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서브 로사 3 - 카틸리나의 수수께끼 로마 서브 로사 3
스티븐 세일러 지음, 박웅희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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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까지 단편집을 포함한 12권이 발표된 스티븐 세일러의 로마 공화정 말기를 다룬 추리 팩션 <로마 서브 로사>가 드디어 본 궤도에 올라선 기분이 들었다. 지난 1권과 2권에 이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더듬이’ 고르디아누스는 17년이라는 세월이라는 흐르면서 예전의 예기는 떨어졌을지 모르겠지만, 가족이라는 울타리에서 좀 더 인간적인 면모로 그리고 훨씬 더 익숙해진 모습으로 다가왔다.

고대 로마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누굴까? <로마인 이야기>의 저자 시오노 나나미 여사는 바로 이 인물에 대한 뜨거운 열정으로 대작을 썼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 바로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시리즈 3탄인 <카틸리나의 수수께끼>에 등장한다.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진행되던 역사의 흐름에서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그리고 키케로를 빼고서는 어떤 이야기도 되지가 않을 것 같다.

그렇게 궁금해하던 차에, 자신이 살던 집을 이제 양자가 된 에코에게 물려 주고 지기 루키우스 클라우디우스의 유산으로 증여받은 시골 농장으로 낙향한 고르디아누스는 전원의 목가적 삶을 꿈꾼다. 하지만, 사방으로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영지에 포위된 그의 농장 생활은 고단하기만 하다. 선대로부터 농장을 책임져온 농장장은 사사건건 주인과 부딪히고, 가장 중요한 건초 농사는 신통치가 않다. 하지만, 정작 위협은 내부가 아니라 외부로부터 다가온다.

클라우디우스 가문과의 상속 재판에서 고르디아누스의 손을 들어준 집정관 키케로는 자신의 대리인 카일리우스를 통해 거절할 수 없는 청탁을 해온다. 당시 민중파의 지지를 받고 있던 명문 귀족 카틸리나에게 거처를 제공해 주라는 것이다. 자칭 로마 정치의 혐오론자라는 고르디아누스는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이 영위하는 전원의 삶에 파문을 던질 예의 제안을 거절하고 싶지만, 어디 세상 일이 그렇던가. 울며 겨자 먹기로, 카일리우스-키케로의 제안을 수락하게 되고 이어지는 네모와 포르펙스의 죽음을 목격하게 된다.

스티븐 세일러의 이번 이야기에서 그 중심에 서 있는 사람은 바로 카틸리나다. 종래의 기득권층 옵티마테스의 편에서 선 키케로에 대적해서, 카틸리나는 로마 공화정의 본질로 돌아가 무산대중에게 토지를 배분하자는 개혁을 주장한다.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겠지만, 이런 주장이 기득권층에게 씨가 먹힐 리가 없다. 당시의 역사적 진실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스티븐 세일러는 이런 카틸리나에게 역사의 기록과는 달리 상당히 호의적인 시선을 보낸다.

고르디아누스는 2편에 등장한 노예 소년 메토를 면천하여 두 번째 아들로 들이는데, 이 메토와의 갈등 역시 <카틸리나의 수수께끼>를 흥미진진하게 만드는 요소다. 16세가 되어 이제 막 토가를 입는 성인식을 치렀지만, 중년의 고르디아누스에게 메토는 여전히 어린 아이일 뿐이다. 카틸리나를 지지하는 로마 청년들이 그랬듯이, 메토 역시 카틸리나의 대의를 따르기로 한다. 이미 치명적인 정치적 패배를 당한 카틸리나를 따르는 메토의 모습에서, 진실을 추구했던 고르디아누스 청춘의 그림자가 얼핏 비치는 것 같았다. 살아가면서 회의론자가 된 그의 눈에 과연 철부지 메토의 행동이 얼마나 무모하게 비쳤을지 불을 보듯 뻔하다.

스티븐 세일러는 자신의 팩션에서 로마 역사상 최고의 변호사라는 키케로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로마 공화정 최고위직인 집정관의 자리에 오른 권모술수의 달인으로 그리고 있다. 기존의 귀족 가문 출신이 아닌 정치 신인이라는 콤플렉스를 가진 키케로는 과연 존재하지도 않았던 카틸리나의 국가 전복 음모를 조작했을까? 그렇게 정확하게 알 수 없는 역사의 빈틈을 작가는 예리하게 파고든다. 이 부분이야말로 팩션 장르가 갖는 참맛이 아닐까?

