의사가 아니었던가. 그러니 대령의 부채는 의사를 정당한 방식으로 매장해 주는 것이었으리라. 마콘도 주민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적대감을 뚫고 그것을 이행하기란 쉽지 않았겠지만. 그런데 왜 의사는 주민들의 치료를 거부했을까.

 

그 외에도 이사벨을 버리고 떠난 마르틴에 대해 수수께끼, 대령의 가족들은 전쟁을 피해 마콘도에 정착했지만 주민들의 적대감 앞에서는 무력할 수밖에 없었던 고독감. 의사와 같은 날 마콘도에 도착한 “풋내기” 신부의 전설 등등. 소설의 많은 부분들이 마치 대작 <백년 동안의 고독>을 위한 사전 정지작업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호랑이로 변장하고 부엔디아 대령 앞에 나타난 말보로 공작 이야기는 신간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다>에도 등장하더라. 미국 제국주의를 상징하는 “썩은 잎”이 흥청거리는 동안, 재미를 보았지만 바나나로 비롯된 호경기가 지나가자 마콘도의 몰락은 어쩌면 필연적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스페인을 상징하는 종교권력인 앙헬 신부가 자살한 의사의 매장을 거부했다면, 미국으로 대변되는 권력자 읍장 역시 시신이 부패해서 냄새가 나기 전까지 매장을 위한 사망증명서를 발급해 주지 못하겠노라고 버틴다. 대령이 두 시간 전에 그에게 알렸지만, 주민들의 적대감에 동조해서 느지막하게 등장해서 고작 하는 말이 그렇다. 마콘도 주민들의 무의식적 적대감으로 각인된 의사에 대한 반감을 상상을 초월했다. 의사의 시신을 담은 관이 드디어 세상의 빛을 보게 되는 순간, 소설을 끝을 맺는다.

 

숨 가쁘게 마르케스를 읽고 있다. <사랑과 다른 악마들>을 필두로 해서, <예고된 죽음의 연대기> 그리고 <썩은 잎>을 읽었다. 오늘 도착한 마르케스 최고의 단편이라는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다>를 절반 정도 읽었고, 중고서점에 가서 <네 슬픈 창녀들의 추억>도 입수했다. 중고책에는 콜롬비아행을 꿈꾸던 청년이 집안의 반대로 콜롬비아에 가는 대신 마르케스의 책으로 대신한다는 슬픈 이야기가 적혀 있더라. 모든 꿈들이 이루어지는 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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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8-11-19 16: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르케스 전작읽기군요! 역쉬 독서의 내공이 쌓인분의 책읽기는 남다릅니다 꾸벅 ~

레삭매냐 2018-11-19 16:55   좋아요 1 | URL
일단 각개격파가 상대적으로 쉬운 작품들
부터 해치우고 나서, 맨 끝에 <백년 동안
의 고독>으로 마무리를 짓는 것으로...

북프리쿠키 2018-11-19 17: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품번 170번 <썩은잎>이 솔 벨로우의 <오늘을 잡아라>작품으로 바뀌어 절판되었네요. 마르케스 작품 전작읽기를 응원합니다.^^;

레삭매냐 2018-11-19 17:42   좋아요 1 | URL
지금 마구잡이로 읽어대고 있답니다 -
오늘도 한 권 읽었고 학 학

솔 벨로우의 책은 사실 관심이 없었는데
이제 없어졌다고 해서리 지난 번에 중고
서점에 가서 업어왔습니다.

응원 감사합니다.

가르시아 2022-04-13 16: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소설의 줄거리는 가물대지만, 백년동안의 고독을 읽었을 때 환성적인 느낌은 잊혀지지 않네요. 썩은 잎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레삭매냐 2022-04-13 17:52   좋아요 0 | URL
<백년 동안의 고독> 읽다 말았는데...
재도전해야 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