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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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청개구리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읽는다는 베스트셀러에 대해 태생적으로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가 보다. 그래서 신경숙 작가의 <엄마를 부탁해>를 읽는데도 꽤 오래 시간이 걸렸다. 왠지 한 번 보고 말 책인 것 같아서, 책도 직장 동료에게 빌려서 읽었다. 때마침 전 세계를 강타한 경제위기 속에서, 다시 전통적인 가치인 가족애를 전면에 내세운 <엄마를 부탁해>가 왠지 모르게 거북하게만 느껴졌다.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의 후기에서 작가는 청춘소설을 쓰고 싶었노라고 은은하게 말했는데, 이 소설은 정윤, 이명서 그리고 윤미루라는 청춘들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청춘이 가지는 재기 발랄함보다는 실종과 죽음 그리고 그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안을 그리고 있다. 그들이 모두 사랑했던 윤교수의 임박한 죽음을 앞두고 플래시백으로 과거를 짚어나가기 시작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정윤은 어머니를 잃고 낯선 도시에서 홀로서기에 나선다. 어머니가 병마와 싸우기 위해, 가장 먼저 한 일은 자신을 떼어 놓는 일이었다고 그녀는 회상한다. 그리고 윤교수의 강의시간에 그(명서)와 귀머거리 고양이를 데리고 사는 윤미루를 만난다. 소설의 초반에 ‘인생은 한 번 뿐이고, 독자적이다’라는 선언을 통해 작가의 삶에 대한 태도가 느껴졌다.

이 세 명의 외톨이들은 모두 죽음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다. 정윤은 자기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미루는 자신이 그렇게 따르던 언니 미래의 죽음에 대한 그리고 명서는 자신과 함께 오랜 시간을 보낸 미루의 불안한 미래에 대한 트라우마로 고통받는다. 삶에서 가장 빛나고 즐거워야 할 청춘의 시간에 그들은 모두 과거의 상실 혹은 앞으로 닥칠 상실을 걱정한다. 작가가 의도적으로 가공한 시대적 배경은 혼란을 부추긴다. 명서와 윤이 맞닥뜨리는 시위는 1987년이 될 수도, 2008년이 될 수도 있다. 작가는 독자가 시대에 대해 추적을 할 수 없도록 바리케이드를 친다. 어디선가 출간된 지 30년 된 시집 이야기를 언급했는데, 다시 8년 전으로 돌아가는 계산을 하려니 머리가 복잡해진다. 모든 걸 현재의 시점에 맞추려는 못난 독자의 헛된 노력이었다.

시위라는 특정시대를 상징하는 소재를 사용하면서도, 그들이 왜 시위에 나서는지에 대한 고민의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다. 그들은 취업양성소가 된 지금 대학의 젊은이들처럼 치열하게 공부를 하는 것 같지도 않다. 차라리 그들의 스승인 윤교수의 모습이 오히려 더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윤교수에게 문학이란 세상과 싸워나가는 무기였을까? 나에게 책이란, 그리고 문학이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 보게 해주는 윤교수의 일갈이 내내 머릿속에 맴돈다.

인생의 절정에서 끊임없이 상실을 고민하고, 생성보다는 소멸에 더 무게중심을 두는 정윤-명서-미루 트리오의 이야기는 아무래도 비교하게 되는 <엄마를 부탁해>의 필적할만한 흡입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엄마를 부탁해>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사건에 대한 서술이었다면,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의 아포토시스(apoptosis: 세포소멸)는 그 대척점에 서 있다. 나의 경우만 하더라도, 소설에 나오는 정윤과 명서가 짊어지고 가야 했던 존재의 소멸에 의한 상실은 아직 체험해 본 적이 없다. 그들처럼 어린 나이였다면 더욱 농무처럼 뿌연 허무주의에서 빠져나오기가 어렵지 않았을까?

그래도 작가는 모든 절망의 순간에 희망을 속삭인다. 정윤의 어머니가 죽으면서, 그녀의 대학생활이 시작되듯이 미루 역시 언니가 죽은 뒤에 실종된 사람들을 찾아 나선다. 병상의 윤교수가 손가락 글씨로 제자들에게 말했듯이 생성(발생)이 있으면, 자연히 소멸도 있기 마련이 아니던가. 끝이라고 생각한 바로 그 순간에, 새로운 시작이 잉태된다. 그리고 생성과 소멸이라는 영원회귀는 오.늘.을. 잊.지. 말.자.는 미루의 선언으로 재현된다.