<카틸리나의 수수께끼>에서는 1권과 2권 같이 고르디아누스가 자객의 습격을 받는 것과 같은 직접적인 위협은 보이지 않지만, 대신 네모와 포르펙스 등의 시신을 통한 간접 경고가 옥죄어 오는 압박과 도대체 누가 이런 음모를 꾸몄는가에 대한 작가의 교묘한 플롯 배치는 정말 탁월했다. 물론, 대단원에서 기다리는 반전 역시 일품이었다. 아무도 믿지 마라!

스티븐 세일러가 그리는 역사의 패배자 카틸리나에 대한 보다 인간적인 접근과 새로운 해석이 인상적이다. 역사적 인물로 이제 막 등장한 대신관 카이사르가 무난하게 <로마 서브 로사>에 연착륙한 점 역시 주목할 만하다. 이제까지 고르디아누스의 일인극이었다면, 이제부터는 에코와 메토까지 가세한 고르디아누스 가족의 이야기로 확대된 이 시리즈가 어디로 나아갈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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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루덴스 - 놀이하는 인간
요한 하위징아 지음, 이종인 옮김 / 연암서가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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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하는 인간”이라는 부제가 붙은 요한 하위징아의 책을 읽었다. 그동안 놀이란 단순히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을 했는데, 저명한 문화 인류학자인 네덜란드 출신의 요한 하위징아가 풀이하는 인류가 그동안 영위해온 놀이에 대한 개념은 확실히 그 차원이 달랐다.

모두 12장으로 이루어진 <호모 루덴스>는 아쉽게도 역자 이종인 선생이 밝히듯이 원문인 네덜란드 직역이 아닌 영어 판본의 중역(重譯)이라고 한다. 하지만, 원 저자인 요한 하위징아가 직접 영문으로 옮기기도 하였으니 비록 중역이기는 해도 충분히 작가의 취지가 전달됐으리라고 믿는다. 원래 언어학자로 학문을 시작한 요한 하위징아는 중세사에 관심을 두면서 탁월한 역사지식을 바탕으로 한 문화인류학의 길을 걷는다. 특히 그가 1919년에 발표한 <중세의 가을>은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를 다룬 걸작으로 알려졌다. <호모 루덴스>는 1938년에 나온 책으로, 하위징아의 중요 저작 중에 마지막 방점을 찍는다.

자, 그렇다면 생각하는 인간 호모 사피엔스가 아닌 놀이하는 인간 호모 루덴스를 주창한 요한 하위징아가 생각하는 “놀이”란 과연 무엇일까? 우리가 흔히 말하는 문화보다도 우선한 놀이에 대해서 총체적 현상에서 접근할 것을 작가는 주문한다. 놀이에는 특별하면서도 사회적 기능을 담보한 의미가 담겨 있다는 것이 요한 하위징아의 생각이다. 동시에 이 놀이에는 인간의 원형적 행위들이 들어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놀이를 통한 ‘이미지 만들기’(imagination) 또한 쉽게 흘려 들을만한 주장이 아니다.

한편, 놀이에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놀이는 자유로운 행위이자 자유 바로 그 자체이며, 모두가 지켜야 하는 규칙을 가지고 있으며, 재현과 경쟁을 수반한다. 이런 놀이의 특징은 좀 더 고등화한 형태의 놀이로 진화해 가면서 의례, 축제 그리고 종교에까지 이르는 과정을 작가는 설명한다. 즐거움이라는 기본 베이스에서 시작해서 이렇게 고등 형태의 문화에 놀이적 요소가 배어 있다는 연구가 놀랍기만 하다.

다음으로, 그는 자신의 학문적 원류인 언어학에서 놀이의 뿌리를 캔다. 다양한 문화권에서 발견되는 놀이 개념의 추상화에 대한 그의 연구는 확실히 매력적이다. 우리 같은 범인들이 어찌 고대 그리스어 혹은 산스크리트어에 접근이나 할 수가 있을까? 어쩌면 언어학을 전공한 작가의 특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양한 층위를 가지는 문화권에서 발견되는 놀이의 ‘진지함’과 ‘심각하지 않음’이 갖는 상보적 관계에 대한 요한 하위징아의 언급이 인상적이었다.

