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순간의 역사 한홍구의 현대사 특강 2
한홍구 지음 / 한겨레출판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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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홍구 교수의 <특강> 시리즈 제2탄이다. 오리지널인 1탄 <특강>에서 대한민국 사회에서 현재 진행형인 이슈들을 돌아보았다면, 이번 2탄에서는 지금으로부터 딱 30년 전인 1980년 5월의 광주에서 시작되는 우리나라 현대사를 관통하는 역사의 현장에 초점을 맞춘다. 사실 이 책을 읽기 전에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읽다가, 그냥 잠깐 집어 들어서 읽기 시작했는데 책이 가진 마성 때문일까? 이 책을 다 읽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 부랴부랴 다 읽어 버렸다.

모두 6장으로 구성된 한홍구 교수의 특강을 순서대로 읽지 않고, 그야말로 ‘역주행’하면서 읽어 가기 시작했다. 작년에 서거한 노무현 대통령 이야기가 가장 궁금했다. 마지막으로 개천에서 난 용이 될 거라는 작가의 말이 왜 이렇게 가슴이 와 닿는지 모르겠다. 한홍구 교수는 모름지기 역사학자란 역사의 공간을 채워야 하는 법이라고 하셨는데, 요즘에는 인터넷에서 활동하는 누리꾼들이 노무현 대통령 서거 후 그의 모습이 담긴 사진들을 통해 그가 쓴 역사를 재조명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는 말이 참으로 감동적이었다.

시작에서부터 우리 사회의 비주류였던 노무현 대통령은 정치판에 뛰어들어서도 자신의 신념을 꺾지 않고, 김영삼의 3당 합당에 육탄으로 저항했고 지역주의 타파를 위해 손쉬운 길 대신 그야말로 가시밭길을 간 정치인이었다. 극적인 대선 레이스 끝에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나서도, 보수와 진보 모두에게 욕을 먹게 그의 상황이 참 안타까웠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민주화가 보수 세력이 재집권한 지 몇 년이 되지 않아 다시 되돌려지는 작금의 상황이 참 먹먹하게 다가왔다.

온갖 욕망을 부추기는 이명박 정권 아래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한홍구 교수는 작년에 발생한 용산참사를 통해 재조명한다. 그리고 무슨 일만 터지면 법치를 내세우면서도 정작 자신들에게 법치를 적용하지 않으려는 그들을 한홍구 교수는 ‘법비’(法匪)라는 말로 에둘러 표현한다. 자신들의 유리한 법원의 판결에 대해서는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조금이라도 정치적으로 불리한 판결은 그들이 즐겨 사용하는 “떼법”으로 저항하고 매도하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 아니던가.

그리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한국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광주를 만난다. 광주에 대해서는 그저 영화 <화려한 휴가> 정도로 밖에 알지 못하는 사실에 대한 알파와 오메가를 한홍구 교수는 차분하게 설명해 준다. 헌법을 고쳐 가면서까지 최고 권좌를 포기하지 못했던 박정희 유신독재의 결말이 잉태하고 있던 비극은 전두환 일당의 군사반란과 5-18 민주화항쟁(광주항쟁)과 그에 대한 폭력적인 진압으로 귀결됐다. 저자는 그렇게 광주를 경험한 이들이 새로운 시대의 주역이 되었다고 한다. 비록 미완이기는 했지만, 전두환 시대를 끝낸 1987년의 6월 항쟁과 그 후에 이어지는 일련의 정치 역정을 나열한다.

한 때는 민주화를 주창하는 탁월한 야당지도자였다가 집권욕에 어두워 야합을 통해 이상하게 변해 버린 전직 대통령에 대한 강의도 흥미로웠다. 한때 엄청난 국민의 지지를 받으면서 개혁 드라이브를 구사하던 문민정부는 어느 순간, 아무런 권한도 없는 대통령의 아들이 소통령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면서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다. 집권 말기에 벌어진 단군 이래 최악이라는 국가 부도 사태는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 치러진 1997년의 대선으로 마침내 선거를 통한 평화적인 정권 교체를 체험하기도 했다.