소설의 청춘들처럼 원하는 때에,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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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계자들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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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언수 작가의 래생과의 만남은 충격 그 자체였다. 작년에 가장 좋아하는 작가 중의 한 명으로 꼽는 루이스 세풀베다의 <감상적 킬러의 고백>을 읽고 나서 우리나라에서 킬러를 소재로 한 소설이 나올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딱 1년 만에 나의 그런 편견을 김언수 작가가 신작 <설계자들>로 단박에 빠개줬다.

작가는 <설계자들>에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권장군 암살에 나선 래생이라는 캐릭터를 독자에게 툭 던지는 것으로 소설을 시작한다. 냉혹한 킬러이면서, 동시에 남모르는 과거를 가진 래생의 실체를 한 꺼풀씩 벗겨 내는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자객과 표적과의 갑작스러운 대면은 신선하게 다가왔다. 자객의 세계에서 자객은 표적이 왜 죽어야 하는지, 아무런 의문도 제기하지 않는다. 암살을 주문한 클라이언트와 클라이언트의 주문에 따라 암살을 ‘설계’한 설계자들의 지시에 따라 자객은 움직인다. 래생은 표적 권장군으로부터 좋은 위스키와 인디오식으로 요리한 돼지고기 그리고 감자까지 얻어먹는다. 그렇다고 표적의 운명이 뒤바뀌진 않는다.

자, 이젠 래생의 과거가 등장할 차례다. 태어나자마자 수녀원 앞 쓰레기통에 버려진 래생은 너구리 영감의 ‘도서관’에 입양되어 허드렛일을 하다가 너구리 영감의 수석 자객 훈련관 아저씨가 털보의 화장장에서 한 줌의 재가 된 후, 본격적인 자객의 길에 나서게 된다. 그는 엄청난 양을 자랑하지만 아무도 찾지 않는(순수하게 책을 읽기 위핸 목적으로는!) 도서관에서 스스로 글자를 깨치고 너구리 영감이 읽지 않을 만한 책만 골라 읽는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절름발이 너구리 영감의 도서관은 지난 90년간 온갖 추문이 얽힌 암살과 납치 그리고 실종이 얽힌 푸주의 입구였다.

그나마 영화 속의 레옹은 여자와 아이는 “클린”하지 않는다지만 래생에게는 애당초 그런 원칙 따위는 없다. 래생과 절친한 동료 자객 추가 이발사라는 이름의 칼잡이 고수에게 당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그의 죽음에 얽힌 이야기가 소개된다. 자객의 세계에서 표적을 처리하라는 지시를 따르지 않는 자객에게 합당한 대가는 죽음뿐이다.

한편, 래생과 같은 도서관 출신의 한자는 미국유학파로 경호 보안업체로 대표로 있으면서 뒤로는 깔끔한 대형마트의 살인청부업을 수행한다. 아날로그 방식의 청부를 담당하는 래생과 기업식 킬링을 서비스하는 신사 한자와의 대결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래생은 집에서 사제폭탄을 발견하면서, 자신이 표적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데...

김언수 작가의 신작 <설계자들>에 뿌리내린 서사구조는 독자가 거부할 수 없는 주술적 마력을 가지고 있다. 글을 읽을수록, 아무런 감정 없이 표적을 처리하는 래생의 삶과 하릴없는 시간을 죽이기 위해 독서를 하는 그의 인문학적 감성이 언제고 사고를 치겠지하는 우려가 동시에 교차한다. 책 읽는 낭만자객 래생의 덤덤한 “클린”은 암살이라는 극단적 폭력에 대한 독자의 사고를 무장 해제시켜 버린다. 작가는 주문, 설계, 암살 그리고 사후처리에 이르는 푸주 시스템을 자본주의적 욕망의 아바타로 서술한다. 우리가 소비하는 제품들이 어떤 방식으로 생산되었는지 관심이 없듯이, 돈만 주면 귀찮을 일을 처리해주는 흥신소 직원들처럼 래생들은 움직인다.