승리와 부상이라는 측면을 통해 놀이의 경제성과의 연결점은 물론이고, 법률과 놀이 사이에도 놀이의 다른 모습인 경기라는 주장은 흥미로웠다. 다만, 그다음에 등장하는 놀이와 전쟁에서는 지나친 논리의 비약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대가에게 도전할 생각은 없지만, 놀이의 다양성에 대한 연구에는 찬성하지만, 과도한 확대해석에는 이견을 제시하고 싶다.

요한 하위징아는 놀이가 가지는 문학적 특성에도 눈길을 돌린다. 신화에 등장하는 의인화와 은유의 과정에서도 그는 놀이의 요소를 채굴해낸다. 막연하게만 가진 신화에 등장하는 알레고리와 은유에 대한 그의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속이 다 시원해지는 것 같았다. 철학과 예술에서도 그는 놀이의 개념을 캐내기 위해 계속 작업하지만 두 학문에 대한 알량한 지식으로는 도저히 대가가 보여주는 총체적 연구의 깊이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현대 문명에 대한 요한 하위징아의 예단 역시 찬란한 광휘를 발한다. 특히 의회 민주주의 역시 게임의 규칙과 페어 플레이라는 놀이가 가지는 요소들은 거세되고, 정치적 입장이라는 놀이답지 않음이 주류를 이루어 가면서 놀이라기보다는 한 편의 코미디가 되는 현실에 저절로 냉소가 뿜어져 나왔다.

마지막으로 요한 하위징아는 위대한 철학자 플라톤의 말을 인용하면서, 인생은 놀이처럼 영위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한다. 우리 문화를 관통하면서도, 도덕의 언저리에서 존재하는 놀이에는 개인적으로 중용이 벗으로 따라붙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는 즐거움의 방편으로서의 놀이에는 찬성하지만, 필연적으로 따라붙는 (심각한) 경쟁에는 반대한다. 서구학자가 연구한 놀이에 ‘정도를 지나침은 미치지 못한다’(過猶不及)는 동양철학이 어울릴지는 모르겠지만, 문득 떠오른 이 말로 맺음을 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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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각승 지장 스님의 방랑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21
아리스가와 아리스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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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일본 작가의 책을 많이 읽고 있다. 지난달에 읽었던 텐도 아라타의 <애도하는 사람> 그리고 야마모토 겐이치의 <리큐에게 물어라> 그리고 오늘 고대하던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행각승 지장 스님의 방랑>까지 숨 가쁘게 달려온 기분이다. 어려서부터 추리 소설 작가의 꿈을 키워왔다는 아리스가와 아리스는 많은 실패에도 굴하지 않고, 본격 추리소설 작가의 꿈을 이룬 자전적인 인물이다. 그가 이번에 주인공으로 고른 인물은 바로 소설의 주인공인 슈겐도 행각승 지장 스님이다.

일단 추리소설에서 주인공이 스님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행각승 지장 스님의 방랑>의 시공간적 배경은 매주 토요일 밤마다 추리 마니아들이 모이는 “에이프릴”이라는 스낵바다. 화자인 나는 비디오 대여점 경영자, 풍경 사진작가 부부, 옷 잘입는 신사복점 큰아들, 지방 돌팔이 치과의사 그리고 스낵바의 칵테일 메이커 마스터가 청중이다. 그리고 이들에게 기이한 미스터리가 얽힌 살인사건과 그 해답을 들려주는 지장 스님이 그 중심에 있다.

우리가 아는 보통 불교의 승려와는 달리 슈겐도를 정진하는 지장 스님은 보헤미안 드림이라는 오렌지색 칵테일을 즐기며, 담배는 꼭 던힐만 피운다. 브랜드는 좋아하는 스님이라……. 물론 지장 스님에게 특이한 건 그뿐이 아니다. 정말 보통 사람은 평생 가야 한 번 들을까 말까한 많은 사건을 직접 체험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에이프릴 클럽의 청중들은 지장 스님이 들려주는 기담을 기대하고, 그가 먹고 마시는 술안주와 칵테일 값을 기꺼이 내준다. 느긋한 주말 여흥에 대한 보답이라고나 할까?

지방 출신의 아이돌 스타가 관련된 살인사건, 슈겐도 행각승 모습 그대로 참가해도 무방한 어느 벼락부자의 생일파티에서 벌어진 의문의 살인사건, 비교 교주의 비참한 결말, 재산상속을 둘러싼 독살사건, 전직 야쿠자의 외로운 죽음, 세계 3대 진미 중의 하나인 트뤼프로 시작되는 미스터리 그리고 백설 속에 벌어진 천재 발명가의 죽음에 이르는 7가지 미스터리를 지장 스님은 우매한 중생들에게 전수해 준다. 하나같이 특이한 사건에 지장 스님 고유의 리듬과 패턴이 어우러지면서 책장을 넘기는 속도가 붙는다.

