펭귄의 실종
안드레이 쿠르코프 지음, 양민종 옮김 / 솔출판사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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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지난 주말에 텔레비전에 하는 우크라이나 기행이라는 프로그램을 볼 수가 있었다. 내가 보기 시작한 부분은 예전에 소피아 로렌 주연의 <해바라기>의 배경이 되었던 폴타바라는 곳으로, 엄청나게 광활한 평원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1970년에 제작된 이 영화가 우리나라에 소개된 것은 1980년대로, 그동안 공산권 국가였던 소련을 상징하는 “해바라기”라는 꽃 때문에 우리나라 상륙이 불허되고 있었다고 했던가. 그냥 화초로만 알았던 해바라기가 우크라이나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작물이라는 사실을 이 프로그램을 통해 알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때 막 읽은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예프를 배경으로 해서 펼쳐지는 안드레이 쿠르코프의 <펭귄의 실종>이 떠올랐다.

전편 <펭귄의 우울>을 읽자마자 후속편인 <펭귄의 실종>을 읽고 싶어서 한동안 몸살이 다 날 지경이었다.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집단으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은 주인공 빅토르 졸로따례프의 운명은 과연 어떻게 될지, 그리고 후속편의 제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심장수술을 받은 펭귄 미샤가 없어졌다고 하는데 과연 빅토르는 미샤를 찾을 수 있을지 점증하는 의문점들을 참을 수가 없었다.

온라인으로 주문을 한 책은 내 손안에 들어오는데 자그마치 4일이나 걸렸다. 참다못해 결국 온라인 미리 보기 서비스를 이용해서 몇 장이나마 컴퓨터로 읽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책을 받자마자 600쪽이 넘는 분량을 단숨에 읽어 버렸다. 전작 <펭귄의 우울>에서 빅토르와 펭귄 미샤 그리고 소냐의 관계가 위태롭긴 했지만 잔잔하게 전개가 있었다면, 후속편 <펭귄의 실종>에서는 펭귄 미샤를 구하기 위한 빅토르의 눈물겨운, 때로는 목숨을 건 모험이 그야말로 소용돌이친다.

남극에서 우연히 만난 브로니코프스키의 도움과 부탁으로 다시 키예프로 돌아온 빅토르.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건, 한 때 유사가족이라고 생각했던 니나의 배신과 펭귄 미샤의 실종이었다. 사실, 전자보다 후자의 사건에 더 충격을 받은 빅토르는 곧바로 미샤의 수배에 나선다. 그가 접한 펭귄 미샤의 소식은 러시아 마피아의 손에 이끌려 모스크바로 끌려갔다고 하는 비보였다. 그 와중에 그는 달팽이 이론을 설파하는 세르게이 파블로비치라는 미래의 국회의원 지망생을 후원자로 두게 된다. 전작에서 수도뉴스의 편집장 이고르 르보비치의 역할이 새로운 캐릭터에게 전이되는 순간이었다.

모스크바에 간 빅토르는 브로니코프스키의 미망인(놀랍게도 한국계 여성이었다!)과 짧은 로맨스를 뒤로하고, 펭귄 미샤를 구하기 위해 전쟁통인 체첸으로 발길을 돌린다. <펭귄의 우울>이 우크라이나 그것도 키예프라는 도시에 한정적이었다면, <펭귄의 실종>에서는 우크라이나-모스크바 그리고 체첸을 아우르는 광대한 스케일을 그 무대로 한다. 펭귄 미샤를 구하기 위해, 자청해서 노예가 된 빅토르는 자의와는 관계없이 화장장에서 일하게 된다. 죽음의 교역이 이루어지는 화장장에서 러시아 연방군과 체첸인들 간의 끝이 보이지 않는 전쟁을 직접 체험하게 된다. 이런 삶과 죽음이 그야말로 종이 한 장 차이밖에 되지 않는 곳에서 과연 빅토르는 펭귄 미샤를 찾게 될 것인가? 과연 그들의 운명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작가 안드레이 쿠르코프는 미스터리 스릴러 초대장을 독자들에게 발부한다.