17살 때부터 업계에 투신해서, 15년간 다양한 종류의 “클린”을 해온 래생이 표적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너무나도 많다. 래생 자신이 자객이라지만, 인간의 본성대로 래생 역시 살고 싶다. 자신의 동료 추가 그리고 ‘그림자’ 정안이 차례로 이발사의 칼에 죽어 나가는 것을 보면서 그는 복수를 꿈꾸었을까? 자신의 실력이 이발사의 그것에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잃을 게 없다는 식의 아포토시스(apoptosis: 세포자살), 다시 말해서 자기희생을 통한 발생과 분화의 스텝을 따른다. 이 과정에서 래생의 자기희생은 자기보다 앞서 자발적 아포토시스를 결정한 미토를 그리고 그녀의 동생 미사의 생명연장에 대한 분화로 보는 것은 지나친 해석일까? 아포토시스란 결국 존재의 궁극적 갱생을 의미하는 것일 테니 말이다.

소설의 전반과 중반의 빼어난 전개와 서사 구조와 비교하면, 미토가 등장하는 후반부가 상대적으로 아쉬웠다. 연재가 계속되면서 결말에 대한 압박 때문이었을까. 예상치 못한 급작스런 결말이 조금 당황스러웠다. 도서관의 주인장 너구리 영감이 자신에 도전하는 한자에 대해 제대로 한 건 해주리라고 기대를 했었는데, 그대로 침몰해 버리는 모습에 실망했다. 푸주 세계의 의자를 치워 버리겠다는 미토의 당찬 아이디어는 애초에 이루어질 수 없는 망상(delusion)이 아니었을까? 그래도 예상하지 못했던 캐릭터의 재등장과 반전은 일품이었다.

김언수 작가의 유머 코드는 개인적으로 아주 마음에 들었다. 폭력남편을 의뢰하기 위해 미나리 박을 찾아온 아줌마가 도저히 실행에 옮기지 못하겠다고 하면서, 가격을 흥정하는 장면에서 그만 빵 터져 버렸다. 지긋지긋한 삶의 불안요소를 제거하는데도 시장가격 이상은 내지 못하겠다고 버티는 그녀의 태도는 정말 쿨했다! 팬티도 안입고 설쳐대는 곰돌이 푸우를 비롯해서 소설을 읽으면서 메모를 해두지 않아서, 어느 장면이라고 꼬집어서 말은 못하겠지만, 곳곳에서 빛나는 김언수 작가의 언어유희에 푹 빠져버렸다.

21세기 낭만자객으로 4년 만에 다시 돌아온 김언수 작가의 성공적인 연착륙을 기원한다. 작가와의 첫 만남은 대단히 만족스러웠다. 아 참, 그리고 소설을 읽으면서 등장하는 책들을 계속해서 검색했는데 결국 다카하시 겐이치로의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는 결국 주문하고 말았다. 이 고질병은 당최 어찌해야 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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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세계사 5 - 바스티유에서 바그다드까지
래리 고닉 글.그림, 이희재 옮김 / 궁리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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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을 기다리고 있던 책이 나왔다는 소식을 들으면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그래서 어제 바로 주문을 했고, 총알 배송으로 받아본 책은 순식간에 다 읽어 버렸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대학인 하버드 수학과 출신의 만화가가 그리는 만화라, 어쩐지 먹물 냄새가 물씬 풍기지 않는가. 래리 고닉이 수년간 계획해온 세계사의 마지막 권의 독서는 한 장 한 장 넘길수록 진한 아쉬움과의 치열한 전투였다.

동양에서 쇄국정책을 펴고 있던 중국과 일본을 설명한 작가는 바로 노예무역이라는 인류 역사상 가장 추악한 범죄에 대한 기술을 시작한다.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아프리카에서 마치 사냥을 하듯이 잡아들인 흑인들을 신대륙 개발에 투입한다. 영국과 프랑스로 대변되는 전 세계를 상대로 한 식민제국 건설 경쟁에서 흑인 노예노동력은 필수불가결한 요소였다.