추리와 미스터리의 전통을 그대로 따르는 듯, 지장 스님이 들려주는 이야기에는 해답이 모두 들어 있다. 전혀 엉뚱한 사람이 범인이 아니라, 플롯 속에 등장하는 캐릭터 중에 범인이 있다는 거다. 에이프릴 클럽 회원들은 모두 지장 스님의 이야기 속에 숨어 있는 복선에 집중하지만, 지장 스님과의 한 판 대결은 항상 스님의 승리로 귀결된다. 물론 아오노가 거의 정답에 이를 뻔 했지만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다 겪은 지장 스님은 사전에 그의 정답을 가로채 간다. 계속해서 회원들로부터 미스터리의 대가로 대접받으려는 속셈이었을까? 그런 그의 인간적인 면모가 마음에 들었다.

책을 읽으면서 한 가지 궁금한 점은 그가 왜 방랑을 하는가였다. 사실 그가 슈겐도 수행을 위해 일본 전국을 방랑한다고 하지만, 자신의 수행보다는 그가 맞닥뜨리게 되는 기이한 사건을 위한 방랑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아마 나뿐만 아니라 에이프릴 클럽 회원들도 마찬가지로 생각했지만 그건 추리와 미스터리 팬들인 그들에게 금기사항이다. 마치 이야기를 하면 모든 비밀이 사그라지는 것처럼, 막판에 지장 스님이 종적을 감추기 전까지 모두 마음 한구석에 고이 모셔 둔다.

누구나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은 ‘보헤미안’의 정서를 가지고, 미스터리 사건을 풀어가는 지장 스님의 캐릭터는 확실히 매력적이다. 이렇게 재밌는 이야기가 단 한 권으로 끝나면 너무 아쉽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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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자 - 2009 제17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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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부터 지도를 좋아했다. 그래서 학교에 가기도 전에 사촌형의 사회과부도(지금도 이런 이름으로 있는지 모르겠다)를 끼고 살았다. 지도 속에서는 전 세계 어느 곳이라도 가보지 못하는 곳이 없었다. 나중에 역사를 공부하게 되면서는 지도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했다. 답사를 다니기 위해서는 정말 꼭 필요한 게 바로 지도였으니까. 그러면서도 19세기 우리나라 전토를 직접 발로 밟은 이가 그린 지도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이제야 비로소 그 지도를 그린 이와 만나게 됐다.

책을 읽으면서 두 단어가 계속해서 나를 따라다녔다. ‘미상불’과 ‘덴바람’, 오늘 미상불을 국어사전에 찾아보니 “아닌 게 아니라 과연”이라고 그리고 ‘덴바람’은 된바람의 다른 말이란다. 미상불은 지도 때문에 아버지를 잃고, 나라의 권력을 쥔 사대부들이 아닌 백성을 위한 지도를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평생을 바친 고산자 김정호의 신산한 인생 전반을 아우르는 말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다음으로, 덴바람은 고산자 선생이 일생의 역작 <대동여지도>를 만들기 위해 겪은 고초를 상징하는 말이라고나 할까.

홍경래의 난으로 대표되는 민란이 조선을 휩쓸던 19세기 당시의 암울한 시대상을 박범신 작가는 중인의 신분으로 지도 만들기에 자신을 내던진 김정호의 삶에 투영시킨다. 전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철저한 신분제 사회를 유지하던 조선에 사민평등 사상을 바탕으로 한 천주교를 도저히 조선 조정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에 따른 박해가 소설의 어느 순간 등장하리라는 예감을 받았다. 그것도 김정호의 외딸인 순실이가 독실한 신자임에야.

박범신 작가는 왜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만드는 데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게 되었는지 조심스러운 추적을 시작한다. 고향인 토산에 살던 김정호의 아버지는 삼정(전정, 군정, 환곡)을 면제해 주겠다는 토산 현감의 제안을 받고, 홍경래의 난 진압에 자원대로 나섰다가 관아에서 제공한 엉터리 지도 때문에 객사하게 되는 변을 당한다. 백성을 위무해야 하는 목민관이 자신의 영달을 위해, 억지로 백성을 동원한 사실도 그렇지만 백성을 수탈하는 삼정의 문란이 얼마나 혹독했으면 군사훈련이라고는 받아 보지도 못한 백성이 반란군 진압에 나서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답답해졌다.