책을 읽으면서, 러시아 내부에 은연중에 작동하는 뿌리 깊은 반유대주의 그림자를 느낄 수가 있었다. 나중에 빅토르가 다시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게 되면서, 죽은 세르게이의 이름을 필명으로 사용했을 때 보이는 보스의 반응이 그 대표적인 예였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침공군의 뒤를 따라 우크라이나 지역에 침입했던 나치 학살부대 “아인자츠그루펜”의 활약이 그 어느 곳보다 왕성했던 곳이 바로 우크라이나가 아니었던가.

포스트 소비에트 시대에 쇠락해 버린 것처럼 보였던 범슬라브주의에 대한 향수도 주된 키워드로 다가왔다. 우크라이나의 키예프,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 체첸공화국 그리고 아드리아 해의 크로아티아에 이르기까지 빅토르가 누비는 곳은 모두 옛 공산주의 소비에트 시절의 영광에 대한 아쉬움이 절절하게 배어 있다. 그 누가 뭐래도, 우리가 남이가? 라는 슬라브 민족의 동질성이랄까. 한편, 과거로부터의 해방된 자유를 만끽하는 그네들의 이중적인 모습들도 동시에 찾아볼 수가 있었다. 바로 그 분절점에 우리의 주인공 빅토르와 펭귄 미샤가 자리 잡고 있는 건 아닐까!

소설을 관통하는 또 다른 키워드로는 “약속”을 꼽고 싶다. 펭귄 미샤를 풀어주겠다는 체첸 갱단 두목 하차예프의 약속 그리고 무엇보다 펭귄 미샤를 남극에 보내겠다는 빅토르의 신념에 찬 약속은 소설을 이끌어 가는 원동력이다. 물론 펭귄 미샤를 구하는 일이 과연 자신의 목숨을 걸만한 일인가에 대한 의문은 좀처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주인공 빅토르 개인의 관계 결핍을 채우는 펭귄 미샤의 존재는, 유사가족 니나의 무존재 함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어느 한 작가의 글을 읽고 나서, 그 나라의 현대문학을 이야기한다는 게 무리일 것이다. 그래도 러시아 현대문학 작가 중에서 나름대로 대중성을 확보한 안드레이 쿠르코프의 펭귄 시리즈를 통해, 고뇌하는 개인의 단면과 산적한 여러 문제에 대한 사회적 접근을 어느 정도나마 체험하고 이해한 것만으로도 이 책을 읽은 보람이 느껴졌다. 안드레이 쿠르코프 작가의 다른 작품들의 출간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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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스바루>를 읽고 리뷰해주세요.
굿바이, 스바루 - 뉴욕 촌놈의 좌충우돌 에코 농장 프로젝트
덕 파인 지음, 김선형 옮김 / 사계절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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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물론 난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덕 파인이라는 이가 누구인지 몰랐다. 뉴욕 토박이로 도미노 피자와 맥도널드의 세례를 받으면서 십수년간 신문기자로 세계를 누비며 활약하던 저자가 어느 날 갑자기 친환경, 탄소 중립 시민으로 유기농 농사를 짓겠다고 뉴멕시코의 깡촌 펑키 뷰트 목장에 등장했을 때 조금은 황당하기까지 했다. 게다가 기름 잡아먹는 하마인 자신의 애마 스바루 대신 탄소 시민에 제격인 폐식용유로 가는 자동차를 타겠다고 결심한 순간은 더더욱!

우리나라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자동차인 스바루는 미국식 생활방식의 상징이다. 게다가 덕 파인은 대형할인점인 월마트에서 파는 전기구이 통닭에 환장한다. 다시 말해, 화석 연료를 태우며 도로를 질주하고, 패스트푸드 음식의 길들여진 온라인 세대가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깡촌에 내려가서 국가가 친절하게도 제공하는 전기 송전을 거부하고, 유전자 조작으로 풍성한 식탁 대신 갖은 고생 끝에 자신이 직접 재배한 유기농 식품들을 먹을 궁리를 했단 말인가. 아 참, 홍수와 우박 같은 자연재해도 빼먹지 말아야겠다.

