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행록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22
누쿠이 도쿠로 지음, 이기웅 옮김 / 비채 / 2010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누쿠이 도쿠로의 <우행록>을 읽었다. 영어 제목으로는 <A Catalog of Follies>, 한자를 풀어 보니 어리석은 행동들의 기록 정도라고나 할까. <우행록>은 재작년에 비채를 통해 처음으로 소개된 <통곡>에 이어, 세 편의 증후군 시리즈를 거쳐 5번째로 국내에 소개된 누쿠이 도쿠로 작가의 책이다. 특이하게도 누쿠이 도쿠로 작가의 부인도 미스터리 작가라고 한다.

일본 작가들의 글이 소재를 불문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자유로운 소재의 선택이 왠지 마음 한구석을 불편하게 하기도 한다. <우행록>에서도 일본의 수도인 도쿄도에서 벌어진 잔혹한 일가족 살해사건이 그 중심에 있다. 이 미스터리는 어느 르포라이터가 살해당한 다코 가족의 일상을 수소문하는 형식으로 시작한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르포라이터가 가장 먼저 의심이 갔다. 도대체 이 사람은 누구일까? 사건 발생 1년이 다 되어 가는 시점에서 과거사를 캐고 다니는 이가 궁금해졌다. 혹시 이 르포라이터가 아직 잡히지 않은 범인은 아닐까? 그가 만나는 인터뷰이들이 하나같이 호의적으로 그를 대한다는 점도 참 신기했다. 사실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그렇게 자세하게 말하고 싶지 않을 텐데도 인터뷰이들은 시시콜콜한 과거의 이야기들을 모두 작가에게 들려준다.

어느 미스터리물처럼 <우행록>도 도대체 누가 범인이고, 무슨 동기로 그런 끔찍한 사건을 저질렀는지에 초점이 맞춰진다. 하지만, 인터뷰가 진행될수록 그런 범인과 동치 찾기보다는 다코 내외의 과거사로 무게중심이 이동한다. 모두 6명의 인터뷰이 중에서 그나마 이웃인 첫 번째 두 케이스는 나은 편이다. 그저 본격적인 이야기에 들어가기에 앞선 준비운동 정도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진행되는 인터뷰에 의하면, 다코 집안의 가장인 다코 히로키는 일본 유수의 대학인 와세다를 졸업하고 국내 굴지의 부동산 개발회사에 다녔다고 한다. 그의 15년 지기인 인터뷰이는 다코가 입사 초기 회사에서 겪은 일과 연애에 얽힌 비사를 들려준다. 직장 동료에게 자기가 점찍은 여자를 먼저 채 갔다는 이유로 혹독한 보복을 하기도 했다는 말에 그럼 그가 범인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 인터뷰이의 시선으로 보는 다코는 과히 호의적으로만 볼 수 없는 사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역시 특정 인터뷰이의 ‘필터’를 통해 접하는 다코 히로키의 일면이다.

역시 인터뷰의 압권은 바로 죽은 다코의 아내인 다코 유키에, 결혼 전에는 나쓰무라로 불린 유키에의 대학 동창인 미야무라 씨의 이야기다. 역시 명문인 게이오 대학에서 화려한 대학생활을 한 유키에에 얽힌 비화가 하나둘씩 드러난다. 집안, 성적 그리고 부유함이라는 삼박자를 모두 갖춘 내부생과 외부생의 이야기에 그만 혀를 찼다. 게다가 외부생은 내부생만의 써클에 들고 싶어하고, 그런 외부생의 심리를 나쓰하라가 이용했다는 미야무라의 이야기는 오래전에 본 영화 <라쇼몽>을 떠올리게 했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편견의 지배를 받는다. 자기가 가진 필터를 통해 세계를 보고, 판단한다. 20대 초반의 게이오 대학을 다닌 학생들 역시 예외는 아닐 것이다. 미야무라는 자기는 내부생이니 외부생이나 하는 것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하지만, 역시 한참 시간이 지난 뒤의 이야기다. 게다가 자기는 그런 사람들과 차원이 달랐다는 식의 말은 어쩐지 신뢰가 가지 않았다. 출중한 아름다움으로 나쓰하라 그룹에 어울리게 된 외부생 다나카를 철저하게 이용한 내부생과 나쓰하라에게 미야무라는 비난을 날린다. 그러면서 그녀는 다코 가족 사건이 우발적인 범행이 아니라 원한관계에 의한 것이라고 확신한다.

여기서 다음 인터뷰이로 넘어갈 때마다 잠깐씩 등장하는 꼬마 여자 아이의 목소리가 있다. 난 솔직하게 말해서, 이 여자 아이가 죽은 다코네 막내딸이라고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나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 버렸다. 인터뷰가 진행될수록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놀라운 진실로 독자를 인도해간다.

5번째 인터뷰이는 다코의 대학시절 스키 동아리부원으로 애증의 관계가 얽힌 이나무라 에미라는 여성이다. 그녀의 말을 통해, 다코가 얼마나 성공지향적이었으며,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파렴치한이었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흠, 이 여자도 충분히 다코에게 원한을 가질만하군. 마지막으로 등장한 오가타는 미야무라의 옛 애인으로 나쓰하라에게 반해 그만 미야무라를 배신한 전력의 사나이다. 물론, 그의 이야기는 미야무라의 진술과는 상이한 점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를 통해 독자는 미야무라의 죽음도 알게 된다. 도대체 범인은 누구고, 그들 가족에겐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우행록>은 참 독특하다. 철저하게 인터뷰라는 객관적이면서도, 지극히 주관적인 진술을 통해 독자가 궁금해하는 미스터리에 접근해 가는 방식이다. 등장한 6명의 인터뷰이는 모두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르포라이터에게 매우 협조적이다. 그냥 미제사건에 대한 르포를 쓰겠다고 해서 모두가 르포 작가에게 협조적인 건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개인적으로 그런 자발적인 협조의 동기가 무척이나 궁금했다.

아니면, 다코 가족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이들은 알게 모르게 그들이 다코 가족에게 가지고 있던 콤플렉스(학벌, 직장, 단란한 가정 등)에 대한 무의식적인 반발이었을까?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임의대로 타인의 삶을 재단하는 그네들의 삶의 모습에서 '이중성(duality)'의 아이러니가 슬쩍 비쳤다. 우리가 알게 모르게 하는 ‘필터링’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해주는 수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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