이런 정치적 상황에, 신산하기 그지없는 김정호 개인의 삶은 소설화시키기에 부족함이 없는 것 같다. 실제로 어떤 삶을 살았는지 역사의 공백이 너무나 많기에 어쩌면 소설가로서는 실존했던 인물인 그를 주인공으로 삼아 예의 공간을 채우기가 매력적이지 않았을까 싶다. 아주 잘 알려지고, 다양한 역사의 기록이 남아 있다면 오히려 작가의 상상력이 침투할 공간이 부족하지 않을까? 팩션이란 기본적으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명백한 역사적 사실만큼은 조심스럽게 다뤄야 하니 말이다.

삶과 죽음은 종이 한 장 차이라고 했던가. 얼굴도 채 기억이 나지 않는 부용꽃 같았다던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의 연이은 죽음으로 고아가 된 김정호는 목수로 생업에 대한 걱정을 덜고 조선의 방방곡곡을 누비면서 지도 만들기를 구체화해 나간다. 그리고 그의 지기로 등장하는 혜강 최한기, 위당 신헌 그리고 묘허 최성환 등과의 교우 관계를 통해 파란만장한 역사의 현장을 달음질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유배에서 풀려나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위당을 찾아간 지기들이 한자리에 모여 우산도(독도)에 대한 토론을 하는 장면은 왜 <대동여지도>에 독도가 빠져 있는지에 대한 변론처럼 들리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했다. 팩션 장르란 바로 이런 맛이 아니던가! 아 그럴 수도 있겠다는.

수명을 다해 가고 있던 조선 왕조의 정치적 상황과 김정호의 개인사를 다루면서도 조선 후기 학문의 한 흐름이었던 실학에 대해서도 작가는 예리한 시선을 던진다. 조선후기 실학자들이 추구하던 실사구시, 다시 말해서 객관적 관찰과 연구를 통한 사실에 도달하려는 이 캐치프레이즈에 고산자의 지도 만들기만큼 딱 맞아떨어지는 소재도 없을 것 같다. 이 실사구시와 짝을 이루는 이용후생에 있어서도, 백성을 위해 지도를 만들었노라는 김정호는 선언하지 않았던가. 고등학교 국사 시간에 그렇게 죽어라고 실사구시와 이용후생을 외웠지만 그걸 어떻게 적용시켜야 하는지는 전혀 모르지 않았던가. <고산자>를 읽으면서 이해를 바탕으로 하지 않은 암기 위주의 교육방식의 폐해를 절감했다.

정말 능력 있는 기술자가 대접을 받지 못하고, 망국을 불러온 위정자가 호령하던 암울한 시절에 대한 이야기에 그만 마음이 헛헛해져 버렸다. 미상불 박범신 작가의 글을 처음으로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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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완벽한 2개국어 사용자의 죽음
토마 귄지그 지음, 윤미연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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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 출신의 작가 토마 귄지그와 두 번째로 만났다.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된 <세상에서 가장 작은 동물원>이 단편 모음이었다면, 이번에 만난 <어느 완벽한 2개 국어 사용자의 죽음>은 장편소설로 아직 낯선 귄지그 작가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게 되는 작은 이정표가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게 해준다.
 
소설은 1978년 3월이라는 시간적 공간만을 제시한 채, 종잡을 수 없는 공간 속으로 독자를 안내한다.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화자는 ‘나’다. 왠지 정키를 연상시키는 주인공은 철저하게 비밀에 싸여 있다. 초반에 ‘완두콩’ 피에르 로베르를 ‘클린’했다는 고백과 함께 자신의 캐릭터 중의 하나인 교활함을 전면에 내세운다.
 
