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빈슨 크루소 - 아후벨의 그림 이야기
알베르토 모랄레스 아후벨 지음, 고인경 옮김 / 별천지(열린책들) / 2010년 4월
품절


난 왜 이 책을 보기 전에 오래전에 본 탐 행크스 주연의 <캐스트 어웨이>가 떠올랐을까? 이미 300년도 더 전에 영국 출신의 작가 대니얼 디포가 쓴 <로빈슨 크루소>를 연상시키는 가장 최근의 비주얼은 바로 탐 행크스가 연기했던 페덱스 직원이었다. 하지만, 이번 달에 열린책들의 임프린트인 별천지에서 출간된 쿠바 출신의 그래픽 디자이너 아후벨이 재창조한 <로빈슨 크루소>의 이미지는 10년 전에 본 영화보다 훨씬 더 강렬하게 다가왔다.

원작에서 로빈슨 크루소는 법률을 공부하라는 부모님의 뜻에 반대하고는 17세기 중반에 원양항해에 나선다. 폭풍을 만나 배는 난파가 되고, 로빈슨 크루소는 무어족의 노예가 된다고 하는데 이런 소설의 전반부는 일러스트 버전의 <로빈슨 크루소>에서는 빠져 있는 것 같다. 브라질에서 플랜테이션 농장주가 된 로빈슨은 다시 한 번 항해에 나섰다가 엄청난 폭풍을 만나 동료를 모두 잃고, 외딴 섬에 표류하게 된다.

아후벨은 고향을 떠나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청년 로빈슨의 삶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도저히 제어할 수 없어 보이는 사나운 바다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바닷가에 내팽개친 로빈슨. 아무도 없는 무인도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그는 난파한 배에서 필요한 물자를 구해서 다시 섬으로 돌아온다, 강아지 한 마리는 외로운 그에게 보너스다.

청년이었던 로빈슨은 섬에서 오랜 세월을 보내며 장년, 중년으로 접어든다. 그런 세월의 흐름을 아후벨은 로빈슨의 덥수룩한 수염으로 대체하는 기지를 발휘한다. 그의 청교도적인 삶을 강조하기라도 하듯, 그는 항상 손에서 성경을 놓지 않는다. 카누를 만들어서, 자신이 사는 섬 주위를 탐험하기도 하지만 얄궂은 바다의 기상조건은 어렵사리 만든 카누도 전복시켜 버린다.

그러던 어느 날, 해적들이 지나가기도 하지만 로빈슨이 몰랐는지 아니면 관심을 두지 않았는지 조용하게 지나간다. 그는 무료한 나날을 달래기 위해 수많은 글을 쓰기도 한다. 그의 그런 조용한 일상에 한 사건이 터진다. 식인종들에게 잡혀 먹을 뻔한 프라이데이를 구해내고, 그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기독교인으로 개종시킨다. 아마 이런 부분에 있어서 식민제국주의적이라는 비판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아후벨은 그런 정치적인 사안보다는 염소의 젖을 짜고, 물고기들과 바다 속에서 유영하는 자유로운 영혼 프라이데이에 더 초점을 맞춘다.

맨 마지막에서 해적선(?)을 탈취해서 마침내 섬을 떠나는 데 성공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 과정이 매끄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마 이 부분에 대해 더 자세히 알려면 아무래도 원전을 읽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로빈슨 크루소>를 보면서, 이렇게까지 글이 하나도 없을 줄은 미처 예상을 하지 못했다. 정말 대니얼 디포의 고전을 쿠바 출신의 그래픽 디자이너 아후벨은 멋지게 이미지화하는데 성공했다. 앵글로색슨 특유의 냉정한 기록이, 라틴아메리카 작가 특유의 정열로 치환된 이미지들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군더더기들 대신 이야기의 고갱이만을 뽑아 올린 아후벨의 노고에 경의를 표한다. 앞으로도 아후벨이 고전의 이미지화라는 작업을 계속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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