자신의 직접적인 체험을 미국식 유머에 갖가지 텔레비전 드라마의 소스들을 동원해서(번역하면서 친절하게도 주해를 달아준 김선형 씨에게 감사드린다), 어떻게 보면 전혀 낭만적이지 않고 문명의 이기가 주는 편리함 대신, 불편함과 경제적 효용에 대한 제고 사이에서 고민하는 도시문명인의 고뇌를 적절하게 잘 그려내고 있다. 게다가 기초대사에 필수적인 단백질마저 자급자족하겠다고 어렵사리 수배해서 구한 판 시스터즈(염소 두 마리)는 호시탐탐한 덕 파인이 애지중지하는 장미 넝쿨에 눈독을 들인다. 공중에서는 이웃에 둥지를 튼 빨간꼬리매가 작가의 달걀 공급책인 닭과 병아리들을 채가고, 육상에서도 포식자 카이요리(코요테)가 방심한 틈을 타서 그의 닭들을 노리는 위기상태가 계속된다.

이런 난관 가운데, 앞으로 2년간 자급자족 경제를 이루겠다는 작가의 노력은 가상하기만 하다. 이 책 초반부의 키워드는 ‘배움’이다. 도시에서 태어나 자란 이가 어떻게 해서 농촌경제 공동체에 일부가 되는가, 그것은 시간이 걸리는 과정이다. 시행착오와 비용을 써가면서, 그렇게 덕 파인은 한 가지씩 차례로 배워 나간다. 아무 생각 없이 입에서 아삭거리는 칠레산 사과들이 뉴멕시코까지 오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과정과 화석 연료의 연소가 필요한 걸까. 게다가 유전자 조작으로 재배된 토마토는 수천 마일을 날아 혹은 달려 소비자의 손에 들어가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물러지지가 않는다. 우리는 왜 이런 본질적인 현상에 대해 무관심하고 그저 손쉽고 싼 먹거리들의 구매에만 관심을 두는 걸까.

태양열이나 풍력 혹은 지열 같은 대체 에너지원들이 있음에도, 우리의 화석연료 에너지에 대한 의존도는 날이 갈수록 높아만 지고 있다. 어느 순간, 그 에너지 공급이 차단되거나 혹은 에너지 가격이 폭등하게 된다면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되는 걸까. 우리보다 한발짝 앞서 이런 여러 문제에 심각성을 깨달은 덕 파인은 자신이 직접 친환경적이면서도 탄소 시민으로서의 의무에 눈을 뜨고, 뉴멕시코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 것이다. 그야말로 선구자적인 삶의 표본이라고나 할까.

좌충우돌 덕 파인의 펑키 뷰트 목장 체험기는 계속되고 있다. 책 뒷부분에 수록된 웹사이트 목록에서 가장 먼저 그의 개인 홈피에서 현재진행형인 그의 모험을 훑어 봤다. 에필로그를 통해 덕 파인은 여러 가지 친환경, 유기농 탄소 시민의 5가지 실천적 과제들을 제시해 주고 있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그의 6번째 교리로, 다음 세대에게 우리가 왜 자연을 보호하고, 불편함을 감수하고 바이오 연료를 사용하면서 탄소 배출을 억제하며 친환경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반드시 절대적으로 숙지하고 이해하게 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우리는 아주 가끔 친환경주의가 우리에게 꼭 필요하다고 인식은 하고 있으면서도, 편리함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한다. 나부터라도 승용차를 타고 출근하는 대신,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해야겠다. 이 작은 실천이 세상을 바꿀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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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8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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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제목 한 번 단순하다. 문득 원작의 표지는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서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텅 빈 교실에 덩그러니 책상과 의자가 놓여 있는 표지가 눈에 들어왔다. 책의 가격은 1,470엔 오늘 환율로 계산해 보니 2만 원이 조금 안 되는 가격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출간된 미나토 가나에 작가의 <고백>은 정가가 11,000원이었다. 책값이 대한해협을 건너면서 반값이 된 걸까? 하긴 우리나라에서 소설 한 권에 2만 원 정가를 붙였다간 바로 폭동이 일어날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원산지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고백>과 만날 수가 있었다.

