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우셰스쿠 - 악마의 손에 키스를
에드워드 베르 지음, 유경찬 옮김 / 연암서가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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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루마니아 출신 작가 헤르타 뮐러의 책을 읽으면서, 그녀의 조국 루마니아를 서슬 퍼런 전체주의국가로 만든 희대의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의 이름이 떠올랐다. 한 때는 소련의 위성국 중에서 독자적인 노선을 걸으며 인간적 공산주의의 모델로 서방에 알려졌던 루마니아에 대한 진실이 그 베일을 벗는다.

프랑스 출신의 저널리스트 에드워드 베르는 루마니아 혁명으로 니콜라에 차우셰스쿠가 권좌에서 축출되고 나서, 직접 루마니아를 찾아 이 독재자의 비참한 몰락과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을 추적한 <차우셰스쿠> 평전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이 책에는 공산주의 이데올로기 대신 오로지 권력의 화신으로 부패한 독재국가를 이끌었던 어느 독재자의 초상과 더불어, 우리에게는 체조의 요정 코마네치의 조국 정도로만 알려진 루마니아 근대사가 담겨 있다.

책의 구성은 자못 흥미롭다. 우선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루마니아 혁명이 발발한 1989년 12월의 루마니아로 독자를 인도한다. 사반세기 동안 루마니아를 통치하면서, 계속된 실정과 비밀경찰 통치로 루마니아 국민의 불만과 분노는 위험수위에 도달해 있었다. 그 무렵, 루마니아 서부의 도시 티미쇼아라에서 시작된 시위가 전국으로 번지자, 막바지에 다다른 차우셰스쿠 정권은 비밀경찰과 보안군에게 시위대에게 무차별 발포를 허용하며 최후의 발악을 시도하고 있었다. 결국, 차우셰스쿠와 그의 부인 엘레나는 그의 독재에 반대하는 일단의 인사들이 조직한 구국전선의 장성들에게 체포되어 약식재판을 거쳐 무려 백여 발에 달하는 총탄을 맞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이렇게 독재자의 말로를 구체적으로 추적한 에드워드 베르는 플래시백으로 루마니아의 원형을 쫓는 역사 탐험에 나선다. 고대 로마제국 시대 발칸반도에 있는 다치아(Dacia)족의 근거지였던 왈라키아와 몰다비아 부근을 아우르면서 루마니아 국가의 탄생을 예고했다. 발칸 반도의 여러 나라처럼, 루마니아 역시 오랜 오토만 제국의 식민 통치를 받았다. 터키인들의 지배 아래에서는 그리스인들의 가혹한 수탈을 경험하기도 했다. 1878년 인근의 부코비나와 베사라비아를 포함한 루마니아 왕국이 드디어 역사에 등장한다.

호엔촐레른-지그마링겐 왕가 출신의 카롤 1세가 다스리던 1878년과 1914년 사이에는 비교적 평화를 유지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루마니아는 전쟁 초반에는 중립을 유지하다가, 나중에 연합군 측에 섰다가 독일군에게 혹독한 시련을 당하기도 했다. 2차 세계대전 증에는 극우파 독재자 이온 안토네스쿠는 추축국에 적극적으로 가담해서 소련을 상대로 한 동부전선에서 히틀러의 독일군과 함께 참전하기도 했다. 특히 루마니아의 플로이에슈티는 독일이 전쟁하는데 무엇보다 중요한 석유자원 확보를 위해서 꼭 필요한 유전이었다.

