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청개구리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읽는다는 베스트셀러에 대해 태생적으로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가 보다. 그래서 신경숙 작가의 <엄마를 부탁해>를 읽는데도 꽤 오래 시간이 걸렸다. 왠지 한 번 보고 말 책인 것 같아서, 책도 직장 동료에게 빌려서 읽었다. 때마침 전 세계를 강타한 경제위기 속에서, 다시 전통적인 가치인 가족애를 전면에 내세운 <엄마를 부탁해>가 왠지 모르게 거북하게만 느껴졌다.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의 후기에서 작가는 청춘소설을 쓰고 싶었노라고 은은하게 말했는데, 이 소설은 정윤, 이명서 그리고 윤미루라는 청춘들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청춘이 가지는 재기 발랄함보다는 실종과 죽음 그리고 그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안을 그리고 있다. 그들이 모두 사랑했던 윤교수의 임박한 죽음을 앞두고 플래시백으로 과거를 짚어나가기 시작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정윤은 어머니를 잃고 낯선 도시에서 홀로서기에 나선다. 어머니가 병마와 싸우기 위해, 가장 먼저 한 일은 자신을 떼어 놓는 일이었다고 그녀는 회상한다. 그리고 윤교수의 강의시간에 그(명서)와 귀머거리 고양이를 데리고 사는 윤미루를 만난다. 소설의 초반에 ‘인생은 한 번 뿐이고, 독자적이다’라는 선언을 통해 작가의 삶에 대한 태도가 느껴졌다.

이 세 명의 외톨이들은 모두 죽음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다. 정윤은 자기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미루는 자신이 그렇게 따르던 언니 미래의 죽음에 대한 그리고 명서는 자신과 함께 오랜 시간을 보낸 미루의 불안한 미래에 대한 트라우마로 고통받는다. 삶에서 가장 빛나고 즐거워야 할 청춘의 시간에 그들은 모두 과거의 상실 혹은 앞으로 닥칠 상실을 걱정한다. 작가가 의도적으로 가공한 시대적 배경은 혼란을 부추긴다. 명서와 윤이 맞닥뜨리는 시위는 1987년이 될 수도, 2008년이 될 수도 있다. 작가는 독자가 시대에 대해 추적을 할 수 없도록 바리케이드를 친다. 어디선가 출간된 지 30년 된 시집 이야기를 언급했는데, 다시 8년 전으로 돌아가는 계산을 하려니 머리가 복잡해진다. 모든 걸 현재의 시점에 맞추려는 못난 독자의 헛된 노력이었다.

시위라는 특정시대를 상징하는 소재를 사용하면서도, 그들이 왜 시위에 나서는지에 대한 고민의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다. 그들은 취업양성소가 된 지금 대학의 젊은이들처럼 치열하게 공부를 하는 것 같지도 않다. 차라리 그들의 스승인 윤교수의 모습이 오히려 더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윤교수에게 문학이란 세상과 싸워나가는 무기였을까? 나에게 책이란, 그리고 문학이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 보게 해주는 윤교수의 일갈이 내내 머릿속에 맴돈다.

인생의 절정에서 끊임없이 상실을 고민하고, 생성보다는 소멸에 더 무게중심을 두는 정윤-명서-미루 트리오의 이야기는 아무래도 비교하게 되는 <엄마를 부탁해>의 필적할만한 흡입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엄마를 부탁해>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사건에 대한 서술이었다면,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의 아포토시스(apoptosis: 세포소멸)는 그 대척점에 서 있다. 나의 경우만 하더라도, 소설에 나오는 정윤과 명서가 짊어지고 가야 했던 존재의 소멸에 의한 상실은 아직 체험해 본 적이 없다. 그들처럼 어린 나이였다면 더욱 농무처럼 뿌연 허무주의에서 빠져나오기가 어렵지 않았을까?

그래도 작가는 모든 절망의 순간에 희망을 속삭인다. 정윤의 어머니가 죽으면서, 그녀의 대학생활이 시작되듯이 미루 역시 언니가 죽은 뒤에 실종된 사람들을 찾아 나선다. 병상의 윤교수가 손가락 글씨로 제자들에게 말했듯이 생성(발생)이 있으면, 자연히 소멸도 있기 마련이 아니던가. 끝이라고 생각한 바로 그 순간에, 새로운 시작이 잉태된다. 그리고 생성과 소멸이라는 영원회귀는 오.늘.을. 잊.지. 말.자.는 미루의 선언으로 재현된다.

소설의 청춘들처럼 원하는 때에,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