신인 작가 미나토 가나에의 데뷔작이라는 <고백>의 구성과 전개는 놀랍다. "내 딸을 죽인 사람은 우리 반에 있습니다."라는 충격적인 고백으로 시작되는 살인과 그에 대한 응징으로서의 복수 그리고 미스터리 스릴러 양식에 충실한 <고백>은 모두 6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성직자, 순교자, 자애자, 구도자, 신봉자 그리고 전도자라는 다소 종교적인 색채의 장들을 읽다 보면 왜 미나토 가나에 작가가 이런 이름을 지었는지 바로 알 수가 있다. 중학교 종업식 날, 담임인 모리구치 유코는 학생들에게 충격적인 고백을 한다. 수영장에서 추락사한 것으로 알려진 자신의 딸 마나미는 사고사가 아니라 그 누군가에게 살해당한 것이라고. 게다가 그 범인은 자신의 반에 있다는 말까지 덧붙인다.

미나토 가나에는 장마다 화자를 다른 이로 배치해서 실제 사건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독자들에게 전달한다. 이 점은 일본 영화계의 대부인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대표작 <라쇼몽>을 연상시킨다. 어느 사무라이의 죽음에 얽힌 이야기가, 사건의 목격자들의 의해 왜곡되고 변질하는 과정이 <고백>에서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영화에서는 열린 결말로 매조지 되었지만, 미나토 가나에 작가는 선과 악의 명백한 기준점을 제시한다. 그것은 바로 상식적인 윤리의 존재 여부다.

중범죄를 저지른 미성년자들이 처벌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 반 학생들의 의견을 묻는 담임 유코 선생님.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딸을 죽인 범인에 대해 복수하고 싶어 하는 동시에, 자신의 학생들을 보호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나중에 기술되지만, 그 누구도 타인을 처벌할 수 없다는 의견이 팽팽하게 맞선다. 이런 갈등은 다음 장인 순교자 편에서 열세 살 살인자에 대한 집단 폭력으로 폭발하게 된다.

한편, 작가는 한 때 일본에 추세처럼 유행하던 열혈 선생님 상에 대한 안티캐릭터를 창조해낸다. <고쿠센>의 양쿠미나 GTO(우리나라에는 ‘반항하지마’로 소개됨)의 오니즈카 같은 학생들을 위해서라면 자신들의 안위 따위는 눈곱만큼도 생각하지 않는 그런 열혈 선생님이 아닌 싱글맘으로 자신의 딸을 기르는 모리구치 유코를 첫 번째 화자로 등장시킨다.

각 장에 등장하는 화자들은 각자의 처지에서 자신이 말하는 ‘누군가’에게 지지를 얻기를 원한다. 그 누군가는 아마도 책을 읽는 독자가 될 것이다. 그리고 사실 어느 정도는 화자들의 말에 수긍이 가기도 했다. 그만큼 미나토 가나에 작가의 기술은 설득력이 넘친다. 이런 원형 순환구조를 통해, 독자들은 모든 것을 설계한 범인은 누구이며, 도대체 무슨 동기를 가지고 이런 끔찍한 사건을 저지르게 되었는지를 추적해 나간다.

책장을 넘길수록, 사전에 작가가 그야말로 지뢰밭처럼 치밀하게 준비해둔 복선의 늪에서 소설의 앞부분을 다시 읽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게 된다. 작가는 화자들의 말을 통해, 언급된 것들에 대한 지대한 애정을 보여준다. 어느 것 하나 빼먹지 않고, 다시 한 번 등장시켜서 확인을 시켜 주거나 혹은 서사에 재활용하는 탁월한 기법으로 독자들을 결말로 이끌어낸다.