마지막 보론에서 한국 야당사와 진보정당사를 다루면서, 한홍구 교수는 새로운 희망을 이야기한다. 비록 역주행을 경험하고는 있지만, 독재정권 하의 몸으로 뛰는 민주화 운동과는 다른 젊은 대중에게 호소할 수 있는 어젠다를 만들어내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닐까 자문하게 된다.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이야기할 거리가 얼마나 많은가 말이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는 구닥다리 시절 경험주의나 일방통행이 아닌, 서로 충분한 대화와 소통을 통한 실천 가능한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지금 이 순간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우리의 지상과제라는 것을 이 ‘특강’을 통해 다시 한 번 깨닫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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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부탁해요, 폼포니오
에두아르도 멘도사 지음, 권미선 옮김 / 민음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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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역사물을 좋아하는 편이다. 특히 그중에서도 팩션으로 역사상의 인물에 가공의 사건을 더한 장르라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이번에 민음사에서 출간된 스페인 작가 에두아르도 멘도사의 <예수를 부탁해요, 폼포니오>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재밌고, 유머 넘치는 주인공에 역사적 인물인 예수 그리스도, 그의 아버지 요셉 그리고 마리아까지 등장하다니 놀랍기만 하다.

본격적인 책 이야기에 들어가기에 앞서 최고의 베스트셀러라는 성경에 대해 기본 지식이 있는 독자라면 책을 더 재밌게 읽을 수 있다고 장담한다. 심지어 옮긴이가 각주에서 다루지 않은 것도 성경의 어디에선가 본 듯한 데자뷰를 느끼기 때문이다. 그만큼 원저자인 멘도사가 성경에 대해 박식하다는 방증일까? 호기심에 책장이 술술 넘어간다.

이야기는 예수의 어린 시절을 파고든다. 사실 신약의 복음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에 대해서는 세세하게 다루고 있지만, 성장기 대부분은 베일에 싸여 있지 않은가. 바로 그 점에 착안해서 멘도사는 우리의 주인공 폼포니오 플라토를 등장시킨다. 로마 시민 출신으로 자연학에 심취한 생리학자이며 철학자를 자처하는 폼포니오는 신비스러운 물을 찾아 곳곳을 누비지만 습관성 장염으로 지독한 냄새를 피우는 가스에 요란한 청각 효과까지 내뿜는다.

방랑자로 떠돌던 폼포니오는 팔레스타인의 나사렛이라는 작은 마을에까지 흘러들어오게 되고, 우연히 만난 꼬마 예수로부터 자신의 아버지 요셉의 억울한 누명을 풀어 달라는 제안을 받게 된다. 작은 마을에서 조용하게 살던 목수 요셉은 마을의 부유한 유대인 에풀론을 살해했다는 혐의를 받고 십자가 처형을 목전에 두고 있다. 자신에게 협조를 거부하는 요셉을 구해야 하는 기구한 운명에 처한 방귀쟁이 폼포니오! 그가 사건에 접근할수록 미스터리는 점점 꼬여만 가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살던 기원후 1세기경의 모습은, 현재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호민관 아피우스 풀크루스는 군단병들을 쥐어짜내며, 개발이 예정된 택지를 빚을 내서라도 사들이려는 탐욕스러운 투기업자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호민관이란 모름지기, 평민의 이익을 대변해야 하는 관리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이익을 탐하는 모양새가 어째 영 탐탁지 않다. 게다가 무신론자가 분명한 주인공 폼포니오의 영혼불멸에 대한 개똥철학은 그야말로 멘도사 작가가 시전하는 언어유희의 극치다.

당시 세간에 퍼진 그리스인들에 대한 편견 역시 날 것 그대로 펄떡펄떡 뛰어다닌다. 로마인들이 즐겨 찾는 공중목욕탕에서 자신의 은밀한 부분을 서슴지 않고 보여주려는 죽은 에풀론의 노예 필립포를 비롯해서, 그리스 유학파 출신으로 에풀론의 아들인 마태 역시 게이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자아낸다.

폼포니오는 셜록 홈스 같은 명탐정은 아니다. 사건의 실마리를 위해 탐문을 하다 알게 된 직업여성 사라에게서 폼포니오는 근심도 덜고, 슬픔도 위로받는 그런 평범한 인간이다. 그리고 그녀의 비참한 죽음을 목격했을 때에는 진심으로 애도하기도 한다. 한편, 로마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팔레스타인 유대인의 염원을 메시아의 도래로 치환시키기도 한다. 바리새파 산헤드린 공회가 실질적인 지배를 하는 유대 사회의 숨겨진 비위에 대해서도 에두아르도 멘도사는 비판을 마다하지 않는다. 수많은 메시아를 참칭하는 이들이 등장했지만, 훗날 진짜 메시아가 등장했을 때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는 모두 그를 부정했지 않은가. 조금은 엉뚱한 결말이었지만, 사라진 진짜 범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에서 다시 등장하게 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멘도사의 놀라운 캐릭터 작법에 감탄했다!