1944년 8월, 루마니아의 젊은 국왕 미하이 1세가 이끄는 친위 쿠데타가 발생해서 독재자 안토네스쿠를 타도하지만, 소련의 지원을 얻은 일단 공산주의자 그룹에 의해 루마니아의 공산화가 진행된다. 사실 종전을 앞둔 포츠담 회의에서 이미 영국의 처칠과 소련의 스탈린은 각각 그리스와 루마니아에서 90%를 지배하기로 협의하면서 루마니아는 소련이 드리운 철의 장막에 편입될 운명에 처해져 있었다. 이 시기에 비로소, 권력욕의 화신인 니콜라에 차우셰스쿠가 등장한다. 농민 출신으로 문맹에 가까웠던 차우셰스쿠는 루마니아의 공산주의 지도자 게오르기우 데즈를 추종하면서 서서히 루마니아 정치 무대에 나섰다.

스탈린주의를 맹신하는 차우셰스쿠는 루마니아 국민의 복지나 국가의 이익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자신의 동지들을 밟고 권력의 정점에 오르는 데에만 자신의 모든 역량을 집중시켰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1944년 8월 23일, 안토네스쿠를 실각시킨 반 독일 쿠데타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등의 사실왜곡부터 시작해서 훗날 조직적으로 이뤄지게 될 우상화 작업을 시작한다.

스탈린 사후, 1956년에 벌어진 헝가리 혁명을 소련이 어떻게 무자비하게 진압하는지 목격한 루마니아 공산주의 지도부는 소련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인간의 얼굴을 한’ 공산주의 모델을 들고 서방세계에 호소하기 시작했다. 1965년 게오르기우 데즈의 사후, 공산당 사무총장으로 모든 권력을 승계한 차우셰스쿠는 정치 무대의 전면에 나서게 된다. 이 얼치기 독재자는 서방세계에는 개화된 공산주의자라는 이미지를 팔면서 한편으로는 세쿠리타테라는 친위 비밀경찰 조직을 동원해서 루마니아를 공산주의 동유럽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전체주의 국가로 만들어 버렸다.

비밀경찰을 동원해서 도청과 밀고를 일상화하고, 오직 차우셰스쿠에게만 충성하는 특권조직과 자신의 부인 엘레나를 정점으로 하는 족벌 정치의 폐해는 차우셰스쿠의 독재가 끝난 지 20년이 넘는 지금도 루마니아 사회에 서로 불신하는 풍조를 남겼다. 스스로 500년 만에 한 명 나올 법한 지도자라는 망상에 빠져, 자신과 엘레나의 생일을 국경일로 삼는 등 가히 변태적 개인숭배와 우상화도 서슴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차우셰스쿠> 평전의 작가 에드워드 베르는 중세 봉건영주, 군주제 그리고 공산주의로 넘어가는 역사적 단계에서 빈번하게 드러난 루마니아 민중과 지식인의 협조와 타협을 냉정하게 꼬집는다.

세계 지도자들과의 빈번한 교류를 루마니아 국민에게 선전하기 위해 서방 세계를 방문했지만, 서방 지도자들은 루마니아 지도자 부부의 천박성에 그만 혀를 내둘렀다. 오죽했으면 프랑스 대통령이 영국 여왕에게 루마니아 국빈의 약탈에 대해 조심하라는 경고까지 했겠는가 말이다. 영부인 엘레나 역시 국가 간의 외교보다는 오로지 자신이 요구하는 사치품 쇼핑에만 관심을 기울였고, 무학의 콤플렉스 때문인지 세계 유수의 대학이나 연구기관으로부터 명예학위를 섭렵하는데 전력을 다했다. 책을 읽을수록, 이 얼치기 독재자의 천박함에 그만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시기의 문제였을 뿐이지, 이미 차우셰스쿠의 몰락은 예견되었다. 다만, 차악이 구악을 대신했다는 말처럼 차우셰스쿠의 독재를 끝장낸 루마니아 혁명은 미완의 혁명으로 기록됐다. 루마니아 국민이 원하는 방향으로 진행되는 대신 차우셰스쿠의 하수인들이 다시 정권을 장악하고 개혁세력이 힘을 쓸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차우셰스쿠 치세가 남긴 잔재의 청산을 위해서는 몇 세대가 걸릴지 모른다는 작가의 지적이 날카롭기만 하다.