올해 일본 서점대상 수상작이라는 표현이 전혀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놀라운 흡입력을 자랑하는 소설 <고백>! 개인적으로 초반에는 대화체가 아닌 일방적 독백체 때문에 고전을 면치 못했는데, 일단 익숙해지자 놀라운 속도로 다 읽어 버렸다. 살인과 복수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긴 했지만, 전율 넘치는 반전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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펭귄의 우울
안드레이 쿠르코프 지음, 이나미.이영준 옮김 / 솔출판사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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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이 쿠르코프, 이름만 들어도 단박에 러시아 작가라는 걸 알 수가 있겠다. 아니 최소한 슬라브 계열의 작가겠지. 구소련의 레닌그라드에서 태어난 안드레이 쿠르코프 작가는 우크라이나에서 살면서, 러시아 어로 소설을 발표한다고 한다. <펭귄의 우울>이라는 특이한 제목의 소설로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됐다.

어디선가 이 책에 대한 소개를 보고 나서 사두기는 진작 사뒀었는데, 이제야 읽게 됐다. 제목에 있는 그대로 펭귄이 등장하는 이 소설의 배경은 포스트 소비에트 시대의 우크라이나 키예프다. 30대 후반의 주인공 빅토르 알렉세예비치 졸로따례프는 신문사에 주로 짧은 글과 산문을 기고하는 작가다. 빅토르는 여자친구와 이별하고 나서, 동물원에서 분양받은 황제 펭귄 미샤와 동거 중이다(이 일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 아니 다른 동물도 아니고 펭귄이 애완동물이라니! 그 설정부터 참 특이하다.

검은 턱시도를 입은 것 같은 남극 출신의 펭귄 미샤는 슬픈 눈을 하고 조용하게 빅토르의 삶 속으로 들어선다. 자신이 쓴 글을 팔기 위해, 신문사를 전전긍긍하던 빅토르는 어느 날 <수도뉴스>의 편집장으로부터 기묘한 제안을 받는다. 아직 살아 있는 이들의 추도기사를 쓰라는 거다. 월급 300달러의 괜찮은 제안을 거절할 이유는 없겠지. 작가적 상상력과 철학적 사고를 회전시켜, 빅토르는 술술 글을 써내려 간다.

중간마다 알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긴 했지만, 평온한 빅토르의 삶에 큰 타격을 줄 정도는 아니다. 편집장 이고르를 통해 알게 된 ‘펭귄이 아닌 미샤’의 딸 소냐가 그리고 그 소냐를 돌봐주기 위해 경찰 친구 세르게이의 조카딸 니나가 합류하면서 유사가정의 형태를 보이기 시작한다. 펭귄 미샤는 말없이, 빅토르의 작업을 지켜보고 혹은 친구와 함께 얼음소풍을 나가는 한가로운 일상이 계속된다.

우울증에 약한 심장을 가진 펭귄 미샤는 빅토르가 우연히 알게 된 이들에 의해 반강제로 장례식에 동원된다. 그리고 빅토르가 쓴 추도기사 <십자가>에 이름이 올라간 이들이 차례대로 죽는다. 그에게 일감을 물어다 주던 편집장 이고르마저 의문의 죽음을 당하게 되면서, 비로소 빅토르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위험을 깨닫게 된다. 게다가 펭귄 미샤마저 중병을 앓게 되면서, 이야기는 미궁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펭귄의 우울>은 기본적으로 소통의 부재로 말미암은 개인의 고독에 그 방점을 찍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예프에서 사는 빅토르는 출장을 가게 돼도, 펭귄 미샤를 맡길만한 친구 하나 없는 그런 외로운 존재다. 관계는 필요에 의해 증발되어 버리고, 내내 외톨이 생활을 해온 빅토르는 소냐나 니나 같은 유사가족보다도 묵묵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펭귄 미샤에게 더 동질감을 느낀다. 어쩔 수 없이 맡게 된 네 살짜리 꼬마, 그 꼬마를 돌보는 유모로 채용된 관계라는 연결고리는 취약하기 그지없다.

그런 취약한 관계의 공간을 안드레이 쿠르코프의 스릴러는 파고든다. 추도기사 <십자가>를 부추기는 A그룹의 정체는 끝까지 밝혀지지 않는다. ‘사회방역소탕’이라는 거창한 핑계로, 거대한 음모가 진행 중이라는 것을 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빅토르는 벼랑으로 내몰린다. 치밀하게 짜인 틀 안에서 전개되던 이야기는 열린 결말과 만나면서 후속편을 기대하게 한다. 아니나 다를까, 거의 본편에 두 배 가까운 분량을 자랑하는 <펭귄의 실종>이 독자들을 맞이한다.