영국에서 노예무역에 대한 지식인들의 반성이 보이는 시작하는 시점에서 바로 래리 고닉은 프랑스혁명으로 포커스를 돌린다. 무능력하고 사치와 방탕 그리고 미국 독립전쟁에 국가 재정을 낭비한 프랑스의 국왕 루이 16세는 재정고갈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그 유명한 삼부회를 소집한다. 순전히 국민에게 세금을 더 거두기 위해 소집했던 삼부회는, 자각한 부르주아 계급을 중심으로 왕정을 타파하고 공화정 수립이라는 역사적 사건으로 치닫는다. 혁명 후의 혼란은 결국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라는 독재자의 등장을 불러오고, 래리 고닉은 불리한 상황에서 언제나 병사들을 내버리고 내뺀 황제 나폴레옹을 마음껏 조롱한다.

나폴레옹 전쟁을 통해 전 유럽에 전파된 자유와 평등 그리고 박애 정신은 산업혁명으로 사유재산을 소유하게 된 부르주아 계급의 성장과 더불어 막을 수 없는 한 시대의 흐름으로 자리 잡게 된다. 비록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노예해방과 전 세계를 상대로 한 자유무역이라는 이름의 식민경영의 시대를 맞이한다. 중국의 부(富)에 눈독을 들인 서구 열강, 특히 영국은 인도를 지배하에 두면서 아편무역이라는 부도덕한 방법으로 동양의 재화를 강탈하기 시작한다.

미국 페리 제독의 강제에 의해 개국하게 된 일본의 근대화 과정, 서구 열강의 담합으로 한 때 중근동의 강국이었던 오토만 터키 제국이 종이호랑이가 되고,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지배로부터 라틴 아메리카가 해방되는 과정들이 아주 간략하게 소개된다. 아무래도 미시적인 역사보다는 거시사에 집중하다 보니 필연적으로 소홀하게 다뤄진 부분이 적지 않다. 아무래도 그 부분은 전적으로 작가의 취사선택에 의한 것이리라.

래리 고닉은 책의 뒷부분에 나오는 방대한 참고문헌을 바탕으로 다양하고 풍부한 독서를 하면서 정치사적 접근뿐만 아니라 지난 시대의 과학, 사상적 발견에 의한 세상의 변화도 놓치지 않는다. 훗날 원자폭탄 개발에까지 이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물론이고, 다윈의 진화론 그리고 카를 마르크스의 사회발전 이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역사의 스펙트럼을 제공한다. 거기에 번역을 맡은 이희재 씨의 현 세태를 풍자하는 번역과 유머 또한 빼놓을 수가 없다.

래리 고닉의 지난 세기에 세계를 주무른 열강에 대한 비판은 인도 분리 독립에 한몫한 영국과 이란, 과테말라 그리고 칠레 등지에서 쿠데타를 지원한 미국에 초점을 맞춘다. 아울러 프랑스혁명에 비해 널리 알려지지 않은 아이티혁명과 2차 세계대전 후, 중국에서 벌어진 국공내전에서 장제스의 국민당군 해산이라는 치명적인 실수가 불러온 파국적 결과 같은 그동안 미처 모르고 있던 역사적 사건을 다룬 균형감도 높이 평가하고 싶다.

래리 고닉의 책을 통해 토크빌의 <앙시앵 레짐과 프랑스혁명>이라는 책을 알게 됐는데, 다시 한 번 좋은 책이 또 다른 좋은 책으로 인도한다는 진리를 깨닫게 됐다. 우리나라에 소개된 래리 고닉의 다른 책에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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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 한니발을 이기고 젊은 로마를 세계의 제국으로 키워낸 남자
B.H.리델 하트 지음, 박성식 옮김 / 사이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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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 인터넷 서점에서 추천하는 책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 편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나만의 독서를 하니 추천은 필요 없어,’ 뭐 그런 생각을 하고 책을 읽는다. 하지만, 이번에 알라딘 대문에 걸린 리델 하트의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았다. 책을 보는 순간, 이 책은 꼭 읽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전광석화처럼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고, 바로 주문을 했다. 운명적 만남이라고나 할까?

서두가 길었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파리에서 태어난 영국 출신의 종군기자이자 전쟁 역사가인 B. H. 리델 하트(B.H. Liddell Hart)의 저작이다. 1차 세계대전 참전용사이기도 했던 리델 하트는 역사 속의 전쟁에 대한 전략 연구와 2차 세계대전 초기 독일의 전격전 이론의 권위자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리델 하트는 두 번째 포에니 전쟁에서 백척간두의 조국 로마를 구하고 장차 패권국가의 초석을 닦은 위대한 사령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승리자이면서도 결국 조국에 배신당했던 비운의 역사적 인물에 대한 재조명을 시도한다.