다시 한 번 절대권력은 필연적으로 부패할 수밖에 없다는 역사의 진리를 되새겨 보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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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큐에게 물어라
야마모토 겐이치 지음, 권영주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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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문학을 접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물론 그전에는 읽고 싶어도 읽을 수가 없었고, 최근까지만 해도 다카노 히데유키나 오쿠다 히데오 같이 조금은 가벼운 작가의 글을 즐겨 읽었다. 그러던 중에 작년에 나오키상을 받았다는 두 권의 책을 연달아 읽으면서 일본 문학에 대해 가지고 있던 주관적 편견을 허무는 계기가 됐다. 텐도 아라타의 <애도하는 사람>과 야마모토 겐이치의 <리큐에게 물어라>가 그것이었다.

국내에는 처음 소개되는 야마모토 겐이치 작가의 팩션 <리큐에게 물어라>에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소재들이 담뿍 담겨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자신의 주군이었던 오다 노부나가의 뒤를 이어 전국통일 이뤄 나가는 역사적 배경으로 해서, 실존 인물인 다도 아티스트 센 리큐의 죽음에 얽힌 비화가 꾸준하게 역사소설을 발표하는 야마모토 겐이치의 글에 담겨 대한해협을 건너왔다.

솔직히 말해서 다도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바가 없었다. 그래서 <리큐에게 물어라>에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다완, 다호 혹은 다석 같이 다도에 관련된 어휘들이 낯설게 다가왔다. 하지만, 아름다움에 대해서라면 세상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심미안을 가졌다는 센 리큐의 전설을 접하면서 조금씩 다도에 이끌리기 시작했다. 다도에는 사람을 미치게 하는 마성이 있다고 하던데, 그 말이 사실일까.

연전에 본 영화 <인사동 스캔들>에서 언뜻 본 장면을 인용하자면, 다도에 사용되는 다완은 누가 사용했느냐에 따라 조선에서 쓰이던 막사발이 일본에 건너가서는 국보로도 둔갑할 수 있다는 말이 바로 떠올랐다. 이를테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애지중지하던 조선의 막사발이 한 500년 정도 지나면 그 가치를 매길 수 없을 정도가 된다는 말이다.

아마 이 책을 읽은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센 리큐의 할복으로 시작되는 이야기는 시간의 흐름에 역행하는 플래시백을 쫓는다. 마치 삶이라는 인간 행위의 근본을 쫓듯이, 독자를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그리고 오다 노부나가 같은 전국시대의 영웅들이 일세를 풍미하던 시절을 빙 돌아 다시 주인공의 죽음으로 되돌아온다. 책을 다 읽고 나서는 문득 책의 뒷부분부터 다시 읽어 보면 하는 어떨까 하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일본 다도를 정립한 것으로 알려진 센 리큐는 중국산 다구인 당물(唐物)로 치장된 화려하기 짝이 없는 서원 다도가 아닌, 차를 숭상하는 이들의 내면세계와 정신을 중요시하는 와비 다도에 자신의 삶을 걸었다. 센 리큐는 행다를 단순히 차를 마시는 행위가 아닌, 모든 것이 지고의 미를 위해 합일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차를 끓이고, 농차를 개는 그의 모습을 소설에서는 청량한 관능으로 묘사하지만, 나에게 그의 삶은 처연한 슬픔으로 다가온다.

당시 최고 권력자인 도요토미 히데요시마저도 안중에 두지 않고 절정의 아름다움, 화사한 생명력을 추구하는 센 리큐의 절대미학에 대한 야마모토 겐이치의 기술에는 유현한 아취가 배어 있다. 비좁은 다실에서 주와 객으로 차 한 잔을 사이에 대면하는 풍경은, 칼만 등장하지 않았다 뿐이지 목숨을 건 사무라이들의 대결만큼이나 팽팽한 긴장감을 유발한다. 예수회의 복음을 일본에 전파하기 위해 야심 차게 히데요시를 찾은 포르투갈 출신의 사제 발리냐노에게 무인의 갑주에 동백꽃 한 가지로 응수하는 장면은 정말 압권이었다.