토마 귄지그는 1978년 3월의 사건을 계속해서 언급하면서도, 속 시원하게 알려주지 않는 전형적인 ‘인질극’을 벌인다. 도대체 그때 무슨 일이 벌어졌단 말인가? 주인공인 나에 이어, 슬로베니아 출신 하사관 모크타르와 훗날 그의 나이 많은 부인이 되는 (미망인) 마담 스카폰, 베트콩 해군 출신의 다오 민, 자신의 목숨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 미니트립, 모크타르의 여동생으로 수많은 남자를 유혹하는 수지, 그리고 최고악당이자 아티스트 짐짐 슬레이터를 차례로 소개된다. 아, 사건 전개에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는 19세 터보 포크 가수 카롤린 드몽시드를 빼먹었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플래시백 기법이 교차하는 가운데 나는 어느 날 다오 민이 제공한 술(혹은 마약, 각성제?)에 취해, 미니트립의 멀쩡한 이를 몇 대 날려 버린다. 그게 바로 재앙의 시작이었다. 미니트립은 가수인지 조폭인지 헷갈리는 짐짐 슬레이터의 애인으로, 나는 그야말로 죽을죄를 지은 것이다. 짐짐의 똘마니들에게 붙들려간 나는, 살기 위해 한 가지 거래를 제안받는다. 자신의 영역을 점점 잠식하는 신예 여가수 카롤린 드몽시드를 클린하라는 명령이다. 철천지원수에게 가장 어려운 일을 맡기라구? 그렇다면 이 일이야말로 나에게 적격인 셈이다. 그래서 나는 전직 군 출신인 모크타르와 함께 카롤린을 경호하는 역할을 맡은 키프로스 출신의 민병대 “가을비” 두목 어빙 낙소스의 부대에 정체를 숨기고 잠입한다.
 
그 와중에 간간이 삽입되는 나의 두 달이나 계속되는 군 병원에서의 생존 투쟁 역시 빼놓을 수가 없는 이야깃거리다. 1978년 3월의 사건과 짝을 이루는 병원 장면은, 인과관계 중에서 결과에 해당한다. 거의 전신을 다쳐서 말조차 못한 채, 의식만 있는 나는 과거에 벌어진 하나씩 사건을 재구성한다.
 
생뚱맞게도 귄지그는 전쟁의 실황중계라는 너무나 자극적인 소재를 서슴지 않고 선택한다. 이미 지난 걸프전에서 CNN의 텔레비전 중계로 익숙해져 버린 실시간 전쟁 중계가 이제는 케이블 텔레비전의 영역에까지 진출한 모양이다. 오로지 시청률의 상승과 광고의 폭주만을 원하는 제작자와 후원자의 결탁으로 가을비 민병대원들에게 자사의 로고가 찍힌 전투 점퍼를 입히고, 실시간으로 그들의 모습을 전파에 실어 내보낸다. 십 대 여가수 카롤린 역시, 계약에 의해 움직이는 마리오네트 인형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존재로 묘사된다.
 
도대체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어느 완벽한 2개 국어 사용자의 죽음>에는 정말 완벽하게 2개 국어를 사용하는 캐릭터가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토마 귄지그는 혹시나 바일링걸하는 주인공의 비극적 죽음을 그린 소설이 아닐까 하는 기대를 품고 책을 집어든 독자를 엿 먹인 걸까? 모르겠다, 이 소설에는 역시나 삶의 덧없음에 대한 니힐리즘의 향기와 더불어 실존의 부정(도대체 공간적 배경의 실마리를 조금도 잡을 수가 없다!), 정체를 종잡을 수 없는 나라는 인물의 허구성 등으로 뒤범벅되어 있다.
 
고전 누와르를 연상시키는 살인과 음모가 넘치지만, 어떤 장르에도 속하지 않는 탈장르성도 엿보인다. 소설을 읽다 보니 어디선가 본 듯한 영화의 장면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예를 들면, 나의 킬러적 고민에서는 뤽 베송의 <레옹>이 그리고 내가 군 병원에서 ‘부활’하는 장면에서는 타란티노의 <킬 빌>의 신부(브라이드)가 떠올랐다.
 
또 한편으로는 모든 것을 자본주의 법칙 아래 종속시켜 버리는 미디어 플래닝에 대한 신랄한 비판도 빼놓을 수 없다. 필연적으로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주제를 탐할 수밖에 없는 영상매체의 총아 텔레비전의 시선은 테러리스트와의 전쟁으로 향한다. 돈벌이가 되는 일이라면, 총탄이 난무하는 전쟁터는 물론이고 용병대장과 십 대 여가수의 조작된 연애까지도 소비자에게 실어 나르는 리얼리티 쇼의 파렴치함에 그만 혀를 내둘렀다.
 
전작 <세상에서 가장 작은 동물원>에서도 낯선 내러티브의 전개와 이야기의 구성에 어리둥절해하던 나에게, 이번 작품 역시 쉽게 이해와 동화 혹은 공감의 문을 열어 주지 않는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어쩌면 독자에게는 불친절할지도 모르겠지만, 꾸준하게 자신만의 문학 세계를 펼쳐 나간다는 차원에서 호감이 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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