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루다의 우편배달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4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지음, 우석균 옮김 / 민음사 / 2004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주 오래전에 <일 포스티노>란 영화를 볼 기회가 있었다. 지인이 비디오테이프로 선물을 해줘서 막 보려고 비디오에 넣었는데, 비디오테이프가 고장이 났는지 어쨌는지 도대체 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시간이 무척이나 오래 흘러 드디어 영화 <일 포스티노>의 원작인 안토니오 스카르메타의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를 읽었다. 읽기 전부터 많은 사람이 추천을 해줘서 기대를 품고 읽기 시작했는데,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책도 영화와 마찬가지로 너무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지 않은가. 칠레를 대표하는 문인이자, 글을 모르는 이들도 시집 한 권쯤은 가지고 있다는 파블로 네루다라는 실존 인물과 그를 흠모하는 이슬라 네그라의 우편배달부 마리오 히메네스가 소설의 주인공이다. 시기는 칠레 대선을 앞둔 1969년으로부터 시작된다.

일자리를 찾아 산안토니오 항구를 배회하던 마리오는 우체국에 붙어 있는 구인광고를 보고 바로 우편배달부로 지원을 한다. 사실 시골 어촌에 편지를 주고받을 일이 무어 있겠느냐만, 담당구역인 이슬라 네그라에는 이미 칠레를 넘어 세계적인 시인으로 추앙받고 있던 파블로 네루다가 살고 있었다. 전 세계 각지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우편물을 배달해야 하는 중차대한 임무가 마리오에게 주어진다.

스카르메타의 의도대로, 마리오는 이 위대한 대시인에게 우편물을 배달해 주면서 소통을 이끌어 나간다. 그리고 이런 소설에 빠질 수 없는 로맨스 또한 등장하게 되는데, 그 주인공은 바로 마을 주점에서 일하는 열일곱 살의 베아트리스다. 아마 베아트리스를 처음 본 순간, 마리오의 머릿속에는 전 세계의 ‘종소리’가 합창하듯 들리지 않았을까? 시인에게 ‘메타포’를 배우게 된 마리오는 시인의 시를 표절해, 베아트리스의 환심을 사는데 전력을 다한다. 바로 이 시점에서 메타포에 대한 개안(開眼)과 사랑에 눈을 뜨는 마리오의 환희를 작가는 절묘하게 그려낸다. 동시에, 사랑에 빠져 버린 철부지 마리오를 측면에서 지원사격해주는 ‘뚜쟁이’ 대시인의 인간적인 면모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마리오의 베아트리스에 대한 열렬한 사랑은 라틴아메리카의 모든 청년이 그러하듯이, 그녀의 어머니라는 큰 장애물을 만나게 된다. 공산당을 혐오하는 과수댁 로사 곤살레스는 순결한 자신의 딸을 마리오라는 흉측한 놈팡이로부터 지켜내기 위해 온 힘을 기울인다. 그럴수록, 사랑에 눈먼 마리오의 가슴은 버적버적 타들어갈 뿐이다. 이들의 사랑은 공교롭게도 민중연합의 대통령 후보 살바도르 아옌데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결실(?)을 보게 된다.

아옌데 정부에서 프랑스 대사를 맡게 된 네루다는 파리로 떠나게 되고, 마리오는 장모 로사의 주점에서 주방장 노릇을 하게 된다. 그러던 중, 파리의 네루다로부터 마리오에게 ‘추신’이 딸린 편지가 오게 되고, 대시인은 마리오에게 이슬라 네그라의 소리를 들려 달라는 부탁을 전한다. 네루다가 일찍이 마리오에게 알려준 메타포의 근원을 이루는 이슬라 네그라의 모든 소리가 작은 카세트테이프 리코더에 담기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들의 작은 행복은 네루다의 건강이 급속하게 나빠지고, 아옌데의 민중정부를 전복시킨 1973년 9월 11일의 피노체트 일당의 쿠데타로 만사휴의가 되어 버린다.

이 책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를 무려 14년이나 걸려서 썼다는 안토니오 스카르메타의 글을 읽으면서 이 정도로 멋진 책을 쓰기 위해서는 14년이 아니라 20년, 아니 30년이 걸려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파블로 네루다라는 실존 인물에 마리오 히메네스라는 가상의 주인공을 등장시켜, 서로 소통하고 친구이자 동지적 관계로 발전해 나가는 과정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묘사가 돼서 픽션이 아니라 실화가 아닐까 할 정도로 리얼리즘의 문학적 구사가 인상적이었다.

마리오의 사랑이라는 지극히 개인적 체험은, 1970년대 초반 라틴아메리카를 뒤흔들었던 아옌데 정부의 사회주의 실험의 부침과 그 맥을 같이한다. 마리오의 메타포와 베아트리스에 대한 열렬한 사랑은, 칠레 민중들의 살바도르 아옌데 박사로 대변되는 민중연합에 대한 사랑으로 대치된다. 1970년 칠레 대선에서 아옌데의 승리와 마리오가 오랜 기다림 끝에 쟁취한 사랑은 말할 것도 없다. 쿠데타 이후의 좌절과 마리오의 실종에 대한 복선 역시 그 궤를 함께 한다.

마리오라는 캐릭터를 통한 민중의 자각 역시 작가가 이 소설을 통해 전달하고 싶었던 메시지이리라. 종래 칠레의 지배해온 기득권층은 국민의 삶과 처우 개선에 대한 수많은 공약을 남발해왔지만, 네루다와 아옌데 만큼 국민에게 진심으로 다가가지 못했다. 하지만, 이 두 명의 거인은 민중의 동지로서 그들을 껴안았다. 우파의 물자 사재기와 악의적인 호도에도, 칠레 국민의 네루다와 아옌데애 대한 열렬한 지지는 꺾이지 않는다. 우파 출신의 국회의원 랍베에 당당하게 도전하는 거듭난 마리오의 모습에서는 심지어 전율이 일었다.

스카르메타의 14년 문학적 내공은 이렇게 1970년대 격동의 칠레를 다루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마리오 히메네스로 대변되는 민중의 삶을 해학적으로 그려내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균형을 잃으면 바로 심각해질 수 있는 미묘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대시인과 시골뜨기 우편배달부라는 어쩌면 서로 상극인 주인공을 민중의 관점에서 친구이자 동지로 그려낸 점이 더욱더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이제 네루다가 영면을 취하고 싶었던 이슬라 네그라가 아닌, 이탈리아 시칠리아에서 찍은 영화 <일 포스티노>를 보면서 <네루다의 우편배달부>의 감동을 되새길 시간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