조금은 엉뚱한 상상일지도 모르겠지만, 이 폼포니오라는 유쾌하면서도 박식한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은 시리즈를 만들면 어떨까 하는 공상을 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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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행록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22
누쿠이 도쿠로 지음, 이기웅 옮김 / 비채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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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누쿠이 도쿠로의 <우행록>을 읽었다. 영어 제목으로는 <A Catalog of Follies>, 한자를 풀어 보니 어리석은 행동들의 기록 정도라고나 할까. <우행록>은 재작년에 비채를 통해 처음으로 소개된 <통곡>에 이어, 세 편의 증후군 시리즈를 거쳐 5번째로 국내에 소개된 누쿠이 도쿠로 작가의 책이다. 특이하게도 누쿠이 도쿠로 작가의 부인도 미스터리 작가라고 한다.

일본 작가들의 글이 소재를 불문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자유로운 소재의 선택이 왠지 마음 한구석을 불편하게 하기도 한다. <우행록>에서도 일본의 수도인 도쿄도에서 벌어진 잔혹한 일가족 살해사건이 그 중심에 있다. 이 미스터리는 어느 르포라이터가 살해당한 다코 가족의 일상을 수소문하는 형식으로 시작한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르포라이터가 가장 먼저 의심이 갔다. 도대체 이 사람은 누구일까? 사건 발생 1년이 다 되어 가는 시점에서 과거사를 캐고 다니는 이가 궁금해졌다. 혹시 이 르포라이터가 아직 잡히지 않은 범인은 아닐까? 그가 만나는 인터뷰이들이 하나같이 호의적으로 그를 대한다는 점도 참 신기했다. 사실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그렇게 자세하게 말하고 싶지 않을 텐데도 인터뷰이들은 시시콜콜한 과거의 이야기들을 모두 작가에게 들려준다.

어느 미스터리물처럼 <우행록>도 도대체 누가 범인이고, 무슨 동기로 그런 끔찍한 사건을 저질렀는지에 초점이 맞춰진다. 하지만, 인터뷰가 진행될수록 그런 범인과 동치 찾기보다는 다코 내외의 과거사로 무게중심이 이동한다. 모두 6명의 인터뷰이 중에서 그나마 이웃인 첫 번째 두 케이스는 나은 편이다. 그저 본격적인 이야기에 들어가기에 앞선 준비운동 정도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진행되는 인터뷰에 의하면, 다코 집안의 가장인 다코 히로키는 일본 유수의 대학인 와세다를 졸업하고 국내 굴지의 부동산 개발회사에 다녔다고 한다. 그의 15년 지기인 인터뷰이는 다코가 입사 초기 회사에서 겪은 일과 연애에 얽힌 비사를 들려준다. 직장 동료에게 자기가 점찍은 여자를 먼저 채 갔다는 이유로 혹독한 보복을 하기도 했다는 말에 그럼 그가 범인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 인터뷰이의 시선으로 보는 다코는 과히 호의적으로만 볼 수 없는 사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역시 특정 인터뷰이의 ‘필터’를 통해 접하는 다코 히로키의 일면이다.

역시 인터뷰의 압권은 바로 죽은 다코의 아내인 다코 유키에, 결혼 전에는 나쓰무라로 불린 유키에의 대학 동창인 미야무라 씨의 이야기다. 역시 명문인 게이오 대학에서 화려한 대학생활을 한 유키에에 얽힌 비화가 하나둘씩 드러난다. 집안, 성적 그리고 부유함이라는 삼박자를 모두 갖춘 내부생과 외부생의 이야기에 그만 혀를 찼다. 게다가 외부생은 내부생만의 써클에 들고 싶어하고, 그런 외부생의 심리를 나쓰하라가 이용했다는 미야무라의 이야기는 오래전에 본 영화 <라쇼몽>을 떠올리게 했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편견의 지배를 받는다. 자기가 가진 필터를 통해 세계를 보고, 판단한다. 20대 초반의 게이오 대학을 다닌 학생들 역시 예외는 아닐 것이다. 미야무라는 자기는 내부생이니 외부생이나 하는 것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하지만, 역시 한참 시간이 지난 뒤의 이야기다. 게다가 자기는 그런 사람들과 차원이 달랐다는 식의 말은 어쩐지 신뢰가 가지 않았다. 출중한 아름다움으로 나쓰하라 그룹에 어울리게 된 외부생 다나카를 철저하게 이용한 내부생과 나쓰하라에게 미야무라는 비난을 날린다. 그러면서 그녀는 다코 가족 사건이 우발적인 범행이 아니라 원한관계에 의한 것이라고 확신한다.

