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문제들
안보윤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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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제목을 보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소하다는 상대적인 거라고. “사소하다”의 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다. 보잘것없이 작거나 적다, 그리고 반대말은 예상대로 중요하다였다. 어떤 사소한 문제는 지극히 주관적 판단의 소치다. 내가 보기에 사소한 것도 타인의 눈으로 보면 중요할 수도 있다는 상대성이야말로 처음으로 만나는 안보윤 작가의 <사소한 문제들>에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아닐까. 사족으로 ‘사소하다’의 예제를 찾아보니 가장 먼저 나오는 문장이 ‘사소한 문제’더라.

일단 소설 <사소한 문제들>의 배경이 내 서식지 부근의 인천 배다리가 반가웠다. 예전에 종종 헌책 사냥을 하러 다니던 헌책방이 즐비했던 바로 그 배다리. 지금은 구 도심에서 밀려나 소설에 나오는 대로 그저 시간이 고이는 장소가 되어 버렸다. 어제 책을 다 읽고 나서 한 번 배다리에 들러볼까 싶었는데, 바람이 차서 그만뒀다. 항상 행동이 생각을 쫓지 못하는구나.

안보윤 작가는 <사소한 문제들>에 두 명의 주인공을 배치한다. 먼저 등장하는 캐릭터는 권아영, 볼품없고 뚱뚱해서 스스로를 숲 속에 사는 몬스터 슈렉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그 생각조차 자신의 것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었던가. 어쩌면 그것도 사소한 문제일지 모르겠다. 싱글맘과 함께 사는 아영이는 외롭고, 쓸쓸하다. 게다가 동네 양아치 황순구에게 상상을 초월하는 모욕과 협박을 받는다. 이거 초반부터 심상치가 않다. 그리고 보니 그 황순구도 자신보다 우월한 이들에게 무시로 폭압적인 대접을 받는다. 그렇게 폭력의 사슬은 이어진다는 말을 작가는 하고 싶었던 걸까. 독자는 상식을 벗어난 전개에서 작가의 진의를 부지런히 수사한다.

두 번째 주인공 배두식은 39세 중년의 헌책방 주인이다. 두식은 동네 건달 황순구의 횡포를 이기지 못하고 집을 뛰쳐나온 아영을 거둔다. 물론, 자발적인 선택이 아니라 칼로 자해하겠다는 아영의 협박에 못 이긴 결과다. 그렇게 둘의 기묘한 동거가 시작된다. 문제는 이 아저씨가 게이라는 점이다. 안보윤 작가는 슬그머니 두식의 성 정체성의 원류를 플래시백으로 소설 곳곳에 파묻는다, 마치 언제 터질지 모르는 그런 부비트랩처럼.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식과 아영은 서로에게 한 줌의 체온을 전해주면서 서로를 보듬게 되는 험한 여정에 오른다.

폭력의 먹이사슬은 황순구를 괴롭히는 일단의 무리에게서 아영에게 고스란히 전달된다. 사회적 약자의 입장에서 아영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보다 약한 이를 때리고 갈취하는 그야말로 전형적 노예근성이 적나라하게 노출된다. 게이 두식에게 가망 없는 로맨스를 꿈꾸게 하는 성현의 존재는 한 술 더 뜬다. 도박에 미쳐 집에서까지 버림받은 성현에게 두식은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존재다. 두식은 성현이 개털이 되어 오갈 데 없을 때 찾게 되는 마지막 버팀목이다. 물론 그런 오아시스도 인터넷 채팅으로 만난 게이 혐오자에게 끔찍한 폭행을 당하자 언제나 차고 넘칠 것 같은 물이 고갈되어 버린다. 그렇게 돈오하게 된 두식은 ‘조심스러운 태도와 상반된 갈구하는 눈빛’으로부터 마침내 해방된다. 물론, 그 과정에 아영의 철부지 행동이 결정적 원인을 제공한다.

정교하게 제조된 우유부단한 캐릭터 두식의 돈을 갈취하는 성현을 독자는 미워할 수박에 없다. 죄는 미워하되, 인간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은 공허하다. 오만가지 이유로 멀쩡한 부모님을 돌아가시게 만들고, 사채 빚으로 가정 파탄에 일조하며, 아내마저 듣도 보도 못한 희한한 질병을 선사하는 성현은 두식을 철저하게 이용해 먹는다. 이 밉상 캐릭터에 대한 증오는 분노로 발전할 판이다. 어쩌면 성현은 두식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습기’ 같은 존재다. 모두가 알고 있지만, 두식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성현은 유리문에 갇힌 “죽은 넙치 얼굴을 한” 실패자다.

아영의 화끈한 방화로 두식의 터전이었던 헌책방이 홀랑 타버렸을 때, 두식은 ‘욕망이 거세된 책’들을 지켜본다. 그런데 정작 거세된 욕망의 주인공은 있으나 마나 한 책이 아니라 두식이 아니었을까. 죽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시간이 고인 헌책방에서 도대체 두식은 무슨 꿈을 꾸고 있었을까. 희한하게도 헌책방 주인이 책 읽는다는 말은 아마 소설에 등장하지 않은 것 같다. 그저 하루의 벌이를 위해 분류를 하고, 인터넷에 가격을 넣는 일을 할 뿐이다. 그마저도 아영이 등장한 다음에는 아영의 몫이 되었지만. 아영이 자신의 발목을 잡는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헌책방이 그렇게 어이없이 사라져 버렸을 때, 비로소 두식은 자신의 과거에 이별선언을 할 수가 있었다. 아영이 남긴 최소한의 체온의 아스라한 추억을 뒤로 한 채.

그러고 보니 <사소한 문제들>에 진짜 ‘사소한’ 문제는 하나도 없었다.

[뱀다리] 방화 와중에 두식의 헌책방 위에 거주하던 성인용품점 사장이 구하기 위해 던진 각종 낯 뜨거운 물품들을 구경꾼들이 잽싸게 약탈해 가는 장면에 대한 묘사는 정말 일품이었다.

[뱀다리2] 작가 사진은 파주가 아니라 배다리에서 찍었으면 더 좋았을 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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