아프리카의 정복자라는 뜻에서 아프리카누스라는 별명이 붙은 스키피오는 그의 맞수 한니발 바르카에 비해 역사상의 평가가 인색한 편이다. 사실 개인적으로 스키피오를 알게 된 계기는 시오노 나나미 작가의 역작 <로마인 이야기>를 통해서였다. 한니발이 전투에서 승리하는 장군이었다면, 스키피오는 리델 하트가 그의 장점으로 꼽은 치밀한 계산과 신중한 태도로 전쟁에 이기는 장군이었다. 그리고 전쟁 끝에 찾아오는 평화의 시기를 명쾌한 통찰력으로 예지하는 노련한 정치가이기도 했다. 훗날 로마 제국의 포용과 관용 정책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앞서 스키피오에 의해 완성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리델 하트는 스키피오가 역사에 처음으로 등장한 시점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보통의 전기나 평전이 주인공의 개인적 삶으로부터 그 연원을 찾지만, 저자는 과감하게 일체의 전설을 배제하고 거의 동시대 인물인 폴리비오스와 후대의 리비우스의 역사 기술에 자신의 창조적 상상력을 덧붙여서 흥미로운 진행을 이어간다. 스키피오가 활동한 역사의 무대는 로마와 카르타고 지중해 영역의 패권을 놓고 다툰 세 차례의 포에니 전쟁 중, 2차 포에니 전쟁에서 천재적 전술가 한니발에 의해 이탈리아 본토가 유린당하던 시기다.

에필로그에서 저자가 비교하듯이, 알렉산드로스나 카이사르가 전제 군주나 독재자로 가능한 인적 물적 자원을 마음껏 활용할 수 있었지만, 스키피오는 로마 원로원의 끝없이 시기와 질투로 지원은커녕 견제의 대상이었다. 그런 모든 악조건을 딛고, 본토에서 한니발을 구축할 것이 아니라 원정을 치르는 한니발 군의 보급기지가 에스파냐라는 것을 대국적 견지에서 파악한 24세의 스키피오는 파견군 사령관으로 에스파냐 공략에 나선다. 에스파냐의 주요 거점인 카르타헤나를 기습공격으로 함락시키고, 한니발의 동생 하스드루발 패퇴시킨 스키피오는 한니발의 물자와 증원군 양성을 위한 병참기지인 에스파냐를 장악하면서 전쟁의 흐름을 로마로 돌리기 시작한다.

로마 원로원의 카토와 퀸투스 파비우스로 대변되는 반 스키피오 파들은 천재 전략가의 성공을 시기하면서, 본격적인 스키피오의 아프리카 원정에 반대하면서 본토의 한니발을 공격할 것을 주문한다. 범인들의 세계를 뛰어넘는 거대 전략가 스키피오는 본토 결전보다 한니발의 본국 카르타고에 대한 공격이 실타래처럼 얽힌 전쟁의 실마리를 푸는 첩경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국가의 지원도 없는 상태에서 자력으로 국운을 건 대원정을 준비한다. 결국, 그의 냉철한 판단이 로마와 카르타고의 운명을 가른 자마 전투에서의 승리로 귀결되기에 이른다.

한니발이 세계 역사상 최고의 전술가라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한니발은 칸나에 전투에서의 대승의 여세를 몰아 로마 공략에 나서지 않으면서, 승기를 놓치고 만다. 상대적으로 스키피오는 사기진작을 위한 심리전의 구사, 선제공격의 이점을 파악하고, 적 주력부대에 대한 집중공격과 기동타격 전술 그리고 승기를 잡았다고 판단되었을 때 추격전을 펼치는 정말 완벽에 가까운 입체적 전략과 전술을 동시에 구사한다. 스키피오의 진가는 전쟁 중이 아니라, 훗날 로마인의 특징으로 자리 잡은 관용정신에 입각한 전후처리 과정에서 더욱 빛났다. 스키피오는 장군으로 전쟁을 치렀지만, 국가의 목적은 전쟁이 아니라 항구적인 평화의 정착이라는 대의를 숙지하고 있었다.