평등과 공존이라는 구 소비에트 시대의 사회적 가치들은 공산주의의 몰락과 함께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다. 대신 자본과 결탁한 물신주의와 권총으로 상징되는 폭력이 찬란했던 소비에트 시대의 영화(榮華)를 대체한다. 게다가 러시아의 루블화도 아닌, 그렇다고 우크라이나의 통화인 흐리브냐도 아닌 달러가 통용되는 세상은 천국보다도 낯설기만 하다. 심지어 이 책이 영역 본의 번역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모든 거래는 달러로 통용된다. 21세기 달러 패권주의의 몰락이 현실화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말이다.

한편, 작가 빅토르는 이 글을 쓴 안드레이 쿠르코프의 거울이다. 그는 지속하지 않는 영감으로 말미암은, 창작의 고통을 자신의 아바타를 통해 토로한다. 신문지상을 통해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 싶어 하는 글쟁이들의 마음을 대변하고, 생활을 위해 돈을 받고 글을 쓰는 빅토르의 처지를 설명한다. 펭귄 미샤를 통해서는 작가가 느끼는 의무적 고독의 묘미를 보여주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책읽기의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 영미권 작가들의 글보다 제3세계 작가들의 글에 더 깊은 관심이 있다. 그래서 그런진 몰라도 우크라이나 작가 안드레이 쿠르코프의 펭귄 미샤 이야기에 흠뻑 빠져 버렸다. 열린 결말(open end)이 조금은 불만스러웠지만, 후속편 <펭귄의 실종>이 전편에서 풀리지 않은 비밀과 의혹을 말끔하게 해결해 주리란 기대를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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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텔 라이프
윌리 블로틴 지음, 신선해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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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책을 읽으면서 내가 느끼는 즐거움 중의 하나는 지도에서 책에 나오는 위치들을 찾아보는 것이다. 구글 맵을 이용해 보니, 윌리 블로틴이 쓴 <모텔 라이프>의 주인공들인 플래니건 형제들의 여정을 짚어낼 수가 있었다. 그들의 본거지인 네바다 주 리노 시를 가로지르는 80번 고속도로가 한 눈에 척하니 들어왔다.

뮤지션이자 자신의 데뷔 소설로 <모텔 라이프>를 발표한 윌리 블로틴은 미국 네바다 주의 리노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두 명의 주인공은 프랭크 플래니건과 제리 리 플래니건 형제다. 혹자는 소설 속의 주인공들을 실제 저자들과 혼동해서는 절대 안 된다고 말하는데, 이 책을 읽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작가 윌리 블로틴이 프랭크고, 이야기의 시작마다 일러스트를 그린 네이트 비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소설은 충격으로 시작한다. 실제로 소설을 이끌어 가는 주인공인 프랭크의 형인 제리 리가 어느 날, 술에 취해 운전하던 중에 갑자기 도로로 뛰어든 웨스 데니라는 소년을 치어 죽이면서 플래니건 형제들의 운명의 수레바퀴는 급회전하기 시작한다.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한 제리 리는 그 소년을 차에 실은 후, 도주해 버린다. 첫 실수로 잘못 꿰어진 단추는 제리 리의 동생인 프랭크마저 도망자로 만든다.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플래니건 형제들의 매우 곤란한 삶의 원형들이 속속들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도박 중독에 빠져, 결국 가정을 떠나 버린 아버지로부터 시작해서 병마와 싸우다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해서 그들이 모텔이라는 뜨내기들이 머무는 곳에 보금자리를 틀게 되었는지의 과정들이 플래시처럼 사이사이에 끼어든다.

