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 한니발을 이기고 젊은 로마를 세계의 제국으로 키워낸 남자
B.H.리델 하트 지음, 박성식 옮김 / 사이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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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평소에 인터넷 서점에서 추천하는 책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 편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나만의 독서를 하니 추천은 필요 없어,’ 뭐 그런 생각을 하고 책을 읽는다. 하지만, 이번에 알라딘 대문에 걸린 리델 하트의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았다. 책을 보는 순간, 이 책은 꼭 읽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전광석화처럼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고, 바로 주문을 했다. 운명적 만남이라고나 할까?

서두가 길었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파리에서 태어난 영국 출신의 종군기자이자 전쟁 역사가인 B. H. 리델 하트(B.H. Liddell Hart)의 저작이다. 1차 세계대전 참전용사이기도 했던 리델 하트는 역사 속의 전쟁에 대한 전략 연구와 2차 세계대전 초기 독일의 전격전 이론의 권위자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리델 하트는 두 번째 포에니 전쟁에서 백척간두의 조국 로마를 구하고 장차 패권국가의 초석을 닦은 위대한 사령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승리자이면서도 결국 조국에 배신당했던 비운의 역사적 인물에 대한 재조명을 시도한다.

아프리카의 정복자라는 뜻에서 아프리카누스라는 별명이 붙은 스키피오는 그의 맞수 한니발 바르카에 비해 역사상의 평가가 인색한 편이다. 사실 개인적으로 스키피오를 알게 된 계기는 시오노 나나미 작가의 역작 <로마인 이야기>를 통해서였다. 한니발이 전투에서 승리하는 장군이었다면, 스키피오는 리델 하트가 그의 장점으로 꼽은 치밀한 계산과 신중한 태도로 전쟁에 이기는 장군이었다. 그리고 전쟁 끝에 찾아오는 평화의 시기를 명쾌한 통찰력으로 예지하는 노련한 정치가이기도 했다. 훗날 로마 제국의 포용과 관용 정책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앞서 스키피오에 의해 완성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리델 하트는 스키피오가 역사에 처음으로 등장한 시점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보통의 전기나 평전이 주인공의 개인적 삶으로부터 그 연원을 찾지만, 저자는 과감하게 일체의 전설을 배제하고 거의 동시대 인물인 폴리비오스와 후대의 리비우스의 역사 기술에 자신의 창조적 상상력을 덧붙여서 흥미로운 진행을 이어간다. 스키피오가 활동한 역사의 무대는 로마와 카르타고 지중해 영역의 패권을 놓고 다툰 세 차례의 포에니 전쟁 중, 2차 포에니 전쟁에서 천재적 전술가 한니발에 의해 이탈리아 본토가 유린당하던 시기다.

에필로그에서 저자가 비교하듯이, 알렉산드로스나 카이사르가 전제 군주나 독재자로 가능한 인적 물적 자원을 마음껏 활용할 수 있었지만, 스키피오는 로마 원로원의 끝없이 시기와 질투로 지원은커녕 견제의 대상이었다. 그런 모든 악조건을 딛고, 본토에서 한니발을 구축할 것이 아니라 원정을 치르는 한니발 군의 보급기지가 에스파냐라는 것을 대국적 견지에서 파악한 24세의 스키피오는 파견군 사령관으로 에스파냐 공략에 나선다. 에스파냐의 주요 거점인 카르타헤나를 기습공격으로 함락시키고, 한니발의 동생 하스드루발 패퇴시킨 스키피오는 한니발의 물자와 증원군 양성을 위한 병참기지인 에스파냐를 장악하면서 전쟁의 흐름을 로마로 돌리기 시작한다.

로마 원로원의 카토와 퀸투스 파비우스로 대변되는 반 스키피오 파들은 천재 전략가의 성공을 시기하면서, 본격적인 스키피오의 아프리카 원정에 반대하면서 본토의 한니발을 공격할 것을 주문한다. 범인들의 세계를 뛰어넘는 거대 전략가 스키피오는 본토 결전보다 한니발의 본국 카르타고에 대한 공격이 실타래처럼 얽힌 전쟁의 실마리를 푸는 첩경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국가의 지원도 없는 상태에서 자력으로 국운을 건 대원정을 준비한다. 결국, 그의 냉철한 판단이 로마와 카르타고의 운명을 가른 자마 전투에서의 승리로 귀결되기에 이른다.

한니발이 세계 역사상 최고의 전술가라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한니발은 칸나에 전투에서의 대승의 여세를 몰아 로마 공략에 나서지 않으면서, 승기를 놓치고 만다. 상대적으로 스키피오는 사기진작을 위한 심리전의 구사, 선제공격의 이점을 파악하고, 적 주력부대에 대한 집중공격과 기동타격 전술 그리고 승기를 잡았다고 판단되었을 때 추격전을 펼치는 정말 완벽에 가까운 입체적 전략과 전술을 동시에 구사한다. 스키피오의 진가는 전쟁 중이 아니라, 훗날 로마인의 특징으로 자리 잡은 관용정신에 입각한 전후처리 과정에서 더욱 빛났다. 스키피오는 장군으로 전쟁을 치렀지만, 국가의 목적은 전쟁이 아니라 항구적인 평화의 정착이라는 대의를 숙지하고 있었다.

카토로 대변되는 로마 원로원의 강경파는 한니발과 카르타고에 대한 철저한 응징을 원했지만, 정치가로서 스키피오는 제국이 아닌 주도국과 동맹국 관계라는 고대 로마의 파트로네스(후견인)와 클리엔테스(피후견인) 관계를 더 선호했던 것 같다. 역설적으로 개인보다는 공동체의 이익을 우선했던 스키피오가 헌신했던 그의 조국 로마는 팍스 로마나라는 제국주의 국가로 팽창하게 된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스키피오라는 역사의 비운의 영웅에 대한 전쟁 역사학자 리델 하트의 사모곡(思慕曲)이다. 저자는 스키피오의 고결한 도덕성과 정신적 통찰력 그리고 투명성에 높은 점수를 준다. 카이사르나 나폴레옹같이 개인의 영달과 이익이 아니라, 조국에 헌신했던 흠결 없는 국가적 영웅에 대한 배신에 리델 하트는 감출 수 없는 분노를 표출한다. 아무래도 비운의 역사적 인물인 스키피오에 대한 저자의 열렬한 사랑이 좀 편파적이라고 느껴지기도 하지만, 나름대로 균형감각을 잡으려고 노력한 점이 엿보인다. 간결하면서도 명쾌한 논리의 전개에, 깔끔한 구성을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장점으로 꼽고 싶다.

B.H. 리델 하트의 또 다른 저작의 출간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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