카토로 대변되는 로마 원로원의 강경파는 한니발과 카르타고에 대한 철저한 응징을 원했지만, 정치가로서 스키피오는 제국이 아닌 주도국과 동맹국 관계라는 고대 로마의 파트로네스(후견인)와 클리엔테스(피후견인) 관계를 더 선호했던 것 같다. 역설적으로 개인보다는 공동체의 이익을 우선했던 스키피오가 헌신했던 그의 조국 로마는 팍스 로마나라는 제국주의 국가로 팽창하게 된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스키피오라는 역사의 비운의 영웅에 대한 전쟁 역사학자 리델 하트의 사모곡(思慕曲)이다. 저자는 스키피오의 고결한 도덕성과 정신적 통찰력 그리고 투명성에 높은 점수를 준다. 카이사르나 나폴레옹같이 개인의 영달과 이익이 아니라, 조국에 헌신했던 흠결 없는 국가적 영웅에 대한 배신에 리델 하트는 감출 수 없는 분노를 표출한다. 아무래도 비운의 역사적 인물인 스키피오에 대한 저자의 열렬한 사랑이 좀 편파적이라고 느껴지기도 하지만, 나름대로 균형감각을 잡으려고 노력한 점이 엿보인다. 간결하면서도 명쾌한 논리의 전개에, 깔끔한 구성을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장점으로 꼽고 싶다.

B.H. 리델 하트의 또 다른 저작의 출간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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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지대 고라즈데
조 사코 지음, 함규진 옮김 / 글논그림밭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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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990년대 중반의 보스니아 내전은 우리에겐 잊혀진 전쟁이다. 고래로부터 세계의 화약고로 불려 온 발칸 반도 그중에서도 종교와 문화의 모자이크라는 별명을 가진 나라 보스니아의 역사는 유혈로 얼룩져 있었다. 중세의 종교 전쟁 이후, 유럽에서 일어난 전쟁은 야만적 전멸전보다는 상대방의 전쟁의지 분쇄에 더 초점이 맞춰져 왔다. 아울러 인본주의 사상에 입각한 인도적인 측면이 부각되었는데 지난 천 년의 끝자락에 벌어진 보스니아-세르비아 내전에서 그런 인도주의는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다. 서로 다른 종교와 민족 간의 불화로 ‘인종청소’라는 끔찍한 낱말이 다시 등장했다. 그 내전의 와중에 몰타 출신의 미국인 아티스트이자 저널리스트인 조 사코는 자신의 역작 <팔레스타인>에 이어, <안전지대 고라즈데>를 세상에 소개한다.

1940년대 나치의 침공에 대항해서 영웅적인 게릴라전을 지휘한 전설적 영웅 티토는 전쟁이 끝난 후, 6개의 공화국이 연방제를 택한 유고슬라비아의 대통령으로 민족 간의 갈등을 봉합하고 하나의 국가 체제 수호를 위해 매진했다. 하지만, 절대권력자가 죽은 뒤에 연방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세르비아가 전면에 나서면서 구 유고연방의 미래는 요동치기 시작한다. 다른 공화국에 비해 우월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해서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차례로 독립선언을 하고, 이에 반발하는 세르비아계와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를 중심으로 하는 신 유고연방의 존속을 지지하는 사이에서 내전이 발생한다.

보스니아는 특히 15세기 이래 발칸 전역을 장악한 오스만 터키의 지배 아래서 무슬림으로 개종한 남슬라브인과 비슷한 수의 세르비아계가 무난하게 지내왔다. 하지만, 세르비아 공화국의 대통령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와 세르비아계 민병대 지도자인 라도반 카라지치를 따르는 민족주의자들을 중심으로 보스니아에서 분리 독립을 위한 내전에 들어가게 된다. 당시 보스니아 동부에 세르비아계에 포위된 몇 개의 지역에 사는 무슬림의 안전을 위해 설정된 것이 바로 안전지대라 불리는 지역이다. 드리나 강 유역의 스레브레니차, 제빠 등이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곳이 바로 고라즈데다.

전작 <팔레스타인>에서 이스라엘 군이 ‘점령지’에서 얼마나 비인도적인 행위를 저지르는지를 양심의 목소리와 조금은 투박하지만, 진실이 담긴 이미지로 전달했던 조 사코는 이번에는 그 무대를 동유럽 한복판의 보스니아로 옮긴다. 그야말로 곰이 날카로운 발톱으로 할퀸 듯한 전쟁의 상흔이 곳곳에 남아 있는 고라즈데로 들어간 조 사코는 현지인들과 소통을 하면서 고라즈데와 보스니아의 역사와 운명을 조명하기 시작한다.