천하를 노리는 수많은 영웅을 제압하고 마침내 전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절대군주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한다. 하지만, 아름다운 것에는 절대 실수를 하지 않는 센 리큐의 눈에 돈과 색을 밝히는 히데요시는 천박 그 자체다. 비록 아티스트와 패트론이라는 관계로 만나게 되었지만, 자신이 모시는 주군의 그런 천박함을 센 리큐는 참을 수가 없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천하를 품에 안은 히데요시가 센 리큐의 그런 오만을 허용할 리가 없다. 속된 말로 노는 물이 틀린 두 사나이의 예견된 충돌은 비극으로 치닫는다.

다도의 예와 전국시대 말엽의 정치적 상황에, 아무도 모르는 녹유 향합으로 상징되는 센 리큐의 반세기를 아우르는 사랑에 야마모토 겐이치는 방점을 찍는다. 센 리큐가 남몰래 평생을 걸쳐 사랑한 여인이, 바로 조선 출신의 무궁화를 떠올리게 하는 절세가인이라는 점이 조금은 작위적이지 않나 하는 생각에 입맛이 씁쓸해졌다. 또 한편으로는 예의 여인에 대한 정한(情恨)이 평생 아름다움의 극한을 추구한 센 리큐의 동인이었다는 점에서 수긍이 갔다.

한 잔 차에 인생을 다리는 센 리큐의 행다에서 사물의 본질과 지고의 아름다움을 쫓는 진정한 아티스트의 마음가짐을 엿볼 수가 있었다. 날 것 그대로의 욕망이 들끓는 현세에서, 소박한 차솥에 조용하게 끓인 그윽한 박차 한 잔의 향기에 지친 심신을 달래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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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하는 사람
텐도 아라타 지음, 권남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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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에서 애도(哀悼)라는 말을 찾아봤다. ‘죽음을 슬퍼하다’란 뜻이란다. 오호, 애도에는 항상 죽음이란 녀석이 짝을 짓는구나. 작년 하반기에 야마모토 겐이치의 <리큐에게 물어라>와 함께 치열하게 나오키상 수상의 경합을 벌였다는 텐도 아라타의 <애도하는 사람>의 주인공 사카쓰키 시즈토는 바로 그 죽음을 애도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 주인공 특이하다 자기가 모르는 사람의 죽음도 애도한다.
 
솔직히 처음에 책을 대했을 때, 책의 내용보다 600쪽을 훨씬 넘어가는 두툼한 사이즈에 먼저 눈이 갔다. 하지만, 텐도 아라타가 창조해낸 일본 전국을 돌며 애도여행을 하는 시즈토의 이야기가 지닌 마성에 이끌려 그만 늦은 밤에 눈을 비벼 가며 다 단숨에 읽어 버렸다. 모두 9장으로 구성된 <애도하는 사람>은 베테랑 주간지 기자인 마키노 고타로, 애도하는 남자 시즈토의 어머니로 위암으로 죽어가는 사카쓰기 준코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남편을 죽이고 교도소에서 형을 살고 출소한 나기 유키요가 번갈아 가며 이야기의 흐름을 이야기한다.
 
먼저 마키노는 가십을 주로 다루는 주간지에서 ‘인간의 악’을 파헤치는 일로 먹고산다. 오늘도 사건 현장에서 무언가 사람들의 이목을 끌만한 건수가 없을까 헤매던 마키노는 애도하는 남자, 사카쓰키 시즈토를 우연히 만나게 된다. 독자는 마키노와 시즈토의 대화를 통해 시즈토가 전국을 유랑하며 죽은 이들을 애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동시에 바로 이런 질문과 맞닥뜨리게 된다, 도대체 왜 시즈토는 이 애도여행을 시작하게 되었는가?
 