여기서 다음 인터뷰이로 넘어갈 때마다 잠깐씩 등장하는 꼬마 여자 아이의 목소리가 있다. 난 솔직하게 말해서, 이 여자 아이가 죽은 다코네 막내딸이라고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나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 버렸다. 인터뷰가 진행될수록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놀라운 진실로 독자를 인도해간다.

5번째 인터뷰이는 다코의 대학시절 스키 동아리부원으로 애증의 관계가 얽힌 이나무라 에미라는 여성이다. 그녀의 말을 통해, 다코가 얼마나 성공지향적이었으며,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파렴치한이었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흠, 이 여자도 충분히 다코에게 원한을 가질만하군. 마지막으로 등장한 오가타는 미야무라의 옛 애인으로 나쓰하라에게 반해 그만 미야무라를 배신한 전력의 사나이다. 물론, 그의 이야기는 미야무라의 진술과는 상이한 점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를 통해 독자는 미야무라의 죽음도 알게 된다. 도대체 범인은 누구고, 그들 가족에겐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우행록>은 참 독특하다. 철저하게 인터뷰라는 객관적이면서도, 지극히 주관적인 진술을 통해 독자가 궁금해하는 미스터리에 접근해 가는 방식이다. 등장한 6명의 인터뷰이는 모두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르포라이터에게 매우 협조적이다. 그냥 미제사건에 대한 르포를 쓰겠다고 해서 모두가 르포 작가에게 협조적인 건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개인적으로 그런 자발적인 협조의 동기가 무척이나 궁금했다.

아니면, 다코 가족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이들은 알게 모르게 그들이 다코 가족에게 가지고 있던 콤플렉스(학벌, 직장, 단란한 가정 등)에 대한 무의식적인 반발이었을까?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임의대로 타인의 삶을 재단하는 그네들의 삶의 모습에서 '이중성(duality)'의 아이러니가 슬쩍 비쳤다. 우리가 알게 모르게 하는 ‘필터링’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해주는 수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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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빈슨 크루소 - 아후벨의 그림 이야기
알베르토 모랄레스 아후벨 지음, 고인경 옮김 / 별천지(열린책들) / 2010년 4월
품절


난 왜 이 책을 보기 전에 오래전에 본 탐 행크스 주연의 <캐스트 어웨이>가 떠올랐을까? 이미 300년도 더 전에 영국 출신의 작가 대니얼 디포가 쓴 <로빈슨 크루소>를 연상시키는 가장 최근의 비주얼은 바로 탐 행크스가 연기했던 페덱스 직원이었다. 하지만, 이번 달에 열린책들의 임프린트인 별천지에서 출간된 쿠바 출신의 그래픽 디자이너 아후벨이 재창조한 <로빈슨 크루소>의 이미지는 10년 전에 본 영화보다 훨씬 더 강렬하게 다가왔다.

원작에서 로빈슨 크루소는 법률을 공부하라는 부모님의 뜻에 반대하고는 17세기 중반에 원양항해에 나선다. 폭풍을 만나 배는 난파가 되고, 로빈슨 크루소는 무어족의 노예가 된다고 하는데 이런 소설의 전반부는 일러스트 버전의 <로빈슨 크루소>에서는 빠져 있는 것 같다. 브라질에서 플랜테이션 농장주가 된 로빈슨은 다시 한 번 항해에 나섰다가 엄청난 폭풍을 만나 동료를 모두 잃고, 외딴 섬에 표류하게 된다.

아후벨은 고향을 떠나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청년 로빈슨의 삶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도저히 제어할 수 없어 보이는 사나운 바다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바닷가에 내팽개친 로빈슨. 아무도 없는 무인도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그는 난파한 배에서 필요한 물자를 구해서 다시 섬으로 돌아온다, 강아지 한 마리는 외로운 그에게 보너스다.