그들의 로드트립은 제리 리의 갑작스러운 변심 탓에, 어디에선가 갑자기 끝나 버리고 프랭크는 다시 리노로 돌아오게 된다. 마음 둘 곳 없는 천국보다 낯선 리노지만, 그네들의 마음속에는 다시 돌아오게 되고야 마는 삶의 회전축처럼 작동하고 있다. 소년을 죽였다는 자책감에 제리 리는 자살을 시도하지만, 그마저 실패하고 다시 병원에 갇히게 된다.

형제끼리 서로 의지하고, 도우면서 살라는 어머니의 유언대로 프랭크는 온 힘을 다해 제리 리를 돕는다. 한편, 삶에 대한 어떤 희망도 없이, 그저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하루하루를 사는 프랭크는 자신의 첫사랑이자 유일한 사랑이었던 애니 제임스와의 가슴 아픈 과거로 괴로워한다. 과연, 플래니건 형제들은 과거의 트라우마들을 딛고 미래로 나아갈 수 있을까.

<모텔 라이프>는 자동차 문화가 그 어느 나라보다 발달한 미국의 모텔이라는 특수한 공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마치 디지털 시대의 유목민들처럼 한 주 혹은 한 달씩 머무는 유목민들의 공간인 모텔을 전전하는 프랭크와 제리 리의 이야기는, 부모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이별로 말미암아 마음의 안식처를 잃어버린 영혼들이 잠시 쉬어가는 곳으로 등장한다. 그들은 모텔에서 쉬고 먹고 자면서, 사랑을 하고 성장해 나간다. 독자들은 책을 읽을수록, 정상적으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일탈적인 삶을 사는 플래니건 형제들의 삶의 모습에 점점 더 수긍하게 된다.

제리 리에게 프랭크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미국 대중문화에 대한 오마쥬로 다가온다. 정말 황당무계한 이야기들로 들리는 프랭크의 이야기는 모두 미국의 텔레비전 드라마, 영화들의 줄거리에 자신과 제리 리가 아는 사람들의 이름을 적당하게 붙여서 만들어낸 이야기들이다. 가령 예를 들어, 마지막 이야기에서 얼음처럼 찬 아이슬란드에 불시착한 프랭크가 북극곰을 죽이고, 그 속에 들어가 살아남는다는 이야기는 <스타워즈: 제국의 역습> 초반부에 루크 스카이워커의 생존전략을 그대도 베꼈다.

작가 윌리 블로틴은 <모텔 라이프>를 통해 독자들에게 미국 하위문화를 여과 없이 소개하고 있다. 그들이 끼니를 때우는 싸구려 레스토랑, 사교의 장으로 나오는 동네 술집, 여행비를 마련하기 위해 아버지가 남긴 총을 파는 총포상, 그리고 도로를 달리기 위해 필요한 중고차를 매매하는 중고차 딜러에 이르기까지 모두 보통 사람들 일상의 모습이다.

소설을 읽던 중에 용서와 화해라는 단어들이 불쑥 솟아난다. 자신이 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 사랑했던 애니 제임스와의 사건을 곱씹던, 프랭크는 결국 병원에서 형 제리 리를 데리고 일생일대의 도박을 벌여 그렇게 딴 돈으로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 나선다. 결국, 프랭크가 돌아갈 마음의 안식처는 바로 자신의 첫사랑이었을까. 형제간의 어처구니없는 배신은 논외의 문제다. 프랭크는 그렇게 자신이 풀어야 하는 본질적 화해를 향해 힘겨운 발걸음을 내딛는다.

<모텔 라이프>는 영화로 만들어도 좋다 싶을 정도로 개별적인 에피소드들과 플래시백들의 사용이 장마다 적절하게 분리되어 있다는 점에서, 영화의 시나리오가 떠올랐다. 아니나 다를까 이미 영화 판권이 팔렸다고 한다. 로드 버디 무비라는 장르가 있듯이, 영화화하기에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을 것 같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윌리 블로틴이 어느 모텔에서 직접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동영상을 보게 됐다. <모든 것이 중요해지는 순간>의 작가 론 커리는 자신의 소설을 쓰기 위해, 미국 중서부 지역의 싸구려 식당에서 직접 감자 튀기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윌리 블로틴 역시 그랬던 걸까. 내년에 그의 신작이 나온다고 하는데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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