그다음 이야기에서는 위암에 걸려 시한부 판정을 받고, 자택에서 죽을 날을 기다리며 호스피스 케어를 받는 시즈토의 어머니 준코가 주인공이다. 텐도 아라타는 소설에서 세 번인가 거미를 등장시키는데, 과연 거미의 존재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거미가 짓는 거미줄 같이 얽히고설킨 인간관계의 복잡성에 대해 말하려던 걸까? 우연한 만남 그리고 아스라한 그리움에 슬며시 작가는 거미를 파견한다.
 
책을 읽으면서 시즈토의 이 기이한 애도여행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고인이 누구를 사랑했고 누구에게 사랑 받았느냐는 삶과 죽음 그리고 사랑이라는 인간 본질에 대한 구도의 여행을 하면서도 정작 자신을 사랑하는 가족에 대해서는 이렇게 무심할 수 있을까라고 분노를 느꼈다. 특히 아이를 임신하고, 남자친구와 절연하고 싱글 맘으로 아이를 낳게 될 딸에 대한 아련한 마음에 마음 놓고 죽을 수도 없는 시즈토의 어머니 준코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이 애도하는 남자가 미워지기도 하더라.
 
세 번째로 타이틀 롤을 맡은 배우자 살해범 나기 유키요는 자신의 남편이 죽음을 맞이한 현장에서 시즈토를 만난다. 그리고 그의 뒤를 따라 시즈토의 애도여행에 동참하게 된다. 죽인 이에 대한 정보가 없더라도, 살면서 누군가 그를 사랑하고 또 사랑받을 만한 일을 했다는 신념으로 시즈토는 힘겨운 여행을 계속한다. 그에게 죽은 이가 무슨 이유로 해서 죽었는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 같은 보통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시즈토의 행동은 그의 순례여행이라는 ‘재현’(representation)을 통해 구체적으로 독자에게 다가온다.
 
또 한편으로는 광신적인 종교단체의 상식에서 벗어난 행위가 아닌가 하는 오해도 받게 되지만, 시즈토의 애도여행은 교묘하게 타인의 삶에 무관심한 현대인에게 공명을 울린다. 그리고 조금씩 그의 애도는 타인에게 공감을 얻기 시작한다. 자신에게 거의 적대적이기까지 했던 마키노는 물론이고, 죽은 남편의 원혼에 시달리는 유키요까지 그의 순례에 동참한다. 그들이 그의 애도를 100% 이해했을진 모르겠지만, 그의 행위를 복제(reproduction)한다는 의미에서 텐도 아라타의 소설은 철저하게 포스트모더니즘 미학의 근간을 따른다.
 
이렇게 재현과 복제의 과정을 거친 텐도 아라타의 글은 마지막으로 시즈토의 애도가 어떻게 정당화(justification)되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그의 애도가 정당화의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면, 그의 행위에 대한 재현은 물론이고 복제도 아무 의미가 없지 않은가 말이다. 죽음은 모두에게 공평하다. 아무리 세상에서 부와 명예, 권력을 가진 이라도 하더라도 죽음은 피할 수가 없다. 바로 이런 죽음의 공평성에서, 그 죽음을 애도하는 시즈토의 행위는 정당화의 과정을 조금씩 밟아 나간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그렇게 숭고한 애도여행을 하는 시즈토가 정작 자신의 가족, 특히 죽어가는 어머니에게 무심한 것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니 어쩌면 텐도 아라타는 독자의 이런 반응까지 고려해서 책을 기술했던 걸까? 정작 자기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과연 시즈토가 어떤 애도를 할지 너무나 궁금했다.
 