청년이었던 로빈슨은 섬에서 오랜 세월을 보내며 장년, 중년으로 접어든다. 그런 세월의 흐름을 아후벨은 로빈슨의 덥수룩한 수염으로 대체하는 기지를 발휘한다. 그의 청교도적인 삶을 강조하기라도 하듯, 그는 항상 손에서 성경을 놓지 않는다. 카누를 만들어서, 자신이 사는 섬 주위를 탐험하기도 하지만 얄궂은 바다의 기상조건은 어렵사리 만든 카누도 전복시켜 버린다.

그러던 어느 날, 해적들이 지나가기도 하지만 로빈슨이 몰랐는지 아니면 관심을 두지 않았는지 조용하게 지나간다. 그는 무료한 나날을 달래기 위해 수많은 글을 쓰기도 한다. 그의 그런 조용한 일상에 한 사건이 터진다. 식인종들에게 잡혀 먹을 뻔한 프라이데이를 구해내고, 그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기독교인으로 개종시킨다. 아마 이런 부분에 있어서 식민제국주의적이라는 비판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아후벨은 그런 정치적인 사안보다는 염소의 젖을 짜고, 물고기들과 바다 속에서 유영하는 자유로운 영혼 프라이데이에 더 초점을 맞춘다.

맨 마지막에서 해적선(?)을 탈취해서 마침내 섬을 떠나는 데 성공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 과정이 매끄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마 이 부분에 대해 더 자세히 알려면 아무래도 원전을 읽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로빈슨 크루소>를 보면서, 이렇게까지 글이 하나도 없을 줄은 미처 예상을 하지 못했다. 정말 대니얼 디포의 고전을 쿠바 출신의 그래픽 디자이너 아후벨은 멋지게 이미지화하는데 성공했다. 앵글로색슨 특유의 냉정한 기록이, 라틴아메리카 작가 특유의 정열로 치환된 이미지들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군더더기들 대신 이야기의 고갱이만을 뽑아 올린 아후벨의 노고에 경의를 표한다. 앞으로도 아후벨이 고전의 이미지화라는 작업을 계속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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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루다의 우편배달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4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지음, 우석균 옮김 / 민음사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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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전에 <일 포스티노>란 영화를 볼 기회가 있었다. 지인이 비디오테이프로 선물을 해줘서 막 보려고 비디오에 넣었는데, 비디오테이프가 고장이 났는지 어쨌는지 도대체 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시간이 무척이나 오래 흘러 드디어 영화 <일 포스티노>의 원작인 안토니오 스카르메타의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를 읽었다. 읽기 전부터 많은 사람이 추천을 해줘서 기대를 품고 읽기 시작했는데,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책도 영화와 마찬가지로 너무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지 않은가. 칠레를 대표하는 문인이자, 글을 모르는 이들도 시집 한 권쯤은 가지고 있다는 파블로 네루다라는 실존 인물과 그를 흠모하는 이슬라 네그라의 우편배달부 마리오 히메네스가 소설의 주인공이다. 시기는 칠레 대선을 앞둔 1969년으로부터 시작된다.

일자리를 찾아 산안토니오 항구를 배회하던 마리오는 우체국에 붙어 있는 구인광고를 보고 바로 우편배달부로 지원을 한다. 사실 시골 어촌에 편지를 주고받을 일이 무어 있겠느냐만, 담당구역인 이슬라 네그라에는 이미 칠레를 넘어 세계적인 시인으로 추앙받고 있던 파블로 네루다가 살고 있었다. 전 세계 각지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우편물을 배달해야 하는 중차대한 임무가 마리오에게 주어진다.