그의 이야기는 대개 보스니아 내전을 직접 경험한 고라즈데 거주민들의 생생한 증언이다. 당시 고라즈데의 안전을 책임지던 UN은 세르비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보스니아에 적극적인 개입보다는 최악의 상황을 면하려는 어정쩡한 태도를 보이면서, 중화기를 보유하고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와 안전지대 고라즈데를 포위한 세르비아계에게 잘못된 신호를 보낸다.

한 때 이웃으로 무탈하게 지내던 이들은 보스니아 내전을 계기로 회복할 수 없는 원수가 되고 만다. 물론, 2차 세계대전 당시 크로아티아계 민병대인 우스타샤와 세르비아계 체트니크에 의해 조직적인 학살로 자그마치 70만 명이나 되는 보스니아 사람들이 희생되었다고 하는데, 반세기가 흘러 다시 그런 악몽을 접하게 된 세대들의 충격이 조 사코의 그림을 통해 재현된다. 물론 <안전지대 고라즈데>에는 그런 비참한 비극만 소개되는 건 아니다. 식량이 떨어져서 생존의 갈림길에 서 있는 와중에서도, 수도 사라예보나 혹은 서방에서 들어오는 오리지날 리바이스 청바지를 갖고 싶어 하는 철부지 소녀들의 이야기도 빠지지 않는다.

자신과 가족의 생존을 위해, 혹한과 저격병의 총탄을 무릅쓰고 전선을 넘어 식량을 구하러 나서는 조 사코의 보스니아 친구 에딘의 증언은 눈물겹다. 고라즈데를 지키기 위해, 빈약한 무장으로 세르비아계 병사들에 맞서지만 어쩔 수 없는 죽음의 공포에 맞닥뜨리게 되는 모습도 여과 없이 소개된다. 세르비아인들로부터 혹독한 인종청소(ethnic cleansing)를 당한 보스니아 무슬림 역시 복수에 눈이 멀어 세르비아 이웃의 재산을 약탈하고 방화를 하는, 피의 보복은 그치지 않는다.

천신만고 끝에 클린턴 행정부의 주도로 1995년 11월 내전의 당사자들이 미국 오하이오 데이턴에서 평화협정을 맺으면서 보스니아 내전은 불안정한 평화를 맞이한다. 그리고 조 사코는 고라즈데를 떠난다. 하지만, 그와는 달리 고라즈데를 떠나고 싶어도 떠나지 못한 수많은 사람의 운명은 과연 어떻게 됐는지 또 오늘날의 고라즈데의 모습은 어떤지 궁금하다.

자신을 스스로 이방인이라고 부르는 조 사코는 지극히 객관적인 시각으로 보스니아 내전을 조명한다. 보스니아에 우호적인 시선이 그 기저에 깔려 있어서, 상대적으로 세르비아 측의 해명이 없다는 점이 아쉬웠다. 그가 그린 만화와 저널리즘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세르비아인들의 의견도 넣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책을 읽으면서, 왜 보스니아가 정치적 갈등이 폭력적으로 변하기 전에 왜 평화적 해결방법을 모색하지 않았는지 궁금했다. 내전과 인종청소라는 극악한 방법이 동원되기 전까지만 해도, 사태가 이 정도에 이를 줄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걸까. 문명이 충분히 야만을 제압할 수 있을 거라는 서방세계의 안일한 판단과 세르비아에 대한 방임이 보스니아에서의 끔찍한 비극의 원인이었다고 한다면 너무 큰 비약일까? 보스니아 사람들 역시 미국을 비롯한 UN과 NATO 군이 자신들을 보호해 줄 것으로 판단했지만, 그것은 큰 오판이었고 보스니아 사람들은 엄청난 희생을 대가로 치러야 했다.

<팔레스타인>에 이어 보스니아 고라즈데로 향한 조 사코의 여정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불편한 숙소, 부족한 먹을거리 그리고 교통편조차 변변하지 못한 저널리즘의 오지를 찾아다니면서 세계의 관심이 필요한 이들의 진실을 오늘도 알리고 있는 조 사코의 뜨거운 열정에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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