개인적으로 <애도하는 사람> 읽기는 타인의 죽음에 대한 시즈토의 절절한 애도와 어머니에 대한 무심함에 대한 분노라는 양가적 감정의 격전장이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허공에 발을 디디는 듯한 헛헛한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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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8
라우라 에스키벨 지음, 권미선 옮김 / 민음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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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만 들어오던 전설 같은 동명 영화의 원작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을 읽었다. 이 황홀하고 달콤한 소설이 멕시코 출신의 여류작가 라우라 에스키벨의 장편 데뷔작이라니 정말 놀랍다. 순식간에 책을 다 읽고 나서, 그녀의 전 남편이었던 알폰소 아라우가 감독한 동명의 영화도 보고 싶었으나 아쉽게도 구할 수가 없어서 아직 못 보고 있다.

소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은 주인공 티타를 중심으로 해서 22년간의 이야기를 열두 달, 열두 가지 요리에 빗대어 보여준다. 우리의 주인공 티타가 부엌에서 만들어내는 요리에는 인생사의 모든 희로애락이 담겨 있다. 고통, 사랑, 분노, 분노 그리고 열정에 이르는 모든 감정이 요리사의 손끝에 실려 음식을 먹는 이들의 심장을 타고 흘러들어, 온몸을 뒤흔든다. 그렇다, 그 정도로 라우라 에스키벨이 그려내는 ‘요리 문학’의 정수는 맵디매운 칠레 고추처럼 강렬했다.

라우라 에스키벨은 소설에서 티타의 어머니 마마 엘레나를 딸의 앞길을 막는 천하의 못된 악당 엄마다. 티타의 가문에는 우습게도, 막내딸이 어머니가 죽을 때까지 결혼하지 않고 봉양해야 하는 가문의 법칙이 있다. 그리고 그 법칙이라는 미명의 형벌은 바로 주인공 티타를 겨냥한다. 그녀가 만난 첫눈에 반한 페드로는 그야말로 살갗을 뚫을 것 같은 뜨거운 정열의 눈길을 티타에게 보내고, 곧바로 청혼을 하지만 별 소용이 없다. 서릿발 같은 청상과부 마마 엘레나의 고집을 꺾을 순 없었다.

그래서 페드로는 차선으로 티타의 맏언니 로사우라와 결혼한다! 페드로는 자기가 죽도록 사랑하는 티타를 곁에서 보고자 그런 끔찍한 결정을 내렸다고 말한다. 하지만, 왜 페드로는 자신의 결정이 주변의 모든 이들을 불행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으리라는 예단은 하지 못했던 걸까. 아니면, 티타를 데리고 사랑의 도주를 감행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러기에 티타는 너무 어렸거나 아니면 마마 엘레나로부터 세뇌된 인습의 굴레에 철저하게 종속되어 버렸던 것일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사랑하는 이를 고통을 안겨 준 페드로가 야속해지기 시작했다.

요리와 함께 어우러지는 사랑의 에로티카는 이 휘황찬란한 아우라를 발하는 멕시코 소설의 고갱이다. 티타가 눈물을 머금고 만든 메추리 요리를 먹은 티타의 둘째 언니 헤르트루디스는 자신의 몸에서 타오르는 뜨거운 열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벌거벗은 채 들판으로 달려나간다. 그리고 멕시코 혁명의 풍운아 후안 알레한드레스와 운명적인 만나게 된다. 결국, 여걸 헤르트루디스는 장군이 되어 고향집으로 돌아온다.

티타의 또 다른 남자 닥터 존 브라운은 티타-페드로-로사우라의 삼각 틀에 또 새로운 긴장감을 불어 넣는다. 알렉스라는 아들이 딸린 홀아비 존은 티타를 보는 순간, 그녀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거스를 수 없다. 웬 놈의 운명이 이리도 많이 등장을 하는지. 티타는 페드로와 존 사이에서 예상된 갈등을 겪게 되고, 결혼과 불륜이라는 위험한 불장난을 한다. 그녀에게서 페드로라는 존재가 떨어지지 않는 한 그것은 숙명일 것이다.