스카르메타의 의도대로, 마리오는 이 위대한 대시인에게 우편물을 배달해 주면서 소통을 이끌어 나간다. 그리고 이런 소설에 빠질 수 없는 로맨스 또한 등장하게 되는데, 그 주인공은 바로 마을 주점에서 일하는 열일곱 살의 베아트리스다. 아마 베아트리스를 처음 본 순간, 마리오의 머릿속에는 전 세계의 ‘종소리’가 합창하듯 들리지 않았을까? 시인에게 ‘메타포’를 배우게 된 마리오는 시인의 시를 표절해, 베아트리스의 환심을 사는데 전력을 다한다. 바로 이 시점에서 메타포에 대한 개안(開眼)과 사랑에 눈을 뜨는 마리오의 환희를 작가는 절묘하게 그려낸다. 동시에, 사랑에 빠져 버린 철부지 마리오를 측면에서 지원사격해주는 ‘뚜쟁이’ 대시인의 인간적인 면모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마리오의 베아트리스에 대한 열렬한 사랑은 라틴아메리카의 모든 청년이 그러하듯이, 그녀의 어머니라는 큰 장애물을 만나게 된다. 공산당을 혐오하는 과수댁 로사 곤살레스는 순결한 자신의 딸을 마리오라는 흉측한 놈팡이로부터 지켜내기 위해 온 힘을 기울인다. 그럴수록, 사랑에 눈먼 마리오의 가슴은 버적버적 타들어갈 뿐이다. 이들의 사랑은 공교롭게도 민중연합의 대통령 후보 살바도르 아옌데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결실(?)을 보게 된다.

아옌데 정부에서 프랑스 대사를 맡게 된 네루다는 파리로 떠나게 되고, 마리오는 장모 로사의 주점에서 주방장 노릇을 하게 된다. 그러던 중, 파리의 네루다로부터 마리오에게 ‘추신’이 딸린 편지가 오게 되고, 대시인은 마리오에게 이슬라 네그라의 소리를 들려 달라는 부탁을 전한다. 네루다가 일찍이 마리오에게 알려준 메타포의 근원을 이루는 이슬라 네그라의 모든 소리가 작은 카세트테이프 리코더에 담기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들의 작은 행복은 네루다의 건강이 급속하게 나빠지고, 아옌데의 민중정부를 전복시킨 1973년 9월 11일의 피노체트 일당의 쿠데타로 만사휴의가 되어 버린다.

이 책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를 무려 14년이나 걸려서 썼다는 안토니오 스카르메타의 글을 읽으면서 이 정도로 멋진 책을 쓰기 위해서는 14년이 아니라 20년, 아니 30년이 걸려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파블로 네루다라는 실존 인물에 마리오 히메네스라는 가상의 주인공을 등장시켜, 서로 소통하고 친구이자 동지적 관계로 발전해 나가는 과정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묘사가 돼서 픽션이 아니라 실화가 아닐까 할 정도로 리얼리즘의 문학적 구사가 인상적이었다.

마리오의 사랑이라는 지극히 개인적 체험은, 1970년대 초반 라틴아메리카를 뒤흔들었던 아옌데 정부의 사회주의 실험의 부침과 그 맥을 같이한다. 마리오의 메타포와 베아트리스에 대한 열렬한 사랑은, 칠레 민중들의 살바도르 아옌데 박사로 대변되는 민중연합에 대한 사랑으로 대치된다. 1970년 칠레 대선에서 아옌데의 승리와 마리오가 오랜 기다림 끝에 쟁취한 사랑은 말할 것도 없다. 쿠데타 이후의 좌절과 마리오의 실종에 대한 복선 역시 그 궤를 함께 한다.

마리오라는 캐릭터를 통한 민중의 자각 역시 작가가 이 소설을 통해 전달하고 싶었던 메시지이리라. 종래 칠레의 지배해온 기득권층은 국민의 삶과 처우 개선에 대한 수많은 공약을 남발해왔지만, 네루다와 아옌데 만큼 국민에게 진심으로 다가가지 못했다. 하지만, 이 두 명의 거인은 민중의 동지로서 그들을 껴안았다. 우파의 물자 사재기와 악의적인 호도에도, 칠레 국민의 네루다와 아옌데애 대한 열렬한 지지는 꺾이지 않는다. 우파 출신의 국회의원 랍베에 당당하게 도전하는 거듭난 마리오의 모습에서는 심지어 전율이 일었다.

스카르메타의 14년 문학적 내공은 이렇게 1970년대 격동의 칠레를 다루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마리오 히메네스로 대변되는 민중의 삶을 해학적으로 그려내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균형을 잃으면 바로 심각해질 수 있는 미묘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대시인과 시골뜨기 우편배달부라는 어쩌면 서로 상극인 주인공을 민중의 관점에서 친구이자 동지로 그려낸 점이 더욱더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이제 네루다가 영면을 취하고 싶었던 이슬라 네그라가 아닌, 이탈리아 시칠리아에서 찍은 영화 <일 포스티노>를 보면서 <네루다의 우편배달부>의 감동을 되새길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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