마마 엘레나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자유를 얻게 된 티타에게 행복의 시간을 도래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페드로의 법적 아내이자 티타의 언니인 로사우라가 이번에는 새로운 장애물로 등장한다. 첫 아이 로베르토를 잃고 두 번째 딸인 에스페란사가 태어나지만, 자기 가문의 법칙대로 에스페란사 역시 자기가 죽을 때까지 봉양해야 한다는 언니의 말에 티타는 그야말로 까무러칠 것처럼 놀란다. 그런 가문의 악습은 자기 대로 충분하지 않은가 말이다.

티타의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가부장의 위치에 오르게 된 마마 엘레나와 뜨거운 열정에 못 이겨 나선 길에서 혁명의 대열에 참가한 헤르트루디스와 달리 집 안에서 얌전하게 요리를 하며 자신의 숙명을 곱씹는 티타의 모습은 너무나 대조적이다. 티타는 페드로의 사랑에 매달려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 나가지 못한다는 점에서 입체적인 신여성이라고 부르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을까? 결국, 어머니의 반항하고 가출을 감행하지만,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다시 농장으로 돌아오는 모습에서 전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캐릭터의 절망이 느껴지기도 했다.

라틴아메리카에서 땅이 갖는 의미란 과연 의미일까? 티타는 그 땅의 결실인 다양한 식재료들을 가지고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놀라운 요리들을 만들어낸다. 언니를 바람나게 한 열정의 메추리 요리, 칠면조 몰레, 참판동고 그리고 바람난 언니도 돌아오게 한 디저트 크림 튀김에 이르기까지 티타의 손끝에서 만들어지는 요리의 비결이 무얼까 생각해 봤다. 십 년 전에 본 드라마 <맛있는 청혼>에서 주인공 정준이 말한 것처럼 그 음식을 맛있게 먹을 사람을 생각하면서 만드는 요리라면 짜장면이라도 맛있지 않을까?

책을 다 읽고 나니, 갑자기 고소한 토르티야로 만든 타코에 얼음을 갈아 넣은 마가리타 한 잔이 마시고 싶어졌다. 라우라 에스키벨과의 만남은 정말 고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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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지대
헤르타 뮐러 지음, 김인순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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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에 MFA에서 봤던 피카소 초기작품 전시회가 생각났다. 사실 피카소의 작품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니, 그의 초기작 역시 그다지 감흥을 주지 못했던 것 같다. 하지만, 대가가 되면 아마추어 시절의 작품들까지 덩달아 뜨고, 무수한 찬사가 쏟아지는 게 세상의 법칙이 아니던가. 2009 노벨문학상에 빛나는 헤르타 뮐러의 <저지대>를 읽으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모두 19개의 중단편이 들어 있는 <저지대>를 나는 타이틀 <저지대>를 빼고 짤막짤막한 단편들부터 다 읽고, 후기와 노벨상 수상 연설문을 차례로 섭렵했다. 오스만 제국과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의 오랜 지배로 동유럽의 국경선이 애매하다는 것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특히 헤르타 뮐러의 고향인 니츠키도르프가 있는 루마니아 서부의 바나트 지방은 세르비아-헝가리 그리고 루마니아 세 나라에 걸쳐 있다. 그것만으로도 이 지역이 얼마나 역사적으로 복잡하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현대 루마니아를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두 명의 독재자가 있다. 한 명은 2차 세계대전 당시 파시스트 정권을 세워 히틀러의 동맹으로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이온 안토네스쿠가 있고, 다른 한 명은 희대의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다. 두 명 모두 처참한 종말을 맞이했다는 점에서도 공통점을 갖는다. 1982년에 처음 나온 헤르타 뮐러의 <저지대>는 역시나 차우셰스쿠 독재 치하에서 검열을 거치면서 몇 개의 단편이 빠졌었다고 하는데, 그 암울한 시대를 이겨낸 헤르타 뮐러의 문학은 새로운 천 년에 빛을 발하고 있고 반면 그녀를 핍박했던 독재자 내외는 무려 160발의 총탄을 맞고 숨졌다고 한다.

독일계 루마니아 출신의 헤르타 뮐러는 우리에게는 생소한 지명의 루마니아라는 공간으로 독자들을 조심스레 인도한다. 책을 읽으면서 문득 궁금해졌다. 자신의 조국에서 외국어를 말하면서 타인의 삶을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하고 말이다. 분명히 여권에는 루마니아인이라고 기록이 되어 있지만, 독일어로 가족과 이웃 사람들과 소통을 하고 전통 독일의 풍습에 맞게 살면서도 루마니아인이라는 이질감 말이다. 나중에 차우셰스쿠의 독재 치하에서 벗어나 독일에 정착하기 전부터 헤르타 뮐러는 독일어로 글을 쓰지 않았던가. 이방인으로서의 면모를 <저지대> 곳곳에서 찾아볼 수가 있었다.

그녀의 데뷔작에서 가장 근간을 이루는 <저지대>에서는 루마니아 바나트 지방의 목가적인 풍광을 엿본다. 가톨릭이라는 종교의 엄숙함 가운데서 느껴지는 가족들 간의 긴장감이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다. 아버지는 수의사에게 뇌물을 먹여 가며 송아지를 도살하고, 집안일에 강박증을 가진 어머니는 빗자루질로 세월을 보낸다. 사람들 간의 관계 못지않게, 작가가 그리는 바나트 농촌 풍경에 묘사는 참 마음에 들었다. 헤르타 뮐러는 참새 둥지 하나, 고향 땅에 자리한 살구나무 한 그루에도 문학의 풍성한 세례를 부여한다. 그 땅에 대한 열렬한 애정이 없이 어떻게 그런 문장을 만들어낼 수 있단 말인가!

<저지대>에 이어 등장하는 <썩은 배>에서는 언니와 내가 목격하는 아버지의 부정에 대한 증언을 기록한다. 부정의 대상이 다름 아닌 이모라는 사실에 그만 경악하게 된다. <저지대>에서도 얼핏 내비쳤던 가족 내부의 긴장이 팽팽하게 묘사된다. 아버지는 자동차를 운전해서 차에 싣고간 채소를 팔아 번 돈을 어머니에게 가져다주는 가장의 역할에 충실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이면에서는 금지된 터부에 도전하며 가정의 안녕을 위협하는 존재로 지목된다.

개인적으로 가장 관심 있게 읽은 단편은 바로 <마을 연대기>였다. 천국보다도 더 낯설게 들리는 바나트 지방에 사는 독일계 루마니아 사람의 참모습을 볼 기회였다고나 할까. 독일계 조상을 둔 바그너 혹은 슈나이더 같은 그네들의 성이며, 교회-학교 그리고 시장이라는 공간을 통해 바나트 독일 사람들을 접할 기회를 제공해 준다. 차우셰스쿠가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은 루마니아 산업 재편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협동 혹은 국영농장에 대한 조심스러운 스케치도 인상적이었다.

개구리를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명백하게 전체주의 비밀경찰국가 루마니아를 빗댄 <의견>과 장학위원회라는 기존의 권위에 도전하는 잉게 이야기를 그린 <잉게>에서는 헤르타 뮐러가 구사하는 문학의 사회적 기능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 지금 읽는 <숨그네>에서도 그렇지만, 그녀의 글을 통해 증언문학의 순기능이 원활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첫 만남으로 한 작가의 작품세계를 판단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저지대>로 그녀의 조국 루마니아와 대가의 작품 세계에 발을 내디뎠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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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06 11:4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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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06 14: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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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09 15: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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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7 19: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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